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황포군관학교 교장 시절의 장제스(왼쪽)와 천제루. [김명호 제공] | |
1927년 8월 21세의 천제루(陳潔如)는 장제스(蔣介石)가 권하는 미국 유학을 떠났다. “정권을 장악하면 경제건설에 착수하겠다. 서양의 기술이 필요하다. 새로운 문화를 익혀라.” 결혼한 지 6년 만이었다.
상하이를 출발한 지 10일 만에 하와이에 도착했다. 중국 영사관 관원들이 영접했고, 현지의 국민당 열성당원들은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부인 환영’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내걸었다. 미국 언론도 중국의 통일을 눈앞에 둔 장제스의 부인 천제루의 미국 방문을 연일 보도했다. 그러나 며칠 후 주미 중국대사관 공보처는 “장제스 총사령관에게는 미국에 와 있는 부인이 없다”는 공고를 신문에 게재했다. 경악한 천은 황급히 목적지인 뉴욕으로 향했다. 그해 겨울 친구의 편지를 통해 장제스가 쑹메이링(宋美齡)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천제루는 13세 때인 1919년 여름 국민당 4대 원로 중 한 사람인 장징장(張靜江)의 집에서 장제스를 처음 만났다. 당시 장제스의 직업은 증권 중개인이었다. 장징장은 동업자였다. 청방(靑幇)의 독무대였던 상하이의 증권교역소에서 이들과 결탁해 벌어들인 돈으로 홍등가에서 날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장제스는 큰 키에 러시아어가 유창한 천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장은 한순간에 상대를 제압해 버리는 재능은 탁월했지만 성격이 불같아 사람을 설득할 줄 모르는 단점이 있었다.
무슨 일이건 순식간에 처리하지 못하면 스스로 해결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징장의 부인이 천을 설득했다. 그러나 뒷조사를 해본 천의 모친은 완강했다. 고향에 부인이 있고, 아들이 있는 것도 큰 약점이었다. 장징장이 나서고 쑨원(孫文)까지 가세해 모친을 설득하는 바람에 장제스는 2년 만에 20세 연하의 천과 겨우 결혼할 수 있었다. 후일 장제스의 전기작가는 궁리를 거듭한 끝에 이때를 “총통의 도양(稻養·벼가 한참 자라던) 시기”라고 했다.
장제스는 쑨원의 부름으로 다시 군복을 입었고 쑨의 처제 쑹메이링도 알게 되었다. 장은 천에게 했던 것을 쑹에게도 그대로 반복했다. 장의 감정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후일 장과 쑹의 결혼을 정략결혼이라고 했지만 장은 이성문제에 있어서는 정략적이지 못한 사람이었다.
황포군관학교 교장이 되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장제스는 숙원이었던 북벌(北伐)을 완수했고, 27년 4월에는 정변을 일으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중국의 최강자로 부상했고 타임(TIME)지의 표지를 장식했다. 이미 눈앞에 쑹메이링이 아른거리기 시작했지만, 그가 가는 곳마다 모습을 나타낸 것은 공인된 부인 천제루였다.
천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귀국해 상하이에 정착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천에게 “홍콩이나 미국을 자유롭게 다녀라. 언제 돌아와도 좋다”고 했다.
천은 홍콩을 택했다. 대만의 장징궈(蔣經國)는 ‘상하이 엄마(上海)’라 부르며 따르던 그를 위해 주룽(九龍)에 저택을 마련했다. 장제스도 쑹메이링 몰래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한 배를 타고 비바람을 헤쳐나갔던 날들이 있었다. 그때의 고마움을 잠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천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장제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30여 년간 내가 얼마나 억울하고 분했는지 잘 알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군(君)과 국가의 명예를 위해 모든 것을 감수했다.”
