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박정희의 死後 이야기 - 趙甲濟
해진 혁대
1979년 10월 26일 밤 국군통합병원 分院으로 옮겨지는 車中에서 운명한 박정희의 屍身을 검안하였던 군의관 정규형 대위는 朴 대통령인 줄 몰랐다. 그는 나중에 合搜部(합수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 “얼굴을 보고도 왜 각하인 줄 몰랐는가”란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답하였다.
“병원에 들어왔을 때는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고 中情 감시자들이 응급 처치 중에도 자꾸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시계가 평범한 세이코였고 넥타이핀의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해져 있었습니다.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약간 있어 50여 세로 보았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각하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10월 27일 새벽 5시를 조금 넘어 鄭炯謨(정형모) 화백은 친구로부터 “대통령이 돌아가신 것 같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는 충격 속에서도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오후에 문공부에서 “좀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國葬(국장)에 쓸 대통령의 영정을 그려 달라는 당부였다. 그날부터 鄭 화백은 철야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朴 대통령의 얼굴을 어떻게 표현할까로 고민했다. 4년 전 대통령을 만났을 때의 인상적이었던 그의 눈을 떠올려 보았다.
부끄럼타듯 아래로 내리뜬 눈, 그러나 正視(정시)할 때는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빛나는 眼光(안광)을 영정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박정희의 눈매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 가슴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구나’ 하는 느낌을 주어 거짓말을 못 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정형모는 陸英修 여사가 죽은 뒤에 청와대 본관에 걸어 둘 육영수 초상화의 작가로 뽑혀서 陸 여사의 사진만 참고하여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는 대통령 부부의 초상화 모두를 死後에 그리는 인연을 갖게 된 것이다. 鄭 화백은 대통령 영정을 그리면서 1975년 8월28일에 그를 만났던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尹胄榮(윤주영) 문공부 장관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서니 대통령은 딸 槿惠와 함께 책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긴장하고 있는 정형모에게 “청와대에는 정 화백의 그림이 가장 많아요”라고 하면서 자리를 권했다. 그는 의자에 앉자마자 정 화백에게 담배를 권하더니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 주었다. 정형모는 ‘부모 앞에서도 피우지 못하는 담배를 대통령 앞에서 피우다니’ 하는 생각이 나서 서너 모금 피우다가 재떨이에 비볐다. 완전히 껐다고 생각했는데 연기가 모락모락 나면서 대통령 얼굴 쪽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당황해 하는 정 화백을 보고 근혜가 재떨이의 뚜껑을 덮었다.
식당으로 옮겨 점심식사를 하는데 정 화백이 그린 육영수의 초상화가 벽면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陸 여사의 특징을 살리려고 웃음 띤 입술과 우아한 목을 신경 써서 그렸지만 만족을 느끼지 못한 정 화백이었다.
대통령은 옆 자리에 앉은 근혜에게 “너도 알렉산더 대왕 전기를 읽고 있지?”라고 하더니 2층으로 올라가 아내의 사진 앨범을 가지고 내려왔다. 그는 햇살이 드는 창가에 앨범을 펴 놓더니 정 화백에게 사진을 고르라고 했다. 그때 37세였던 정 화백은 대통령이 꼭 자상한 아버지처럼 느껴졌다. 그날 식단은 토스트와 만두국, 그리고 반찬 세 가지가 전부였다.
