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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대표적 역사왜곡

淸山에 2009. 9. 3. 15:08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대표적 역사왜곡


▲ 대조선지도 조선국총도편에 표기된 대마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란 일본의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하였다는 설이다.

야마토왜의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이라고도 불린다. 이 주장은 현재 일본의 교과서에 수록되어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편견과 우월감을 조장하고 있다.

침략행위의 정당화 도구로 사용된 임나일본부설
일본의 임나일본부에 관한 연구는 이미 17세기 초에 시작되어 19세기 말에는 본격적인 문헌고증에 의해 정설로 뿌리를 내림과 동시에 각국에 소개되었다.

이를 통해 3세기경에는 외국에 식민지를 건설할 정도로 일본의 고대사회가 발전하였다는 논리로 나아갔고,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하였다.

이처럼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과거로의 환원으로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일본인과 한국인은 본래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일선동조론'과 함께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35년 간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관념적 버팀대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식민사학의 극복을 논의할 때,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비판과 부정이 빼놓을 수 없는 과제가 됨은 당연하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는 보통 4가지가 제시되고 있다. 그 중 핵심적인 것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적힌 내용.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구황후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뒤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 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도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거론되었다.

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남조·송·제·양나라의 역사기록에 나오는 왜왕의 책봉기사도 들고 있다. 여기에는 왜왕이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諸軍事倭國王)"이라는 관작(官爵)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송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소노카미신궁의 칠지도도 왜의 군사적 우세와 한반도 남부 지배를 인정한 '번국(蕃國)' 백제가 야마토조정에 바친 것으로 해석되었다.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한국학계
그러나 '임나일본부'란 명칭은 '일본서기'의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기록에는 빈번히 나타나지만 한국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 존재 여부조차 의심되었고 이에 대한 반론들이 제기되었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이 북한학계 김석형의 분국설이다.

이 설에 의하면 삼한·삼국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삼한·삼국의 식민지라 할 수 있는 분국들을 곳곳에 설치하였고, 이때 임나일본부는 일본열도 내에 수립된 가야의 분국 임나에 설치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설은 광개토대왕비문이 석회가 발라져 변조되었다는 주장과 함께, 그 사실 여부보다는 근대 일본역사학의 '제국주의적 체질'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

현재 일본학계에서는 예전처럼 한반도 남부에 대한 식민지경영과 같은 주장은 거의 사라졌으나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기내(畿內)의 야마토조정과는 무관한 규슈의 지방호족에 의해 설치되었다고 보는 견해로부터, 일본의 '출장소' 또는 '출장기관'과 같은 출선기관설 등을 계속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의 신빙성이 의심을 받자 이제는 선사시대부터 가야지역과 일본열도의 활발한 교류를 들어, 가야지역에 일부의 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게 되었고 이러한 왜인들을 통제하는 행정기관이 임나일본부였다는 '가야의 왜(倭)'설이나 왜의 식민지 지배기관이 아니라 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들로 이해하는 외교사절설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반면 한국학계에서는 대체로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데, 가야를 지배했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왜'가 실제로는 백제라는 견해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활동한 왜군을 백제의 용병으로 보는 백제군사령부설이 있다.

최근에는 임나일본부는 왜의 통치기관이나 백제의 군사령부와 같은 것이 아니었으며, 임나와 안라에 파견된 왜의 사신인 기비노오미와 가와치노아타이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던 '왜'의 문제의 총합으로서 제기되는 임나일본부 문제는 한국고대사의 복원뿐만 아니라 한일관계사 및 동아시아 역사상의 재구축과 올바른 한·일관계 정립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다.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임나일본부설
임나일본부설은 몇 가지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첫째가 임나의 위치를 대부분 한반도 가야지방 또는 가야지방을 포함한 남부지방으로 오해하였다.

유일하게 분국설을 주장한 김석형만은 임나의 위치를 일본열도 서부지방으로 보았다. 일본서기, 환단고기, 중국의 사서에 의하면 임나는 한반도 남부 가야지방이 아니고 대마도이다.

