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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의 후예' 노르만이 세계사를 바꾼 2대 決戰 이야기

淸山에 2017. 5. 5. 07:32







 '바이킹의 후예' 노르만이 세계사를 바꾼 2대 決戰 이야기

교황을 포로로 잡아 지중해의 왕자로 군림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시비타테 전투.

그 13년 뒤의 해이스팅스 전투는 노르만 전사집단이 영국을 정복, 초일류국가로 가는 길을 연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중세 유럽의 三國志
 
  서기 900년대 초,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정착한 바이킹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문명화하여 유럽 최강의 騎士(기사)집단이 된다. 해적질을 하던 이들이 騎馬(기마)전술을 발전시켜, 보병 중심의 다른 군대를 눌렀다. 1066년 노르망디 공국의 월리엄 공은 잉글랜드로 쳐들어가 해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롤드 왕을 戰死(전사)시키고, 大勝(대승), 그해 성탄절에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였다. 윌리엄 정복왕과 노르만 후손들은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영국을 유럽 최강의 국가로 만든다. 노르만의 영국 정복은 영어와 佛語(불어)를 결합시켜 오늘날 영어가 세계 최고의 언어가 되는 길도 열었다.
 
  이보다 먼저 이탈리아 남부에서도 노르만 전사들의 정복사업이 진행중이었다. 1017년부터 본격화된 정복은 1130년 로베르 2세가 남이탈리아와 시실리를 통일, 왕으로 登極하기까지 100여 년이 걸렸다. 이렇게 세워진 시실리 왕국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富强(부강)한 나라가 된다. 바이킹의 피를 받은 소수의 노르만 전사들, 특히 오트빌(노르망디의 촌락) 출신 탄크레드 家門의 형제들이 지중해 문명의 심장부를 정복해간 이야기는 삼국지처럼 흥미롭다. 유럽에서도 최근에 와서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대목이다.
 
  11세기를 전후한 이탈리아 남부는 교황, 비잔틴, 신성로마제국, 롬바르디(게르만족의 일파), 아랍 세력이 각축하면서 여러 도시가 各自圖生(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었다. 노르만 전사들은 처음엔 용병으로 봉사하다가 나중엔 권력을 찬탈하는 방식으로 야금야금 남부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점령해가기 시작하였다.
 
  *999년: 노르만 전사들이 나폴리 남쪽의 도시국가 살레르노를 사라센 해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용병으로 나타난 것이 100여 년에 걸친 남부 이탈리아 정복 사업의 시작이다.
 
  *1017년, 이탈리아 동해안 몬테가르가노의 미카엘 천사 聖所(성소)를 노르만 순례자들이 참배할 때 바리의 롬바르드族(족) 계열의 영주 멜수스가 그들을 설득, 아풀리아를 다스리던 동로마제국(비잔틴)의 군대를 공격하도록 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노르만 戰士들은 남부 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傭兵으로 고용되었으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1046년: 노르망디 오트빌 家門의 로베르 기스카르가 남이탈리아로 와서 먼저 온 형제들과 함께 정복사업에 나서는데, 분열되었던 남이탈리아를 통일하는 主役이 된다. 용맹무쌍한 노르만 세력이 용병의 역할을 넘어 남부 이탈리아 권력투쟁의 키 플레이어로 등장하자 위협을 느낀 세력들이 1052년에 反노르만 연합전선을 구성한다(용병이 힘을 길러 주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다른 예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이다). 서로 적대적이던 교황, 비잔틴, 롬바르드 세력, 신성로마제국은 일단 노르만의 得勢(득세)를 꺾어야 한다는 데는 共感(공감)한다.
 
 
  노르만이 교황을 포로로 잡은 시비타테 決戰
 
  1052년 교황 레오 9세는, 독일로 가서 자신의 친척이기도 한 하인리히 3세 황제에게 援軍(원군)을 요청, 약 700명의 스와비아 보병을 얻어 돌아왔다. 그는 콘스탄티노풀의 동로마(비잔틴) 황제의 협조도 얻어 지원군을 받기로 하였다. 1053년 6월 레오 9세는 직접 연합군(비잔틴 군은 나중에 합류하기로 함)을 이끌고 노르만 세력 타도에 나선다. 교황 측 연합군은 약 6000명이었다. 보병이 다수고 기병이 보조 역할을 했다. 독일 및 이탈리아 인이 중심이었다. 노르만 전사들도 단결했다. 남부 이탈리아에서 각자 정복 사업을 벌이면서 반목하던 세 노르만 지도자들이 이때는 뭉쳤다.
 