정형모는 國葬 하루 전인 11월2일에 朴 대통령의 영정을 완성하여 납품했다. 7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탁자만한 150호짜리 화폭에다가 근대화 혁명가의 비장한 혼을 불어넣어 보려고 했던 정씨는 곧 곤한 잠에 떨어졌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1979년 11월 3일 故 朴正熙 대통령 국장 영결식이 중앙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崔圭夏 대통령권한대행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영전에 바쳤다. 이때 국립교향악단이 연주한 교향詩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독일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이 장엄한 곡은 낮은 音에서 시작하여 高音으로 치달은 뒤에 꼭지점에 도달했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이 곡은 독일 철학자 니체가 쓴 같은 이름의 책 序文을 음악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곡을 선택한 것은 국립교향악단의 洪燕澤(홍연택) 상임지휘자였다. 그는 “朴 대통령과 超人의 이미지를 연결하고 말고 할 겨를이 없었다”면서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곡을 연주한 것이다”고 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序文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인간이란 실로 더러운 강물일 뿐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이 강물을 삼켜 버리려면 모름지기 바다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박정희는 疾風怒濤(질풍노도)의 시대를 헤쳐 가면서 영욕과 淸濁(청탁)을 같이 들이마셨던 사람이다. 더러운 강물 같은 한 시대를 삼켜서 바다와 같은 다른 시대를 빚어 낸 사람이다. 박정희가 그런 용광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순수한 마음이 권력을 잡고 나서도 스스로의 魂을 더럽히지 않고서 맑게 유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글라이스틴 駐韓미국대사가 평한 대로 ‘한시도 자신이 태어난 곳과 농민들을 잊어 본 적이 없었던’ 토종 한국인이었다. 그는 死後 지식인들로부터 뭇매를 맞았으나 서민들의 마음속에서는 항상 살아 있었다.
영결식에서는 박정희의 육성연설 녹음을 두 편 골라서 틀었다. 지금 들으면 국민들에 대한 遺言처럼 느껴진다.
1978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식 치사. 여기서 박정희는 自主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自主정신이란 우리 스스로가 이 나라의 주인이며 역사창조의 주체라는 自覺”이라면서 “우리의 전통과 역사에 뿌리를 둔 주체적 民族史觀을 정립하여 자주정신을 북돋움으로써 민족중흥의 활력을 제공하자”고 역설했다.
박정희는 《국가와 혁명과 나》의 끝 장에서도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한국의 창건, 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이다. 동시에 이것은 본인의 생리인 것이다. 본인이 특권 계층, 파벌적 계보를 부정하고 군림사회를 증오하는 소이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고 했었다.
박정희가 自助정신·自立경제·自主국방을 강조한 것은 이 3自를 갖추어야 진정한 자주독립국가 행세를 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박정희의 이 확신은 국수주의나 폐쇄적 민족주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서민들에 대한 동정심과 서민들을 괴롭히는 힘센 자들에 대한 정의감의 확대판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서민들을 괴롭히는 强者에 대한 반발심이나 우리나라를 누르려는 강대국에 대한 반발이나 같은 심정에서 출발한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는 서민적 반골정신을 대통령이 된 뒤에는 민족의 자주정신으로 승화시켰던 사람이다.
영결식 기도에서 천주교계를 대표한 金壽煥(김수환)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인자하신 주여, 이제 이 분은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엎드려 주님의 자비를 빌고 생명을 목말라 합니다. 이 분의 영혼을 받아주십시오. 죄와 죽음의 사슬을 끊고 생명과 광명의 나라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새문안교회 姜信明(강신명)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저 공중을 날으는 참새 한 마리도 당신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기에 우리는 지금 이 뜻하지 않은 일의 뜻을 알지 못 하여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하기야 이 길은 인간이면 누구나 한번은 가야 할 피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너무나 뜻밖에 비참하게 가셨기에…….”
방울이
박 대통령의 친척과 측근 인사들은 지금도 김재규의 ‘背恩忘德(배은망덕)’을 말할 때 “개보다 못한……”이란 표현을 쓴다. 인간을 차별하지 않았던 박정희는 평소 개에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방울이가 자신의 의자에 앉아 있으면 쫓아내지 않고 그 옆자리에 가 앉았다. 더운 여름날 방울이가 혀를 빼물고 헐떡거리면 대통령은 자신이 부치던 부채로 방울이에게 바람을 보냈다.
5·16 전 `朴 장군은 신당동에서 살 때 ‘와이마루너’라는 독일産 경기견을 ‘와이마루’라 부르며 키웠다. 아내 `陸英修는 이 개가 새끼를 낳으면 시장이나 蓄犬舍(축견사)에 팔아 집수리 비용을 마련하기도 했다. 지금도 신당동 집에 남아 있는 벽돌담과 채양은 이 강아지 판매대금으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와이마루는 여섯 차례가량 새끼를 낳았다는 것이다.
