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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와 베토벤 교향곡 3번]
아래는 기사 원문 입니다.
소믈리에가 와인을 들고 온다. 병 속에 든 액체는 볏짚색 기운의 옅은 연두빛을 띄고 있고, 검정색 직사각형 에티켓과 그 안에 흰색 글자로 적힌 ‘EROICA’가 동공을 자극한다.
‘에로이카’라. 느낌이 강렬하다. 에티켓도 그렇고, 병의 라인도 그렇고, 뭐랄까. 등이 깊게 파인 검정색 드레스를 입은 매혹적인 여성의 자태 같다고 할까.
와인을 잔에 따르며 소믈리에가 입을 연다. “손님이 지금 드시는 와인은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리슬링’입니다. 원래 이름은 ‘에로이카’지만 ‘에로티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하죠.”
맞다! 섹시함이다. 이 와인을 관통하는 이미지는 바로 뒷태를 드러낸 여성이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기 직전 심장 박동수를 증가시키는 그 섹시함이다. 그런데 원래 리슬링은 독일에서 유명한거 아니던가?
“미국 워싱턴주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 ‘샤토 생 미셸’이 독일 모젤 지방에서 최고 명성의 리슬링을 만드는 ‘닥터 루슨’과 합작해 만든 와인입죠. 리슬링하면 당연히 독일을 떠올리셨겠지만 샤토 생 미셸은 리슬링 와인 생산에 있어 단일 회사로는 세계 최대랍니다. 콜럼비아 밸리와 야키마 밸리에 포도원을 두고 레드 와인 팀과 별도로 화이트 와인 제조팀을 두고 만드는 회사죠. 이런 회사가 200년 넘게 가족 경영을 하고 있는 닥터 루슨과 만들어 탄생시킨 게 바로 에로이카랍니다.”
달콤한 과일 향에 긴 여운, 당도와 산도가 적절히 조화된 풍미가 혀를 간질인다. 맛있다. 행복하다.
“에로이카하면 맨 먼저 떠오르시는 게 있으시죠. 맞아요. 베토벤 교향곡 3번입니다. 이 와인은 그 이름을 그대로 붙였는데요. 구대륙(독일)과 신대륙(미국)의 합주를 뜻하려는 의도였을 겁니다. 이 덕분인지 1999년부터 2003년 빈티지까지 5년 연속 와인스펙테이터 지 ‘톱 100’에 오르며 품질을 인정받았어요.”
“그렇군요. 에로이카 하니까 떠오르는 게 저도 있네요. 원래 이 곡은 베토벤이 나폴레옹에게 헌정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얘기 아시죠. 그런데 원래 제목은 ‘보나파르트’였다고 해요. 그러다 나폴레옹이 폭군이 돼 버리자 분노해 이름을 바꿨다는군요.”
이길상 기자 juna109@donga.com
리슬링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닥터 루슨은 상당한 만족감을 줍니다. 특히 가격 대비해서 말이죠.
3만원 짜리 와인을 마셔도 달콤하고 근사한 상상을 할 수 있게 하니까요.
에로이카는 닥터 루슨과 샤토 생 미셸이 합작해서 만든 5만원대 와인인데요. 단 맛은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지만 전체적인 균형감이 상당히 좋습니다. 어려운 말 다 빼고 얘기하면 맛있습니다. 리슬링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실망하지 않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