  탄크레드와 첫째 부인 사이에서 난 험프리(아풀리아 영주), 둘째 부인 사이에서 난 로베르 기스카르, 아벨사의 영주가 되어 있던 리처드는 약 3000명의 기병과 500명 정도의 보병을 편성했다(이 노르만 병력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활동중이던 노르만 장정의 거의 전부를 모은 것이다). 이들은 교황 군대가 비잔틴 제국의 援軍(원군)과 합류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早期(조기) 공격을 결단했다. 노르만 군은 식량이 부족하여 굶으면서 전투를 해야 할 판이었다. 그들은 교황에 반기를 든 적은 없으므로 협상을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053년 6월18일 양쪽 군대는 남부 이탈리아 시비타테(Civitate)라는 들판에서 마주 섰다. 노르만 군은 우익에 중무장 기병, 가운데는 말에서 내린 기병과 弓手(궁수), 왼쪽에 기병과 보병 혼합군을 배치했다. 교황 연합군은 왼쪽에 이탈리아 부대, 오른쪽에 독일에서 데리고 온 스와비아 보병을 두었다.
 
  노르만이 先攻(선공)했다. 우익의 중무장 기병이 교황 측의 이탈리아 보병들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보병은 압도적인 노르만 기병의 돌격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추격 섬멸전이 전개되었다. 노르만의 中軍(중군)은 교황군의 스와비아 보병과 격돌했다. 키가 큰 스와비아 보병은 큰 칼을 잘 썼다. 사람을 세로로 兩斷(양단)할 정도였다고 한다. 노르만 중군은 스와비아 보병들의 철벽같은 방어진을 돌파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반격을 당해 守勢(수세)로 몰렸다. 이때 이탈리아 보병들을 추적하였던 노르만의 중무장 기병이 섬멸전을 끝내고 돌아와 배후에서 스와비아 군을 쳤다. 스와비아 군은 兩面(양면) 공격으로 붕괴, 노르만軍(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노르만 군은 교황이 머물던 시비타테 城門(성문)에 도착, 최후통첩을 보냈다. 항복하면 봐주고 저항하면 주민들까지 몰살시키겠다고 선언했다. 그 뒤 일어난 사태에 대해선 두 가지 說(설)이 있다. 하나는 교황이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城(성)을 나가 항복,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주민들이 살기 위하여 교황을 성문 바깥으로 내몰았다는 說(설)이다.
 
  노르만 군대는 교황을 베네벤토로 데리고 가서 아홉 달 동안 軟禁(연금)시켰다. 나중에 제1차 십자군 전쟁의 선봉이 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노르만 전사들은 교황에게 사과하고 융숭한 대접을 하면서도 여러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교황은 독일의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구원군을 보내줄 것이라 믿고 버티었으나 그들은 오지 않았다. 교황은 마침내 굴복했다. 노르만이 남부 이탈리아에서 구축한 기득권을 인정한 것이다. 레오 9세는 풀려나 로마로 돌아온 뒤 곧 죽었다.
 
  1059년 다른 교황 니콜라스 2세와 로베르 기스카르는 멜피(Melfi) 조약을 맺고 노르만의 남부 이탈리아 지배권을 公認(공인)했다. 기스카르를 아풀리아 公, 카라비아 公, 시실리 伯(백)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후 노르만 세력은 교황 편에 선다. 교황의 옹립에도 간여하였다. 당시 교황들은 내부 개혁(신부의 禁婚 등)을 하고, 주교 등 사제 임명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맞서는데 노르만이 개혁 교황 측에 힘을 실으면서 역사의 大勢(대세)를 탔다.
 
  시비타테 전투는 1066년의 헤이스팅스 전투처럼 세계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노르만의 남부 이탈리아 및 시실리 정복 사업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그동안 각개 약진하던 노르만의 남부 이탈리아 정복 사업은 이 전투에서 공을 세운 기스카르 중심으로 통합된다. 그의 동생 로베르(영어표기는 로저)가 시실리까지 정복하고 그의 아들 로베르 2세가 나폴리 남쪽의 이탈리아와 시실리를 통일한다. 1130년 로베르 2세는 교황으로부터 시실리 왕국의 왕으로 공인받았다. 이 왕국은 나중에 지배자와 이름은 바뀌지만(마지막엔 나폴리 왕국), 700년간 존속되었다.
 
