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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로 배우는 중국사

淸山에 2010. 12. 30. 07:48
 

 

 
 
 
고사성어로 배우는 중국사
 
 
 
    머리말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우리나라로서는 모든 영역에 있어 한문이 우리생활과 유리될 수 없는 표현수단이다.  이에따라 중국역사에서 일어났던 많은 이야기들이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그로부터 유래된 고사성어들은 우리의 언어생활이나 행동약식에 있어서 지침이 되는 것도 적지않다.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우리나라에서 고사성어들이 사용되어 왔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원래의 뜻이 약간 변질되어 온 것들도 적지않아 오늘날에는 정작 중국인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오늘날 국제정세의 변천에 따라 중국어는 영어의 뒤를 이어 우리에게 세계공용어로서 새롭게 부각되었고, 이와함께 중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도 급증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 시일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내와 끈기로서 오랜시간을 들여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는 중국어의 발음을 모른다해도 필담으로 어느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최소한의 의사소통을 위한 필담을 위해서라도 사용되는 한자의 정확한 뜻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그 한 방면으로 우리생활 속 깊숙히 스며든 고사성어를 잘 활용하면 한문을 시간을 절약하며 재미있게 배울 수 있을 것이며, 덧붙여 중국역사속의 고사들을 통해 중국인들의 의식저변에 깔린 사상을 이해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중국의 각 시대별로 많은 고사성어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 모두를 소개할 수는 없으므로 우리가 평소 귀에 많이 익었거나, 쉽게 인용하는 고사성어의 유래를 살펴보고, 나아가 중국인의 사상과 역사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 보탬이 됐으면 한다.
 
  독후감의 구성은 각 시대별 정치, 사회 상황과 대표적인 고사성어의 유래를 소개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2. 하(夏)나라 시대(P.7)
 

  신석기 시대의 앙소 문화와 용산문화, 그리고 장강(長江)유역에서 발달하였던 각종 신석기 문화를 거쳐 최초의 국가출현을 암시하는 전설은 삼황오제설(三皇五帝說)이다.  삼황은 [상서(尙書)]의 수인씨, 복희씨, 신농씨의 기록을, 오제는 [사기(史記)]의 황제 전욱, 제곡, 요, 순의 기록을 따르고 있다.
 
  이 두책의 기록에 의하면 수인씨는 화식(火食)하는 방법, 복희씨는 사냥하는 기술, 신농씨는 농경을 발명했다.  또한 오제 가운데 황제는 무력으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문자, 역법, 궁실의 상, 화폐, 수레 등의 문물제도를 창안한 최초의 군주였다.  [상서]에 의하면 요는 순을 발탁하여 제위를 양위하는데,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선양이다.  또한 순도 13년간의 치수(治水)에 성공한 우(禹)의 공로를 인정하여 제위를 우에게 선양하였다.
 
  삼황오제의 뒤를 이어 중국역사의 무대위로 하조(夏朝)가 등장한다.  하의 曆史는 주변의 많은 부족들과의 투쟁으로 특징지어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2대 계(啓)와 유호씨와의 싸움, 3대 태강때의 안읍의 상실 삼묘와의 충돌, 중기에 유궁씨, 말기에도 걸과 유궁씨와의 충돌을 들 수 있다.  이 하왕조는 하남성에서 흥기한 상족(商族)에 의해 멸망했다.
 
 
 
    3. 상(商)나라 시대 (P.13)
 

  상나라는 중국 최초의 왕조로 언급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결정적인 고고학적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실재성에 대해 논란이 많다.  상조는 용산문화권에 속하는 것으로 추측되며, 무수한 방, 읍, 국 등 도시국가중에서 상읍이 흥기하여 기원전 1500년 경에는 하남성 안양에 정착하며 주변의 약소도시국가를 복속하여 창건한 것으로 추측된다.  상조는 신정(神政)으로 주변의 부족을 지배하였으며, 청동문화가 창달하였고, 갑골문(甲骨文)을 만들어 조사으이 제사, 농사의 길흉에 대한 기록을 만들어 중국 고대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4. 주(周)나라 시대 (P.17)
 

