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박정희를 알지만 누구도 박정희를 모른다 ① [조인스]
박정희는 어떤 인물인가?
어떤 술집에서 언쟁이 붙은 손님들 이야기를 등 뒤로 들어보니 한쪽은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옹호자, 다른 한쪽은 비판자였다. 우리 사회에서 그만큼 훼예포폄(毁譽褒貶)이 엇갈리는 대통령은 없다. 이 같은 현상은 일반인의 좌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전문학자들의 논문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햇살이 강하면 그늘이 짙다고 했다. 그래서 논제를 민주냐 반민주냐 하는 정치적 관점에서 경제 문제로 옮긴다 해도 “한강의 기적을 일구었다”는 쪽과 “한국 경제를 비뚤어지게 했다”는 쪽으로 갈리고 만다. 그런데 이런 상반된 시각과는 별도로 역대 대통령 가운데 누구를 평가하느냐는 여론조사에서는 벌써 16년째 박정희가 단연 톱이다.
또 이승만(李承晩) 정권이나 장면(張勉) 정권 하면 ‘가난, 혼란, 어두움’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박정희 정권 하면 ‘발전, 안정, 밝음’의 긍정적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대답한 사람이 많았다는 조사도 있다.(<조선일보> 2004년 12월 31일) 정통성이나 정당성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민주주의를 위축시킨 마이너스 유산을 남긴 것이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계속 박정희를 최고의 대통령으로 간주하는 것일까?
플라톤은 공동의 삶의 기원에 ‘먹는 것’의 문제가 놓여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역시 경제를 발전시킨 박정희의 실적을 높이 평가해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신드롬에는 일부 맹목적인 향수 같은 것도 있고, 군사정권 시대에 절대선이라 믿었던 민주화의 신념이 깨진 데 대한 실망 같은 것이 역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대중에게는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집권 후 박정희는 “민주주의라는 빛 좋은 개살구는 기아와 절망에 시달리는 국민 대중에게 너무 무의미한 것”(박정희,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 1962)이라고 역설했다. 이는 배고픔을 벗어나는 것이 당대 민주주의라고 본 대중의 정서와 맞아떨어진 측면이 있었다. 사람들은 보릿고개를 넘는 데 그가 헌신적이었고 열심히 일했으며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했던 것이고, 지금도 그렇게 평가하고 있는 셈이다.
누구나 가난을 벗기 위해 노력한다. 그 성과로 기업가가 된 사람도 있고 전문직 종사자가 된 사람도 있으며 개중에는 정계로 나아가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 입신영달이나 치부를 넘어 집단이나 민족을 위해 노력한 인물은 극히 드물었다는 점에서 박정희는 역시 한 시대의 지도자였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
박정희와 억눌린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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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구미시 상모리에 있던 박정희 대통령 생가.
정치학자 해럴드 D 라스웰은 “억눌린 경력이 정치가를 만든다”고 지적했다. 수줍음을 잘 타고 말솜씨도 그리 뛰어나지 않았던 박정희를 혁명가 내지 정치가로 만든 것은 ‘억눌린 경력’이었다. 그의 삶을 가장 억눌렀던 짐은 ‘가난’이었을 것이다.
1917년 경북 선산의 빈농에서 아버지 박성빈(朴成彬)과 어머니 백남의(白南義) 사이에 5남2녀의 막내로 태어난 박정희는 태어나기 전부터 가난 때문에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의 작은누나 박재희(朴在熙)는 그 점을 이렇게 증언했다.
“그때는 또 집안이 원체 가난하여 식구가 하나 더 느는 것이 큰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기를 지우려고 백방으로 애를 쓰셨습니다. 시골 사람들이 흔히 쓰는 방식대로 간장을 한 사발이나 마시고 앓아 누우시고, 밀기울을 끓여서 마셨다가 까무러치기도 했답니다. 섬돌에서 뛰어내려 보기도 하고, 장작더미 위에서 곤두박질쳐 보기도 했더랍니다.”(정재경, <위인 박정희>, 1992)
이렇게 시달리다 태어난 탓인지 박정희는 기골이 장대한 아버지나 형들과 달리 체구가 왜소하고 까만 얼굴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이 든 어머니의 젖이 말라 밥물에 곶감을 넣어 끓인 멀건 죽을 먹으며 자랐다. 그는 턱없이 가난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 일이 있다.
“학교에서는 내일이 추석명절이라고 오전 수업만 하고 학생들을 집으로 보내주었다. 마을에 들어서니 떡을 치고 전 부치는 구수한 냄새가 온 마을에 서려 있었다. 그러나 정작 우리집에 들어서자 전혀 음식을 장만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던 그날의 냉랭하던 정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박정희, 수기 <나의 소년시절>, 1970년 4월 26일)
우등 자리를 놓치지 않던 그는 어떻게든 가난만은 벗어나고 싶었다. 소년의 이 같은 결심은 대개 판검사든 사업가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부(富)에의 개인적인 출구를 찾는 것으로 귀결되기 쉽다. 그러나 박정희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는 엉뚱하게도 군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소년 시절에는 군인을 무척 동경했다. 그 시절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지방에 와서 야외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고 박정희는 수기에 적었다. 그 직업이 자신의 취향이나 적성에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동기가 있었다.
그는 보통학교 시절 <이순신>과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감명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롤모델이 된 것이 나폴레옹이었다. 병정놀이를 즐겨 했던 그는 나폴레옹이나 이순신 같은 군인이 되고 싶었지만 우선 주변의 권유에 따라 학비가 들지 않는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어머니는 아들이 입시에서 떨어지기를 빌었다고 한다.
수업료 면제라곤 해도 기숙사비는 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정희는 해마다 고향에 돌아가서 돈이 마련될 때까지 몇 주고 한 달이고 눌러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입학 때 중간 정도였던 그의 성적은 점점 떨어져 4학년 때는 꼴찌, 5학년 때는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가난의 그늘은 짙었다.
그의 조행(操行)평가서에는 “음울하고 빈곤한 듯함”이라는 식의 코멘트가 기재되었다. 나약한 정신력은 대개 여기에서 좌절하기 쉽다. 그러나 태내에서부터 사선을 넘나들며 태어난 그였다. 이런 유의 사람에게는 역경이 오히려 축복의 통로가 된다. 강인함을 키우는 훈련장이 되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장군이 되고 싶은 꿈을 안으로 더욱 다져나갔다.
그것을 방증하는 것이 쳐지는 학과성적과 달리 뛰어난 점수를 얻은 교련과목이었다. 대구사범 동기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시기 그의 손을 떠나지 않았던 책이 바로 <나폴레옹 전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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