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트루먼의 한국전쟁 “하나님에게 맹세코 그 자들이 代價를 치르도록 해주겠어!” 1950년 6월엔 참전 결단, 12월엔 한국 포기 거부 결단으로 두 번 우리를 구했던 한 순박하고 우직한 지도자의 내면. 남침 보고를 받자마자 “그 개자식들을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고 10초 만에 결심한 그는, 맥아더가 망친 전쟁을 수습할 때도 “우리는 어려울 때 친구를 버려선 안 된다”면서 한국 포기를 거부했다. 1950년 6월24일 미주리 인디펜던스 1950년 6월24일 해리 트루먼 美 대통령은 週末(주말)을 고향에서 보내고 있었다. 토요일인 이날 오후 그는 비행기 편으로 워싱턴에서 고향인 미주리州 인디펜던스로 날아왔다. 밤 9시쯤 잠자리에 들려는 대통령을 찾는 전화가 걸려 왔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메릴랜드에 있는 집에서 건 전화였다. “각하, 매우 심각한 소식입니다. 북한군이 남한을 전면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무초 대사의 보고에 따르면 그 전에 있었던 총격전과는 다른 본격적인 공격입니다. 유엔 사무총장에게 안보리 소집을 요청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즉시 워싱턴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애치슨은 말렸다. “야간 비행이 위험하고 국민들을 놀라게 할 필요도 없으며, 이미 해야 할 조치는 취했습니다. 잠이 오면 푹 주무세요.” 일설에 의하면 이때 트루먼 대통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개자식들을 저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결정을 하는 데 1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곁에 있었던 딸 마거릿의 회고에 의하면 트루먼은 전화를 받고 돌아오면서 매우 격앙되고 걱정스런 표정이었다고 한다. 제3차 세계대전의 序曲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다음날 트루먼은 일찍 일어나 동생 비비안의 목장에 갔다. 그는 비비안의 다섯 손자·손녀들과 악수를 하고는 우유 짜는 기계와 새로 산 말을 살펴보았다. 그날 아침 신문과 방송에선 남침 소식이 보도되고 있었으나 트루먼은 한국사태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오 직전 무초 대사가 보낸 전보가 그에게 건네졌다. <공격의 양상으로 보아 한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임이 분명해졌다> 12시30분 애치슨 장관이 다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했다. 통화를 끝낸 트루먼 대통령은 보좌관들에게 “즉시 워싱턴으로 돌아갈 것이니 오후 2시에서 2시15분 사이에 캔사스 시티 공항으로 집합하라”는 지시를 했다. 트루먼이 결단하고 애치슨이 이끌다 전용기 안에서 그는 워싱턴으로 전화를 걸게 하여 저녁 식사를 겸한 고위 대책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약 세 시간의 비행시간 중 트루먼 대통령은 깊은 생각에 들어갔다. <나는 과거 민주국가들이 이런 공격을 저지하지 않아 침략자들이 그런 짓을 계속하도록 방치했던 일들을 생각했다.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자유세계로부터 아무런 저지를 받지 않고서 한국을 침략할 수 있도록 허용된다면 강한 공산국가를 이웃으로 두고 있는 작은 나라들은 협박과 공세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번 공격을 방치한다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다. 비슷한 사건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불렀듯이>(트루먼 회고록) 저녁에 전용기 인디펜던스號가 워싱턴의 국립공항에 착륙했다. 애치슨 국무장관,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리무진을 타고 영빈관인 블레어 하우스로 향하는 車中에서 트루먼은 말했다. “하나님에게 맹세코 그자들이 代價를 치르도록 해주겠어.” 블레어 하우스에는 14명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모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는 전쟁 이야기를 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식사가 끝나고 식탁이 정리된 뒤 회의가 시작되었다. 딘 애치슨 장관이 상황 보고를 했다. 대통령은 참석자 전원이 발언하도록 유도했다. 러스크 국무차관은 “5년간 한국에 주둔했던 미국으로서는 특별한 책임이 있다. 한반도가 공산화된다면 이는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匕首(비수)가 될 것이다”고 했다. 브래들리 合參의장은 “공산당에 대해서 선을 그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소련은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우리를 시험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회의는 트루먼이 주도했다. 그의 결심이 회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트루먼은 브래들리의 말을 받아서 “선을 단호하게 그어야 한다”고 했다. “북한군을 저지해야 한다. 소련은 도박을 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이 또 다른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싫어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한국을 공짜로 삼키려 한다.” 셔먼 해군참모총장과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은 “해·공군만으로 남침을 저지할 수 있다”면서 육군의 투입을 반대했다. 트루먼은 회고록에서 “아무도 미국이나 유엔이 물러서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이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선 무슨 수든지 써야 한다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이날 회의는 트루먼이 결단하고 애치슨이 이끄는 형국으로 진행되었다. 애치슨이 건의한 정책들을 트루먼이 승인했다. 도쿄의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최대한 빨리 한국 측에 무기와 보급품을 제공할 것, 美 공군력의 엄호 아래 駐韓(주한)미국인을 철수시킬 것, 제7함대는 필리핀에서 대만 해협으로 전개하여 중국의 공격에 대비할 것 등. “육군도 보내라” 트루먼은 포병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었다. 다음날(워싱턴 시간 6월25일, 서울 6월26일) 트루먼 대통령은 일반적인 내용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미국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맥아더 원수는 “한국군은 북한군을 저지할 수 없다. 완전한 붕괴가 임박했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이날 저녁 트루먼 대통령은 블레어 하우스에서 두 번째의 긴급 각료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韓國戰 개입 결정이 공식화되었다. 미국은 한국군을 돕기 위하여 우선 공군력을 사용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이날 회의도 애치슨 국무장관이 주도했다. 브래들리 合參의장은 머잖아 육군이 투입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한국에 대한 전쟁계획조차 없다는 점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허전한 목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나는 전쟁을 하기 싫다. 지난 5년간 애써온 것은 오늘 밤 내가 해야 하는 이런 결정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다음날은 북한군 탱크가 서울에 진입했다는 뉴스가 일제히 나갔다. 오전 11시30분 의회 지도자들, 국무장관, 국방장관, 합참의장 등 40명의 요인들이 백악관의 西館 각료회의실에 모였다. 이 회의에서 트루먼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에 의거하여 전쟁을 지도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의회가 별도로 전쟁 결의안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백악관 대변인 찰리 로스가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서를 代讀했다. 양하원 합동회의도 이날 315 對 4표로 징병기간을 1년 연장하는 결의를 했다. 유엔 안보리는 이날 밤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유엔군을 편성하여 공산군을 저지하기로 결의했다. 1950년 6월30일 새벽 3시 국방부는 한국전선을 시찰한 맥아더 원수의 電文을 받았다. 그는 “미국의 해·공군뿐 아니라 육군의 투입이 있어야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타이밍이 핵심이다. 지체 없는 명확한 결정을 바란다> 프랑크 페이스 육군장관이 백악관으로 전화를 건 시각은 새벽 4시47분. 트루먼은 벌써 일어나 면도를 마친 상태였다. 그는 침대 옆에 있는 수화기를 들었다. 페이스 장관은 “맥아더가 우선 2개 사단의 투입을 건의했다”고 말했다. 트루먼은 주저하지 않았다. 대통령이란 직책은 결정하는 것 나중에 그는 한국으로 지상군을 파병하는 결정이 가장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결정보다 더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저지하여 자유국가를 지켜 내어야 한다는 사명감과 아시아에서 큰 전쟁을 일으켜선 안 된다는 걱정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날 일기에서 트루먼은 <毛澤東은 무슨 짓을 할까. 러시아의 다음 행동은 무엇일까>라고 썼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나중에 이렇게 평했다. <대통령이란 직책은 결정하는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 기념물의 銘文대로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미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으로 파병된다. 3년간 戰場에서 미군은 5만 여 명이 죽고 10만 명 이상이 다치게 된다. 트루먼은 미군을 투입하여 한국을 지켜 내어야 할 아무런 조약상 의무가 없었다. 당시 美 군부는, 한국은 미국이 싸워서까지 보호할 만한 전략적 가치가 없는 곳이란 판단을 내려놓고 있었다. 애치슨 국무장관도 그해 1월 내셔널 프레스 클럽 연설에서 한국이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에서 제외된다고 확인했다. 그런 점에서 트루먼의 파병 결정은 극히 예외적인 조치였다. 학자들이 참전결정의 이유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분석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트루먼 대통령의 성격과 인간됨이었다. 그는 미주리의 가난한 農家(농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철도회사 檢數員(검수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직접 작은 상점도 꾸려 가다가 大공황 때 부도를 낸 적도 있는 서민이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20세기 미국의 유일한 대통령이기도 했다. 그는 陸士에 들어가고 싶어 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나쁜 視力을 속이고 자원입대하여 프랑스 전선에서 포병장교가 되어 용감하게 싸웠다. 그는 전형적인 미국의 시골사람이었다. 순박하고 솔직하고 용감하며, 힘센 사람이 으스대는 것을 참고 보지 못하는 反骨(반골)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에게 스탈린이 金日成을 앞세워 뺨을 때린 격이었다. 슬며시 돌아드는 게릴라전이 아닌 공개적인 전면 南侵은 최대강국 미국의 체면과 함께 트루먼의 성깔을 자극했다. 무초 대사 증언: 李承晩의 모습 6·25가 터졌을 때 駐韓미국 대사는 존 J 무초였다. 1950년 6월25일 오전 8시 그는 전화벨 소리에 일어났다. 부대사인 에베레트 프란시스 드럼라이트였다. “美 군사고문단이 새벽에 38선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해왔습니다. 대사를 깨우지 않은 것은 상황을 더 정확히 파악한 뒤에 보고하려고 한 것입니다.” 