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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 허윤석 시, 조두남 작곡 - 곽신형

淸山에 2010. 11. 24. 10:46
 

 

 산(山)    허윤석 시,   조두남 작곡
 

 

 


 
 
소리없는 가랑비에 눈물씻는 사슴인가  
영을넘는 구름보다 목이쉬어 우노라네 
아 아 아 산에산에 사노라
사향나무 가지마다
눈물먹은 꽃이피면
푸른언덕 그늘아래
    숨은새도 울고가네    
 
싸리덤불 새순밭에 숨어우는 사슴인가 
속잎피는 봄이좋아 산을보고 우노라네   
아 아 아 산에산에 사노라
동백나무 가지마다
송이송이 꽃이피면
 나물캐는 산골처녀
물소리에 귀를씻네
 
 

산 곽신형

 ***
 
곡 자체도 상당히 서정적인 가락이지만
특히 이 노래 가사 내용에 깊이 서려있는 민족의 애환과 역사적인 고난의 숨소리를 강하게
느끼면서 그 고통과 질곡의 시대 속에 시와 노래를 통해 일제에 저항하며 겨레의 가슴속에
소망과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고 민족의 아픔을 위로하려는
작가의 애틋한 마음과 의지를 영혼 속 깊이 호흡하면서
눈물겨운 민족의 슬픈 정서를 깊이 공감했다.

더구나 조국 광복 65주년을 맞은 이 뜻 깊은 역사적인 주간에,
거기다가 이 민족 5천년 반만년 역사가운데 가장 가슴 저리도록 아프고, 슬프고, 치욕스런
경술국치, 내각 총리 이완용에 의해 조선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통해 일본 황제와
한일 합병 조약을 체결하여 이 민족 고조선 때로 부터 시작하여 개국이래로 최고,
최대의 통절한 비극적 국가 운명이 발생한 해가 꼭 100년이 되는 해요,
또 그날이 8월22일 조인식과 29일 공포된 것이 바로 이 주간이다.

그 시대 한 복판에서 몸부림 치고 절규하던,
뼈저린 민족혼이 농축되어있는 시에다가 곡을 붙인 노래 가사를 음미하며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웠던 이 민족의 비애와 역사를  회상해 보는 기가 막힌 기회가 아닌가?  
청년 시절 읽었던 “허윤석”의 ‘문화사 대계’라는 단편 소설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1934년에 조선 문단에 등단한 허윤석은 그 후에
“마적” “파초” “밀밭 없는 동리” “길 주막” 등 많은 작품을
남긴 그 시대의 비중 있는 작가로서
대중화 되지 않은 것에 비해 문학계에서는 상당히 알려진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주로 소설인데 여기 드믈게 내 놓은 시작품 “산”은 1940년에 작시 작곡된
노래로서 단순한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향토색 짙은 향기 나는 서정시가 아니고
그 시대 배경과 그의 작품 성격으로 보아 이 시는 민족 수난의 현장에서 국가적 비운을 조국 해방의 불타는 염원으로 승화시켜 놓은 민족 정서의 총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허윤석의 작품 성격은 상당히 간결한 문체를 사용하면서도
매우 상징적인 기법으로써 부조리한 사회상과 인간성 상실을 주제로 다루면서
감각적 표현에 탁월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상징과 비유를 즐겨 사용하는 스타일은 그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민족 감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없는 식민지 통치하에서 한계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 “산”이라는 테마는 그 당시 식민지하에 굴욕적인 통치를 받고 있는
우리 민족의 우울한 역사적 환경을 주제로 정한 것임을 쉽게 이해 할 수 있겠다.
이 산에 등장 하는 연약한 동물, 즉 사슴이나 산새의 동작을 통해 슬픔과 탄식,
그리고 조국 해방이 그리워 숨죽이며 고대하는
애절함이 절절히 깃들어 있음을 눈여겨 볼 수 있다.

눈물 씻는 사슴도, 목이 쉬어 울어대는 사슴도, 싸리 밭에 숨어 지내는 사슴도,
민족의 기개를 다 빼앗기고 한 시대 속에 응어리진
이 민족의 슬픈 정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어디에 대 놓고 항거하거나 통곡 할 수도 없어 소리 없이 내리는 가랑비처럼 눈물뿌리며
영을 넘는 저 공중의 뜬 구름처럼 손에 잡을 수  없는 조국의 꿈과 현실을 보고 탄식하며
<목이 쉬어 우노라네  아 ---------- 아 ---------- 아아------------- >
얼마나 피맺힌 절규 아닌가?