  주조(周朝)는 정치적 지배체제로서 종법적(宗法的) 봉건제도를 실시하여 희서으이 일족을 요충지의 제후로 봉하여 개국의 기틀을 형성하였다.  또한 이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종친간 상하의 분별과 친소로 규제하는 종법제도로 천자에서 제후, 경대부에 이르기까지 차등적 종법질서를 중심으로 한 일가(一家)의 천하를 형성하였다.  이 같은 종법적 봉건제도는 상조의 신정정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국의 최초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통치제도이다.  또한 주조는 은의 청동문화를 계승하면서, 독창성을 가미하여 발달된 청동문화를 보유하여 아직 원시적인 생활을 하는 주변의 다른 민족에 앞선 선진문화를 가진 민족이었다. 
 
여기에 禮敎文化를 창달하여 중국문화 형성과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중화와 제이에 대한 관념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때 주조의 문화가 고대 및 현대 중국문화의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조가 유왕에 이르러, 유왕이 신후의 소생인 태자 선구를 폐하고 포사의 소생 백복을 후사로 정하려하자 신후의 오빠 신후(申侯)가 북방의 견융을 충돌하여 주조를 침입케 한다. 
유왕은 여산아래에서 견융과의 싸움에서 패사하고, 호경이 함락되었다. 
 
이에 진 문후, 위 문공, 진후 등의 협력으로 선구가 평왕으로 등극하고 낙읍(洛邑)으로 수도를 옮겼다. (B.C. 770)
  이로부터 펴오앙의 동천 이전을 西周時代, 그 이후를 東周時代라 한다.
 
 
 
    5. 夏에서 周사이의 時代적 고사성어
 

    가) 반구제기(反求諸己) (P.11)
  夏朝때의 백계가 유호씨의 침범을 막지 못하자 그 원인을 자신의 덕행의 부족으로 돌린데서 유래되었다.  이 고사는 사회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마땅히 자기에게 많이 요구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허물을 찾고 아울러 더욱 노력하여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 복부불반분(覆水不反盆) (P.19)
        : 한번 엎은 물은 다시 대양에 담지 못한다.
  周의 강태공은 젊은시절부터 늘 집에서 책을 읽지 않으면 낚시를 하면서 지내왔다.  결혼을해서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돈벌이를 하지않아 생활고가 심했다.  견디다못한 그의 아내는 친정으로 돌아가고, 혼자 그럭저럭 생활하다, 서백후 희창의 부름을 받아 부패한 당시 권력체계를 쇄신하는데 공을 세웠다.  높은지위에 오른 강태공은 고향으로 말을타고 금위환향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내는 다시 받아주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강태공은 술을 담은 대야를 그의 아내에게 주며 위와 같은 말을 했다는데서 유래되었다.
 

    다) 해불양파(海不揚波) (P.29)
  주 무왕이 상을 토벌한 후 수년만에 병으로 죽고, 태자 송이 제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성왕(成王)이다.  그러나 성왕이 아직 어려 부왕의 동생 주공이 섭정하며 국정을 처리하니 천하는 태평하였고, 백성들은 안락하였으며, 이웃나라들도 모두 주공을 흠모하여 앞을 다투어 조공을 받쳤다.  그때 교지국의 월상씨도 사신 중삼역을 중국에 파견, 진기한 동물을 보내왔다.  주공이 중삼역에게 말하였다.
 
  “우리나라가 귀하의 나라에 은덕을 베푼일도 없고, 또한 우리 양국사이에는 정치적 상하관계를 맺은것도 아닌데, 어찌 감히 당신네 나라를 속국이라 하고, 조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올때 저희 왕 황구께서 제게 이르기를 ‘지금 천하에는 사나운 폭풍이 사라지고, 끊이지 않던 장마비와 재난은 오래전부터 볼 수가 없으며,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지 않은지가 벌써 3년이나 되었다.  내가 생각컨데 중국에 성인이 나타나 세상을 잘 다스려 주시기 때문이니라.  그러니 우리는 마땅히 조공을 바쳐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주공은 그 조공을 받아들이고 사신이 돌아갈 때 그들이 방향을 잃을까 저어하여 지남차를 선물하고, 사람을 시켜 그들의 길을 안내하게 하였다.
 