朴 대통령의 9일장 기간에 청와대 본관 2층에 혼자 남은 방울이는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대통령을 항상 쫄쫄 따라다니던 스피츠 수컷 방울이는 대통령을 찾아 침실과 前室을 기웃거렸다. 나중에는 대통령의 슬리퍼가 놓여 있는 곳에서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 2층 침실의 문만 열리면 대통령이 나타난 줄 알고 꼬리 치며 달려갔다가 이내 시무룩해져서 돌아오기도 했다.
방울이가 본관 2층의 주민이 되기 전에는 한 마리의 진돗개가 살고 있었다. 아내를 잃은 朴 대통령은 허전한 공간을 메우기 위해서였던지 개를 키우려고 했다. 1975년 무렵 전남 진도 군수가 상납한 것은 황구와 백구라고 불린 진돗개 수컷 두 마리였다. 全錫濚(전석영) 총무비서관과 朴鶴奉(박학봉) 부속실장이 두 마리의 진돗개를 목욕시킨 뒤에 2층 내실로 데리고 올라갔다. 대통령은 백구를 선택했다. 이름은 ‘진도’라고 붙였다. 탈락된 황구는 경호경비대(경찰)에 보내져 경비견으로 쓰이다가 곧 병을 얻어 죽었다.
진도는 주인한테만 충성을 바치는 진돗개의 성격 그대로였다. 야성이 살아 있어 먹을 것을 주는 대통령을 할퀴기도 했다. 진도는 대통령에게는 절대적으로 충성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우 사나웠다. 그래서 박학봉은 이 흰둥이 진돗개를 ‘박진도’라고 놀리기도 했다. 전석영 비서관은 “각하가 아시면 어쩌려고……”라면서 눈총을 주기도 했다. 2층으로 올라가던 차지철 경호실장이 달려드는 진도에 혼이 나서 박학봉에게 구원을 청한 적도 있었다.
부속실 사람들에 대해서는 진도가 고분고분했다. 먹을 것들이 부속실을 통해서 나오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속실의 ‘미스 리’는 진도에 엉덩이를 물린 적도 있었다. 진도의 정위치는 대통령의 침실 앞 거실이었다. 의젓한 자세로 버티고 있는 진도는 든든하게 보였다.
1978년 이 진도는 박 대통령의 私邸(사저)인 신당동 집으로 下放(하방)됐다. 진도가 너무 사나워 청와대 본관 안에서 원성을 산 것도 한 원인이었다. 진도는 신당동 집 관리인 朴煥榮(박환영)의 손에 넘어갔다. 여기서 진도의 운명은 또 한 번 바뀐다. 청와대 본관 시절의 진도는 대통령의 위광을 믿고 멋대로 싸돌아다녔으나 신당동에서는 쇠사슬에 묶이는 신세가 됐다. 워낙 사나워 밥을 주는 박환영만 물지 않았으니 격리조치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도는 쇠사슬을 이빨로 빡빡 물어뜯는 등 저항도 해 보았으나 때늦은 후회였다. 박 대통령이 가끔 신당동에 들르는 날이 진도가 사슬로부터 해방되는 날이었다. 재회도 잠깐, 대통령이 떠날 때면 진도는 車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꼬리를 흔들고 달려가려고 했다. 울화통이 터진 생활 때문인지 진도는 신당동 집에서 1년쯤 살다가 1979년 봄에 시름시름 앓더니 죽고 말았다.
박환영이 대통령에게 보고했더니 “잘 묻어 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박환영은 북한산의 양지바른 기슭에 진도를 묻고는 돌멩이로 표시를 해 놓았다. 진도가 청와대에서 신당동 집으로 밀려나갈 무렵에 들어온 것이 방울이었다. 朴槿惠가 이 방울이를 구해서 육발이 수술도 해 주면서 귀여워했다. 이 방울이는 박정희 유족이 청와대를 나올 때 신당동 집으로 따라갔다.
*李光耀가 뽑은 아시아의 3大 인물
1994년 1월19일 朴 대통령 시해 사건 때 문공부 장관을 지냈던 金聖鎭(당시 대우그룹 부회장. 싱가포르 대사 역임)이 月刊朝鮮을 위하여 싱가포르 李光耀 수상과 인터뷰할 때 이런 질문을 던졌다.
