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문-1 [기행문] 山情無限 (鄭飛石) ==출처:인터넷 월간조선 2006.4.12== 편집자 注: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이 글의 원문은 글벗사에서 나온 ‘한국의 영원한 수필 명작’ 1994년 판을 사용했다. 김진태씨 추천. 鄭飛石 1911~1991. 소설가. 평북 의주 출생. 일본대학 문과 중퇴. 1936년 ‘卒哭祭’로 데뷔. 신문기자를 거쳐 1954년 ‘자유부인’을 발표한 이래 전업 작가로 변신. 산길 걷기에 알맞도록 간편히만 차리고 떠난다는 옷치장이, 정작 푸른 하늘 아래에 떨치고 나서니 멋은 제대로 들었다. 스타킹과 낙카아팬트와 잠바로 몸을 거뿐히 단속한 후, 등산모 제쳐 쓰고 바랑을 걸머지고 고개를 드니, 장차 우리의 발 밑에 밟혀야 할 만이천 봉이 천 리로 트인 창공에 뚜렷이 솟아 보이는 듯하다. 그립던 금강으로, 그리운 금강산으로! 떨치고 나선 산장에서는 어느새 산의 향기가 서리서리 풍긴다. 산뜻한 마음으로 활개쳐가며 산으로 떠나는 지완과 나는 이미 진고개에 방황하던 창백한 인텔리가 아니라 역발산 기개세의 기개를 가진 갈 데 없는 야인 文書房(문서방)이요, 鄭生員(정생원)이었다. 경원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차안에서 무슨 홀게 빠진 체모란 말이냐? 우리 조상들의 본을 떠서 우리도 할 소리 못할 소리 남 꺼릴 것 없이 성량껏 떠들었으면 그만이 아닌가? 스스로 야인의 긍지에 도취되어서, 뒤로 흘러가는 창 밖의 경개를 우리는 호화로운 심정으로 영접하였다. 고리타분한 생활을 巷間(항간)에 남겨 두고, 잠시나마 악착스러운 생활을 벗어나 순수한 자연의 품 안에 들어본다는 것은 항상 오만한 인간 생활의 순화를 위하여 얼마나 긴요한 일일까? 허심탄회, 인화지와 같은 마음으로 앞으로 전개될 자연들을 우리는 해면처럼 흡수했으면 그만이었다. 철원서 금강 전철로 차를 바꿔 탄 것이 저무는 일곱 시쯤. 먼 산골에는 황혼이 어리고 대지는 각일각 회색으로 용해되어 가는데, 개성을 抽象(추상)당한 산령들이 묵직한 윤곽만으로 서녘 하늘에 웅크렸다. 고요하고 태고 같은 이 풍경 속에서 순시도 멎음 없이 변화를 조종하는 기막힌 조화는 대체 누가 부리는 요술이던가? 창명히 저물어가는 경개에 심취하여, 창가에 기대인 채 마음의 평화를 즐기다가, 우리는 어느덧 저모르게 가슴 깊이 지녔던 비밀들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보배로 여기던 비밀을 아낌없이 털어놓도록 그만큼 우리를 에워싼 분위기는 순수했던 것이다. 유리창 밖으로 비치는 지완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의 청춘사에서도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웠을 사랑담을 허심히 들어넘기며, 나는 몇 번이고 담배를 바꿔 피웠다. 침착한 여인네가 장롱에 옷가지 챙겨 넣듯 차근차근 조리 있게 얽어 나가는 지완의 능숙한 화술은 맑은 그의 음성과 어울려서 귓가에 도란도란 향기로웠다. 사랑이 그처럼 담담할 수 있을까? 세상에 사랑처럼 쓰라린 것, 매운 것은 없다는데 지완의 것은 아침 이슬같이 淡潔(담결)했다니, 그도 그의 성격의 소치일까? 창 밖에 金風(금풍)이 소슬해서, 그 사람이 유난히 고매하게 느껴졌다. 내금강 驛舍(역사)에 도착, 어느 외국인의 山莊(산장)을 그대로 떠다 놓은 듯이 멋진 양관, 외금강역과 아울러 이 한국식 내금강역은 산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무한 정다운 호대조의 두 건물이다. 內(내)와 外(외)를 여실히 상징한 것이 더 좋았다. 십삼야월의 달빛 차겁게 넘실거리는 역 광장에 나서니, 심산의 밤이라 과시 바람은 세찬데, 별안간 계간을 흐르는 물소리가 정신을 빼앗을 듯 소란하여 추위는 한층 뼈에 스민다. 