무초는 걸어서 5분 거리인 대사관으로 향했다. 대사관은 반도호텔에 있었다. 도중에 UPI의 빌 제임스 기자를 만났다. “대사님 아침부터 어디를 가십니까?” “38선에 무슨 일이 일어난 듯한데 챙겨 보시오.” 무초 대사는 오전 9시에 <북한군의 전면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보고를 워싱턴의 국무부로 보냈다. 도쿄의 극동군사령부에도 전달하도록 했다. 무초 대사는 서울에 주재하는 다른 나라 대사들에게도 戰況(전황)을 알려 주었다. 이날 무초 대사는 경무대로 자주 들어가 李承晩 대통령에게 최신정보들을 알려 주었다. 李대통령도 여러 통로로 보고를 받고 있었으나 무초의 보고가 더 정확했다. 그때 미군은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을 한국군의 여러 부대에 파견해 놓고 있었다. 오후에 경무대로 들어가니 李承晩 대통령 옆에 申性模(신성모) 국방장관이 있었다. 李대통령이 “방금 국무회의가 열렸다”고 말했다. “내가 공산군에게 붙들리면 국가적 재난이 된다는 거야. 내가 먼저 서울을 떠나기로 결정했어요.” 무초 대사는 말렸다. “한국군은 劣勢(열세)에서도 지금 잘 싸우고 있습니다. 밀리고 있으나 부대 단위로 항복한 곳은 없습니다. 서울에서 각하께서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부가 서울을 떠났다는 사실을 전선의 부대가 알게 되면 사기가 떨어져 무너질 것입니다. 서울을 떠나는 시기를 최대한 늦추어야 합니다.” 새벽에 서울을 떠난 李대통령 李承晩 대통령은 “내가 잡혀선 안 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한 시간쯤 설득하다가 지친 무초 대사는 일어서면서 말했다고 한다. “각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6월26일 오후 경무대에 올라간 무초 대사는 李承晩 대통령이 서울을 떠나기 위하여 두 대의 기동차를 준비했다는 말을 들었다. 李대통령은 27일 새벽에 서울을 떠나 수원으로 내려갔다. 무초 대사에겐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무초는 대단히 화가 났고 李대통령은 미안해하였다. 그 뒤 무초 대사는 李대통령의 오스트리아인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李대통령이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면 무초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한번 들르세요”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무초 대사가 李대통령을 찾아가 한 시간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그 사이 대통령은 생각하고 있던 話頭(화두)를 꺼냈다. 무초는 자연스럽게 對話에 참여하여 영향을 줄 수 있었다. 1971년 1월과 2월에 은퇴 중이던 무초 대사는 워싱턴에서 ‘역사 기록을 위한 肉聲증언’에 응하여 위의 秘話를 소개했던 것이다. 무초 대사는 “그날 한국군은 기습을 당하고도 참으로 잘 싸웠다”고 말했다. 북한군은 당일에 서울에 들어올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었다면 북한은 전쟁을 일으킨 李承晩 정부가 북한군의 반격으로 무너졌다고 선언하고 국민들이 통일을 환영하고 있다면서 상황을 기정사실화하여 미국과 유엔의 개입근거를 없애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무초 대사는 “한국군의 조직적인 저항과 戰線의 暴雨가 한국을 구했다”고 말했다. 릿지웨이 장군 등 미군 측의 회고에는 한국군의 무능과 무책임성에 대한 비판이 많다. 한국 사정을 잘 아는 무초는 동정적이다. 단기간에 건설된 한국군이 미국이 무기를 제대로 대주지 않은 데도 이 정도로 싸운 것은 대단하다는 것이다. 그의 李承晩 대통령에 대한 평도 재미있다. “李대통령은 아주 머리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45년간 한국의 독립이란 목표를 위해 달려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고, 이것이 그의 정치적 강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의지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독립투사로 단련된 성격을 국가원수가 되고 나서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성적일 때는 훌륭한 역사적 이해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아주 고차원의 시각에서 복잡한 세계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감정적으로 되면 그는 독립투사 시절의 본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한국인의 생존과 자신의 생존에 집착했습니다. 그는 의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매우 복잡한 인물이었으나 위기 때 일처리를 잘했으며 자신의 뜻을 고급 영어로 잘 표현했습니다. 그는 ‘제퍼슨식 민주주의자’임을 자랑했습니다. 이 분야에 대한 그의 레토릭은 미국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외국인 부인(注: 프란체스카 여사)이 그에게 큰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딘 소장의 방황 윌리엄 F 딘 소장은 광복 직후 한국의 군정장관으로 일했던 이다. 6·25 남침 소식을 그가 들은 것은 일본 규슈 고쿠라에 주둔하던 24사단 사령부에서였다. 그가 지휘하던 24사단과 다른 3개 사단은 美8군을 구성하여 일본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다. 참전을 결정한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에게 駐日미군을 투입할 것을 명령했다. 딘 소장은 선발대로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1개 대대 병력을 보냈다. 1950년 7월 초 이 부대는 오산에서 압도적인 북한군과 격전을 벌인 끝에 거의 전멸했다. 24사단의 임무는 북한군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었다. 지연작전이었다. 7월18일부터 3일간 24사단은 大田에서 잘 버티었다. 딘 소장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서 용맹을 날린 이였다. 당시 그는 자신의 사단이 戰死 968명, 부상 4300명, 실종 374명, 포로 42명의 피해를 본 것을 자랑하다시피 했다. 포로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는 포로가 되는 것을 가장 큰 수치로 여겼다. 大田 공방전에서 딘 소장은 전투대열에 앞장섰다. 사단장이 그렇게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衆寡不敵(중과부적) 상태에선 지휘관이 이렇게 솔선수범해야 병사들의 士氣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걸어서 후퇴했다. 그는 부상병을 위해서 물을 얻으러 갔다가 길을 잃고 대열에서 벗어났다. 그의 부관은 딘을 찾지 못하자 남쪽으로 걸어가서 이틀 뒤 미군 부대와 합류했다. 혼자가 된 딘 소장은 산속을 헤매다가 넘어지고 떨어지면서 기절도 하고 어깨가 골절되기도 했다. 딘 소장은 낙오병이 된 타보 중위를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恩人을 밀고한 한국인 7월26일 두 사람은 산속에서 한국인을 만났다. 자신들을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 주면 40달러를 주기로 약속했다. 이 한국인은 두 미군을 오막살이집으로 데려갔다. 그래놓고는 동생을 북한군에 보내 밀고했다. 딘과 타보는 북한군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북한군들은 집을 에워싸더니 “나오면 죽이지 않겠다”고 소리쳤다. 두 사람은 총을 쏘면서 집을 뛰쳐나가 논으로 기어 들어갔다. 타보 중위는 딘 소장을 따르지 못하고 헤어졌다. 타보 중위는 며칠 뒤 북한군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고 거기서 죽었다. 딘 소장은 논에 엎드려 있다가 어두워지자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벼 이삭을 씹어 먹었다. 친절한 한국인이 주는 밥을 먹기도 했다. 8월2일 딘 소장은 산에서 한국인을 만났는데 아주 호의적이었다. 그는 딘 소장을 외딴 집으로 데려갔다. 4일간 머물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틀째 되는 날 형제가 말다툼을 벌였다. 미군을 보호해 주면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동생이 이겨 딘 소장은 이 집을 나가야 했다. 그는 또 4일간 걸었다. 노인을 만났다. 이 노인은 미군이 있는 대구까지는 이틀만 걸으면 된다고 알려 주었다. 희망이 보이자 딘 소장은 대담해졌다. 그는 큰길로 나서서 걷기 시작했다. 여기서 한두규·최천봉이란 인물을 만났다. 딘 소장은 두 사람에게 미군 군표와 선물을 주기로 약속하고 대구까지 안내를 받기로 했다. 세 사람은 대구를 향해서 걸었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한국인이 뒤따라오던 딘 소장과 동료를 향해서 손짓을 했다. 길가에서 쉬고 있으란 시늉이었다. 그래놓고 그는 앞으로 달려가더니 스무 명의 북한군들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딘 소장은 자동소총을 꺼내려고 했다. 이때 옆에 있던 한국인이 붙들고 늘어졌다. 그때 딘 소장은 체중이 25kg이나 줄어든 상태였다. 딘 소장은 북한군 손에 넘겨졌다. 밀고한 한국인은 5달러에 해당하는 3000원씩을 북한군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딘 소장은 35일간 헤매다가 붙들린 것이다. 그가 붙들린 장소에서 미군부대까지는 약 89km였다. 인천상륙작전계획 裁可한 트루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최종적으로 허가한 이도 트루먼이었다. 합참의장 브래들리, 육군참모총장 콜린스는 이 모험적 작전에 반대했다. 나중에 美8군사령관, 유엔군사령관이 되는 릿지웨이도 반대였다. 그는 극동군사령부가 주관한 도쿄 회의에 참석할 때는 반대를 분명히 하기로 결심했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맥아더의 브리핑에 설득 당했다. 칠십 老將 맥아더의 知的 능력과 업무장악력에 압도당한 것이다. 릿지웨이는 워싱턴으로 돌아와선 인천상륙작전을 지지하는 핵심인물이 되었다. 1950년 8월26일 트루먼 대통령은 고위전략회의에서 인천상륙작전을 裁可(재가)했다. 이날 트루먼은 맥아더가 해외참전용사 모임 앞으로 보낸 글이 보도된 것을 읽어 보고 매우 화가 나 있었다. 맥아더는 ‘대만을 지키려 하면 아시아에서 고립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위선자들이라고 猛攻(맹공)했다. 사실상 트루먼 행정부를 겨냥한 연설이었다. 트루먼은 기사를 크게 읽더니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에게 이를 취소시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존슨 장관이 머뭇거리자 트루먼은 지시문을 구술하곤 즉시 실시하라고 했다. 트루먼은 전부터 맥아더를 ‘이기주의자’, 언론타기를 좋아하는 ‘프리 마돈나’라고 부르면서 경멸했다. 이런 私感에 흔들릴 트루먼이 아니었다. 그는 최고사령관인 대통령은 전쟁지휘관을 확실하게 뒷받침해야 한다고 믿었다. 美 해병1사단이 이끄는 10군단 소속 약 7만 명과 262척의 함정이 9월15일 인천에 상륙했다. 지칠 대로 지친 북한군은 무너졌다. 9월28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 한국군과 美8군이 반격을 개시했다. 북한군은 협공 당했다. 국군은 기습을 당해도 후퇴는 할지언정 부대 단위로 항복하지는 않았으나, 북한군은 조직적으로 와해되어 갔다. 세계戰史에서 유례가 드문 일대 전환이 이뤄졌다. 그때까지 유엔군은 부산교두보를 지켜낼 수 있는가의 생존투쟁에 급급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엔 ‘북한군의 섬멸’과 ‘통일’이란 새로운 목표가 눈앞에 열리게 되었다. 미국의 政界와 언론은 흥분했다. 맥아더는 영웅에서 神으로 승격했다. 이런 들뜬 분위기 속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당초의 전쟁목표(침략군의 격퇴와 남한의 수복)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엔군의 38선 돌파와 北進을 허용하여 북한군을 섬멸하고 한국을 통일한다는 것이 새로운 전쟁 목표가 되었다. 美 국무부 안에서 소수의 異見이 있었다. 칩 볼렌, 폴 니츠, 조지 케넌 같은 우수한 人材들의 신중론은 워싱턴을 달군 勝戰 무드에 묻혔다. 냉철한 마셜 신임 국방장관이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폭적인 재량권을 주었다. 마셜은 <전술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제약이 없다고 생각하라>는 電文을 보냈다. 트루먼 대통령은 정치인이었다. 설사 그가 맥아더의 北進에 제동을 걸고 싶어도 그렇게 했다가는 ‘목전에서 완전 승리를 포기한 비겁한 대통령’으로 낙인찍힐 터였다. 