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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과학 칼럼
좀 엉뚱한 행동을 하거나 실없는 말 하는 사람을 가리켜 ‘쓸개 빠진X’이라고 한다. 겁이 없거나 통이 크고 당찬 사람에게는 ‘담이 크다’는 표현을 쓴다.
옛 어른들은 노루가 다른 동물보다 잘 놀라고, 도망가서는 다시 멍한 듯 두리번거리는 것은
쓸개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쓸개는
담즙을 저장하는 담낭(膽囊)을 뜻하는데, 사실 노루는 담낭이 없다.
담낭이 저장하고 있는 담즙은 간에서 생성돼 십이지장으로 유입된다. 주성분인 담즙산염은
지방을 유화시키는 한편 이자에서 분비되는 소화효소인 리파아제의 작용을 촉진한다.
그 결과 생긴 지방산을 용해시켜 장에서의 흡수를 용이하게 하는 기능도 한다.
이렇게 담즙은 소화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어느 척추동물이든 담즙을 만들지 않을
수 없다.
동물에 따라 담낭이 왜 있고 없는지는 과학적으로 규명되지 않았지만 먹이를 섭취하는
간격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양잇과 동물이나 갯과 동물같이 먹이 섭취 간격이 있는 동물은 먹이 섭취 때 담즙이 일시적으로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담즙을 담아둘 수 있는 담낭이 발달된 반면, 먹이 섭취 간격 없이
수시로 먹는 동물은 담즙이 계속 소요되므로 담낭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쓸개가 없는 동물로는 사향노루를 제외한 모든 종의 사슴, 얼룩말을 포함한 말 종류, 낙타, 기린, 코끼리, 코뿔소, 고래, 비둘기 등 일부 조류, 쥐,
일부 어류까지 다양하다.
그렇다면 쓸개 없는 동물은 그렇지 않은 동물에 비해 ‘쓸개 빠진 X’이란 소리를 들어야 할 정도로 실없는 행동을 하거나 능력이 떨어질까?
노루가 놀란 듯 뛰고 나서 두리번거리는 것은 어리둥절해서가 아니라 일단 포식자로부터
안전거리를 확보한 뒤 피하기 좋은 곳을 찾으려는 것이다.
얼룩말의 경우 함께 모여 휴식을 취할 때나 먹이를 섭취할 때 포식자를 경계해야 하기 때문에
몸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두고 항시 사방을 살핀다.
위기에 처하면 급히 달아나야 하는 처지라 편히 누워 쉬는 경우도 드물다. 코끼리는 동물 중에서 가장 사려 깊고 신중하다. 큰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일 250kg 정도의 풀을 먹어야 한다.
하루의 3분의 2를 먹이 찾는 데 쓰기 때문에 잠잘 틈도 거의 없다.
낙타는 척박한 사막지대에 살기 때문에 먹이를 찾아 돌아다닐 수밖에 없다.
사막의 열기 속에서 250kg 이상의 짐을 지고 매일 10시간 넘게 걸으면서
50km 이상을 이동할 수 있는 낙타의 적응력과 강인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기린은 5m가 넘는 큰 키로 멀리 있는 포식자를 일찍 알아볼 수 있어서 다른
동물에게도 조기에 위험을 알려준다.
또 높이 있는 나뭇잎을 먹음으로써 다른 동물과 먹이경쟁도 피하는 신사적인 동물로 통한다.
고래는 포유류이면서도 뭍에 한번 오르지 못하고 막막한 대양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먹이를 섭취하기 위해 무리들과 서로 협력하는 지혜도 갖추고 있다.
쥐는 항상 움직임이 바쁘고, 비둘기와 같은 조류는 이른 아침부터 활동을 시작한다.
이렇듯 쓸개 빠진 동물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다른 동물에 비해 한가한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다. 늘 부지런히 움직인다. 또 지혜와 순발력이 뛰어나고, 인내심이 강하다.
외적의 공격에 대비해 경계태세를 항상 늦추지 않기 때문에 편안한 휴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모든 동물은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는 마음껏 먹고, 깊은 휴식을
취하는 것보다는 항상 움직이고 무엇을 찾으려 하는 역동적인 모습이 좋게 보인다.
사람에게 ‘담이 크다’고 말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리 좋은 표현이 아닐 수 있다.
고지방 음식에 미련할 정도로 식사량이 많다는 뜻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소화를 시키려면 많은 양의 담즙이 필요할 터이니 담, 즉 쓸개도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남식 서울대 교수·수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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