장안사로 향하여 몇 걸음 걸어가며 고개를 드니 산과 산들이 아니었던가고 금세 어루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힘껏 호흡을 들여 마시니, 어느덧 肝臟(간장)도 청수에 씻기운 듯 맑아온다. 淸溪(청계)를 끼고 물소리를 즐기며 걸어가니 십 분쯤, 문득 발부리에 나타나는 단청된 다리는 이름부터 격에 어울려 함부로 건너가기조차 외람된 問仙橋(문선교)! 문선교! 어느 때 어떤 은사가 예까지 찾아와서 仙境(선경)이 어디냐고 목동에게 借問(차문)한 고사라도 있었던가? 있을 법한 일이면서 깜짝 소문에조차 듣지 못한 것은, 역시 선경과 속계가 스스로 유별한 탓이었을까? 차문주가 하처재(借問酒家何處在)/목동요지 행화촌(牧童遙指杏花村)은 속계의 노래로, 속계에서는 이만하면 풍류객이었다. 동양류의 선경이란 풍류객들이 사는 고장을 일컬음이니, 선경과 속계는 백지 한 겹밖에 아닐 듯이 믿어지니, 이미 세진을 떨치고 나선 몸이라 서슴지 않고 문선교를 건너기로 하였다. 이튿날 아침 고단한 마련해선 일찌거니 눈이 떠진 것은 몸에 지닌 기쁨이 하도 컸던 탓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간밤에 볼 수 없었던 靈峯(영봉)들을 대면하려고 새댁같이 수줍은 생각으로 밖에 나섰으나, 계곡은 여태 짙은 안개 속에서, 준봉은 상기 깊은 구름 속에서 용이하게 자태를 엿보일 성싶지 않았고, 다만 가까운 데의 전나무, 잣나무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것이 눈에 뜨일 뿐이었다. 모두 근심 없이 자란 나무들이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하늘을 향하여 문실문실 자란 나무들이었다. 꼬질꼬질 뒤틀어지고 외틀어지고 한 야산 나무밖에 보지 못한 눈에는 귀공자와 같이 氣稟(기품)이 있어 보이는 나무들이었다. 조금 후 단장 짚고 험난한 前程(전정)을 웃음경 삼아 探勝(탐승)의 길에 올랐을 때에는, 어느덧 구름과 안개가 개어져 遠近(원근) 산악이 열병식 하듯 점잖이들 버티고 서 있는데, 첫눈에 비치는 만산의 색소는 紅(홍)! 이른바 단풍이란 저런 것인가 보다 하였다. 萬壑千峯(만학천봉)이 한바탕 흐드러지게 웃는 듯, 산색은 붉을 대로 붉었다. 자세히 보니 홍만도 아니었다. 청이 있고 녹이 있고, 황이 있고, 등이 있고, 이를테면 산 전체가 무지개와 같이 복잡한 색소로 구성되었으면서 얼른 보기에 주홍만으로 보이는 것은 스펙터클의 조화던가! 복잡한 것은 빛깔만이 아니었다. 산의 용모는 더욱 多技(다기)하다. 혹은 깎은 듯이 峻(준초)하고, 혹은 그린 듯이 온후하고, 혹은 막잡아 빚은 듯이 험상궂고, 혹은 틀에 박은 듯이 단정하고…… 용모 풍취가 형형색색인 품이 이미 凡俗(범속)이 아니다. 산의 품평회를 연다면, 여기서 더 호화로울 수 있을까? 문자 그대로 무궁무진이다. 장안사 맞은편 산에 울울창창 우거진 것은 모두 잣나무뿐인데, 모두 이등변삼각형으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섰는 폼이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흡사히 괴어 놓은 茶禮塔(차례탑) 같다. 부처님은 禮佛床(예불상)만으로는 미흡해서 이렇게 자연의 진수성찬을 베풀어놓은 것일까? 얼른 듣기에 부처님이 무엇을 탐낸다는 것이 이미 불심이 아니고 무엇이랴. 장안사 앞으로 흐르는 계류를 끼고 돌며 몇 굽이의 협곡을 거슬러 올라가니, 산과 물이 어울리는 지점에 조그마한 찻집이 있다. 다리를 쉴 겸, 스탬프북을 한 권 사서, 옆에 구비된 기념 인장을 찍으니 그림과 함께 지면에 나타나는 세 글자가 明鏡臺(명경대)! 俯仰(부앙)하여 천지에 慙愧(참괴)함이 없는 공명한 심경을 明鏡止水(명경지수)라고 이르나니, 명경대란 흐르는 물조차 머무르게 하는 곳이란 말인가! 아니면 지니고 온 악심을 여기서만은 淨(정)하게 하지 아니치 못하는 곳이 바로 명경대란 말인가! 