그리고 후반부에 들어와 두 종류의 나무가 상징적으로 나오고 있는데
곧 사향나무와 동백나무의 등장은 바로 압박 민족과 피압박 민족에 대한
너무도 대조적인 상황 설정임을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그런데 사향나무에 꽃이 피고 동백나무에 물이 오르는 그 과정과 동기와 결과가
우리 민족 정서의 현장을 너무나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향나무는 백과사전에도 없고 인터넷에도 안 올라와 식물도감을 참조하니 관목도 아닌,
마디가 굵은 수풀의 일종으로 이 나무는 염분을 흡수했다가
그 주변을 아예 박토로 만들어 놓아
다른 식물이 접근할 수 없게 만드는 고약한 나무로 알려져 있어
다른 민족을 수탈하고 침략을 일삼아 온 왜정을 비유 했고,
동백나무는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겨울에 꽃피는 인동초라는 의미에서
온갖 수난을 겪으며 인내해온 우리 겨레를 상징하는 나무로 비유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사향나무 꽃은 많은 눈물을 먹고 피었단다.
그리고 이 꽃이 필 때 우리 민초들의 반응이 뭔가?
 <숨은 새도 울고 가네...>
꽃이 피는 때는 영광과 기쁨과 자랑의 상징인데 일제 만행이 꽃필 때마다
그늘 속에 숨어 지내는 이 민족은 울며 탄식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도망다니기에 바빴다.
 잠언 29:2에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은 탄식 한다>는 말씀 그대로 이다.   
그러나 이런 역사의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시인은 민족의 여명을 꿈꾸며
희망을 노래하는 위로의 메신저가 되고 있음을 눈여겨 볼 수 있다.

여기 동백나무에 꽃이 피면, 시제상 그것은 분명 미래적 사건이지만 그는 미래의 광복의
꿈을 안고 그것을 현재화 해서 희망을 선포하는 예언자적 기질을 발휘하는
용기를 주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나무 가지에 물오르는 소리와 나물 캐는 산골 처녀는
새봄을 알리는 봄의 대표적 전령이 아닌가? 
여기 동백나무에 꽃피고 가지에 물오르는 소리는
암울한 역사적 환경에서지만 시대를 거스를 수 없는 자유에의 함성과 평화의 물결을 옹호하는
국제 사조의 큰 틀 안에서 민족의 소망을 바라보는 역사적인 작가의 혜안일지도 모른다.

그 엄청난 민족 해방의 선물이 우리 앞에 다가오는 역사의 봄소식을
애타게 갈망하는 이 민족의 정서를 ‘귀를 씻는 처녀’라는 표현으로
얼마나 운율이 넘치는 묘사로 장식했는가!
 이것이 시문학이 갖고 있는 은유의 장점이고 알레고리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나무에 물오르듯
자유의 함성이 터지는 이 희망찬 소식을 방해하지 못 하도록 귀를 씻고 기다리는
 이 민족의 애타게 갈망하는 심정을 너무도 멋지게 그려내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러한 시 한 편의 작품을 통해서나마 억울한 민족 감정을 토로하고
한 많은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움츠리고 억눌려 신음하는 이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노래를 통해서 악의 세력을 향해 저항하려는 민족의식을 일깨워준 선배들께
머리 숙여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모르고 아무런 역사의식이 없이도
얼마든지 노래 할 수 있고 불편 없이 즐길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방관자로서, 진실을 가지고 역사에 참여하는 뜻있는 지성은 될 수 없다.
무슨 역사의 위대한 창조자가 아니라도 인생을 깊이 이해하며 진정 역사의 정의 편에 서서
생명을 사랑하는 역사의 기여자가 되고 무게 있는 인생이 되려면
역사의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역사와 노래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노래는 무엇인가? 
 
노래는 자연과 인생에 대한 영혼의 고백이며 삶을 가락에 맞추어 읊는 일이다. 
노래 가사는 말(言語)이다. 그냥 의미 없이 지껄이는 소리가 아니다. 
이 말속엔 인간의 감정과 생각,
 
그리고 사상과 역사와 철학이 들어 있다. 뜻이 들어있는 소리란 말이다.
자기의 감정과 생각이 노래 장단에 맞추어 소리가 표출 될 때 사람은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그런데 노래라고 모두 인간의 마음을 고양시키고 감정을 순화시키며
삶의 리듬을 높여 주는 것이 아니다. 
소위 나쁜 노래도 있다. 
 
생각과 사상이 순수하지 못한 형편없는 노래도 세상엔 더욱 많다.
일본의 군국주의를 찬양하거나 독재자 김정일을 찬양하기 위해서 부르는 노래는 어떤가? 
 
그것들은 인간의 진실이 아니고 왜곡되고 날조된 언어들이기에
역사의 상식과 진실을 아는 이 들에겐 상당히 불쾌한 노래들이다. 
왜? 그것은 가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찬양하기 위해서 인생을 창조 하셨다고 했다.(사 43:21)
물론 경건한 찬송과 가곡을 동일시 할 수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창조자를 높여드리는 정서에 반하는 노래는 인간의 타락한 감성을 자극하여 더욱 어두운 정서를 유발하여 결국 영성까지 파괴하는 영향력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세상엔 우상을 찬양하거나 심지어 사탄을 찬양하는 노래까지 등장하지 않았는가?
소름끼치는 일이다.  나는 이런 구뤂에 가입하였다가 성격 파탄, 가정 파탄은 물론
그 인생 전체를 파멸로 이끈 젊은이들을 미국에서 많이 만나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류의 노래는 아니라도 인생을 허무주의로 이끌어 가는 부정적인
노래들도 세상엔 너무 많다.