  노르만이 비잔틴 세력, 교황 세력, 로마르디 세력, 그리고 신성로마제국 세력을 배제하고 이탈리아 남부와 시실리를 통합하여 세운 시실리 왕국은 '태양의 왕국'이라 불린다. 약150년간 유럽에서 가장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나라가 되었다. 노르만 인들은 사람과 나라를 다스리는 데 정통하였다. 이런 성공의 가장 큰 비결은 법치였다.
 
  노르만 전사 집단이 지중해 지역의 왕자로 등장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시비타테 결전 13년 후 이번엔 같은 뿌리를 가진 노르만 전사들이 잉글랜드로 쳐들어가 해이스팅스 전투에서 이긴다. 잉글랜드, 스콧랜드, 웨일즈, 아일랜드가 노르만 치하로 들어가면서 오늘의 영국, 그 기초가 다져진다. 노르만 전사들은 시실리 왕국처럼 잉글랜드를 잘 경영하여 유럽에서 가장 선진된 국가 조직으로 키운다. 같은 시기에 노르망디 출신 두 전사 집단이 남쪽과 북쪽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제도를 가진 나라를 만들었다는 점은 세계사의 한 경이이다.

 




해이스팅스 결전, 오늘의 영국을 만들다
    

*윌리엄 정복왕이 떠난 항구에서
  
  노르망디의 디브 수 메르 항구는 1066년 9월, 노르만 공국의 윌리엄 공이 이끄는, 약 7000 명의 프랑스 어를 쓰는 기사들과 약 2000 마리의 말이 약 700 척의 배를 타고 출항한 곳이다. 필자는 노르망디를 여행하면서 해안 휴양지 도빌에서 하룻밤을 자고 난 뒤 베이유로 가는 길에 이 항구를 찾았다. 디브 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평온한 모습의 작은 항구엔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 그 흔적은 없었다. 주민에게 이곳이 그곳이냐고 물었더니 '아니 외국인이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아느냐'는 표정이었다.
 
  1066년 윌리엄 공은 해롤드 왕이 즉위한 직후 잉글랜드 원정을 결심한다. 자신이 王位(왕위) 계승권이 있다면서 교황청에 로비하여 지원을 약속 받고 기사들을 모집한다. 자신의 휘하 기사들뿐 아니라 이웃한 브리타뉴, 프랑다스를 넘어 全유럽의 모험가들이 몰려 왔다. 모험심이 강한 유럽의 전사들에게 잉글랜드 원정은 일종의 벤처 투자 사업이었다. 윌리엄 공은 원정에 참여하는 기사들에게 성공하면 잉글랜드의 땅을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다.
 
   원정군을 편성, 유지하는 데는 대단한 軍需(군수)지원이 있어야 했다. 마크 모리스라는 학자의 계산에 의하면 디브 수 메르 항구에 집결한 7000명의 병력과 2000 마리의 말을 먹이는 데는 하루 28t의 밀가루와 하루 3만 갤런(3.78리터)의 물이 필요하였다고 한다. 이들에게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중세엔 상비군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다가 필요할 때 대규모 병력을 모집하는 식으로 하지 않으면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8월 초 노르만 군은 출항 준비를 끝냈지만, 날씨와 풍향이 맞지 않아 한 달 정도 기다려야 했다. 윌리엄 공은 속이 타 들어갔을 것이다. 700척의 대함대가 디브 항을 떠난 것은 9월12, 13일 중 하루로 추정된다. 바다는 거칠었다. 함대는 잉글랜드로 곧 바로 향하지 못하고 노르망디 연안을 따라 동쪽으로 약160km를 항해, 생벨러리 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보름 정도 날씨의 好轉(호전)을 기다리다가 9월27일 저녁 잉글랜드를 향해 출항하였다.
 
  노르만 군의 잉글랜드 점령 과정은 중세에서 가장 정확하게 기록된 사건이다. 베이유 자수에선 시각적으로 기록했고 여러 권의 從軍記(종군기)가 있어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윌리엄 공이 탄 旗艦(기함)은 너무 빨리 나갔다. 28일 아침 잉글랜드 해안으로 다가가는 데도 後續 (후속)함대가 보이지 않았다. 윌리엄 공은 그래도 태연하게 아침 식사를 맛있게 했다고 전한다. 곧 뒤따르던 함대가 나타나, 페븐시에 상륙했다.
 
  *영국의 운명, 그리고 세계사의 흐름을 하루에 결정한 해이스팅스 전투
  
  윌리엄 공은 배에서 바닷가에 내릴 때, 다리를 헛놓아 엎어졌다. 불길한 징조였다. 그는 두 팔을 뻗으면서 외쳤다고 한다. '내가 잉글랜드를 잡았다.'
 