  이 고사에서 유래하여 후세 사람들은 이 성어를 가지고, 국가가 안녕하고 세계가 태평하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즉 큰 바다에 바람이 자고 파도가 고요하여, 풍랑이 없는 것을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사회질서가 잘 잡힌 것으로 비유하였다.
 

     라) 일일삼추(一日三秋) (P.35)
  ‘삼추(三秋)’는 세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일추’를 1년이라 생각한다.  모든 곡물이 가을이 되어야 익어 옛날 사람들은 곡식이 익어야 가을이라고 하였다.  남쪽을 제외하고는 곡류는 대부분 1년에 한번 익으니 ‘삼추’는 곧 3년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 해석은 ‘삼계(三季)’ 즉 9개월을 말한다.  세번째는 단지 가을 3개월을 ‘삼추’라고도 한다.
 
  이것은 어떤 사람을 그리워하는 시로, 그 대상은 여성인 듯 하다.  옛날의 가요는 대부분 애정을 노래한 것이 많으니 이 시는 한 남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가사라 할 수 있다.
 

그리운 사람이여!
칡넝쿨을 캐는 그대를 하루라도 못보면
삼개월을 보지 못한 듯하구나
그리운 사람이여!
쑥을 뜯는 그대의 얼굴을 하루라도 못보면
9개월의 세월이 지난듯 그렇게 하루가 길구나
그리운 사람이여!
애초를 캐는 그대의 얼굴을 못보면
마치 삼년을 헤어진 듯 하구나.
 

  이와같이 이 시는 아주 뚜렷한 애정을 노래한 시이니, 한 남자가 여인을 그리워하며 하주를 보지못하여 3개월, 9개월 혹은 3년이 지난듯 길게 느껴지는 마음의 간절함을 적절하게 묘사하였다.  이러한 심정은 열애중의 남녀라면 누구나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일삼추’는 헤어져 있는 하루가 긴 심리적 시간의 흐름을 비유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의미가 확대되어 남녀간의 그림움 뿐만 아니라, 친구, 가족, 어떤 일을 간절히 기다릴 때도 또한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마) 청출어람(靑出於藍) (P.40)
  주조에 학문이 높은 순황이라는 사람이 있어 [순자]라는 책을 지었다.  순황은 이 책의 [권학편]에서 말하기를, “청색은 남색을 조절하여 만든것이나 얼음이 물보다 차가운 것과 비교할 수 있다”고 하였다.
  순자가 한 이 말의 뜻은, 만약 학생이 열심히 학문을 연구하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후에 그의 스승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의 성취를 이룰 것이라는 점을 비유한 것이다.  [북사(北史)]라는 책에 수록된 [이밀전]에 이 성어를 인용한 고사가 있다.  이 말은 어릴 때 공번을 스승으로 모시었으나 그는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여 많은 성취가 있었다.  그러자 그의 스승이었던 공번이 이밀에게 와서 제자로 받아줄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당시 사람들은 이밀이 학문상에 이룬 성과가 그 스승을 능가하였음을 칭찬하여 ‘청출어람’이라 하였다.
 
 
    6. 춘추전국시대 (P.45)
 

  춘추전국시대는 주(周)의 동천(B.C 770)에서 진의 중국통일 (B.C 221)까지의 약 550년간을 말하며, 춘추는 공자의 [춘추], 전국은 [전국책]에서 그 명칭이 유래하였다.  이러한 춘추전국시대는 주의 종법적 봉건제도를 벗어나 열국이 상호대립과 항쟁속에서 개혁과 혁신이 끊이지 않던 시대였다.  정치적으로는 전제군주의 형성과 중앙집권제의 성립, 경제적으로는 농업상의 생산기술의 진보와 혁신이 있었으며, 이러한 발전은 수공업, 상업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또한 경제의 성장으로 말미암아 씨족공동체의 붕괴가 이루어졌으며, 각국의 군주들은 앞을 다투어 인재를 등용하였다.
  춘추전국시대의 각 방면에 걸친 변화와 발전 및 열국의 대립과 항쟁은 당시의 사상가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어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학술과 사상을 제자백가가 출현하였다.  오늘날의 역사서에서 춘추오패, 진문공, 초장왕, 오왕합려, 월왕구천과 전국칠웅이 부침을 거듭하면서 마침내 진이 천하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다.
 