웨이크 섬의 트루먼과 맥아더 이런 가운데 중국의 周恩來(주은래) 는 중국주재 인도대사를 통해서 워싱턴에 경고를 보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은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경고는 ‘가벼운 공갈’로 간주되었다. 한국군 3사단은 10월1일 동부전선에서 38선을 돌파, 北進하기 시작했다. 미군을 主力으로 하는 유엔군은 10월9일 서부전선에서 38선을 넘었다. 북한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10월10일 트루먼은 맥아더 원수를 만나러 웨이크 섬으로 날아가겠다고 발표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회담 장소를 정하라”고 했다. 맥아더는 태평양 상의 작은 섬 웨이크를 지정했다. 이 섬에 가는 데는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보다 세 배나 더 긴 여행을 해야 했다. 트루먼은 “전쟁지휘관이 현장을 너무 오래 비워선 안 된다”면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최고사령관과 부하의 회담이 아니라 두 주권국가의 頂上이 각각의 부하들을 데리고 회담하는 식이었다. 태평양전쟁의 영웅이자 일본의 통치자인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의 기적적 성공으로 神格化되고 있었다. 그는 1937년 이후 미국을 줄곧 떠나 있었다. 맥아더는 이때 로마의 시저가 골 지방을 다스렸던 것처럼 자신은 赤化된 중공까지 해방시켜 아시아의 시저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충만해 있었다. 미주리 시골 출신인 트루먼이 아시아에 가장 가까이 갔던 곳은 샌프란시스코였다. 트루먼은 중공의 개입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11월의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을 지원해야 할 의무도 있었다. 이런 정치적 계산이 그를 웨이크로 가게 했다. 1950년 10월15일 오전 6시30분 대통령 전용기가 웨이크 섬 활주로에 착륙했다. 맥아더를 태운 비행기가 상공을 선회하면서 대통령 전용기가 먼저 내려 자신을 마중하도록 했다는 說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맥아더는 전날 밤에 도착해 있었고 비행장엔 30분 전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을 맞는 맥아더의 복장은 缺禮(결례)였다. 작업복에다가 낡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거수경례도 하지 않았다. 트루먼도 처음엔 약간 놀라는 듯했으나 다정하게 말했다. “장군을 만나기 위해 오래 기다렸습니다.” “각하, 다음번 만남은 그렇게 길지 않았으면 합니다.” 두 사람은 시보레 차의 뒷좌석에 동승했다. 앞자리에 탔던 대통령 경호원에 따르면 트루먼은 타자마자 “나는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을까 걱정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퀸세트 兵營에서 배석자와 기록자 없이 마주 앉았다. 트루먼은, ‘맥아더가 먼저 일전의 해외참전용사 모임 앞으로 보낸 성명서로 해서 심려를 끼쳤다고 사과했다’고 기록했다(회고록). 트루먼은 “그건 이미 끝난 일이다”고 말했다.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전쟁은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중공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다”고 안심시켰다. 맥아더를 만난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느끼듯이 트루먼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부드럽게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그는 나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쁜 듯했다. 그는 감동을 주는 흥미로운 인간형이었다>고 썼다. 맥아더도 회고록에서 <나는 트루먼이 성격이 급하고 편견이 있는 사람이라는 보고를 받았으나 만나 보니 예절 바르고 우스개를 잘하며 말도 직설적으로 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만나자마자 나는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썼다. 단독 면담 뒤 두 사람은 배석자를 두고 두 시간 더 회담했다. 맥아더는 한국의 戰況을 장밋빛으로 그렸다. “중공군은 개입 못 한다.” “평양은 일주일 안으로 떨어질 것이다. 추수감사절까지는 북한군의 조직적 저항은 끝날 것이다. 美8군은 크리스마스까지는 일본으로 복귀할 것이다. 내년엔 남북한 총선거를 치를 수 있을 것이다. 그 뒤 미군은 전부 철수할 것이다. 군사적 점령으로 얻을 것은 없다.” 트루먼은 “이 전쟁을 制限戰(제한전)으로 축소시켜야 한다. 중국과 소련의 개입 가능성은 없는가”라고 물었다. 맥아더는 이렇게 斷言(단언)했다. “그들이 전쟁이 터진 후 한두 달 사이에 개입했더라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개입을 겁낼 필요가 없어졌다. 중국은 30만 군대를 만주에 갖고 있는데 10만에서 12만5000명이 압록강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그들은 공군도 없다. 우리는 한국 내에 공군기지를 갖고 있으므로 중국이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하면 사상최대의 떼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에 1000대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다. 러시아 공군력과 중공 육군이 결합되면 큰 문제이지만 그런 작전은 매우 힘들기 때문에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약 6만 명의 북한군 포로를 어떻게 할 생각인가”라고 물었다. 맥아더는 “그들은 한국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다. 처음으로 잘 먹고 깨끗한 데 머물고 있으니까”라고 농담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회담을 종결지으면서 “성명서를 기초할 동안 점심 식사를 같이하자”고 말했다. 맥아더는 이 친절한 제안을 거절했다. “도쿄에 빨리 돌아가고싶다”는 게 이유였다. 이만저만한 무례가 아니었지만 트루먼은 내색하지 않았다. 성명서를 정리하는 동안 맥아더가 트루먼에게 물었다. “각하께선 차기 선거에 출마하십니까? 일본 천황이 궁금해 합니다.” 트루먼은 대답 대신 反問(반문)했다. “장군의 정치적 계획은 무엇이오?” “없습니다. 장군이 각하에 도전한다면 그의 이름은 아이젠하워일 것입니다.” “아이젠하워는 정치의 1조1항도 모르는 인물이요.” 트루먼은 비행기에 타기 전에 맥아더에게 훈장을 주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트루먼은 ‘미국의 소리’로 중계된 연설을 통해서 맥아더를 격찬했다. “그는 세계戰史의 새로운 페이지를 썼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와 같은 인물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全세계가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그는 위대한 군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입니다.” 맥아더는 도쿄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연설을 전해 듣고는 감사 電文을 트루먼에게 보냈다. 트루먼 전기를 써 퓰리처 상을 받은 데이비드 매컬로프는 이렇게 썼다. <트루먼은 역사적 위인은 適期에 죽음으로써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나 맥아더가 웨이크 섬 회담 직후에 죽었다면―비행기 추락이나 심장마비로―그들의 역사적 위치나 업적에 대한 평가는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두 사람은 이후 죽을 때까지 서로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 金日成, 중공군 참전 요청 소설 《三國志》에서 周瑜(주유)가 한탄했던 방식으로 이야기한다면 한국인으로선 “트루먼을 내신 하늘이 어찌 毛澤東(모택동)을 같이 내셨는가”라고 부르짖게 된다. 北進하는 유엔군 앞에서 북한군이 일패도지하고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1950년 10월, 맥아더가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내도록 하겠다고 미군들에게 약속했던 그 순간 北京에선 毛澤東의 음모가 분주하게 진행 중이었다. 스탈린이 6·25 전쟁의 최종 연출자, 金日成이 최초 실행범이라면 毛澤東은 후반전의 主役이 된다. 1950년 10월부터 6·25 전쟁은 ‘트루먼 對 毛澤東’의 구도로 전개되는 것이다. 毛澤東은 중국의 赤化가 끝나지 않았던 1949년 4월 말 북한의 민족보위副相 金一이 金日成의 편지를 가져와 중공 인민해방군에 소속된 조선족 장병을 귀환시켜 달라고 요청하자 이를 승낙했다. 그는 해방군의 東北軍區 소속 164, 166 사단을 장비와 함께 북한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이 해 여름에 북한으로 돌아온 2개 사단은 북한군 5, 6사단으로 재편되었다. 북한군은 약 2만3000명이 늘었고, 3개 사단이 5개 사단으로 증편되었다. 바로 이 무렵 미국은 한국이 전략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약 4만5000명의 駐韓미군을 철수시켰다. 남북한의 군사력 균형이 무너진 셈이다. 金日成은 이때부터 방어적 자세에서 벗어나 남한 공격을 목표로 세운다. 1950년 1월 毛澤東은 金光俠(김광협) 부수상이 찾아와 金日成의 요청을 전달하자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소속의 조선인 장병 1만4000명을 무기를 갖고 귀환하도록 해주었다. 이들은 4월18일 원산에 들어와 북한군에 편입되었다. 전투 경험을 가진 약 3만5000명의 해방군 출신들이 북한군의 핵심이 되어 남침 때 앞장선다. 1950년 3월30일 金日成과 朴憲永(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4월25일까지 머물면서 스탈린과 세 차례 만나 남침을 허락받고 자세한 전쟁계획을 지도받았다. 스탈린은 그 1년 전엔 남침을 허가하지 않았었다. 그 사이 중국이 공산화되고 소련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것이 전략상황을 急變시켰다. 스탈린은 남침을 허가하면서 조건을 달았다. 毛澤東을 만나 동의를 받으란 것이었다. 金, 朴은 5월13일 北京에서 毛澤東을 만났다. 毛澤東은 남침에 동의하면서 만약 미군이 참전하면 중공은 군대를 보내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金日成은 “참전할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중국에서도 싸우지 않고 물러갔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그래도 毛澤東은 “미군이 38선을 넘어 北進하는 일이 생기면 중공군을 반드시 보내겠다. 그 전에 3개 군단을 압록강을 따라 배치해 두겠다”고 말했고, 金日成은 “파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고 했다. 毛澤東은 전쟁의 전개과정을 살피면서 金日成에게 인천 등지에 대한 상륙전을 조심하라는 충고를 했다. 毛澤東은 미군의 반격이 시작될 것으로 보고 여름엔 林彪(임표)가 지휘하는 最强의 제4야전군 병력의 상당수를 뽑아 만주지역으로 보냈다. 1950년 9월28일 서울 중앙청에 태극기가 다시 올라가던 날 金日成은 노동당 정치국 전체회의를 열고 소련과 중공에 지원을 요청하기로 결의했다. 10월1일 金日成은 북한주재 중국대사관의 紫成文(자성문) 참사관을 만나 “압록강 對岸에 배치된 중공 제13 집단군을 출동시켜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毛澤東, 반대론 꺾고 파병 결정 毛澤東은 10월1일, 2일에 서기국 회의를 열어 파병문제를 토의하기 시작했다. 외교 책임자인 周恩來는 중공군을 파병하는 데 반대했으나 毛에 정면으로 맞설 입장은 아니었다. 그는 중국주재 인도대사를 불러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北進하면 중공도 개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는 메시지를 미국에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이를 공갈로 치부했다. 10월3일 오전 毛澤東은 北京주재 소련대사 로시친을 통해 스탈린에게 電文을 보냈다. 毛澤東은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면 소련도 같이 휘말려들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면서 <지금 개입하는 것보다는 사태를 지켜보면서 힘을 비축해야 한다>고 신중론을 전개했다. 중국공산당 서기국 회의에서 다수가 개입반대론을 폈던 것을 반영한 내용이었다. 