둘째, 송서 왜전에 나오는 왜왕을 일본열도 왜왕으로 오해하였다. 송서 왜전에 나오는 왜왕은 대화왜왕이 아니고 대마도에 치소를 두고 당시 일본열도 등지를 통제한 임나연정왕이다.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를 모두 일본열도 방면의 왜로 오해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는 대부분 마한(馬韓)이나 구태백제(九台百濟)를 지칭한 것이고, 대마도나 일본열도왜를 지칭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셋째 일본서기에 나오는 일본부의 성격과 존재이유를 오해하였다. 일본부는 출선기관설이 주장한 것처럼 대화왜가 한반도 가야지방에 둔 군정기관이 아니고 임나(대마도)에 주재한 대화왜 신(臣) 또는 장군들의 주재소다.

그리고 임나연정 시대에 나오는 일본부와 흠명천황 시대에 나오는 일본부는 그 성격과 존재이유가 전혀 달랐다.

'일본서기'와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 의하면 임나는 좁은 의미로는 대마상도 북안에 위치한 소국이고, 넓은 의미로는 대마도 전지역과 일기도(一岐島)이다.

한국의 일부 사학자들은 광개토대왕비문에 대왕이 왜를 추격하여 임나가라까지 갔다는 문구가 나오자 '임나가라(任那加羅)'라는 문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임나와 가라가 붙어있자 임나를 경상도 가야 지방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임나는 대마도이고, 가라는 변두리 지역이라는 뜻으로 고대에는 경상도 가야 지방 외에 대마도나 일본열도도 가라라 불렀다. 또한 일본서기 문구에 임나는 축자국(북구주)에서 2천여 리 떨어져 있다고 적혀 있는데, 아래 나오는 수서나 위지 문구를 보면 축자국에서 2천 여리 떨어져 있는 곳은 대마도이다.

또한 임나연정은 광개토왕이 대마도왜, 일본열도왜, 백제, 신라, 가야를 복속시킨 후 복속지를 통제하기 위하여 A.D 400년에 요지에 있던 10개국으로 만든 연립정부다. 이 연정의 치소는 임나(대마도)에 있었다. 그 때문에 이 연정을 임나연정이라 불렀다.

고기(古記)에는 임나연정도 임나로 적혀 있다. 대마도를 뜻하는 임나와 임나연정을 뜻하는 임나는 의미가 전혀 다르므로 꼭 구별을 해야 한다. 아래에 나오는 임나는 대마도라는 뜻이 아니고 임나연정 또는 임나연정 지역이라는 뜻이다.

또한 송서 왜전(倭傳)을 보면 왜왕 진(珍)은 자칭 6국제군사라고 주장하였고 무(武)는 자칭 7국제군사라고 주장하였다. 일본의 사학자들은 위 문구에 나오는 왜왕을 대화왜왕이라 주장하고, 당시 왜왕이 임나 뿐만 아니라 백제, 신라, 가라 등지를 관장하는 작호를 내려 달라고 한 것으로 보아 대화왜왕이 임나 외에 신라, 백제 등지를 복속시키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왜왕은 대화왜왕이 아니고 광개토왕이 대마도에 설치한 임나연정왕이다. 그리고 임나연정 시대에 대화왜왜는 임나연정에 복속하고 있었다.

대화왜는 임나연정(A.D 400-479년) 시대에 임나연정왕의 요구에 따라 대화왜의 신(臣) 또는 장군들을 임나에 주재시켰는데, '일본서기'에는 대화왜의 신 또는 장군들이 임나에 주재한 곳이 일본부로 적혀 있다.

'일본서기 웅략천황기'에는 대화왜의 신과 장군이 임나에 주재한 곳이 일본부로 적혀 있고, 일본부에 주재한 대화왜의 신과 장군은 임나연정왕의 지시를 받았다.