천은 생전에 영문 회고록을 남겼는데, 장제스와 본인의 사후에 공개할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25> 5·4운동 지도자 段錫朋의 변절
| 제25호 | 20070902 입력
미국 유학 떠나기 전 기념촬영을 한 5·4운동의 학생 영수 다섯 명. 뒷줄 가운데가 돤시펑이다. [김명호 제공] |
1919년의 5·4운동은 신식 교육을 받은 신지식인들의 첫 번째 현실참여였다. 시위 주동자 중 뤄자룬(羅家倫)· 돤시펑(段錫朋)·쉬더옌(許德衍)·푸쓰녠(傅斯年) 등은 베이징대학 학생들이었다. 영미식 자유주의 영향을 받은 이들의 목표는 평화적 시위로 군벌정부의 굴욕외교에 항의하고 민중을 각성시킨다는 것이었다.
반면 베이징고등사범학교의 쾅후성(匡互生)과 슝멍페이(熊夢飛) 등은 유혈과 희생이 따르지 않는 시위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시내 사진관을 다니며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중국 대표들의 용모를 익히고 친일파 차오루린(曹汝霖)의 집을 수소문했다. 차오의 집 앞에서 폭동을 일으킬 계획이었다. 가솔린과 성냥을 준비했고 권총은 구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5월 4일은 일요일이었고 유난히 더웠다. 학생들이 방 안이나 도서관에 있기엔 적당치 않았다. 거리로 나온 학생들이 차오의 집에 이르렀을 때 집주인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방화를 결심한 쾅후성이 성냥을 꺼내자 옆에 있던 돤시펑이 기겁을 하며 막았다.
“무슨 짓이냐? 나는 책임 못 진다.” 쾅은 “누가 너보고 책임지라고 했느냐? 너는 책임질 일 없다”며 방화를 감행했다.
책임 문제를 거론한 것만 봐도 돤시펑은 자타가 공인하는 학생 영수였다. 며칠 후 돤은 베이징에 설립된 학생연합회 회장에 뽑혔고, 6월 18일엔 상하이에서 열린 전국학생연합회에서 회장에 당선됐다. 이때부터 상하이가 학생운동의 중심이 됐다. 학생자치를 주장하는 돤을 사람들은 “돤총리(段總理)”라고 불렀다.
돤시펑과 학생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회유와 매수도 만만치 않았다. 상하이 방직업자가 이들의 미국유학 자금으로 거금을 내놓았다. 후스(胡適)도 “혼란기일수록 학생들은 구학(求學)에 충실해야 한다”며 돤에게 유학을 권했다. 학생 영수 다섯의 미국 유학은 “오대신출양(五大臣出洋)”으로 풍자됐다. 귀국 후 모두 군벌정부에 충실했음은 물론이다.
신문화 운동에서 시작해 5·4운동과 마르크스주의 전파,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성립으로 이어지는 미래에 대한 환상을 품고 살아야 했던 복잡한 시대의 가장 큰 실패자가 이들이었다. 민주와 과학을 외쳐댄 5·4운동을 통해 입신했지만 모두 반민주적인 인물로 타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24> ‘新인구론’ 주장한 베이징대 총장 馬寅初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 제24호 | 20070826 입력
‘신인구론’ 발표 직후 베이징대학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담소하는 마인추. [김명호 제공] |
1953년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과학적인 인구조사가 전국적으로 실시됐다. 총인구 6억193만8035명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국토 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다는 쑨원의 우려가 무색해졌다. 전란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아무리 죽어도 줄지 않고, 죽이면 죽일수록 늘어나는 게 사람”이라는 말이 맞는 듯했다. 매년 1300만 명이 늘고, 2% 증가율이란 예측이 나왔다.