- 만약 아시아에서 귀하를 제외하고 위대한 지도자를 세 사람만 든다면 누구를 꼽겠습니까?
“먼저 鄧小平을 꼽겠습니다. 그 노인은 정말 어려운 시대에 험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는 중국이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방향을 전환시켰습니다. 만일 등소평이 모택동 이후에 정권을 잡지 못했더라면 중국은 소련처럼 붕괴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 두 번째로는 누구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일본의 요시다 수상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과 냉전이 시작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본이 미국 편에 확실히 서도록 하였습니다.”
- 이제 마지막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글쎄요. 세 번째 사람을 거론하게 되면 한국의 국내정치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 같아서…….”
李光耀는 ‘아시아의 3대 지도자에 들어갈만한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때 金泳三 대통령은 우리 현대사와 前 정권, 특히 군사정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정치공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3大 지도자에 현직 대통령이 싫어하는 朴正熙를 포함시켜서 괜히 한국·싱가포르 관계에 악영향을 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가 김영삼 대통령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서민의 인정 속에서 生이 끝나기를
〈국민으로서는 열여덟 해나 받든 지도자요
개인으로는 서른 해나 된 오랜 친구
하느님! 하찮은 저의 축원이오나
인류의 `贖罪羊(속죄양), 예수의 이름으로 비오니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고이 쉬게 하소서. 이 세상에서 그가 지니고 떨쳤던
그 장한 義氣(의기)와 行動力(행동력)과 質朴(질박)한 인간성과
이 나라 이 겨레에 그가 남긴 바
그 크고 많은 功德(공덕)의 자취를 헤아리시고
하느님, 그지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
설령 그가 당신 뜻에 어긋난 잘못이 있었거나
그 스스로가 깨닫지 못한 허물이 있었더라도
그가 앞장서 애쓰며 흘린 땀과
그가 마침내 무참히 흘린 피를 굽어보사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길이 살게 하소서〉
친구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써 내려간 具常(구상) 시인(작고)의 이 ‘鎭魂祝(진혼축)’은 대령에서 대통령 시절까지 인간 박정희와 交友하면서 남긴 일곱 편의 詩作 중 마지막 편이 됐다.
具常이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나자렛 예수》를 쓰고 있을 때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亡者가 되어 버린 친구를 위해 진혼축을 썼고 그 뒤 5년간 친구의 安息(안식)을 기원하는 미사를 올렸다. 具常은 “그 친구는 의협심과 인정이 강하고 詩心이 있는 사람이었다”면서 “亂世에 파격적인 인물들을 모아서 혁명을 일으킨 뒤에 정상적인 사람들로 주변을 교체해 가는 과정에서 갈등도 많았지만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람을 죽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朴正熙의 꿈은 自主的 근대화를 통한 民族中興(민족중흥)이었다. 그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권력과 부패의 늪 속에 발을 담그고, 三面(3면)의 敵으로부터 공격을 당해 가면서, 자신들도 지킬 수 없는 도덕과 명분론을 무기로 삼아 대책 없는 비난을 業으로 삼는 위선적 守舊 지식인 세력의 도전을 극복해야 했다. 그를 공격한 세력은 좌익뿐이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경험이 한 세대도 안 되는 나라가 서구식 先進 민주주의를 그대로 따라 하지 않는다고 朴正熙를 독재로 몰았던 관념론자들이 더 많았다. 이들은 카터類의 미국인들로부터 응원을 받고 있었다.
기회주의자들과 기능주의자들이 主流를 형성한 정권 안에서 오직 朴正熙만이 이들 위선자들과 맞설 수 있는 논리와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朴正熙의 절대고독이 담긴 獨白(독백)이 바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였다. 朴正熙의 소망은 ‘소박하고, 근면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 독립된 한국의 창건’이었다.
그는 1963년 자신의 魂(혼)을 불어넣어 쓴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동시에 이것은 본인의 생리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 책에 미리 이렇게 유언해 놓았던 것이다.
<본인이 특권계층, 파벌적 계보를 부정하고 군림사회를 증오하는 所以(소이)도 여기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본인은 한마디로 말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人情(인정) 속에서 生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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