    가) 모피지부(毛皮之附)
  진의 공자 이오는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군주가 되기위해서는 진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이에 그는 진의 지지를 얻기위해, 만약 그가 진의 도움으로 제위에 오르면 그 사례로 다서성을 바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뒤에 그의 계획이 성공하여 진의 군주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진 혜공이다.  혜공은 즉위한 후에 진에게 성을 다섯개나 준다는 것이 아까워 차일피일 미루다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후 몇년이 지나 진의 농사가 흉작이어서 백성이 굶주리게 되자 진국으로부터 쌀을 사들이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그러자 진왕은 혜공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던 과거의 일을 개의치않고 흔쾌히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진의 백성들은 기아를 면하였다. 
 
이듬해에는 진국의 수확이 좋지 않아 진국에서는 진국의 쌀을 사려고 하였으나 혜공은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대부 정경은 혜공에게 한나라의 군주로서 신의를 행하지 않으면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힘드니 이번 기회에 진을 도와 예전에 받은 은혜와 성의에 사의를 표시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때 대신 괵사는 이에 약속을 어겨 진에게 다서성을 주지 않으니, 진은 반드시 진에 대한 불만이 여전히 남는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피지부존 모장언부(皮之不存 毛將焉附)’라는 비유를 들었다. 
 
그 뜻은 진국에게 다섯 성을 주어야 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인데, 이 문제를 더 해결하지 않고 진국에게 쌀을 파는 것은 마치 털만 있고 가죽이 없는 것과 같으니, 가죽이 없는데 털이 어디에 붙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오직 털만 있고 가죽이 없으니 그 털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 괵사의 말에서 유래하여 사람들이 일을 해결할 때에 일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지엽적인 문제만 해결하려 마음쓰는 것을 ‘모피지부(毛皮之附)’라고 한다.
 

    나) 고어지사(枯魚之肆) (P.64)
  장자의 집이 몹시 가난하여 식량이 떨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장자는 감하후에게 가서 식량을 꿔달라고 부탁하였다.
  “좋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도 형편이 어려우니 좀 기다렸다가 조세를 거두어 들일 때에 은자 3백냥을 꿔드리지요.”
  그의 말에 화가 난 장자는 그에게 말하였다.
 
  “어제 내가 길을 걷다가 물고기 한마리가 길가의 마른 구덩이 속에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 물고기가 나를 보더니 힘없이 내게 말하길 ‘어르신네, 저는 본래 동해에 있던 몸이나 어쩌다 불행하게도 이 마른 구덩이에 떨어져 물이 말라 죽게 되었습니다.  간절히 바라오니 제게 한통의 물을 가져다 저를 구해주십시오’라고 말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자, 마침 나는 남쪽의 여러 국왕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그곳에는 물이 많으니 내 반드시 물을 가져와 너를 구해주마’라고 했고.  그랬더니 그 물고기는 몹시 화가나서‘그것이 어찌 가능합니까? 지금 내가 필요 한것은 단지 한통의 물로, 그것만 있으면 나는 살 수가 있으나 만약 당신이 서강(西江)의 물을 가져오기를 기다린다면 그때는 아마도 나는 이 자리에 없고, 어물전에나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오.’라고 말하더군.”
 

  다) 편장막급(鞭長莫及) (P.70)
             : 말채찍이 길지만 말의 배에는 닿지 않는다.
  어느날 초나라가 군사를 이끌고 송나라를 침략하였다.  다급해진 송나라 왕은 진나라 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상황을 알리고 송국이 초국과 싸우는데 지원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진나라 왕은 이를 듣고 승낙하려 하였다.  그러나 진의 대신 백종이 이 일을 알고 황급히 진왕을 알현하고 만류하며 말하였다.
 
  “주군께서 군대를 이끌고 송국을 돕는 것은 도리상으로 볼 때 마땅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형세로 보아서는 옳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옛말에 채찍이 비록 길다하나 말의 배를 때리지는 못한다 했습니다.  우리 진나라가 강하기는 하나 막강한 세력을 가진 초와 싸운다는 것은 두마리의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것 같이 우리도 반드시 다치게 될 터인데 어찌 지금의 형세를 거스르려 하십니까?
 
