서예작품은 어떻게 감상하여야 하는가?
서예는 동양 특유의 미적 예술이다. 따라서 서예를 감상한다는 것은 사람의 사상, 정감, 취미, 심미안 등을 개발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서예의 수준을 이끌어 올리는 데에도 상당한 도움을 주는 것이다.
반백응(潘白鷹)은 이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술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작가의 창조를 보는 것만 아니라 감상자들도 창조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이다. 베토벤은 음악의 대가로 그의 작품은 하늘도 놀라고 땅도 놀랄 만큼 훌륭한 창조물이라는 것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음악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베토벤의 작품이라도 어려울 뿐이고 심지어는 듣기가 괴로울 정도다. 따라서 우리가 예술을 감상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스스로가 그 분야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있어야 한다. 서예는 이러한 것이 더욱 요구되어지는 예술이다. 그리고 좋은 글씨의 오묘함은 진정한 감상자가 있어야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제대로 발휘하여
새로운 창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서예를 감상하려는 자가 어느 정도 이에 대한 기초가 있어야만 제대로 서예를 감상할 수가 있지 그렇지
못하면 깨닫기가 힘들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서예는 회화와 같이 현실 중의 각종 사물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는 예술이다. 그러나 서예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점과 획의 구성은 매우 특수한 예술언어와 리듬감을 나타내고 있다. 한 폭의 좋은 작품을 대하노라면 백 번을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으며, 감람을 씹는 것과 같이 처음에는 떫지만 십으면 씹을수록 맛이 더 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사람의 시각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형체와 동태미에서 풍기는 맛에 충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미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은 인류가 유구한 역사 속에서 축적되어 형성된 획득물이며, 나아가서는 수만 년 동안 인류가 경험하였던 의식속에 집중되었거나 개괄되었거나 추상적으로 상당히 공고되었던 어떤 것들에 대한 연상과 정감의식이 통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곧 서예의 창조와 감상의
현실에 의거할 수밖에 없다.
동한(東漢)은 "좋은 글씨의 형체는 앉은 것 같고, 서 있는 것 같고, 나는 것 같고, 움직이는 것 같고, 오고 가는 것 같으며, 눕고 일어나는 것 같으며, 근심하는 것 같으며, 기뻐하는 것 같으며, 벌레가 잎사귀를 갉아 먹는 것 같으며, 날카로운 칼과 창 같으며, 강한 화살 같으며, 물이나 하늘 같으며, 구름이나 안개 같으며, 해와 달과 같으며, 종횡으로 방방 뛰는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글씨라고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서예의 점과 획 그리고 형체가 반드시 사람들이 대하고 있는 현실 가운데에서 아름다운 모양 그리고 동태적인 것을 연상시킬 수 있어야만 비로소 훌륭한 예술이라는 말이다. 물론 서예가들이 하나의 획으로 어떤 사물의 형상과 변화를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는 없지만, 객관적으로 사물의 형태와 동태적인 미감을 충분히 표현할 수는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작가가 창작을 할 때 무한히 다양한 객관적 현실 가운데 아름다움을 받아들여, 점과 획 그리고 형체에 집중적으로 표현시킴으로써 작가가 가지고 있는 사상 감정을 이에 충분히 발설하는 것이다.
글씨체로 볼 때 전서, 예서, 행서, 초서, 해서 등은 각기 다르며 저마다 고유한 풍격과 유파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 작가의 각기 다른 성격, 기질, 예술의 연원, 생활경험 등을 삽입하면 작품의 풍격도 각양갹색으로 나타난다. 이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견해도 전부 일치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안진경(顔眞卿)의 서풍은 법도가 있고 의젓하기가 태산이 내려 앉은 듯하여 장중하면서도 후박한 기상으로 호방한 풍격을 개척하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오히려 안진경의 글씨를 평하여 말하길 법은 갖추고 있으나 아름다운 것은 없으며 마치 껍질이 두꺼운 만두와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는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과 씩씩한 장부의 기상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을 보더라도 글씨에 대한 견해가 각각 다르고 감상하는 기준도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견해야 어찌되었건 좋은 작품에는 반드시 필법(筆法), 묵법(墨法), 장법(章法), 기운(氣韻) 등의 네 가지 요소가 구비되어야
한다는데 대해서는 모두들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힘이 꼭 점과 획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서예작품이란 글자들이 모여서 행을 이루고, 행들이 모여서 장을 이루면서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점은 한 획의 규범이 되며, 한 자가 한 작품의 부분적인 미가 전체적인 미에 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행서나 초서는 한 글자만 보아서는 안된다. 이 글자와 저 글자 도는 이 줄과 저 줄을 보면서 그 속에 담겨진 필력·필세·필의·성기고 빽빽한 것·긴장되고 해이한 것·균형·서로의 획들이 어떻게 배합되었는지를 제대로 살펴야 하며, 필묵이 있는 곳에서부터 없는 곳에 이르기까지를 살펴야 하며 조밀한 곳에서부터 성긴 곳에 이르기까지도 자세히 살펴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종합하면 한 폭의 서예작품을 예술적으로 치라할 때에는 반드시 글자와 글자, 행과 행 사이의 간격과 대소 획들을 적절히 배합시키고, 먹의 농담을서로 어울리게 하고, 신축성을 고려하여 전체가 일맥상통하게 하여야만 진정한 예술효과가 발휘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몇 가지 처리방법이 온당치 못하면 엉성하고 산만하거나 무질서하게 되어 문체가 나지도 않게 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피로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읽기도 어려워
감상을 곤란하게 만든다.