아무러나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찻집을 나와 수십 보를 바위로 올라가니, 깊고 푸른 黃泉潭(황천담)을 발 밑에 굽어보며 半空(반공)에 巍然(외연)히 솟은 층암 절벽이 우뚝 마주선다. 명경대였다. 틀림없이 化粧鏡(화장경) 그대로였다. 옛날의 죄의 유무를 이 명경에 비추면, 그 밑에 흐르는 황천담에 죄의 影子(영자)가 반영되었다고 길잡이는 말한다. 명경! 세상에 거울처럼 두려운 물건이 다신들 있을 수 있을까. 인간 비극은 거울이 발명되면서 비롯했고, 인류 문화의 근원은 거울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나의 지나친 역설일까? 백 번 놀라도 猶不足(유부족)일 거울의 요술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일상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것은 또 얼마나 可驚(가경)할 일인가! 신라조 최후의 왕자인 마의태자는 시방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바위 위에 꿇어 엎드려, 명경대를 우러러보며 오랜 세월을 두고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했다고 한다. 운상기품에 무슨 죄가 있으랴만 등극하실 몸에 麻衣(마의)를 감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 이미 佛法(불법)이 말하는 전생의 緣(연)일는지 모른다. 두고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며 계곡을 돌아나가니, 앞으로 閻魔(염마)처럼 막아서는 웅자가 釋迦峰(석가봉)! 뒤로 맹호같이 덮누르는 신용이 天眞峰(천진봉)! 전후 좌우를 살펴봐야 협착한 골짜구니는 그저 그뿐인 듯. 진퇴유곡의 절박감을 느끼며 그대로 걸어 나가니, 간신히 트이는 또하나의 협곡! 몸이 감길 듯이 정겨운 황천강 물줄기를 끼고 돌면, 길은 막히는 듯 나타나고, 나타나는 듯 막히고, 이 산에 흩어진 전설과, 저 봉에 얽힌 由來談(유래담)을 길잡이에게 들어가며 쉬엄쉬엄 걸어 나가는 동안에, 몸은 어느덧 심해같이 유수한 수목 속을 거닐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천하에 수목이 이렇게도 지천으로 많던가! 박달나무, 엄나무, 피나무, 자작나무, 고로쇠나무… 나무의 종족은 하늘의 별보다도 많다고 한 어느 시의 구절을 연상하며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이라곤 그저 단풍뿐, 단풍의 산이요, 단풍의 바다이다. 산 전체가 燎原(요원) 같은 花園(화원)이요, 벽공에 외연히 솟은 봉봉은 그대로가 활짝 피어 오른 한 떨기의 꽃송이이다. 산은 때 아닌 때에 다시 한번 봄을 맞아 백화 난만한 것일까? 아니면, 불의의 신화에 이 봉 저 봉이 송두리째 붉게 타고 있는 것일까? 진주홍을 함빡 빨아들인 해면같이 우러러볼수록 찬란하다. 산은 언제 어디다 이렇게 많은 색소를 간직해 두었다 일시에 지천으로 내뿜는 것일까? 단풍이 이렇게까지 고운 줄은 몰랐다. 문 형은 몇 번이고 탄복하면서, 흡사히 동양화의 화폭 속을 거니는 감흥을 그대로 맛본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도 한 떨기 단풍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다리는 줄기요, 팔은 가지인 채 피부는 단풍으로 물들어 버린 것 같다. 옷을 훨훨 벗어 꼭 쥐어짜면, 물에 헹궈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다. 그림 같은 연화담, 수렴폭을 玩賞(완상)하며 몇 십 굽이의 석계와 목잔과 철색을 답파하고 나니 문득 눈 앞에 막아서는 무려 삼백 단의 가파른 사다리―한 층계 한 층계 한사코 기어오르는 마지막 발걸음에서 시야는 一望無際(일방무제)로 탁 트인다. 여기도 해발 오천 척의 望軍臺(망군대)!―아, 천하는 이렇게도 광활하고 웅장하고 숭엄하던가! 