  백종의 말을 들은 진나라 왕은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기고는 송국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라) 외수외미(畏首畏尾) (P.83)
             : 이것도 저것도 겁나다.
  춘추시대에 진과 초 두나라는 천하의 패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다. 
어느날 진 영공이 호지에서 제후들의 회합을 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정목공이 보이지 않자 혹시 정 국이 진에 대해 딴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하였다.
  그러자 정의 공자 귀생은 진나라의 집정자인 노선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ꡔ우리 군주 정목공께서 재위하신지 3년 동안에 세차례나 진나라로 가서 진군을 배알하였으니, 우리가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진국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네 진국은 아직도 우리 정국의 서으이가 부족하다고 여기고 만족하지 않으니, 이제 정국은 오직 망한 나라일 뿐이니 여기에서 더이상 진국에 대해 예절을
갖출 수가 없습니다.
 
  흔히 ‘머리와 꼬리를 움추리면 몸길이가 몇자나 되나’라고 말합니다.  또 ‘사슴은 죽어도 그들을 택하지 않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비록 지금 우리 정국의 처지가 이와 같이 초구그이 공격을 두려워하고, 또 진국이 습격해 올까하여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사슴이 사람에게 쫓길때는 몸을 숨길 곳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정국을 핍박하여 더이상 피할 수 없을 때면 우리 또한 몸을 숨길 안전한 곳을 선택할 여지가 없습니다.  진국의 명령은 마치 영원히 끝이 없는 것 같으니, 이것은 우리 정나라로 하여금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없게하는 것입니다.  우리 정나라의 주군께서는 나라가 곧 망하려 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전국의 모든 힘을 기울여 국경에서 진국의 대군을 기다릴 수 밖에.
 
  이 이야기는 [좌전]에 수록되어 있다.  정나라의 공자가 인용한 ‘畏首畏尾 身餘其’의 두 구절은 한 사람이 머리를 공격당할까 두려워하고, 또 아래가 해를 입을까 무서워 움츠러들어 그 사람의 몸에서 공격할 만한 곳이 얼마나 될까?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것을 인용하여 어떤 일도 겁이 나서 하지 못해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여 결국 아무것도 못함을 형용한다.
 

  마) 일폭십한(一暴十寒)
               :하루 따뜻하게 하고 열흘을 얼리다.
  전국시대는 제자백가의 활동이 활발하고 그들의 유세가 성행하였다.  일반적으로 유세를 하는 인사들은 학문이 높을 뿐만아니라,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생동감 넘치는 비유들로 위정자를 풍자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맹자이다.
 
  맹자는 제나라의 왕이 어리석어 일을 함에 지속성이 없고, 쉽게 다른 사람의 참언을 믿는 것이 불만이라 그에게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바둑을 두는 것은 작은일처럼 보이지만 만약 왕께서 한마음으로 전념하여 뜻이 이르지 않으면 잘 배우지 못하고 상대를 이기지도 못합니다.  혁추는 전국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두는 사람입니다.  그는 두 제자를 두었는데, 그중의 하나는 전심으로 뜻을 가지고 언제나 혁추의 지도를 받기에 여념이 없었고, 다른 하나는 늘 하늘에 기러기가 있음을 생각해서 기러기를 쏠 화살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두제자는 혁추가 직접 가릋니 것이나 뒤의 사람의 실력은 형편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지력(智力)에 어떤 구별이 있어서가 아니고, 전심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후 사람들은 맹자의 이 구절을 인용하여, 일을 하는데 끈기있게 지속하는 마음이 없고 일을 추진함에 있어 일정함이 없는 것을 ‘일폭십한’이라 한다.\
 
 
 
    7. 진(秦)나라 시대 (P.127)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한 진왕정은 황제 존호를 제정하여 자신을 시황제라 칭하고 군현제도를 기반으로 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도를 채택하였다.  또한 이를 공고히 하기위해 치도의 건설, 북방에 위치한 연, 조, 진 등의 장성들을 개축연결한 만리장성의 구축 그리고 아방궁과 여산릉을 신축하였다.  이와 함께 각국의 문자를 폐지하고 진의 소천제를 통용시키고, 화폐와 도량형도 통합하였다.
 