黑海의 소치에서 휴가 중이던 스탈린은 이 電文을 받자마자 답신을 보내 중공의 참전을 毛澤東에게 촉구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대규모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에선 군국주의가 부활되지 않고 있어 미국을 지원할 수 없다>고 했다. 스탈린은 또 <조선이 미군에 점령되면 蔣介石(장개석)과 일본의 교두보가 될 것이다>고 경고하면서 <우리는 미국과 일본보다 강하지 않은가>라고 毛澤東을 자극했다. 스탈린을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모시는 마음이 강했던 毛에게 이 電文은 상당한 심리적 압박이었다. 10월3일 북한 내무상 朴一禹(박일우)가 金日成의 편지를 갖고 와서 毛澤東을 만나 의용군 형식의 파병을 요청했다. 연안파 출신인 朴은 중공의 수뇌부와 친면이 있었다. 10월4, 5일 北京에선 중국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려 참전문제를 토론했다. 4일 회의에선 참전을 찬성한 사람은 毛澤東뿐이었다. 周恩來와 중공군사령관으로 내정된 彭德懷(팽덕회)는 중립, 나머지 7명은 적극 반대였다고 한다. 周恩來는 10월3일에도 중국주재 인도대사 파니카를 만나 미국 측에 공개적인 메시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周는 “한국군만 38선을 넘으면 중국은 개입하지 않지만 미군이 침입하면 반드시 중공의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고 말했다. 중국의 6·25 전쟁 연구자들은 毛澤東이 한국군만의 北進을 저지하기 위해서도 파병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다만, 이때는 수십만 병력이 아닌 수만 병력을 보냈을 것이고, 군복을 북한군으로 위장시켰을 것이다. 10월5일 중국공산당 정치국확대회의는 毛澤東의 설득에 눌려 파병을 결정했다. 彭德懷가 적극적으로 毛澤東 편을 들었다. 참전파가 주장한 이유는 대강 이러했다. 1. 미국은 대만·한국·인도지나 세 방면으로 중국을 치려 한다. 2. 미국과의 교전이 불가피하다면 일찍 할수록 좋다. 공업시설을 건설한 다음에 하면 시설이 파괴되고 일본과 독일이 부흥하여 불리하게 된다. 3. 적대세력이 압록강까지 진격하면 1000km의 국경선을 방어하기가 어렵다. 大兵力을 常時 주둔시켜야 하므로 수동적 자세에 빠진다. 4. 전쟁이 끝나기 전에 참전해야 한다. 끝난 뒤엔 참전의 大義名分을 찾을 수 없다. 5. 중국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준비 부족상태이다. 그들의 전략적 중점은 유럽이고 한국에 보낼 수 있는 병력은 한정되어 있다. 毛澤東, 스탈린에게 참전 통보 毛澤東이 이때 중공의 최고지도자가 아니었다면 중공의 參戰은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학설이 다수이다. 트루먼이란 한 개인의 결단에 의해 구출되었고 맥아더의 천재성에 의해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된 한국인은 魔王(마왕) 같은 毛澤東의 결심으로 다시 지옥의 문턱까지 가게 된다. 參戰을 결정한 毛澤東은 彭德懷에게 아들 毛岸英(모안영)을 데리고 가도록 지시한다. 毛岸英은 그 뒤 유엔군의 폭격으로 죽었다. 10월5일의 정치국확대회의는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는 날을 10월15일로 정했다. 10월7일 맥아더는 金日成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성명을 냈다. 같은 날 유엔은 남북한 통일을 위한 선거의 실시 등을 결의했다. 10월9일 유엔군이 서부전선에서 38선을 넘어 평양을 향해 북진을 시작했다. 참전결정을 스탈린에게 통보한 毛澤東은 周恩來와 林彪를 소련으로 보내 무기 및 공군력 지원 등을 협의하도록 했다. 林彪는 파병될 병력이 자신의 제4야전군이므로 당연히 사령관이 되어야 할 사람이었으나 아프다면서 빠졌다. 漢族 군대로선 唐나라의 삼국통일 개입 이후 1200년 만에 처음으로 한반도를 침략하는 군대가 된 중공군의 지휘부는 후방지원을 맡은 高崗(고강) 동북군구 사령관 겸 정치위원과 전선사령관 彭德懷였다. 10월8일 毛澤東은 金日成에게도 참전을 통보했다. 북한주재 대사를 수행하여 金日成을 만났던 紫成文 참사관은 이런 증언을 남겼다. <대사와 나는 모란봉의 지하 지휘소로 갔다. 金日成은 우리가 다가가는데도 누군가와 큰 소리로 다투고 있었다. 상대는 朴憲永 부수상 겸 외상이었다. 朴이 방을 나간 뒤 우리가 들어갔다. 金日成이 일어나 악수하면서 “그는 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할 마음 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가 중국의 참전방침을 통보하자 金日成은 言爭할 때의 긴장된 표정을 풀고는 웃으면서 “잘 되었다. 참으로 잘 되었다”고 소리쳤다. 金日成은 우리 둘의 손을 잡고 홀에 있는 식탁으로 끌고 가더니 술잔을 채웠다. 그는 “중국군의 緖戰(서전) 승리를 위해 건배!”라고 소리쳤다> 毛澤東이 주도한 중공군 파병결정은 막판에 또 한 차례의 곡절을 겪는다. 10월10일 흑해의 소치에서 휴가 중인 스탈린을 찾아가 만난 周恩來와 林彪는 스탈린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스탈린, “공군 지원은 불가능” 스탈린은 “당장 소련 공군력을 투입하여 중공군을 지원할 순 없다”고 말한 것이다. 중공군이 남하한 뒤, 즉 두세 달 뒤에는 소련 공군이 그것도 제한적으로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장비가 형편없는 중공군이 소련 공군기의 엄호 없이 미군기의 공습에 노출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문제는 10월9일 출병 군단 지휘관 회의에서 제기되었던 것이다. 지휘관들은 彭德懷와 高崗에게 “소련 공군의 지원이 있느냐”고 물었다. 중요한 것을 빠뜨렸다고 생각한 彭德懷는 북경의 毛澤東에게 물었다. 毛는 周恩來-스탈린 회담 결과를 통보받은 뒤 만주에 있던 彭德懷에게 “공군지원은 없다”고 알렸다. 직선적인 성격의 彭德懷는 북경으로 올라가 10월12일 밤의 정치국 회의에 참석하여 “배신당했다. 이런 상태에선 전쟁을 할 수 없다”고 길길이 뛰었다고 한다. 毛澤東은 彭德懷에게 “일단 출동준비를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周恩來와 스탈린은 소치 회담에서 소련 공군의 지원 없이는 중공의 참전이 불가능하다는 데 합의했다. 이에 따라 金日成에겐 소련 측이 <타이밍을 놓치지 말고 중국으로 물러나 게릴라전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는 연락을 해주기로 했다. 스탈린은 이 회담에서 중공 측에 10개 사단분의 무기를 대주고 소련 공군기를 만주 지역으로 전진 배치하는 데는 동의했다. 이 회담에서 스탈린이 “金日成이 중국의 만주지역으로 물러나 게릴라전을 해야 한다”고 말하자 林彪가 즉각 “金日成은 물러나지 말고 산이 많은 북한에서 게릴라전을 지휘해야 한다”고 반박하는 장면이 있었다. 林彪는 金日成이 만주에 망명정부를 세우면 미국의 공격 목표가 될 것임을 걱정했던 것이다. 周恩來 일행은 10월13일 오후 비행기 편으로 소치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周恩來는 숙소에 들어가 차를 한잔 마시고 있었다. 통역으로 따라갔던 師哲(사철)이 북경과의 통신을 담당한 보좌관 방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지시가 들어온 게 있는가.” 보좌관은 “지금 막 電報가 들어오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師哲이 받아 읽어 보니 정치국 회의가 있었고 <소련의 공군지원이 없더라도 우리는 참전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師哲이 놀라서 周恩來한테 달려가 보고했다. 周恩來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잘못 읽은 것이 아닌가” 라고 말했다. 師哲이 電文을 읽고 있는 사이 周恩來는 소파에 앉은 채 아무 말 없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깊은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毛澤東은 별도로 스탈린에게 10월13일의 중국공산당 정치국 회의가 참전을 再확인했음을 통보했다. 이 전보에서 毛澤東은 중요한 전략의도를 밝혔다. 26만 명이 10월19일에 압록강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가면 공세를 취하지 않고 북부 산악지방에 방어진지를 구축해 유엔군의 北進을 기다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26만 渡河, 깊은 잠에 빠져든 毛澤東 스탈린은 毛澤東이 소련의 공군지원 없이도 참전하기로 결정한 데 대하여 상당히 감격했다고 한다. 毛澤東이 중국을 赤化하는 데 스탈린은 큰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방해했었다. 이런 자격지심 때문인지 스탈린은 毛가 제2의 티토가 될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毛澤東이 어려운 결정을 내린 데 대해서 스탈린은 전폭적인 무기 지원으로 보답했다. 毛澤東의 참전 결정 뒤엔 비정한 계산이 있었다. 그는 투항한 蔣介石 군대 출신들을 한국으로 많이 출병시켜 소모시키는 代價로 소련으로부터 무기 및 제조기술을 지원받아 중공군을 세계적 强軍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이다. 소련은 중공군이 출병한 지 3주도 지나지 않아 대포 탄약 등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 무기들은 중공군이 대공세를 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소련 공군기도 1950년 11월 초부터 압록강 상공에 나타나 미군기와 교전하기 시작했다. 소련과 미군은 공중전을 벌이면서도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擴戰을 피하기 위해 덮어 두기로 암묵적 양해가 이뤄진 셈이다. 중국과 소련은 이후 밀월기로 들어간다. 1953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제1차 5개년계획을 소련은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0월13일 밤 金日成은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서 스탈린으로부터 電文을 받고 혼비백산했을 것이다. 중공군의 참전통보를 받고 안도했던 그에게 스탈린은 <중국은 파병을 거부했다. 귀하는 중국이나 소련으로 전면적 철수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대와 무기를 전부 철수시켜야 한다>고 지시했다. 金日成은 놀라더니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런 권고를 받은 이상 따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직후 스탈린의 또 다른 電報가 도착했다. <중국군은 장비가 불충분하지만 조선의 동지들에게 군사적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10월19일 彭德懷는 4개 보병군단과 3개 포병사단의 압록강 渡河를 명령했다. 그 자신은 저녁에 참모 1명, 경호원 2명, 무전기 한 대를 실은 지프차로 압록강 철교를 넘었다. 毛澤東은 반대자들을 설득하여 참전을 결정한 이후 한때 고민에 빠졌다. 10월17일엔 출병부대에 대해서 渡河 대기선으로의 進軍 속도를 늦추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동안 생각을 다시 해봐야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최종적으로 渡河 명령을 내린 10월19일 毛澤東은 수면제를 먹고 나서도 잠이 오지 않아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섭영진 참모총장 대리가 보고차 왔다. 毛澤東은 옷을 갈아입고 접견실로 나왔다. 섭 장군이 경례를 붙이고는 “주석에게 보고 드립니다. 의용군은 지금 압록강 渡河를 개시하였습니다”고 했다. 그가 30분간의 보고를 끝내고 돌아가자 毛澤東은 “지금부터 잔다”고 하더니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치명적 간극 80km 이 순간 한국인의 운명이 또다시 바뀐 것이다. 통일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그해 여름처럼 또 다시 국가적 생존을 건 투쟁의 시기를 맞게 된 것이다. 6·25 전쟁의 전개과정을 보면 쌍방이 비슷한 방식으로 실수와 성공, 그리고 起死回生(기사회생)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起死回生한 유엔군과 한국군 측은 오만해진 맥아더의 치명적 誤判(오판)으로 중공군의 기습을 허용한다. 중공군과 북한군이 이번엔 起死回生하여 再공세를 펴고 유엔군과 한국군은 다시 벼랑으로 몰린다. 맥아더는 北進할 때 美8군을 주력으로 하는 서부군과 美10군단을 주력으로 하는 동부군으로 나눴다. 서부군은 평양-신의주-압록강을 향해 進軍했고, 동부군은 원산에 상륙한 이후 동해안을 따라 北上했다. 8군과 10군단 사이엔 거의 80km나 되는 간극이 벌어져 있었다. 산악지대였다. 이 산악지대를 통해서 중공군이 들어와 8군과 10군단의 양측방을 치게 될 줄은 맥아더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V자형의 進擊은 중공군의 대공세를 부른 바보 같은 布陣이었다. 