이름도 정다운 白馬峰(백마봉)은 바로 지호지간에 서 있고, 내일 오르기로 예정된 비로봉은 단걸음에 건너뛸 정도로 가깝다. 그밖에도 유상무상의 허다한 봉들이 전시에 할거하는 영웅들처럼 여기에서도 우뚝, 저기에서도 우뚝, 시선을 낮춰 아래로 굽어보니 발 밑은 千斷崖(천인단애) 無限際(무한제)로 뚝 떨어진 황천 계곡에 단풍이 선혈처럼 붉다. 우러러보는 단풍이 새색시 머리의 칠보단장 같다면, 굽어보는 단풍은 치렁치렁 늘어진 규수의 붉은 치마폭 같다고나 할까, 수줍어 생글 돌아서는 낯붉힌 아가씨가 어느 구석에서 금방 튀어나올 것도 같구나! 저물 무렵에 마하연의 旅舍(여사)를 찾았다. 산중에 사람이 귀해서였던가. 어서 오십사고 상냥한 안주인의 환대도 은근하거니와, 문고리 잡고 말없이 맞아 주는 여관집 아가씨의 인정은 무르익은 머루알같이 고왔다. 여장을 풀고 마하연사를 찾아갔다. 여기는 禪院(선원)이어서, 불경 공부하는 승려뿐이라고 한다. 크지도 않은 절이건만 늙은 승려만도 실로 삼십 명은 됨직하다. 이런 심산에 노승이 그렇게도 많을까! 무한청산 행욕진(無限靑山行欲盡) 백운심처 노승다(白雲深處老僧多) 옛글 그대로이다. 노독을 풀 겸 식후에 바둑이나 두려고 남포동 아래에 앉으니, 溫故之情(온고지정)이 불현듯 새로워졌다. “남포동은 정말 오래간만인데”하며 불을 바라보는 문 형의 말씨가 하도 따뜻해서, 나도 장난 삼아 심지를 돋우어 보았다 줄여 보았다 하며, 까맣게 잊었던 옛 기억을 되살렸다. 그리운 얼굴들이 흐르는 물의 낙화송이같이 떠돌았다. 밤 깊어 뜰에 나가니, 날씨는 흐려 달은 구름 속에 잠겼고 음풍이 몸에 신선하다. 어디서 솰솰 소란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기에 바람소린가 했으나, 가만히 들어보면 바람소리만도 아니요, 물소리인가 했더니 물소리만도 아니요, 나뭇잎 갈리는 소린가 했더니 나뭇잎 갈리는 소리만은 더구나 아니다. 아마 바람소리와 물소리와 나뭇잎 갈리는 소리가 함께 어울린 교향악인 듯싶거니와, 어쩌면 곤히 잠든 산의 호흡인지도 모를 일이다. 달빛에 젖으며 뜰을 어정어정 거닐다보니, 여관집 아가씨가 등잔 아래에 외로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무슨 책일까? 밤 깊는 줄조차 모르고 골똘히 읽는 품이 춘향이 태형 맞으며 백으로 아뢰는 대목일 것 같기도 하고, 누명 쓴 장화가 자결을 각오하고 원한을 하늘에 고축하는 대목일 것 같기도 하고, 시베리아로 정배 가는 카츄샤의 뒤를 네프 백작이 쫓아가는 대목일 것 같기도 하고… 궁금한 판에 제 멋대로 상상해 보는 동안에 산 속의 밤은 처량히 깊어갔다. 다음날 아침 다시 산을 찾아 나섰다. 자꾸 깊은 산 속으로만 들어갔기에, 어느 세월에 이 골을 다시 헤어나 볼까 두렵다. 이대로 친지와 처자를 버리고 중이 되는 수밖에 없나 보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이키니 몸은 어느 새 구름을 타고 두리둥실 솟았는지, 群小峰(군소봉)이 발 밑에 절하여 아뢰는 비로봉 중허리에 나는 서 있었다. 여기서부터 날씨는 급격히 변화되어 이 골짝 저 골짝에 안개가 자욱하고 음산한 구름장이 산허리에 감기더니, 銀梯金梯(은제금제)에 다다랐을 때 기어이 비가 내렸다. 젖빛 같은 煙霧(연무)가 짙어서 지척을 분별할 수 없다. 雨裝(우장) 없이 떠난 몸이기에 그냥 비를 맞으며 올라가노라니까, 돌연 일진광풍이 어디서 불어왔는가, 휙 소리를 내며 운무를 몰아가자 은하수같이 정다운 은제와 주홍 주단폭같이 늘어놓은 붉은 진달래 단풍이 몰려가는 연무 사이로 나타나 보인다. 은제와 단풍은 마치 이랑이랑으로 섞바꾸어가며 짜놓은 비단결같이 봉에서 골짜기로 퍼덕이며 흘러내리는 듯하다. 진달래는 꽃보다 단풍이 倍勝(배승)함을 이제야 깨달았다. 오를수록 雨勢(우세)는 맹렬했으나, 狂風(광풍)이 안개를 헤칠 때마다 농무 속에서 홀현홀몰하는 영봉을 영송하는 것도 가히 장관이었다. 산마루가 가까울수록 비는 暴注(폭주)로 내리붓는다. 만이천 봉이 단박에 창해로 변해 버리는 것일까. 