  한편 법가사상에 따라 활발하게 개혁을 추진하던 진시황의 시책에 많은 유생들의 비난이 있자, 이들을 규제할 필요를 느낀 진시황은 이사으이 건의에 따라 [진기]와 농학, 의학서를 제외한 모든 서적을 소각하고, 그 다음해에 460여명의 유생들을 생매장하였다.  이것이 중국의 역사상 유명한 ‘분서갱유’이다.
 
  기원전 211년 10월에 5차 순행도중 진시황이 돌연 사망하였다.  이에 태자 부소와 사이가 나빴던 조고와 이사가 모의하여 유서를 개조, 호해를 황제로 옹립하였다.  시황제 사후의 황제들의 무능과 조고의 농단, 그리고 방대한 토목공사에 따른 백성들의 궁핍한 생활 등의 여러 요인과 결부되어 빈농출신의 하급장교인 진승, 오광의 반란을 계기로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반란군으로 계,위 황실후예들의 자립, 초의, 항량이 기병하였다.  그후 항량이 죽고 항우가 그 세력을 키워 나갔고, 패의 풍읍에서 유방이 봉기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조고에 의해 황위에 이른 자영은 조고를 주살하고 관중까지 진격해 유방군에게 항복하여 3대 16년의 진왕조가 멸망하였다.
 
 
 
   8. 한(漢)나라 시대 (P.154)
 

  기원전 202년에 중국을 통일한 유방은 황제로 즉위하고 수도를 장안(長安)으로 하였다.  그는 군현제와 봉건제를 절충한 군국제를 실시하고 창건에 공이 큰 장수와 유씨 일족을 제후왕과 열후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세력이 커지면 자기에게 반기를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신을 비롯한 이성제후들을 거세하고, 동성제후를 배치하여 왕권을 공고히 하였다.
 
  또한 한무제(漢武帝)는 제국내의 사상통일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유가사상(孺家思想)을 국학으로 채택하고, 문제 경제시대에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흉노, 남월, 서남이 및 위만 조선을 정벌하였다.  한편 이와 같은 전쟁의 수행으로 고갈된 재정을 일어키기 위해 염철전매제와 균수법, 평준법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선제(宣帝)이후 나이 어리고 무능한 황제의 등극은 외척과 환관의 정치참여를 가져왔고, 이 과정에서 정권을 장악한 사람이 왕망이다.  왕망은 당시 유행하던 참위사상에 힘입어 황제를 몰아내고 신(新)을 건국하였으나 국내외의 혼란으로 왕망은 재위 16년만에 역사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당시 왕망에 이어 전한(前漢) 경제의 6대 손인 유수가 모든 세력을 평정하고, 재통일하여 왕무제를 즉위하니 역사상 후한(後漢)의 시작이다. 
 
후한은 낙양에 도읍을 정하고, 전한시대의 제도를 답습하여 건국제도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 후한도 말기에 이르러서는 환관과 위척의 암투, 환관의 전횡과 이에 반발한 유학 지식인층의 형성과 탄압속에서 그 정치적 뿌리가 흔들렸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 농민의 빈곤으로 태평도(太平道)와 오두미도(五斗米道)가 대두되고, 황건적이 일어나고, 중국은 다시 분열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가) 차재두량(車載斗量) (P.189)
                 :수레로 싣고 말로되다.
  후한말, 삼국이 아직 형성되기 전에 익주목사 유장이 장로라는 사람의 모친과 동생을 죽였다.  당시 장로는 힘이 없어 비록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참을 수 밖에 없었으나 이에 대한 원한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였다.  그후 시국이 어지러워지고 여기저기에서 조정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생겨남에 따라 유자의 세력도 축소되었다. 
 
장로는 이때를 기회로 모병을 하여 거사를 일으켜 복수를 시작하였다.  파서의 태수 총희는 장로의 공격을 받자 이 긴급한 소식을 유장에게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유장은 크게 놀라 군사회의를 소집하였으나, 아무도 이에 대처할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하였다.  그때 장송이 나서서 자기가 세객으로 조에게 가서 조조의 지원을 요청하겠다고 하였다.
 