毛澤東이 彭德懷에게 지시한 최초의 작전방침은 수세적이었다. <북쪽 산악지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敵軍이 평양-원산선을 고수하고 더 이상 北上하지 않으면 우리도 평양, 원산을 공격하지 않는다> 유엔군의 北進속도는 너무 빨랐다.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넌 10월19일에 유엔군은 평양을 점령했다. 彭德懷는 신의주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 그는 북부의 일부 산악지대와 중국의 통로를 확보하는 것조차 보증하기 어렵다고 毛에 보고했다. 맥아더에 못지않은 군사적 천재성을 지닌 毛澤東은 유엔군의 동서 兩軍의 진격로 사이에 드러난 80km의 간격에 착안했다. 이 틈을 타고 大迂廻(대우회) 전략을 쓸 수 있겠다고 본 것이다. 그는 방어전 계획을 機動戰(기동전) 개념으로 바꾼다. 방어전을 준비하기 전에 우선 잡은 戰機를 살려 적을 먼저 공격한 다음 戰局의 주도권을 잡은 뒤 상황을 봐가면서 공세를 준비한다는 것이었다. 중공군과 韓·美軍 사이 최초 교전은 10월25일에 있었다. 그 전날 맥아더는 유엔군에 대해 총공세를 명령했었다. 白善燁(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1사단과 美 기병1사단(騎兵으로 출발한 사단이나 이때는 騎兵이 아님)이 청천강을 넘어 운산까지 진출했을 때 중공군의 逆攻을 당했다. 중공군은 주로 한국군 부대를 겨냥해서 공격했다. 한국군 1, 6, 8사단이 큰 타격을 입었다. 美 1기병사단은 1500여 명의 전사자와 실종자를 냈다. 6사단은 10월26일 압록강변 초산에 도달해 강물을 수통에 담아 李承晩 대통령에게 보낸 직후 중공군의 공세로 물러나야 했다. 11월6일까지 계속된 중공군의 1차 공세로 유엔군의 北進에 제동이 걸렸다.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은 청천강 남쪽으로 물러났다. 중공군은 그 뒤 산악지역으로 숨어버렸다. 맥아더는 중공군 포로들의 증언을 무시하고 개입한 중공군의 병력을 數萬 정도로 과소평가했다. 실제로는 북한지역에 전개된 중공군은 40만을 육박하고 있었다. 불과 열흘 전 웨이크 섬에서 “중공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고, 있다 하더라도 소규모일 것이며 그마저 공군력에 의해 떼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자신 있게 예언했던 맥아더는 실수를 거듭한다. 평양-원산선으로 물러나 방어선을 구축했어야 할 맥아더는 공세를 재개하기로 한다. 영국의 노동당 정부는 걱정이 많았다. 11월7일 영국군 참모총장 슬림 원수는 영국 합참회의에서 이런 견해를 밝혔다.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가장 좁은 지역(注: 평양-원산선)을 선택해 방어진지를 구축해야 한다(유엔군의 현재 포진은 너무 넓어 방어하기가 쉽지 않고 한국군은 중공군의 첫 공격에 무너질 것이다). 그렇게 하면 중공군도 압록강 남쪽에서 머물면서 협상에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체면을 세워 줘야 한다> 11월28일: 총공세에서 총퇴각으로 11월24일 맥아더는 또 다시 총공세를 명령했다. 언론이 ‘크리스마스 공세’라고 이름 붙인 것은 맥아더가 이 작전에 성공하면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낼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북한의 산악지대에 숨어 있는 중공군 병력이 45만 명에 달하고 있음을 알고도 이를 워싱턴에 알리지 않은 채 무모한 공세를 폈을 가능성이 있다. 맥아더가, 중공군의 대공세를 유발하여 전쟁을 중공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함정을 팠다는 說이 유력하다. 트루먼 대통령이 擴戰(확전)과 原爆(원폭) 사용을 거부함으로써 맥아더가 팠다는 함정에는 자신이 빠지게 된다. 유엔군은 11월24일 별다른 저항 없이 15km를 진격했다. 다음날 중공군 45만 명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11월28일은 한국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날이었다. 중공군 제38군과 42군이 美8군과 10군단 사이의 간격을 뚫고 남하하여 美8군의 후방으로 돌아 배후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에서 敵이 등 뒤에 나타나는 날은 비극의 시작이다. 이날 밤 맥아더는 도쿄에서 긴급 작전회의를 소집했다. 워커 8군 사령관과 알몬드 10군단장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美8군의 후퇴와 10군단의 흥남 집결(사실상의 후퇴)을 승인하였다. 대공세 4일 만에 유엔군은 후퇴로 전환한 것이다. 11월28일은 毛澤東판 인천상륙작전이었다. 그날 밤 毛澤東은 흥분했다. 그는 彭德懷 앞으로 보낸 전보에서 <7개 미국과 영국 사단, 5개 한국군 사단을 섬멸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好機(호기)가 왔다>고 했다. 워싱턴 시각으로 11월28일 오전 6시15분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 각하, 맥아더 사령관으로부터 아주 비관적인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이날 아침 백악관 참모회의에서 트루먼은 “우리는 참담한 상황에 직면했다”고 말을 꺼냈다. 이날 회의에는 작가인 존 허시도 배석했다. 그는 뉴요커 잡지에 트루먼 대통령의 近況을 기고하기로 되어 있었다. 트루먼은 허시의 同席을 허가했다. 미국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특혜였다. 허시는 이렇게 썼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볼이 붉어졌다. 흐느낄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고 조용한, 그러나 용기에 찬 말투로 이야기했다. “최악의 상황이지만 우리는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이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해 가는 수밖에 없다.”> 트루먼 대통령은 총공세에서 총퇴각으로 급변한 한국사태에 대한 책임을 그 누구한테도 돌릴 수 없는 입장이었다. 참전, 인천상륙작전, 38선 돌파, 맥아더에 대한 신임 등 모든 결정은 그 자신이 내린 것이었다. 맥아더에게 속았다는 억울한 심정이야 있었겠지만 그런 불만은 누구한테도 발설할 수 없었다. 그토록 걱정하던 중공군의 참전이 확인된 11월1일엔 푸에르토리코 독립투사 2명이 백악관으로 들어와 트루먼 대통령이 2층에서 지켜보는 가운데서 경비원을 사살하고 총격전을 벌이는 사건도 있었다.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참패했다. 11월보다 더 암울한 12월, 그리고 새해 1월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맥아더의 엄청난 요구 11월28일 오후 3시 백악관의 각료회의실에서는 국가안보회의(NSC)가 열렸다. 트루먼 傳記의 저자 데이비드 매클로프는 이 회의가 트루먼 시대의 가장 중요한 회의들 중 하나였다고 평가했다. 그날 아침 맥아더는 워싱턴으로 보낸 電文에서 엄청난 요구사항을 내놓았다. 최대한의 추가 파병, 대만의 蔣介石 군대 투입, 중국의 해상봉쇄, 중국 본토 폭격, 擴戰의 권한 등. 맥아더는 <나의 군대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타격을 입어 피폐한 상태이다>면서 <우리 사령부는 능력을 초과하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했다. 참석자들이 맥아더를 비판하자 트루먼은 이를 제지했다. 싸움을 지휘하는 장군을 공격하여 敵 앞에서 체면이 손상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마셜 국방장관은 “미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한국에서 계속 싸워야 하지만 명예롭게 발을 빼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때이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과 전쟁을 해선 안 된다. 그런 전쟁은 러시아가 깔아 놓은 함정에 빠지는 일이다. 제한전을 해야 한다”고 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우리는 한국에 들어온 중공군을 이길 수 없다. 그들이 우리보다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있다. 우리는 지탱할 수 있는 방어선이 어디인지를 빨리 알아내야 한다”고 했다. 이날 회의는 맥아더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거부한 셈이다. 한국을 포기해서도 안 되고 擴戰도 안 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1950년 12월은 미국인들에게 1941년 12월의 진주만 폭격 때보다 더 심각한 위기감을 조성했다. 눈 덮인 한국의 산야에서 미군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중공군에 쫓기고 있었다. 無敵의 해병대도 흥남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승리를 목전에 두었다가 당한 패배라 충격이 더했다. 한국 포기론이 다시 머리를 들었다. 국가비상사태 선언 트루먼 대통령은 제1, 2차 세계대전 때도 하지 않았던 조치를 취했다.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것이다. 대통령은 물가와 임금의 통제, 그리고 500억 달러 규모의 새로운 국방예산 편성을 선언했다. 이 예산규모는 연초에 책정된 예산의 네 배였다. 미국이 한국전을 계기로 거대한 경제력을 본격적으로 가동하여 對蘇 전략 수행에 나섰다는 증거였다.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공산주의자 색출에 여념이 없던 매카시 상원의원은 트루먼 대통령의 두 팔인 애치슨 국무장관과 마셜 국방장관의 사임을 요구했다. 고민하는 애치슨 장관에게 1950년 12월4일 조지 케넌(前 駐소련 미국대사. 對蘇 봉쇄론의 주창자로 유명하다)이 메모를 전달한다. 애치슨은 이 메모를 읽고 머리가 맑아지고 용기가 우러나오더라면서 참모들에게 읽어 주고는 자신의 회고록에 그 全文을 소개했다. <친애하는 장관님, 어제 저녁의 논의를 계속하는 입장에서 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私的인 일에서도 그렇지만 국제문제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일어난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해 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같은 논리로, 우리 조국의 운명에 지금 큰 실수와 재앙이 일어난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데, 문제는 미국인들이 이 사태에 대해서 어떤 자세로 임하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사태를 솔직하고 당당한 각오로써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고 倍前의 노력과 결의로써 轉禍爲福(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든다면, 즉 진주만의 경우처럼 필요하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자세로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자신감이나 우방이나 소련과의 협상력까지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 국민들과 우리 우방들에 대해서 우리가 직면한 불행한 사태를 숨기거나 고함을 지르고 신경질을 내는 방식으로 대응한다면 이 위기는 우리의 자신감뿐 아니라 미국의 세계적 위상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해치게 될 것입니다. 조지 케넌> 맥아더는 중공군의 大공세에 대한 저항선 구축을 포기하고 38선으로의 전면 철수를 명령한다. 유엔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철수 길에 올랐다. 중공군의 참전 직전까지 자신만만하던 맥아더는 완전히 탈진한 사람이 된 듯이 행동했다. 그는 워싱턴에 대해서 요구사항을 들어 주지 않으면 한국을 포기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위협을 가했다. 워싱턴의 국무부 국방부 수뇌부는 이런 맥아더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과 워커 8군 사령관을 즉각 교체해야 한다는 생각은 누구나 하고 있었으나 그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다. ‘맥아더 해임’이란 생각은 상상의 범위 바깥에 있었다. 한국 포기를 권유한 영국과 트루먼의 단호한 거절 애치슨은 나중에 “결정적 시기에 나와 마셜, 그리고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대통령을 망쳤다”고 술회했다. 