고달픈 삶의 현실을 극복하며 생활 속에 애환을 덜어 주거나 삶의 시름을 잊게하여
내일의 희망을 품게 하는 노래방의 긍정적인 기능을 부인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가요 가사들은 전에도 잠간 언급했지만 너무도 비관적이고 염세적이며 운명적이고 자조적인 것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자기의 현실을 딛고 일어서려는 결연한 의지나 건설적이며 창조적인 의욕이 없고
다만 운명에 맡겨버리는 슬픈 자학이 많다.
 
上記한 가곡 “山”의 경우도 슬픈 정서가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백나무 가지가지 마다 송이송이 꽃이 피는 비전을 제시하며 나무에 물오르는 소식에 귀를 씻어가며 소망하는 민족의 끈질긴 희망과 집념이
번뜩이지 않는가? 
 
소위 가곡과 가요의 장르가 여기에서 차이가 나는 것 같다. 
 
가요는 흥과 정이 있지만 인생의 슬픔을 해석하고 창조적으로
변환 시키는 생명의 에너지가 희박하다. 
 
그러나 가곡엔 자연과 인생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허무주의로 기우러지지 않도록
자연을 예찬하는 진실과 아름다움이 있어 예술적경지로 승화시키려는 창조성이 있다.
 
그러면 역사의식의 필요성은 무엇인가?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선과 악의 투쟁하는 무대이다.
그러나 이 선과 악의 대립과 긴장관계에서
항상 선은 악에 의해 희생당하고 그 악은 자체의 모순으로 붕괴되고,
또 새로운 선과 악이 투쟁하다가 선이 악에 희생당하고 악이 붕괴되는 반복이다.
인류의 표면적인 역사는 정의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낙관적인 해피엔드의 드라마가 아니다. 
이러한 역사관에 비추어 과연 우리가 오늘 Christian 이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오늘의 구체적인 역사 2010년 8월 23일이란
여기 이 시간에서 구체적인 역사의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멀리 임진왜란 까지는 안 가더라도 최근세에 우리 앞에 일어난 일, 한일 합병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수많은 이 민족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기막힌 사건들, 징병 사건, 위안부
사건, 사할린 사건, 나라 땅 송두리 째, 언어, 문화 유산, 이름, 성씨, 민족혼 까지 다 빼앗겨
버려  100년 동안이나 이어져 내려온 이 엄청난  민족의 절규와 신음소리, 6.25날에 들렸던 그 총소리, 4.19날 외쳐대던 자유에의 그 함성, 광주 시민들의 절규, 8.15에 목이
터져라 부르던 그 해방의 감격소리만이라도 지금 우리가 들을 수 있다면
오늘 이 나라의 정치와 사회는 이 지경, 이 꼴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역사의 소리를 외면하거나 전혀 듣지 못하고 다만 노래만을 즐겨 부른다는 것은
천박한 감상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자기 감정의 도취나 유희만을 위하여 인생을 향락하려는
속물근성과 무엇이 크게 다를 것인가?  
 
그러나 그저 단순한 취미생활을 가지고 즐겁게 인생을 살려는
동기가 불순하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며 건전한 가치관을 가지고 건강한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는
참 훌륭한 생활인의 자세이다.
 
그런데 한 가지 기억할 것은 노래를 좋아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고상한 사람치고
악한 사람이 없다고 하는 오해는 말아주기 바란다.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역사와 인간의 본성을 너무도 모르는
순진한 무지와 편견일 뿐이다.  
 
지난 20세기 한 세기동안 전 인류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지구를 폐허로 만들어 놓았던
악한 지도자들을 보면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히틀러의 나치주의자들을 보라!  그 친위대원들의 수기를 읽어보면
그들은 모두 칸트의 철학을 읽고 릴케의 시를 탐독하며 바하의 음악에 심취했던 사람들이다. 
모두가 최고의 인테리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류역사 속에서
그토록 잔인한 야수가 되어 갖가지 만행을 서슴없이 저질렀던 것이다.
인간의 병든 이성과 양심을 개선하거나 치료하는데
단순한 음악은 아무런 힘도 기능도 발휘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음악을 사랑하고 노래를 좋아하되
역사의 소리를 들을 줄 알고 미래를 대처해 나가기 위해 실력과 지혜를 키워야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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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산”을 새롭게 배우면서 가사에 얽힌
그 시대와 민족의 우울한 정서를 읽으며 그러한 비참한 역사의
굴레 속에서도 서정적인 가락으로 희망을 심어주며 아픈 상처로 고통 받는
민족의 슬픈 정서를 달래주고 위로해 주며 불의한 역사 앞에 항거하는
작시 작곡가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감사하는 마음가짐으로
이 노래를 부르는 것도 하나의 작은 역사의식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믿고 이 글을
써보는 것이다. 
 
**퍼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