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Classic 성악

돈 코사크 남성 합창단이 부르는 러시아 민요 - 저녁 종

淸山에 2010. 12. 1.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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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코사크 남성 합창단이 부르는 <저녁 종>
 
 
[돈 코사크 남성 합창단의 창단 유래]
 
돈 코사크 남성 합창단의 첫 리허설은 1921년 러시아 혁명 중 赤軍에게 패배한 白軍 포로수용소(터키에 임시 설치했던)에서 시작되었다. 합창단은 조국에 대한 향수와 불안정한 현실을 노래로 승화시켰으며, 이들이 불가리아로 이송될 무렵에는 이미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의 교회에서 일요일마다 노래를 할 수 있었고 이 후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들의 콘서트를 기획한 Volkerbundes와 계약하였으며 호프부르크 궁에서 열린 공연이 바로 돈 코사크의 첫 공연이었다. 오스트리아 투어를 기점으로 영국, 프랑스, 미국, 스위스 등지에서 공연하기 시작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 1939년까지 이들은 베를린에서 거주하였으며 그 후 미국공연에 대한 제안을 받고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적인 기계문명의 나라 미국에서 투박하고 흙냄새 물씬 풍기는 러시아 민요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합창단의 우려와 예상을 깨고, 뜻밖에도 미국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계기로 전 단원은 미국의 시민권을 얻어 영주하게 되었다. 이 후 2차대전이 끝나던 1945년, 연합군을 위한 공연을하기 위해 다시 독일로 돌아왔으며, 약 1만회의 공연 끝에 1979년 해단하기까지 ‘돈 코사크 합창단’은 서방 세계의 왕궁과 가장 저명한 홀에서 공연하기에 이르렀다.
 
<라흐마니노프와 살리아핀의 전폭적 지지>
 
미국에서 망명 중이던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는 요양차 방문한 스위스에서 매년 코사크 합창단의 지휘자 세르게이 자로프를 만나 음악적으로 지도한 바 있으며, 금세기 최고의 베이스인 표도르 살리아핀 또한 이들 합창단에게 열렬한 지지를 표한 바 있다. 오페라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텔레스 배역의 전형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 살리아핀은 런던에서 열린 돈 코사크 합창단의 공연을 관람한 후 세르게이 자로프를 방문하여 포옹과 한담을 나누고는 하였다.
 
<합창단의 재설립>
 
합창단은 해단 후 12년 만인 1991년, 당시의 오리지날 멤버였던 바냐 흘리브카와 게오르그 팀첸코에 의해 재설립되었다. 이들은 본래 합창단의 고전적인 레퍼토리에 더해 새로운 창립자들의 훈련 아래 새로운 음색과 폭넓은 레퍼토리를 갖추게 되었다. 가벼운 악기같은 음색으로 시작되는 솔로 파트부터 오케스트라와도 같은 장대함까지, 광범위한 소리의 스펙트럼으로 오리지널 팀의 진정한 후계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에 기반을 두고있는 이 합창단은 함부르크 뮤직홀과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프랑크푸르트의 홀 등에서 라이브로 공연하며 그 외에도 매년 세계 각국의 250개의 대성당과 콘서트홀에서 공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2번 내한 공연한 바 있다.
 
* 돈 코사크 합창단이 부르는 러시아 민요 "저녁 종"
 
* 러시아 정교 성당
 
 
 
제정 러시아의 국교는 러시아 정교였다. 러시아 정교는 동방 정교의 분파로 러시아 국민들은 모두 러시아 정교를 믿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시골 어떤 곳에도 아름다운 러시아 정교회 사원을 볼 수 있다. 러시아 국민의 90%를 차지한 러시아 농민들은 언제나 교회와 함께 살았다.
 
그래서 러시아 정교는 러시아 정부의 국민을 위한 통치 수단으로도 이용되기도 했고 정교사원은 적군(赤軍)을 막는 요새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교회에서의 종소리는 농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도 했으며 정교회 신부들은 농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러시아의 굳건한 그리스도교 전통은 소비에트 통치 동안 정교회를 막아보려는 정권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이 민요에서 화자(話者)인 노인은 도시에서 저녁때 종소리를 들으면서 옛날 고향 시골 마을에서 아버지와 친구들과 함께 듣던 고향의 교회 종소리와 삶을 회상하고 있다.
 
저녁 종, 저녁 종!
얼마나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지!
어린 시절 시골 고향 내가 사랑하고, 아버지 집이 있던 곳.
 
난 저녁 종과 영원히 이별했었네.
거기서 마지막으로 종소리를 들었지!
이젠 살아있는 이 몇 없네
 
그땐 즐거웠고, 젊었었지
저녁 종, 저녁 종!
얼마나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지!
 
[ 코사크 족 이야기 ]
 
* 코사크 기병
 
 
 
코사크의 어원인 ‘카자흐’(Qazap)는 ‘독립적인’ 혹은 ‘자유로운’ 이라는 의미를 가진 터키 말에서 유래되었다. 슬라브족의 한 일파인 코사크인들의 조상은 원래 돈 강과 드네프르 강 유역에서 정착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뿔뿔이 흩어져 흑해와 카스피해 북쪽 평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게 된다.
 
여기에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도망쳐 나온 농노들도 법이 미치기 어려운 변경지대에서 모여 살며 자치적으로 군사조직을 이루어 코사크인들의 다른 조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15세기부터 이들 코사크 부족들은 독특한 머리 모양과 헐렁헐렁한 바지와 같이, 다른 슬라브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차이를 갖게 되었는데, 제각각 조그만 정착지를 중심으로 느슨한 권력구조를 가진 공동체를 이루었다.
 