우리는 갈 데 없이 물에 빠진 쥐 모양을 해 가지고 비로봉 절정에 있는 찻집으로 찾아드니, 유리창 너머로 내다보고 섰던 동자가 문을 열어 우리를 영접하였고, 벌겋게 타오른 장독 같은 난로를 에워싸고 둘러앉았던 선착객들이 자리를 사양해 준다. 인정이 다사롭기 온실 같은데, 밖에서는 몰아치는 빗발이 어느덧 우박으로 변해서 창을 때리고 문을 뒤흔들고 금시로 천지가 뒤집히는 듯하다. 龍虎(용호)가 싸우는 것일까? 산신령이 대노하신 것일까? 경천동지도 유만부동이지 이렇게 萬象(만상)을 뒤집을 법이 어디 있으랴고, 간담을 죄는 몇 분이 지나자 날씨는 삽시간에 잠든 양같이 온순해진다. 변환도 이만하면 극치에 달한 듯싶다. 비로봉 최고점이라는 암상에 올라 사방을 조망했으나, 보이는 것은 그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운해뿐, 운해는 태평양보다도 깊으리라 싶었다. 內ㆍ外ㆍ海(내ㆍ외ㆍ해) 삼 금강을 일망지하에 굽어 살필 수 있다는 한 지점에서 허무한 운해밖에 볼 수 없는 것이 가석하나, 돌이켜 생각컨대 해발 육천 척에 다시 신장 오 척을 가하고 오연히 佇立(저립)해서, 만학천봉을 발 밑에 꿇어 엎드리게 하였으면 그만이지, 더 바랄 것이 무엇이랴. 마음은 천군만마에 군림하는 개선 장군보다도 교만해진다.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樹海(수해)였다. 설 자리를 삼가 구중심처가 아니면 살지 않는 자작나무는 무슨 수중 공주이던가.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이 哀話(애화) 맺혀 있는 용마석. 마의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능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덤. 철책도 상석도 없고, 풍우에 시달려 비문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무덤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에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석양이 저무는 서녘 하늘에 화석된 태자의 애기 龍馬(용마)의 孤影(고영)이 슬프다. 무심히 떠오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는 듯, 소복한 白樺(백화)는 한결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 달이 중천에 서럽다. 태자의 몸으로 마의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에 들어온 것은, 천 년 社稷(사직)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 몸에 짊어지려는 고행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공주의 섬섬옥수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가 어떠했을까? 흥망이 재천이라, 천운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가 있으니, 태자가 망국지한을 고행으로 창맹에게 베푸신 두터운 자혜가 천 년 후에 따습다. 천 년 사직이 南柯一夢(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천 년도 須臾(수유)던가!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 움큼 부토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롭다. 입력날짜 : 2006-04-12 (23: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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