대화왜는 6세기에 신라의 일본열도 진출을 막기 위하여 대화왜의 신을 대마도에 있던 임나국 또는 아라국에 주재시켰다. '일본서기'에는 대화왜의 신이 임나국 또는 아라국에 주재한 곳이 일본부로 적혀 있는데, 학자들은 이를 임나일본부 또는 아라일본부라 부른다.

일본서기·삼국사기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
'일본서기 흠명천황기'에 임나와 일본부가 자주 나오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하여 6세기경 한반도와 대마도 정세를 살펴본다.

A.D 501년에 일어난 동성왕계와 무령왕계의 싸움으로 백제는 A.D 502-503년에 고구려에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빼앗기고 국력이 약해지자, 신라는 그 틈을 타서 지증마립간 5년(A.D 504년)에 요지에 성을 쌓고, 다음 해 신라의 세력권에 들어 있던 소국들을 해체하고 그 곳에 주, 군, 현을 두었으며, 지증마립간 15년(A.D 514년)에는 함안의 아시라국을 해체하고 아시촌(함안)에 소경을 두었다.

그 뒤 법흥왕 9년(A.D 522년)에 고령가야가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고 신라의 세력권으로 들어왔으며, 법흥왕 19년(A.D 532년)에는 금관가야가 신라에 항복하였다.

다음으로 대마도 정세를 살펴본다. 신라는 백제와 대화왜를 왕래하는 해상통로를 차단하여 백제와 대화왜를 분리·고립시키기 위하여 계체천황 21년(A.D 527년) 이전에 대마도에 진출하여 남가라(南加羅)와 록기탄(己呑)을 점령함으로써 대마도에 거점을 확보하였다.

대마도에 거점을 확보한 신라는 대마도에 있던 반파국이 계체천황 7년(A.D 513년)에 대마도에 있던 백제영지 기문을 백제로부터 빼앗았다가 대화왜의 압력으로 기문을 백제에 다시 돌려준 후 백제와 대화왜 모두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던 기회를 이용하여 계체천황 23년(A.D 529년)에 반파국의 왕에게 신라의 왕녀를 시집보내어 반파국과 혼인동맹을 맺었고, 반파국과의 혼인동맹이 깨어진 후 반파국의 8성을 빼앗았다.

그 뒤 흠명천황 2년(A.D 541년) 이전에 다시 대마도에 있던 탁순국을 점령하였다.

신라는 흠명천황 2년부터 대마도에 마련한 거점을 이용하여 백제와 대화왜 간의 해상통로를 차단하려 하였고, 백제와 대화왜는 이를 막으려 하였다.

즉 흠명천황 2년부터 대마도에서 신라와 백제·대화왜 사이에 치열한 외교전, 군사전이 벌어지자 대화왜왕은 대마도 북안을 점령한 신라를 물리치기 위하여 임나(대마도)의 여러 소국들과 백제와의 원활한 협조를 위하여 대화왜의 신을 임나(대마도)에 파견하였다.

일본서기 흠명천황기에 의하면 이 시기의 일본부는 백제왕 또는 대화왜왕의 지시를 받았다.

또한 일본서기 흠명천황기 4년조 문구에 의하면 일본부 하내직이 임나(대마도)에 주재한 이유는 임나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즉 일본부는 임나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대화왜가 임나에 파견한 대화왜 신(臣)의 주재소였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임나는 한반도 가야지방이 아니고 대마도이다. 그리고 웅략천황기에 나오는 일본부는 임나연정왕의 요구에 의하여 임나(대마도)에 파견된 대화왜 신의 주재소였고, 흠명천황기에 나오는 일본부는 신라가 대마도 북안(北岸)에 있던 소국 남가라, 록기탄, 임나국 등을 점령하여 백제와 대화왜와의 해상통로를 위협하자 북적(北賊) 신라를 대마도에서 몰아내어 백제와 대화왜와의 해상통로를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대화왜가 임나에 파견한 신(臣)의 주재소였다.

즉 임나를 가야 지방으로, 일본부를 가야지방을 다스린 군정기관으로 본 학설은 일본서기나 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시사포커스], 역사 바로 지키기, 글작성자 : 오공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