코사크 부족들의 정착지는 ‘시츠’ (Sicz) 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 시츠는 마치 독립된 하나의 도시와 같이 자급자족적 경제 공동체였을 뿐만 아니라, 신병의 모집과 훈련 등 군사적 업무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시츠에서는 자유선거를 통해 ‘헤트만’이라고 부르는 족장을 선출했다.
 
본질적으로 시츠의 모든 구성원은 평등했기 때문에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있었고, 선출된 족장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고 여겨질 때는 탄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戰時에는 헤트만의 권한은 절대적이어서 자신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사람을 즉결처분할 권한도 행사했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코사크 인들은 농사와 유목을 병행하였는데, 걸음마를 떼자마자 말타기부터 배운 코사크 인들은 기마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코사크인 들이 타고난 전사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도 이들의 험난한 삶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러시아 정교를 받아들인 코사크 인들은 인근의 투르크족과 타타르족을 비롯한 주변의 이슬람 세력들과 치열한 생존투쟁을 벌여야 했으며, 16·17세기에는 로마 카톨릭 국가인 폴란드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율 브린너 주연의 영화 <대장 부리바>는 바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코사크 인들은 변경 지역의 땅을 경작하고 자치를 누리는 대신 이민족들의 침입에서 러시아를 지켜주는 국경 지대의 파수꾼 역할을 하였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말 안 듣고 골치 아픈 이 변경의 싸움꾼들을 억지로 중앙정부에 복속시키는 것보다 슬슬 구슬려 가며 이용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라는 판단이 섰을 것이다.
 
* 코사크 기병대의 행진, 영화 <대장 부리바>를 연상시킨다
 
 
 
코사크인들은 러시아의 묵인 하에서 점차 세력권을 확장해 나갔고, 시베리아 개척에도 앞장을 섰다. 특히 ‘예르마크’의 원정과 ‘하바로프’의 시베리아 탐험이후 코사크 족은 바이칼, 우수리강, 아무르강, 야쿠츠크 일대에 요새를 세웠으며, 이 요새들이 오늘날 시베리아에 위치한 ‘이르크츠크’와 ‘하바로프스크’, ‘야쿠츠크’ 등의 도시로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의 ‘짜르’ 체제가 점점 중앙집권적 형태를 갖추어 가면서, 코사크인들에 대한 정책도 변화하게 된다. 적극적인 동화정책을 추진하면서 코사크 족에 대한 개입을 늘려갔던 것이다. 코사크인들은 자신들의 자치권이 위협 받을 때마다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는데, 17·18 세기 ‘스텐카라친’, ‘콘드라틴 블라빈’, ‘예멜리안 푸가초프’ 등이 그 대표적인 지도자들이었다. 불행하게도 코사크인들의 봉기는 번번이 실패했고, 러시아 정부는 교묘한 방식으로 코사크인 들을 다루었다.
 
코사크 인들의 자치 의회 활동에 대해서 명목상으로는 인정을 했지만 사실 이것은 유명무실했다. 러시아 정부가 코사크 사회의 최고 권력자인 ‘헤트만’에 대해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코사크인 관리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코사크 사회의 전통을 무너뜨렸다. 토지를 소유하고 임대할 수 있는 권리, 즉 지주권을 가진 관리들이 출현함으로써 코사크 인들이 전통적으로 유지해온 평등사상과 토지공유제도는 무너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짜르’ 체제 아래서 코사크 인들은 러시아 황실의 근위대 노릇을 하게 된다. 러시아 정부는 코사크 인들을 강제징집하는 대신 다양한 코사크 집단에 대해서 마치 ‘자유 상비군’ 집단처럼 대해 주었다. 러시아 군내에 분산되어 편입된 다른 변경 민족들과는 달리 코사크 인들은 독자적인 부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일정한 자유를 부여받은 코사크 병사들은 개별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각 집단별로 동원된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이런 방법으로 러시아는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잘 훈련되어 있는 코사크 부대를 언제나 동원할 수 있었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최선두에서 막아낸 것도 코사크 기병대였다. 이들의 용맹성과 잔학성은 과거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한 훈족과 몽골족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코사크 군대는 모스크바에서 후퇴하는 나폴레옹 군을 끝까지 쫓아가며 괴롭혔다. 눈속에 깊숙이 빠져 탈진한 프랑스 군인들이 항복의사를 밝혔을 때도 코사크 인들은 인정사정없었다.
 
이후에 벌어진 크림 전쟁과 제1차 대전까지 코사크 부대는 러시아군의 최정예 부대로 그 명성을 떨쳤다. 제정 러시아 말기, 코사크 부대는 주로 각지에서 빈번하게 일어난 폭동을 진압하는데 동원되었고 이 때문에 러시아 민중들에게는 ‘짜르’ 압제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세르게이 에이젠쉬타인’이 감독한 전설적인 영화 <전함 포템킨>에 나오는 유명한 오데사 계단 학살 장면에서 잔인한 학살자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도 코사크 부대였던 것이다.
 
러시아 혁명과 뒤이어 벌어진 내전 과정에서 코사크 사회도 격심한 분열에 휩싸였고, 구체제를 수호하려는 ‘백군’과 혁명파인 ‘적군’으로 나뉘어 피를 흘려야 했다. 그리고 볼셰비키의 승리는 코사크 집단의 영원한 해체를 가져온다.
 
 2차대전 당시 코사크 기병대가 부활해서 소련과 독일 양진영에서 활약하기도 했지만 과거처럼 군사 자치권을 가진 전통적인 코사크 기병대와는 전혀 다른 부대였다. 오늘날 2차대전 전승 기념 퍼레이드에는 반드시 등장하여 행진하는 코사크 부대, 하지만 군사 자치권을 가진 전통적인 코사크 군대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코사크족 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