  장송이 조조가 있는 허도로 가서 그를 만나려고 하였으나, 조조는 마초를 패배시키고 돌아와 승리에 도취하여 오만해져 장송의 면회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송은 그곳에서 3일을 기다리다가 문지기에게 뇌물을 주어 문지기가 그를 조조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겨우 조조를 만날 수 있었다.  장송이 열심히 조조를 설득하고 있을 때에 조조의 수하인 양수가 들어왔다.  양수는 그가 유장의 세객으로 와서 장로의 침입을 막아주길 바란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곁에서 장송의 말을 듣고 있던 양수가 비꼬는 듯한 말투로 장송에게 말하였다.
 
  “유장이 있는 곳에는 능력있는 사람이 없는가?”
  그러자 오기가 생긴 장송이 약간 허풍을 떨며 말하였다.
  “유장의 주변에는 문무를 다 갖추고, 지혜와 용기를 겸비했으며, 충성스러운 사람이 어찌 백명 뿐이겠소?  나 장송같은 인재는 수레에 싣고 말로 될‘車載斗量’ 정도로 많소.”
 
 
 
    9. 삼국시대 (P.193)
 

  한의 전군교위였던 조조는 황건적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농민세력을 자신의 휘하로 흡수하고 낙양으로 진입하여 헌제를 자신의 본거지인 허도로 납치하고 실질적인 통치권자로 등장했다.  또한 그는 원교근공책을 써 손책, 마등, 장로, 원소등과는 친선을 표방하고, 가까이 있는 여포, 원술, 장수 등을 하나하나 합병해 나갔다.  그리하여 199년에는 황하 이남의 군웅들을 모두 제거하고 원소까지 제거한 조조는 업으로 본거지를 옮기고, 216년에는 칭왕하여 위왕으로 즉위, 독자적인 정치를 실시하였다.
 
  220년 1월에는 조조가 죽자 조비가 왕위를 계승하고, 헌제를 핍박하여 선양의 형식을 통하여 위 문제로 즉위함으로써 후한은 14대 196년만에 멸망하였다.
  오(吳)는 손책이 단양, 예장, 회계 등 강남 지역에서 구축하고, 그가 죽은후에는 아우 손권이 기반을 확장하여 지금의 절강, 복건, 강서, 광동, 호남의 전 지역과 호북, 강소, 광서우 일부와 교주를 확보하였다.
 
  또한 한 종실 출신인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형주자사 유표에게 의착하다 그가 죽은후에 형주를 차지하고, 촉한으로 자립하여 소열제가 되었다.  그의 판도는 지금의 사천성과 섬서, 감숙, 운남, 귀주, 광서 등의 일부를 차지하였다.  이와같이 형성된 삼국은 약 90여년간 서로 연합과 이탈을 반복하면서 대립 항쟁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삼국의 대립속에서 위나라에서 사마씨가 득세하면서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가 정권을 독점하다가 사마소는 촉한의 후주가 환관 황호의 농간에 휘말려 국정이 문란한 틈을 타서 촉한을 멸망시키고 진왕으로 봉해졌고, 그가 죽은후에 그의 아들 사마염이 위원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니 그가 진무제이다.  또한 재위 31년이란 장수를 누린 손권이 죽은후에 오의 정치가 문란해져 경제는 즉위 2개월만에 살해되고, 손권의 손자인 손호가 즉위하였으나, 그도 방탕한 생활로 인심을 잃자 이틈을 타 진무제는 오의 수도인 진업을 함락시킴으로써 중국은 분열 90여년만에 다시 통일되었다.
 
 
 
    10. 진나라 시대 (P.219)
 

  삼국을 통일한 진무제(晋武帝)는 위나라가 종친세력의 약화로 권신이 발호하여 망한 것을 교훈삼아 일족들을 왕으로 봉하고, 각 지방의 무기를 국가로 회수하고, 군대를 해산하여 지방자사들은 행정권만을 갖게되었다.  그러나 이분권적 봉건제도는 제왕들의 할거를 초래하였지만, 지방의 무력약화로 그들을 저지할 수 없었다.  또한 당시 중국의 북변에는 흉노, 갈, 선비, 저, 강의 오호가 있었는데, 세력이 강해진 그들의 남침 위기속에 무제가 죽고 혜제가 즉위하자 황후가씨는 황태후 양씨를 살해하고 가씨일족을 정권에 끌어들이고, 종친들 사이를 이간시켜 서로 싸우게 하였다.  그러나 조왕 윤이 가황후를 죽이고 혜제를 폐위하여 자신이 제위에 올랐다.  이에 반발한 다른 제왕들이 군사를 일으켜 종왕윤을 죽이고 혜제를 복위시켰다.
 