왕희지의 <난정서(蘭亭敍)>는 불후의 명작이다.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형체와 짜임새 속에 편안하고 안온한 맛이 있으면서도 매우 다양한 변화가 엿보인다. 필획을 둥글게 돌리는 것은 마음먹은 대로 되었으며, 펄펄 나는 획들은 생동감이 서려 있으며, 인위적인 운필의 흔적은 찾을 수 없으니 작품 전체에서 아름답고 윤기있고 청신한 아름다움이 저절로 풍겨난다. 당대(唐代) 감상가인 이사진(李嗣眞)은 일찍이 구름 속에서 삐져나온 태양이요, 연꽃이 물 속에서 나온 형상이요, 음양과 춥고 더움의 사계절 변화가 고르게 조화되어 있으며, 맑은 바람이 소매에서 나오고 밝은 달이 품 속에 들어가는 모습이라는 말로 왕희지의 글씨를
연상하여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안진경(顔眞卿) 행초의 풍격은 확실히 독특한 데가 있다. 그의 <제질문고(祭嫉文稿)>는 이러한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좋은 자료다. 그는 안록산(安祿山)의 반란에 저항하다 장렬하게 죽은 조카에 대한 비분강개한 정이 행간에 가득 담겨져 있고 ,붓에 먹물을 듬뿍 찍어 강하고도 뻣센 획으로 담수에 써내려 갔으니 격조는 격앙되어 있어서 이전에 형성하였던 침착하고 후박한 풍격을 찾을 수 없다.
초서의 대가인 장욱(張旭)의 <고시사첩(古詩四帖)>을 보면 표일한 기세로 기이한 형상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새가 춤을 추며 나는 것 같으니 그 묘한 맛이 고금에 드물다 할 것이다. 장욱은 일생의 희노애락,궁핍함, 우수, 유쾌함, 원망, 그리움 등을 모두 술에 섞어 마시면서 무료한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가슴속에 있는 모든 불평과 정서를 모두 초서 위에 배출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 즉 산수, 벼랑, 계곡, 짐승, 곤충, 물고기, 초목, 꽃, 해와 달 그리고 별, 풍우, 불, 번개, 구름, 춤, 전투 등에서 기쁘고 놀라운 현상들까지도 모두 상징화하여 초서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감상자의 입장에서 보면 작가의 경력과 시대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면 정확하게 작품을 평가하기가 곤란하다. 이 점은 옛사람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과제다. 일반적으로 해서는 경직화되기가 쉽고, 행초는 매끄럽게 되기가 쉽고, 큰 글씨는 산만해지기가 쉽고, 작은 글씨는 구속되기가 쉽다. 그러므로 해서를 쓸 때에는 단정하면서도 활발하게 하여야 하며, 행초를 쓸 때에는 날아 움직이는 듯하면서도 침착해야 한다. 큰 글씨를 쓸 때에는 짜임새를 긴밀하게 하여야 하며, 작은 글씨를 쓸 때에는 너그럽게 하여야 한다. 여기에 기이한 것에는 바른 것을 배합하여야 하고, 바른 것은 기이한 것을 보충하여 기이하면서도 촌스럽지 않게 하며, 생동감이 있으면서도 경직되지 않게 하여 세련되고 피곤하지 않게 하여야 한다. 이것은 비록 작가에 대한 요구사항일 뿐만 아니라 감상자들도 이러한 각도에서
작품의 우열을 감상하여야 한다.
예술이란 모방 혹은 복사하거나 사진 찍듯이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다. 적지 않은 감상자들은 왕왕 기계적으로 비첩의 맛을 추구하고 심지어 이를 따르지 않으면 가치없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옛사람의 작품에는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환경과 사상 감정이 있기 때문에 배우고 따른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법은 중요한 것이지만 옛법에만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된다. 감상할 때는 다른 사람의 약점만 들추지 말고 장점을 흡수하여야 한다. 편견은 결코 예술평가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주마간산으로 대충 보고 지나가는 것으로는 작품이 간직하고 있는 기법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세심히 살피고 완미하여야만 비로소 유파와 운필의 기법등을 제대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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