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 배움/우리말 벗

어쭈구리

淸山에 2010. 12. 30. 07:02
 
 

 

 

 

어쭈구리  

 

 

가게에 붙은 수많은 상호 가운데 ‘어쭈구리’라는 별난 상호가 있다. 주로 호프집에서 확인된다. ‘어쭈구리’ 호프집은 전국 연쇄점이어서 이와 같은 상호의 호프집이 전국에 대단히 많다.
  똑같은 상호는 눈에 잘 띄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어쭈구리’와 같이 독특한 말을 이용한 상호는 더더욱 눈에 잘 띈다. 이런 점에서 ‘어쭈구리’ 호프집은 일면 성공한 셈이다.
  그런데 굳이 불량스러운 말인 ‘어쭈구리’인가? 유쾌, 통쾌, 흔쾌하게 술 마실 수 있는 만인의 광장 호프집에 남을 무시하고 비아냥거릴 때 쓰는 ‘어쭈구리’는 잘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장삿속에서 아무렇게나 선택한 상호라면 할 말은 없다.
  ‘어쭈구리’는 불량스러운 말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표준어가 아니라는 점에서도 상호로서 문제가 있다. 큰 사전을 찾아보아도 이 단어는 올라와 있지 않으며, 이와 유사한 단어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 ‘어쭈구리’를 고유어가 아닌 한자 성어(成語)로 설명하기도 한다. 곧 ‘魚走九里(어주구리)’에서 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럴듯한 이야기까지 결부되어 있다.

  옛날 중국 한나라 때의 일이다. 어느 연못에 예쁜 잉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메기 한 마리가 이 연못으로 몰래 잠입하였다. 그 메기는 잉어를 보자마자 잡아먹으려 덤벼들었다. 잉어는 연못 이곳저곳으로 메기를 피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궁지에 몰린 잉어는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하였다. 잉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뭍에 올라 지느러미를 다리 삼아 냅다 뛰기 시작했다. 메기가 쫓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잉어가 뛰어간 거리는 약 구 리(九里) 정도나 되었다. 잉어가 뛰기 시작하였을 때부터 그것을 목격한 농부가 뒤따라갔는데, 잉어가 멈추자 그 농부는 이렇게 외쳤다. “어주구리(魚走九里)!”

  ‘魚走九里(어주구리)’는 ‘물고기가 구리(九里)를 달리다’의 뜻이다. 물고기가 먼 거리를 달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능력도 없는 어떤 사람이 능력 밖의 황당한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 이 한자 성어를 쓴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황당하다. ‘魚走九里’라는 한자 성어는 도대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개그맨(익살꾼)이 꾸며낸 이야기가 돌고 도는 것이다. 유머 게시판으로나 가야 할 내용이다.
  그럼 ‘어쭈구리’는 어디에서 온 말인가? 이에 대한 답은 이 단어가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를 알아봄으로써 그 단서를 잡을 수 있다. “어쭈구리, 그렇게 말하니까 성인군자 같군!”, “어쭈구리, 제법인데.”, “어쭈구리, 죽는 줄 모르고 까불고 있군.” 등에서 보듯 ‘어쭈구리’는 남의 잘난 체하는 말이나 행동을 비웃거나 비아냥거릴 때 쓴다.
  이와 같은 의미 기능을 갖는 단어에 ‘아주’가 있다. [아쭈]로 발음하기도 하나 ‘아주’가 표준어이다. 위 문장의 ‘어쭈구리’를 ‘아주’나 ‘아쭈’로 대체 표현해도 문장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어쭈구리’와 ‘아주’, ‘아쭈’가 같은 의미라는 점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어쭈구리’의 어원 설명의 절반은 달성된 셈이나 마찬가지이다. ‘어쭈구리’의 ‘어쭈’를 ‘아쭈’의 모음 변화형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에서 모음 ‘ㅏ’와 ‘ㅓ’의 교체는 빈번하므로 ‘아쭈’가 ‘어쭈’로 변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다만 ‘구리’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부사 ‘그리(그렇게)’이다. 이 ‘그리’가 ‘어쭈’의 제2음절 모음 ‘ㅜ’에 이끌려 ‘구리’로 변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어쭈구리’는 ‘아주, 그렇게’라는 의미가 된다. 잘난 체할 만한 처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까불고 날뛰느냐는 뜻을 담고 있다고나 할까.
  또 한편으로는 ‘구리’를 단순한 접미사로 처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접미사 ‘-구리’가 많이 쓰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저되는 바가 없지 않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어쭈구리’가 한자 성어가 아니라 우리 고유어라는 점, 그리고 ‘어쭈’는 ‘아쭈’, 즉 ‘아주’에서 온 말이라는 점이다.

 

국립국어원 새국어생활 14권 4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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