민생에 치명적인 게 인구 증가라고 확신하던 마인추(馬寅初, 1882∼1982) 베이징대학 총장은 57년 7월 5일 인민일보에 ‘신인구론’을 발표했다. 4년에 걸친 조사를 토대로 한 이 논문은 이후 50년간 중국의 모든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열거한 인구의 급속한 증가 이유는 언제 보아도 흥미롭다. 예전엔 졸업이 실업을 의미했지만 사회주의 실시 이후 국가가 직장을 마련해주니 경제상황이 개선돼 결혼 숫자가 늘어났다. 부부가 같은 도시에 근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니 출산 기회도 많아졌다. 임신부에겐 56일의 휴가를 주고, 농촌의 산파들을 전문가들로 대체해 영아 사망률도 줄었다. 양로금 지급으로 노년 사망률도 감소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내전이 종식됐고 각지에 산재한 비적을 소탕해 비명횡사하는 숫자가 줄었다. 자본주의 국가에선 없애기 불가능한 창기(娼妓) 문제까지 해결해 이들도 가정을 꾸리게 됐다. 정부에서는 자녀가 많은 가정에 보조금을 주는 등 모든 여건이 출생률은 증가하고 사망률은 감소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대로 가면 식량과 취업, 생활 수준 등에서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인구 억제를 통한 인구 품질의 제고를 역설했다. 그의 ‘신인구론’은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58년 1월 마오쩌둥이 “인구가 많은 게 좋을까 아니면 적은 게 좋을까? 지금은 인구가 많아야 한다”고 한마디 했다. 이때부터 ‘많아야 좋다(人多好)’는 것이 인구 문제의 주류사상이 됐다. 마인추는 호된 비판을 받았고 60년 1월엔 베이징대학 총장직에서 쫓겨났다. 이후 집 안에서만 칩거하던 그는 79년 베이징대 명예총장과 인구학회 명예회장으로 복귀했다.
노년 인구의 사망률 감소를 걱정했던 마인추는 82년 100세로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23> 난징대학살의 주범 다니 히사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 제23호 | 20070818 입력
형장으로 향하는 난징대학살의 주범 다니 히사오. 장군 신분을 고려해 형구를 채우지는 않았다. [김명호 제공] |
1945년 11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중국 내 설립한 전범처리위원회는 베이징, 난징, 선양, 쉬저우, 지난, 타이베이 등 10개 도시에 전범구치소와 전범재판소를 개설했다. 그중 가장 관심을 끈 것은 이듬해 2월 난징에서 개정된 전범심판 군사법정이었다. 재판장 스메이위(石美瑜, 1918∼1992)와 5명의 심판관, 2명의 검찰관으로 구성된 난징 군사법정은 피고인들의 면면이 다른 지역을 압도했다.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의 주범 다니 히사오(谷壽夫, 1882∼1947)와 학살계획의 입안자, 중국인 죽이기 경쟁을 벌여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 지금의 每日新聞)에 대서특필됐던 일본군 장교 등 화제의 인물들이 중국의 특별 요청으로 도쿄에서 압송돼 왔기 때문이다. 이들 외에 거물급 중국인 첩자(漢奸)들도 난징 법정에서 심판을 받았다.
다니에 대한 심판은 2월 6일에서 8일까지 중산둥(中山東)로의 리즈서(勵志社) 강당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됐다. 개정 첫날 1000여 명이 방청석을 메웠고 법정 밖에는 스피커를 설치했다. 육군 중장 다니가 지휘하던 일본군 6사단은 중화문(中華門)을 통해 난징에 입성한 후 28건의 단체학살을 자행했다. 19만 명 이상의 무고한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살인 경기’를 벌였던 ‘황군(皇軍)의 영웅’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와 노다 쓰요시(野田毅)도 6사단 소속 장교였다. 다니는 난징 공격은 시인했지만 민간인 학살은 부인했다. 학살 현장에서 목숨을 건진 100여 명이 증인으로 출석했고 발굴된 유골들 이 증거물로 제출됐다. 만행 장면을 찍은 기록물도 법정에서 상영됐다.
마침내 47년 3월 18일 군사법정은 다니에게 총살형을 선고했다. 4월 26일 다니는 중국 헌병들에게 이끌려 법정을 출발했다. 중산(中山)로에서 10년 전 만행이 있었던 중화문까지 군용 트럭 위에 앉아 중국인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보기 위해 수만의 인파가 거리에 운집했다. 흥분한 모습을 보인 사람들은 없었고 거리는 정적에 휩싸였다. 트럭 위에 앉아 형장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은 지난날의 광란을 회상하는 담담한 모습이었다. 위화타이(雨花臺) 집행장에 도착한 다니는 중화문 쪽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