대통령에게 단호한 정책을 건의하지 못한 책임을 이른 말이었다. 맥아더는 합참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래도 어느 누구도 맥아더를 해임해야 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12월3일 고위대책회의에서 참다못한 육군 참모차장 매튜 릿지웨이는 한마디 했다. “회의만 할 게 아니고 즉각적인 조치가 취해져야 합니다. 戰場에 있는 군인들과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책임을 지고 행동해야 합니다.” 이 회의 역시 아무 결론 없이 끝났다. 릿지웨이는 공군참모총장 반덴버그 장군에게 물었다. “왜 합참은 맥아더 장군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고 회의만 하는 겁니까?” 반덴버그 장군은 “그렇게 해도 맥아더는 명령을 듣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릿지웨이가 화가 나서 “명령에 불복종하는 장군은 누구든지 해임할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했더니 반덴버그 장군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나가버렸다고 한다. 중공군의 총공세와 유엔군의 총퇴각이 진행되던 1950년 12월의 쌍방 병력수는 유엔군이 약 54만 명, 중공군이 약 45만 명이었다. 무기의 양적·질적 비교에선 압도적으로 유엔군의 우세였다. 중공군은 공군과 해군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공군은 총을 갖지 않은 병사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유엔군은 총퇴각을 하고 있었다. 이는 맥아더가 전쟁의지를 상실한 것을 뜻했다. 맥아더는 “한국을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不忠한 맥아더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 트루먼은 여기에 덧붙여 영국 애틀리 총리와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트루먼은 11월30일 기자회견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다가 “원폭 사용도 검토한다”는 失言(실언)을 했다. 미군이 한국에 묶여 있는 사이에 소련이 유럽을 공격할 수 있다고 걱정하던 애틀리 총리가 워싱턴으로 날아와 트루먼과 담판했다. 영국은 1개 여단을 한국에 보내놓고 있었으므로 무시할 수 없는 발언권을 가졌다. 애틀리는 트루먼에게 한국을 포기하는 代價를 지불하더라도 중공군과 휴전할 것을 권유했다. “군사적 상황이 워낙 불리하니 한국에서 철군하고, 대만을 포기하고 중국을 유엔에 가입시키는 代價로 휴전을 얻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시아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배석했던 애치슨 국무장관은 “여론보다는 미국의 안보가 더 중요하다”고 했고, 마셜 국방장관은 “우리의 전투력에 대한 아시아 사람들의 신뢰가 좋은 평가에 이르는 길이다”고 반박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경제난이 심각했던 영국은 중국시장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과 중국을 화해시키고 싶어 했다. 영국 정부는 그 과정에서 한국이 희생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이런 애틀리의 압박에 대해서 트루먼 대통령이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한국에 머물 것이고 싸울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이 도와주면 좋습니다. 도와주지 않아도 우리는 어떻든 싸울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을 버리면 한국인들은 모두 살해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편에서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우리는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해서 친구를 버리지 않습니다.” 맥아더는 자신의 야심을 앞세우면서 싸웠지만 트루먼만은 한국인에 대한 인도주의와 동정심을 깔고서 對韓정책을 폈다는 느낌이 든다. 맥아더의 이기적인 천재성과 트루먼의 우직하고 순수한 인간성이 위기를 맞아 극명하게 대조된 것이다. 맥아더는 알고 있었다! 1996년 1월15일 고려서적에서 펴낸 《丁一權(정일권) 회고록》 304~307페이지에는 중요한 정보가 들어 있다. 1950년 가을 北進 중이던 유엔군 정면에 중공군이 처음으로 나타나 기습하는 바람에 국군이 큰 타격을 받은 직후의 일을 기록한 대목이다. <老대통령은 내 보고를 듣고 나서 “역시 나왔구먼. 이젠 겁쟁이 트루먼도 배꼽에 힘 좀 넣겠지”하고 지극히 태평이었다. 戰局의 앞날에 대해서도 낙관하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맥아더가 잘 알아서 할 것이오” 하고, “丁총장, 맥아더와 나는 중공군이 나온다고 보아 왔습니다. 장군, 그(필자 注: 맥아더를 지칭)는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겉으로는 부인했으나 北進 전략에 대한 트루먼의 잔소리를 막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맥아더 그는 훨씬 앞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니 경우에 따라서는 原爆 사용도 불사할 각오라고 내게 굳게 약속한 바 있습니다. 그의 전략가로서의 深謀(심모)는 참으로 탁월합니다”하고 격찬해 마지 않았다> 丁一權 총장에게 李承晩 대통령은 두 통의 편지를 보여 주었다고 한다. 한 통은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李대통령의 편지 寫本이었다. 丁씨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 사본의 요지는 이러했다고 한다. <北進이 순조롭게 진행됨에 따라 워싱턴과 英·佛은 소련 및 중공의 군사개입을 겁내고 있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는데 本職은 소련은 몰라도 중공의 개입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보는 바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더라도 이 가능성을 긍정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귀하가 긍정함으로 해서 北進을 방해하는 作戰上의 제한이 가중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민은 거족적으로 北進통일만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하의 英邁(영매)하신 지도가 아니고서는 이 열망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 간절한 심정을 살펴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李대통령이 보여 준 또 다른 한 통의 편지는 맥아더가 李대통령에게 보낸 답장이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고 한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本職은 믿을 만한 정보통의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중공군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 이 가능성을 겉으로는 긍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압록강을 건널 것입니다. 조금도 모르는 것으로 할 것입니다. 중공은 그 방대한 군사력을 배경삼아, 가까운 장래에 아시아에 있어서 데모크라시의 최대의 위협이 될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소련이 있습니다. 중공의 잠재적인 군사력을 때릴 만한 기회는 지금 아니고서는 없을 것입니다. 전략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만, 워싱턴이 어디까지 本職의 전략을 뒷받침해 주느냐가 문제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거센 반대에 부딪힐 것입니다. 하지만 불퇴전의 결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필요하다면 原爆도 불사할 것입니다…> 지금은 故人이 된 丁一權은 회고록에서 이 맥아더의 편지 날짜까지 기억했다. 1950년 10월13일이었다고 한다. 태평양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맥아더 사령관의 회담이 열리기 이틀 전이었다. 丁一權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이 두 통의 私信을 아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는지 확실치 않다. 極秘(극비) 중의 극비였다. 史家들이나 비평가들이 이 극비를 알 까닭이 없었다. 맥아더는 자신에게 집중되는 비판의 소리, 즉 “중공군 개입의 가능성을 오판하여 유엔군의 북조선 철수를 자초했다”는 책임추궁에도 이 비밀서한만큼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맥아더의 大전략 맥아더가 李承晩에게 보냈다는 편지를 통해 맥아더의 大전략이 대충 짐작된다.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으면 한반도 통일이 이루어지니까 좋은 것이고, 개입했을 때는 이것을 擴戰의 기회로 삼아 중공을 치겠다는 전략이었다. 문제는 이런 거대한 전략이 현지 사령관의 의지대로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세계대전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그런 擴戰의 결정은 대통령만이 내릴 수 있는 것이었다. 맥아더와 李承晩은 기독교 사상에 기초한 철저한 反共주의자란 공통점이 있었다. 다른 점은 李대통령은 한반도 통일을 목표로 하고 있었는데, 맥아더는 中共收復(중공수복)까지 내다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丁一權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51년 초 동해안의 양양 전선으로 시찰 나온 맥아더는 丁一權 총장과 둘만 있게 되자 이런 말을 하더란 것이다. “이제까지 만주폭격과 原爆 사용을 주장해 왔지만 조금도 잘못은 아니다. 原爆이라 했지만, 본보기로 허허벌판에 한 발 터뜨려 보자는 것이었다. 난들 왜 原爆의 가공스러움과 죄악스러움을 모르겠는가. 다만 중공군에게 제동을 걸어 보자는 것인데, 트루먼은 끝내 거부해 오고만 있다. 지금도 늦지 않았는데… 丁장군, 당신도 잘 알다시피 原爆을 그토록 바라고 있는 당신네 李대통령에게 말할 수 없이 미안하오. 만날 때마다 ‘原爆도 不辭한다’고 했던 약속이 이처럼 허사가 될 줄은 몰랐다고, 노인에게 전해 주시오.” 丁一權의 회고록과 연관된 자료가 하나 있다. 폴 H 니츠가 쓴 ‘히로시마로부터 글라스노트까지’란 회고록이 그것이다. 니츠는 미국 외교가의 巨物로서 주로 전략과 정책 수립에 종사해 왔다. 딘 에치슨 국무장관 밑에서 정책기획실장 자리에 있을 때 그가 입안한 對蘇전략 기본계획서인 ‘NSC 68’이란 문서는 <이 전략으로 미국이 냉전에 이겼다>는 평가까지 들을 정도이다. 국무성 정책기획실장 시절에 그는 6·25 전쟁을 겪었다. 회고록엔 이런 대목이 있다. <내 책상에 올라오는 맥아더의 교신 감청 자료에 의하여 맥아더의 진정한 목표는 중국으로 전쟁을 확대시켜 毛澤東을 몰아내고 蔣介石을 복귀시키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맥아더가 매우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이 확실했다. 나는 언젠가는 대통령이 맥아더를 해임해야 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 일이 아무리 인기 없고 어려운 일일지라도> 니츠는 회고록에서 맥아더가 그런 위험한 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원자폭탄의 在庫(재고)에 대해서 제대로 보고받지 못한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원자폭탄은 원자력위원회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原爆의 재고량은 중국 본토를 상대로 본격적인 공격을 할 만큼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戰의 희생자들 1950년 12월23일 워커 美8군 사령관은 서울 북쪽 의정부의 미군부대를 방문하는 길에 아들 샘 워커 중위에게 은성훈장을 직접 수여하기로 했다. 얼어붙은 도로를 맹속도로 달리고 있던 워커 중장의 지프를 한국군 트럭이 추돌했다. 지프가 옆으로 뒹굴면서 보좌관과 운전병은 튕겨 나와 살았지만 워커는 즉사했다. 李承晩 대통령은 이 소식을 전해 듣자 사고를 낸 한국군 운전병을 즉시 처형하도록 지시한다. 옆에 있던 美 군사고문관 짐 하우스먼 대위가 말려 운전병은 3년 징역형을 받았다. 이 짐 하우스먼은 회고록에서 이런 뼈아픈 지적을 했다. 〈하버드 대학의 고풍어린 교내 예배당 벽에는 한국전에 목숨을 바친 20여 명의 하버드생 병사들 이름이 동판으로 새겨져 있다. 