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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노비에 대해서 - 퍼온글

淸山에 2009. 9. 3. 16:10

 

 

조선의 노비에 대해서

 

조선의 노비에 대해 이해하자면 먼저 노예란 무언가에 대해서부터 살펴야 한다. 노예란 무엇일까? 그리고 노예는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바뀌어 갔는가? 사실 노비에 대한 오해는 바로 이러한 노예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점이 크다.

원래 노예란 약탈을 통해 얻어지는 이방인이었다. 같은 무리 가운데서 노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다른 무리 가운데서 포로를 잡거나 납치해서 노예로 부리던 것이었다. 아니면 아예 침략자에 의해 하나의 무리 전체가 복속되어 노예로써 부려지거나. 즉 그들은 처음부터 타자로서 그 사회에 동화될 수 없는 존재였으며 따라서 그 사회의 잠재적인 위험요소였다.

고대사회에서 - 아니 비교적 최근은 남북전쟁 전의 미국 남부에서 노예에 대해 가혹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같은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었다. 문화나 종교, 풍습 등이 모두 달랐다. 아직 이질성이 남아 있기에 자신을 부리는 이들에 대한 적개심이 남아있을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그를 통제하는 데 공포 이상 가는 것이 없는 법이었다. 오로지 물리적인 강제력으로만이 노예로 하여금 복종토록 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아직 생산이 부족했거나, 더 많은 생산을 확보하기 위한 등의 이유도 있기는 했지만 일단 이런 측면에서는 그런 게 컸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방인일지라도 오래도록 그 사회에서 노예로 머물다 보면 그 사회에 어느새 동화되게 된다. 또한 이미 노예를 부리고 있다면 굳이 외부로부터가 아니더라도 그 사회 내부로부터도 노예를 조달하려는 경우도 생겨나게 된다. 더 이상의 외부로부터의 노예의 유입이 없다면 이래저래 노예라고 영원히 이방인일수만은 없게 되는 것이다. 종교도 같고, 어느새 사고방식이나 문화 역시 비슷해지게 되면 아주 타자로서 인식할 수만은 없게 되니 어느새 동질감을 서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노예에 대해 가혹하게 대한 것이 그들이 그 사회에 위협이 되는 이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었다면, 동질성을 갇게 된다면 이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대우는 필요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남북전쟁을 전후해 미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처음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데려다 노예로 부릴 때야 노예는 그저 사람 모습을 한 짐승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흑인노예와의 잦은 접촉을 통해 많이 익숙해지고, 흑인들이 기독교와 영어를 그들의 종교와 언어로써 받아들임에 따라, 점차 이들 흑인들에 대해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북부는 물론 노예해방에 반대하던 남부에서도 그같은 움직임이 일찍부터 있었는데, 결국은 같은 사람임을 - 동질성을 인식하게 되고 나서는 과거와 같이 노예로 부리는 것은 꽤나 난감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사회에서도 그리스에 비해 세계제국으로써 보다 보편적인 세계에 살았던 로마인들은 노예에 대해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다. 사유재산도 축적할 수 있었고, 노예주의 배려에 의해 노예에서 해방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일단 노예에서 해방되고 나면 시민권을 얻어 자유민이 될 수도 있었다. 그에 대한 차별 또한 사실상 없었다. 게르만의 경우는 해방노예라 할지라도 일정기간 차별적인 지위에 있어야 했지만 역시 시간이 흐르면 자유민과 별다른 차이 없이 존재할 수 있었다.

더구나 특히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일단 절대유일신인 야훼를 섬기고,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한다고 하는 점에서 노예와 노예주 사이에는 이전보다 더 강한 종교적인 유대가 형성되게 되었다. 굳이 로마교회에서 기독교도를 노예로 삼는 것을 반대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기독교도를 포로로 억류하여 노예로 삼는 것은 반대하고 있었으므로, 그 영향으로 노예에 대한 대우는 이전보다 더욱 향상되었었다. 즉 이미 중세 초기가 되면 노예라고 해도 신분상 노예라는 것이나, 영주에 대한 의무에서 일반 예속농보다 더 불리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차이가 없는 신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중세 초기 장원에 아직 남아 있던 노예들은 일단 자신의 망스를 소유할 수 있었다. 더 많은 세금과 부역을 지불해야 하기는 했지만, 일단 노예라 해도 자신의 경작지에서 생산되는 생산물은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었다. 결혼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서, 심지어 서로 신분이 다른 콜로누스나 자유민과도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자식들의 신분은 어머니를 따라 정해지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매질을 당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다. 더구나 지속적으로 장원의 노예들은 해방되어 농노로 바뀌어갔기 때문에 노예의 수는 갈수록 줄어 10세기가 넘어가고 나면 프랑스의 장원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자유민 또한 상당수가 농노로 전락하여 사라지고 있기도 했다.


바로 조선의 노비가 그랬다. 고려 전기까지 노예란 전쟁포로였다. 삼국시대에도 끊임없이 삼국이 서로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전쟁포로들이 각 사회에서 노예로 공급되고 있었고, 고려 전기에도 후삼국의 혼란기를 거치며 발생한 많은 전쟁포로들이 노비로 전락하고 있었다. 광종이 노비안검법을 통해 해방시키려 했던 노비도 바로 이들이었다. 조선전기 고려 각지를 떠돌던 무자리들을 양인으로 삼거나 공노비로 삼은 것도 그런 일환이었다.