  그러나 공을 세운 제왕들간에 다시 내분이 일어나 291-306년의 16년간에 걸친 팔왕의 난이 일어나 화부일대가 전란에 휘말렸다.  이 와중에 성도왕영이 흉노 유연의 힘을 빌리려 그를 부르자, 유연은 이를 빌미로 군대를 모집하여 반란을 일으켜 한왕이라 자칭하고는 기주, 청주, 예주, 서주 등을 점령하였다.
 
  또한 유연의 아들 유총이 낙양을 함락시켜 회제를 사로잡자, 민제가 장안에서 즉위하여 제위를 이었다.  그러나 유요가 다시 공략하자 투항하여 진은 50년만에 멸망하였다.
  이에 사마씨의 일족인 사마예가 옛날 오나라의 도읍지인 진업에서 즉위하니 그가 동진의 원제이다.
 

  가) 구약현하(口若懸河) (P.229)
              :말하는 것이 청산유수 같다.
  곽상의 자는 자현으로, 당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대학자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으며, 특히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사으이 이치에 대해 깊은 사색에 잠기기를 좋아했다.  성인이 된 그는 노장의 학설을 좋아하였고, 그에대해 깊은 연구와 지식이 있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관직을 맡아줄 것을 청했으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오직 학문을 연구하고 천리를 토론하는 것을 인생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러나 나중에 사람들의 강권에 못이겨 황문시랑을 맡았다. 
그의 말이 논리에서 정연하여 태위 왕연은 그를 칭찬하기를
  “곽상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마치 산위에서 곧장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와 같이 거침없이 말이 막히는 법이 없다.”
  후세 사람들은 왕연의 말에 근거, ’구약현하‘라는 성어를 만들어 말을 잘하는 사람의 말이 끊이지 않는
것을 비유하였다.
 

  나) 맹인할마(盲人轄馬) (P.232)
              : 장님이 눈먼 말을 타다.
  어느날 환현과 고개지가 참군 은중감의 집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세사람은 각 사람의 상상하는 자연계의 현상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중에 누가 먼저 제의했는지는 모르지만, 각자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환현이 먼저 말하기를
  “창끝을 쌀속에 담그고 다시 칼로 불을 때서 밥하기”,
그러자 은중감은
  “백세된 노인이 마른 나무가지에 기어오르기”
  다음 고개지가
  “장님이 눈먼 말을 타고 한밤중에 깊은 연못에 이르기”
 
  여기에서 이야기는 끝났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무모한 행동이나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을 비유하는 성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11. 맺음말
 

  지금까지 하(夏)나라에서 진(晋)나라까지의 정치상황과 연결해서 고사성어에 관계된 일화들을 살펴보았다.  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빠진것도 많고 미흡한 것도 많지만,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중국의 사상과 역사를 이해하는데 조금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이책은 단순히 학문을 배우려는 사람들의 학습서를 넘어선다.  고사성어를 시대별로 엮으면서 짤막한 시대배경을 개괄, 중국사의 큰 흐름을 정리한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수업시간에 중국법제사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지만 국소적인 면도 있고해서 난이했는데 나름대로 이책으로 중국고대사를 쉽게 정리할 수 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해서 역사의 전환기에서는 사회 각 분야의 혁명적 변화가 있기 마련임을 전제할 때 중국의 역사는 기나긴 역사의 흐름속에서 그 변화의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사상의 변천과정은 그 역사의 전환기적 배경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출현이 그 예이다.  오늘날 중국이 있기까지 도도히 흘러내려온 대륙의 역사는 짤막한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지식과 독서량이 부족함으로 더이상의 부연은 불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만약에 내가 중국에 관해 조금더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다면 이번 독후감상문 제출을 위한 이 책의 기여는 나한테는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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