미국은 한 도시에서 한 사람이 나올까 말까 한 ‘미국의 희망’들을 한국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내보냈다. 교수들도 참전해 더러 전사했다. 한국에서도 많은 학도병들이 전사했다. 한국의 어느 학교에도 戰死 학도병들의 이름이 새겨져 지나는 자들의 머리를 숙이게 하는 표지는 없다. 존경하는 소대장님, 용감한 대대장님, 그리고 생명을 던져 진지를 지켜낸 병사들의 얘기는 입으로만 전해질 뿐 그들을 기릴 수 있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한국은 戰後 팔을 잃은 국회의원, 눈이 날아간 국방장관을 갖지 못했다. 행사장이나 연회장 같은 데서 한국전 戰傷者들을 만나 본 적도 없다〉 蔡命新(채명신) 前 駐越 한국군사령관은 유일한 혈육인 동생이 월남한 뒤 장교가 되어 인접부대에서 함께 근무하다가 전사한 아픔을 겪은 사람인데, 1952년 당시 美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이 주관한 한 회의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밴플리트 사령관은 북한으로 출격했다가 실종된 아들(공군 조종사)에 대한 공중수색 보고를 다 들은 다음 전혀 표정 없이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명령하는 바입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로 내 아들을 수색하기 위한 특수작전은 중지하도록 명령합니다. 행방불명자에 대한 공군의 수색작전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번 특수작전은 그 정도이면 최선을 다한 겁니다. 이제부터는 시간낭비이고 피로를 더해 줄 뿐입니다. 그간 작전에 참여해 준 장병들에게 밴플리트 중위의 아버지로서 심심한 감사를 표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담담한 표정, 그건 감동 그 자체였다. ‘미국의 힘’이 바로 그의 얼굴에 쓰여 있었다〉 릿지웨이 등장 워커 사령관의 후임은 육군참모차장 매튜 릿지웨이 중장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제82공수사단장으로서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했고, 노르망디 상륙전 때는 낙하산을 타고 敵陣(적진)에 내린 勇將(용장)이었다. 그는 통보를 받자마자 <준비된 점검목록에 따라 짐을 꾸리고 유언장을 작성했으며, 유산 분배를 결정하고 전선으로 가져갈 사진을 처자와 함께 찍었다>고 한다. 50代의 릿지웨이는 가슴에 수류탄이 달린 공수부대원의 복장을 하고 다녔다. 그는 한국전선에 도착하자마자 전선을 누비면서 떨어진 士氣(사기)를 되살려 내려고 애썼다. 릿지웨이 사령관이 장교들에게 맨 처음 명령한 것은 지프의 덮개를 걷도록 한 일이었다. 그는 말했다. “밀폐된 차는 탑승자에게 안도감과 안이함을 준다. 포장 따위가 총탄을 막아 주지는 못한다. 달아나던 타조가 모래에 머리만 파묻고 안심하고 있는 것과 같은 심리일 뿐이다.” 1951년 1월4일 서울은 다시 중공군 손에 넘어갔다. 릿지웨이는 피란길에 오른 한국인들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슴이 쓰려 왔다고 했다. 한국의 겨울 추위는 미군들의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릿지웨이 장군은 이들의 사기를 회복시키지 않고서는 반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 猛將은 텐트를 치고 장병들과 행동을 함께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발끝에서 입술까지 언 몸을 녹인 커피 한 잔의 추억을 실감 있게 묘사했다. 아래 소개하는 글은 릿지웨이가 美8군 소속원들에게 내린 훈령 全文이다. 미군 장교들의 생각과 筆力(필력)을 잘 보여 준다. 진짜 군인은 모두가 知性人(지성인)이다.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내가 한국에 온 지난 數週 동안 제8군 장병들의 마음속에 두 개의 절실한 의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이다. 8군사령관으로서 나는 모든 장병들이 나의 응답을 들을 권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1951년 1월21일자로 8군에 소속되거나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아래와 같은 나의 응답을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첫 번째 질문, ‘왜 우리는 여기에 있는가?’에 대한 답은 간단하고 단호하다. 우리가 존중하는 정부의 合憲的으로 구성된 당무자들이 내린 결정에 의해서 우리는 여기에 와 있다. 유엔군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말했다. “유엔 회원국들이 우리에게 부여한 임무에 따라서 우리 사령부는 한국에서 군사적 布陣(포진)을 유지할 것이다.” 더 이상의 논평은 불필요하기 때문에 나의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바치고 기대하는 충성심은 이상의 명령에 대한 아무리 사소한 의문이라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대답은 단호한 것이다. 두 번째 의문은 아주 심각한 것이므로 우리 사령부 소속원들은 논리적이고 완전한 답변을 들을 권리가 있다. 나의 답변은 이렇다. 나로선 문제가 명쾌하다. 한국의 이런 저런 도시와 농촌을 지키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그런 不動産 문제는 부수적인 것이다. 문제는 동맹국 한국의 자유에만 한정되지도 않는다. 한국인들의 志操와 용기가 전쟁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꺾이지 않았음을 우리가 높게 평가하지만, 한국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것은 더 큰 명분의 한 상징이며 이 大義명분 속에 포함되는 셈이다. 문제의 본질은 서구 문명의 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에서 꽃피도록 하신 그 힘이 공산주의를 저지하고 패배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인간의 존엄성을 비웃고, 포로들을 쏘고, 시민들을 노예로 삼는 독재세력이 개인과 개인의 권리를 신성하게 보는 민주세력을 뒤집어엎을 것인가이다. 문제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심에 따라서 우리가 생존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시체처럼 사라질 것인가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싸움은 동맹국 한국의 국가적 생존과 자유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이 논란의 여지없이 명백해진다. 이 전쟁은, 우리의 조국이 독립과 명예를 누리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자유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이다. 우리가 바친 희생과 도움은 他人(타인)을 위한 자선이 아니라 우리를 지키기 위한 직접적 自衛(자위)행동이었다. 결론적 분석: 여기 한국에서 제기된 문제의 핵심은 공산주의냐, 개인의 자유냐의 투쟁이며, 우리가 목격한 그 겁에 질린 사람들의 大탈주를 중단시킬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절망적이고 비참한 그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게 할 것인가이다. 이것들이 우리가 싸우는 이유들이다. 일찍이 그 어떤 軍사령부의 소속원들도 우리가 직면한 이런 도전을 감당한 적이 없다. 이는 도전이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과 우리 국민들 앞에서 최선의 노력을 보여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리하여 군인이란 직업과 우리를 키워 준 용감한 사람들에게 영광을 돌리자> 천당과 지옥 사이를 오간 한국 점차 트루먼과 워싱턴의 정책전문가들은 맥아더의 보고를 不信하기 시작한다. 그가,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일축했다가 중공군이 총공세를 펼치자 갑자기 비관적으로 변해 原爆 사용, 중공 공격을 주장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撤軍할 수밖에 없다고 말을 바꾸는 것은 패전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라는 평판이 돌기 시작했다. 트루먼은 육군과 공군의 참모총장을 한국전선으로 보내 현장을 조사하도록 했다. 1951년 1월17일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 반덴버그 공군총장은 한국 시찰에서 돌아와 맥아더와는 전혀 다른 낙관적 보고를 했다. 美8군의 사기가 좋아졌고 릿지웨이 신임 8군사령관이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워싱턴의 분위기는 급변했다. 이후 철군론은 쑥 들어가 버렸다. 6·25 전쟁 중 한국인의 운명이 외국정부에 의해서 몇 번이나 지옥과 천당을 오간 사실을 요사이 한국인들은 잘 모른다. 1951년 1월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건너 수원을 향해서 밀려 내려오고 있을 때 영국이 중심이 되어 캐나다·인도 등 자유진영 소속 국가들을 끌어 모아 중국에 대한 휴전안을 마련하여 유엔에 제출했다. 그 골자는 현 위치에서 휴전, 평화회복을 위한 정치회담, 모든 외국군의 단계적 철수, 남북한 관리행정을 위한 준비, 휴전 후 미국·영국·소련·중공이 참여하는 정치회담을 열어 대만 문제와 중공의 유엔가입을 논의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내심 이 결의안의 내용을 걱정했으나 우방국 영국이 주도함으로 명시적으로 반대하기가 어려웠다. 영국은 유엔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전쟁에서 손을 떼고서 유럽 방위에 전념하기를 원했다. 美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고민에 빠졌다. 이 제안을 거부하면 미국은 우방국과 갈라서게 되고 유엔에서 소수파로 전락할 수 있다. 유엔이 이 제안을 했을 때 중공이 받으면 더 큰일이 난다. 현 위치 휴전이란 수원 以南까지 중공군과 북한군이 진출한 상태의 휴전이므로 서울이 공산군 手中에 넘어간다. 이는 사실상 남한의 소멸을 의미한다. 애치슨은 중공이 이 제안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이 제안을 지지하자고 설득했다. 미국도 휴전안을 지지하니 유엔은 1951년 1월13일 휴전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중공은 4일 뒤 이 제안을 거부했다. 애치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 중공이 이때 휴전안을 받아들였으면 한국의 수도권은 북한 측으로 넘어가 버린 상태에서 휴전했을 것이다. 공산측은 일단 治下에 들어온 지역을 절대로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중공이 이 제안을 거부한 것은 승승장구하던 당시 戰況에 취해서 미군을 완전히 밀어낼 수 있다고 過信(과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對中 휴전안을 제안했던 나라들도 중공이 이를 거부하자 미국 노선으로 복귀하여 2월1일 유엔이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에 동참했다. 한국의 운명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지옥까지 갔다가 생환한 셈이다. 맥아더 해임 8군사령관 릿지웨이는 1951년 3월 본격적인 반격에 나선다. 3월15일 서울을 수복하고 전선을 38선 북쪽으로 밀어 올렸다. 미국은 위기에서 벗어났다. 戰線 상황이 외교적, 국내적 문제를 결정한다는 고전적 예이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맥아더는 워싱턴과 싸웠고 릿지웨이는 적과 싸웠다>고 썼다. 4월5일 하원의 야당(공화당) 총무 조 마틴이 맥아더 원수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했다. 맥아더는 이 私信에서 트루먼 행정부의 한국전 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공산주의와의 진짜 싸움은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대만의 蔣介石 군대가 유엔군과 함께 공산군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고 했다. 4월10일 트루먼 대통령은 마침내 抗命(항명)한 맥아더를 해임했다. 미국 여론은 트루먼을 공격하고 맥아더를 영웅으로 맞았다. 맥아더는 귀국한 뒤 의회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다. 뉴욕에선 700만 명 이상이 거리로 나와 그를 환영했다. 1927년에 찰스 린드버그가 최초의 대서양 횡단 비행을 하고 돌아왔을 때보다 더 많은 인파였다. 