그러나 말했듯 처음에는 전쟁포로였어도 시간이 흐르고 자식에서 자식으로 대를 이어가다 보면 처음의 그런 의식은 자연스레 흐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같은 집안에서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고, 또한 이래저래 부대끼고 하다 보면 어느새 동질감마저 느끼게 된다. 노비가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얼핏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서로 동일집단이라고 하는 인식이 어느새 자리잡고 있었기에 당시로서는 매우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더구나 여기에 성리학이 가족의 연장선상에서 사회질서를 정의하는 유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나오면서, 노비는 사회의 최하층부로써 그 존재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의 노비들을 보자면 일단 그 인신이 소유주에게 구속되어 있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많은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먼저 사유재산을 가질 수 있었고, 법적으로 주인으로부터 사적인 제제를 받지 않을 것을 보장되고 있었다. 나아가 사유재산을 축적하여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면 노비에서 풀려나 평민이 될 수도 있었다. 주인이 풀어주거나 공을 세워 나라로부터 인정받으면 또 평민이 될 수 있었는데, 때로 그런 이들 가운데 아예 관직에 나가 양반이 되는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공노비의 경우는 아예 그 특수한 신분을 이용해서 각종 이권에 개입해 많은 부를 축적하는 경우도 나왔었고. 오죽하면 집안이 망해 노비에게 얹혀 사는 양반의 이야기며, 노비가 일을 해서 주인인 양반을 부양하는 이야기마저 기록에 나올까? 아마 박제가가 그렇게 집이 가난해서 노비가 밖에 나가 일을 해 벌어 온 쌀로 연명하고 했었다는데... 심지어 19세기에 이르면 아예 노비가 주인보다 더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경우마저 나타나고 있었다.

사실 이게 또 웃기는 것이 노비는 일단 주인에게 종속된 몸이라 역이나 세금을 지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아예 속량을 할 수 있음에도 노비의 신분을 유지하는 경우도 당시에는 적지 않았었다. 19세기 순조 때 공노비를 해방한 이유도 이처럼 세금을 거둘 수 없는 노비와 양반의 수는 늘어나는데 평민의 수는 갈수록 줄어드니 역과 세수의 확보차원에서 단행한 것이었었다. 사실상 이때에 이르면 사노비 역시 실질적으로 주인에 종속되어 봉사하는 경우는 겨우 체면유지나 할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고, 대부분 외거노비로써 자기 재산을 가지고 소유주의 영향 아래 사실상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으니, 여전히 신분적인 제약은 있었지만 갑오개혁에서의 사노비해방이란 거의 형식에 불과하다 할 정도로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재미있게도 당시의 기록등을 보면 사대부들이 무척 이 노비들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보는 앞에서만 열심히 하는 척을 한다든지, 때려도 말을 안 듣는다든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생각같아서는 매질을 하고 억지로 고통을 주어 열심히 하도록 하면 될 것 같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아마 바로 그러한 노비에 대한 비효율성이 또 점차 노비를 풀어주어 반자유농으로 풀어주도록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노비로 예속시켜 부리기보다는 자기 땅 경작해서 그 생산물을 갖다 바치도록 하는 쪽이 더 이익이었을 테니까. 노예가 사라지게 된 이유가 또 그것이었다.

아무튼 따라서 조선의 노비란 노예라기보다는 - 중세초기의 노예보다도 이후 나타나는 농노에 가까운 존재라 할 수 있다. 토지 대신 여전히 주인에게 종속되어 있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자기 재산도 가질 수 있었고, 가정도 자유롭게 꾸릴 수 있었고, 종속되었다는 전재로 상당한 자유도 누릴 수 있었다. 물론 그에 대한 댓가로써 종속된 만큼 여러 봉사를 바쳐야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나마도 생산이 증가하고 노비 역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사실상의 예속관계가 해체되고 있었고.

다만 유럽과의 차이라면 유럽의 경우는 여러 요인들로 인해 점차 농노마저도 사라지고 자유민이 되어갔던 반면, 조선의 경우는 또 조선만의 여건으로 인해 조선 후기까지도 명목상으로나마 노예제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화폐경제도 발달하고, 생산도 증가하는 등 여러 이유들로 인해 사실상 노예제라기도 뭣한 상태가 되어 버리지만.

참고로 공노비의 경우는 또 사노비와 달라서 이와 비슷한 예를 들자면 고대 로마에서의 전문직 노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관청에 소속되어 국가가 필요로 하는 각종 노역을 제공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는 각종 장인이나 수군 등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일들도 있었다. 공노비들이 부를 축적하고, 오히려 관에 속해 있다는 점을 이용해 때때로 문제를 일으키곤 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말이 관청에 속한 노비라는 것이지 사실상 하급 실무공무원에 가까운 신분이었으니.

즉 조선의 노비를 그저 노예로만 보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물론 노예와도 비슷한 부분이 아주 없지 않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중세유럽의 농노에 더 가까운 존재들이었고, 그나마도 조선후기에 이르면 상당한 자유를 획득하고 있었으니. 그런 것을 두고 노예제사회라 하는 것은 글쎄... 하긴 그런 시대구분 자체가 유럽중심의 사관이 만들어낸 편견이긴 할 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