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국악명상 庫

노들강변

淸山에 2010. 12. 16. 13:22
 
 

 

 

 

 

 

1934년 2월에 발표된 노들강변은 바로 신민요 정착에 획기적인 역할을 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장단은 세마치 장단에 맞추어 부른다.
오케레코드사 창립 1주년 기념작으로 발표된 이 노래는 당시 오케의 중심 작곡가였던 문호월이 작곡하고 만담의 당대 일인자로 활약하던 신불출이 작사했으며, 경기민요 명창으로 이미 많은 민요 음반을 취입한 박부용이 불렀다.
더없이 흥겨운 가락도 가락이지만, 노들강변의 독특한 멋은 가사 전체를 통해 유유하게 흐르는 달관한 듯한 무상감에서 더욱 뚜렷이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흥겨운 가락과 무상한 사설이 절묘하게 어울린 데에 민요 명창의 구성진 목소리가 더해져서 절창을 뽑아내고 있는 것이다.
신불출은 유행가 작사로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지는 않지만, 당시 잡지에서 그가 지은 시조 작품이 자주 발견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재주뿐만 아니라 글재주도 상당했던 것 같다.
또한 그가 취입한 많은 만담 음반에서 느낄 수 있는 해학과 비판의식, 그리고 월북을 택한 등의 이후 행적을 감안해 볼 때, 노들강변 노랫말도 그저 흔한 신세타령으로만 흘려 버릴 수는 없을 듯하다.
노들강은 서울 여의도의 남쪽을 흐르는 강을 말한다. 노들강에는 지금도 수양버들이 무수히 늘어져 있는데, 88도로와 나란히 뻗어 있는 그 옆의 길이 노들길이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 매어나 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을 이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노들강변 백사장 모래마다 밟은 자죽
만고풍상 비바람에 몇 번이나 지워 갔나
에헤요 백사장도 못 믿을 이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노들강변 푸른 물 네가 무슨 망령으로
재자가인 아까운 몸 몇몇이나 데려갔나
에헤요 네가 진정 마음을 돌려서
이 세상 쌓인 한이나 두둥 싣고서 가거라
 
 
 
 
노들 강변 봄버들/휘휘 늘어진 가지에다/무정세월 한허리를/칭칭 동여매여나 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으리로다/푸르른 저기 저 물만/흘러 흘러서 가노라."
내용이 유흥적이고 퇴폐적인 것은 이 노래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일제하의 허탈감이나 무기력에서 비롯된 이같은 정서는 레코드로 상품화되어
팔리면서 더욱 심해졌다.
이런 사정은 일제시대에 많이 불리던 〈노랫가락〉이라든지 〈창부타령〉 등의
비기능적인 민요나 많은 수의 신민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노들강변의 유래>
우리는 보통 `노들강변`이라고 하면 버드나무가 휘휘 늘어진 어느 강변을 연상하
지 않습니까?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의 민요가 그러한 인상을 주게 하지요.
아마도 `노들`이 `버들`을 연상시키나 봅니다.
그래서 어느 곳이든 이러한 풍경이 있는 강변이면 `노들강변`으로 생각하기 쉽지요.
하지만 실제 `노들강변`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노들강변`은 서울의 `노량진` 나루터를 말합니다. 현재 서
울의 흑석동에 있는 국립묘지 근처에 있던 나루터를 말합니다.
 
여러분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왜적과 싸우시던 `울돌목`을 아시겠지요? 이 `울
돌목`은 한자어로 `명량(울명, 돌량)`이라고 하지요. 이 `명량`의 `명`은 `울명`자이
고요. `량`은 원래 `돌량`입니다. 이 `돌`은 충청도 방언에 `똘, 또랑`으로도 사용하
고 있지요.`노량`의 `량`도 `돌량`입니다. 그래서 `노량(이슬노, 돌량)`은 `노돌`이라고 했지요.
그러던 것이 `노들`로 변화를 했습니다. 그래서 `노량`이 `노들`로 변하고 거기에 `강변`이 덧붙은 것입니다.
이 `노들강변`은 옛날에 서울과 남쪽 지방을 잇는 중요한 나루였습니다.
그래서 이 `노들강변`은 애환이 많이 깃든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