트루먼을 탄핵해야 한다는 소리도 높아졌지만 이 열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5월에 3주간 진행된 상원 청문회에서 맥아더의 神話가 무너졌다. 맥아더는 3일간 증언했다. 그는 고집불통이고 자신의 실수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며 세계정세엔 관심이 없는 인물로 비쳐졌다. 마셜 국방장관과 브래들리 합참의장이 트루먼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맥아더가 문민통제하의 군인으로서 해선 안 될 越權(월권)을 저질렀다고 공박했다. 맥아더의 명성에 큰 타격이었다. 그는 정말로 사라져 가는 老兵이 된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더 빨리 해임했어야 했다고 후회한다. 맥아더가 해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毛澤東은 좋아했다. 측근은 그 상태를 龍心大悅(용심대열)이었다고 표현했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셨다>는 뜻이다. 중국에선 지금도 맥아더보다는 릿지웨이를 더 높게 평가한다고 한다. 毛澤東의 미군 축출 야심을 부순 것이 릿지웨이의 반격과 서울 수복이었던 것이다. 중공군의 大공세 직후에 트루먼이 책임을 물어 맥아더를 해임하고 방어전에 나섰더라면 유엔군은 38선 북쪽, 예컨대 평양-원산선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한국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1951년 봄, 릿지웨이의 반격으로 戰線은 거의 원위치하여 38선으로 돌아왔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그 뒤 2년간 지리한 高地 쟁탈전과 참호전을 계속하지만 어느 쪽도 전략적 돌파를 하지 못했다. 1951년 6월25일 트루먼 대통령은 휴전을 협상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며칠 전 야콥 말리크 소련 외무차관이 휴전협상을 제의한 데 대한 답이었다. 트루먼, 포로의 자유의지 존중 결정 휴전회담이 2년간 길어진 이유는 포로송환 문제 때문이었다. 유엔군에 포로가 된 북한군 및 중공군 중 상당수가 돌아가기보다는 자유세계에 남고 싶어 했다. 제네바 포로 조약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조건 송환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포로가 된 소련군인들 중 상당수가 남고 싶어 했으나 미국은 이들을 무조건 돌려보내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들은 돌아가자마자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보내졌다. 폴 니츠 등 美 국무부 간부들은 이 前例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국방부는 무조건 송환 쪽이었다. 국무부와 국방부가 아무리 회의를 해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트루먼의 최종 결재를 받자고 했다. 트루먼은 ‘자유의지 확인 이후의 송환 원칙’을 결단했다. 공산군 측은 무조건 송환을 고집하여 휴전이 늦어졌고 트루먼 재임기간 중 휴전에 이르지 못했으나 미국은 인권의 원칙을 관철시켰다. 미군은 1950년 흥남에서 철수할 때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10만 명의 피란민을 군함에 태우고 남한으로 왔다. 이 또한 세계戰史에서 찾기 힘든 인류애의 發顯(발현)이었다. 1953년 6월18일 李承晩 대통령은 유엔군이 관리하던 반공포로들을 석방시켰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막바지에 이른 휴전회담이 깨진다고 화를 냈으나 공산군 측도 내심으론 골치 아픈 문제를 그렇게 해소해 버린 것이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휴전회담을 깨려는 李承晩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서 韓美 상호방위조약과 국군 현대화 및 戰後 복구지원들을 약속한다. 이때 처음으로 李承晩이 주도권을 잡는 것이다. 트루먼·스탈린·毛澤東·金日成·맥아더가 주무르던 한국전쟁의 향방을 李대통령이 막판에서 결정할 수 있게 됨으로써 韓美동맹이란 국가번영의 울타리를 만들어 낸다. 수년 전 《毛澤東 秘話》를 쓴 정창과 할리데이 두 저자는 러시아 측 외교문서를 인용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북한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던 毛澤東이 金日成에게 휴전 당시 불법억류하고 있던 6만 명의 한국군 포로들을 계속 잡아두도록 지시함으로써 이들을 비참한 운명에 넘겼다. 이들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고 탈출도 할 수 없도록 북한의 벽지로 보내졌으며, 생존자가 있다면 이들은 아직도 그런 곳에 살고 있을 것이다> 毛는 중공군 포로 2만1374명 중 3분의 2가 귀환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가버린 데 대한 보복을 한국군 포로에 대해서 한 셈이다. 두 저자가 인용한 문서는 러시아에서 2000년에 출판된 ‘극동문제연구’(제2권)에 실린 알레나 볼로코바의 ‘한국전의 휴전회담’(1951~1953)이란 논문이었다. 이 毛澤東 전기는 한국전쟁 때 전사한 중공군은 약 40만 명이며, 연 300만 명이 참전했다고 한다. 공식발표로는 전사자가 15만2000명이지만 鄧小平(등소평)이 일본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실토한 인원수가 40만이란 것이다. 한편 盧武鉉(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에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 대학생들에게 연설한 뒤 질문을 받은 자리에서 “나는 毛澤東과 鄧小平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 바 있다. 강력한 심장을 가진 보스 트루먼 대통령은 참전 결정으로 한국을 구했지만 擴戰을 거부하고 맥아더를 해임함으로써 통일을 막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요사이 학자들의 거의 일치된 견해는 트루먼의 擴戰 거부가 정당했다는 것이다. 맥아더는 “전쟁에선 승리를 대체할 것이 없다”고 했지만, 트루먼은 “전쟁에서 승리의 대체물이 있다. 그것은 평화이다”고 말했다. 1953년의 휴전은 후임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작품이었다. 이렇게 얻은 평화의 시기에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위대한 지도자, 韓美동맹, 그리고 우수한 민족적 자질을 살려 북한정권을 압도하는 경제적·정치적 성장을 이룩했다. 한국은 의지만 있으면 자유통일을 할 수 있는 高地에 올라섰다. 트루먼의 참전 결단, 그리고 한국 포기 거부 결단 덕분에 가능했던 번영이다. 6·25 전쟁에서 미국과 한국이 손잡고 국제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함으로써 자유세계는 많은 것을 얻었다. 일본과 독일의 부흥과 再무장, 대만의 생존, 미국의 본격적인 군비증강 등. 冷戰이 자유세계의 승리로 끝난 뒤 학자들은 6·25 전쟁의 의미와 트루먼의 역할을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트루먼이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반열에 오르는 가장 큰 이유도 한국전쟁에 대한 지휘를 올바르게 했다는 점 덕분이다. 1953년 1월15일 트루먼은 퇴임 직전의 작별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나의 재임기간에 대해서 冷戰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그림자를 드리운 시기라고 기억할 것입니다. 하루도 이런 전면적 투쟁으로 영향을 받지 않고 지낸 날이 없었습니다. 그 배후엔 항상 원자폭탄이란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나의 재임기간을 냉전의 시작이라고 본다면, 이 8년간 그 冷戰을 이길 수 있는 進路(진로)가 설정되었다는 점을 인정할 것입니다> 트루먼은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정확하게 규정한 셈이다. 冷戰이 자유세계의 승리로 끝나자 역사가들은 냉전 승리의 전략은 트루먼이 만든 것이란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마셜 플랜에 의한 유럽 부흥,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의한 집단안보, 트루먼 독트린에 의한 反共정책, 그리고 한국참전 결정은 냉전승리의 씨앗이었다. 레이건이 성공적인 秋收(추수)를 함으로써 트루먼의 위상이 높아진 셈이다. 高卒 학력밖에 없는 트루먼은 ‘위대한 성격’으로써 미국 역사상 최고의 국무장관(딘 애치슨)과 국방장관(조지 마셜)을 부렸다. 애치슨은 트루먼을 ‘보스’, ‘강력한 심장을 가진 대장’이라고 불렀다. 마셜은 “트루먼의 용기 있는 결단보다도 그의 인간됨이 더 오래 기억될 것”이라고 평했다. 트루먼을 잊은 한국인 트루먼은 퇴임 후 고향인 미주리州 인디펜던스에 돌아가 도서관을 짓고 회고록을 쓰면서 바쁜 여생을 보냈다. 현실 정치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女가수 마리아 칼라스의 독창회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그가 나를 알아보더군”이라고 자랑하기도 했다. 트루먼은 88세이던 1972년 12월26일에 죽었고, 이틀 뒤 고향의 도서관 마당에 묻혔다. 그의 부인은 10년을 더 살았다. 트루먼은 한국인을 만나면 유달리 따뜻하게 대했다. 유학 중인 한국 장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위로해 주기도 했다. 1963년 金鍾泌(김종필)씨가 ‘他意半自意半’의 외유를 하던 중 트루먼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트루먼 대통령은 金씨에게 “내가 한국을 통일시켜 드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트루먼은 영국을 원망했다고 한다. 트루먼은 金씨에게 “국민은 호랑이이고 정치인은 사육사이다”고 말했다. “사육사가 호랑이에게 밥을 잘 주고 하니 호랑이도 감사할 줄 알고 안심하고 있다간 먹히는 수가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그는 자신의 회고록 서문에서 대통령직의 본질을 이렇게 요약하였다.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호랑이 등에 오르는 일과 같다. 계속 달리지 않으면 잡아 먹힌다. 대통령은 항상 사건의 머리 위에 있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사건이 그의 꼭대기에 앉게 된다. 한 순간이라도 안심해선 안 된다. 대통령이 되어 보지 않은 사람은 대통령의 無限 책임에 대하여 이해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대통령에게 돌아오지 않는 책임은 없다. 대통령은 한시라도 자신이 대통령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최측근 참모나 가족들도 대통령이 어떤 자리인지를 알 수가 없다. 나는 사람 속에는 그래도 惡보다 善이 더 많다는 믿음으로 대통령職을 수행했다. 善이 惡을 누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나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역사적 先例를 연구했다. 모든 문제는 과거에 그 뿌리가 있다. 나는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결정을 내리려 했다. 내가 왜 역사를 읽고, 또 읽었느냐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한국엔 맥아더 동상과 테헤란路는 있으나 트루먼 동상도, 트루먼 이름이 붙은 거리도 없다. 2년 전 친북좌익 세력들이 인천의 맥아더 동상을 부수려 들 때 盧武鉉 당시 대통령도, 이해찬 당시 총리도 맥아더는 물론 트루먼의 역사적 역할에 대해서 한마디도 국민들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盧씨는 “나쁜 역사도 보존해야 한다”는 식으로만 이야기했다. 그는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미군의 참전이 없었더라면 나는 북한의 강제수용소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가 한국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해준 사람, 대통령이 될 수 있게 해준 사람이 트루먼이라면 과장인가? 우리 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만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한 외국인의 결단에 의해서 나라를 구하고 유복한 생활을 보낸 적은 일찍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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