  잉글랜드 왕 해롤드는 그때 북쪽 요크셔 지방에 있었다. 윌리엄 공의 상륙 사흘 전 이곳에서 決戰(결전)이 있었다. 노르웨이의 바이킹 왕이 수백 척의 원정군을 데리고, 동해안에 상륙했다. 그 또한 잉글랜드 왕좌를 노렸다. 남쪽에서 노르만 군의 상륙을 기다리던 해롤드 왕은 군대를 급히 북상시켜 스탬포드 다리에서 노르웨이 침략군을 만났다.
 
  ‘스탬포드 다리의 전투’로 알려진 이 싸움에서 노르웨이의 바이킹 군대는 전멸하고 왕도 죽었다. 대승을 거둔 해롤드 왕에게 노르만 군의 상륙 소식이 전해진 것은 10월1일 전후였다. 해롤드 왕은 강행군을 하면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10월14일 아침 해롤드 왕이 지휘하는 앵글로-색슨 군대와 윌리엄 공이 지휘하는 노르만 군대는 해이스팅스에서 마주 섰다. 해롤드 왕이 언덕의 능선을 차지했다. 노르만 군은 敵을 올려 다 보는 위치여서 불리하였다. 특히 노르만 군의 자랑인 기병 돌격이 어렵게 되었다.
  노르만 군은 3열로 섰다. 첫째 列은 弓手(궁수), 둘째 열은 중무장 보병, 셋째 열은 기병. 윌리엄 공은 이 기병 열의 한복판에서 지휘하였다. 잉글랜드의 기병은 보통 때는 말에서 내려 보병처럼 싸웠다. 이날 잉글랜드 군은 활 부대를 동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방패를 이어 붙여 방벽을 만들고 수비 자세를 취하였다.
  노르만 군은 먼저 활로 집중 사격을 시작했다. 잉글랜드 군은 방패로 화살의 폭우를 피했으나 사상자가 났다. 이어서 노르만의 중보병이 앞으로 나와 잉글랜드 군을 덮쳤다. 방패와 방패,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 함성, 비명이 戰場(전장)을 진동했다. 잉글랜드 군은 물러나지 않았다. 창과 도끼, 돌을 매단 몽둥이를 던지며 저항하였다. 노르만은, 중보병의 공격이 효과를 보지 못하자 기병을 보냈다. 기병돌격은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는 형국이라 큰 충격을 주지 못하였다.
 
  7000명의 戰士가 200만을 손에 넣다
  
  일진일퇴하는 백병전이 수 시간 계속되었으나 승부는 나지 않았다. 오후에 들어 공격하던 노르만 군의 左翼(좌익)이 철통같은 잉글랜드 군의 수비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윌리엄 공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노르만 군의 좌익이 무너져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수비만 하던 잉글랜드 군이 추격에 나섰다. 이 위기를 逆轉(역전)시킨 것은 윌리엄 공이었다. 그는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준 다음 후퇴하는 노르만 군을 수습, 반격에 나섰다. 잉글랜드 군은 유리한 高地(고지)를 버리고 추격에 나섰다가 노르만의 반격에 걸려 많은 전사자를 내고 돌아갔다.
 
  노르만 기병 전술은 몽골군과 닮은 점이 있었다. 전투 중 달아나는 시늉을 한다. 적은 추격하느라고 戰列(전열)이 흩어진다. 이때를 틈타 재집결, 반격을 감행, 흩어진 적군을 섬멸한다는 공식이었다.
 
  윌리엄 공은 해이스팅스 전투 막판에 이 기만전술을 썼다. 이런 전술은 고도로 훈련된 부대만 할 수 있다. 윌리엄의 직할 기병 및 보병부대가 유인에 동원되었다. 접전중 갑자기 등을 돌려 아래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잉글랜드 군은 수비전만 하다가 비로소 찬스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수비대열에서 이탈, 달아나는 노르만 군을 좇기 시작하였다. 수비하기 좋은 고지를 버리고 흩어지면서 내려왔다. 달아나던 노르만 보병과 기병이 집결하더니 갑자기 유턴했다. 반격이 시작되었다. 잉글랜드 군이 몰리기 시작하였다. 이 순간 잉글랜드 해롤드 왕이 전사하였다. 베이유 자수의 그림에 따르면 그는 화살을 눈에 맞고 죽었다. 왕이 죽으면 졸병들은 버틸 수가 없다. 잉글랜드 군은 무너졌다.
 
  쌍방의 병력은 각 7000명 쯤 되었을 것이다. 그날 반 정도는 죽거나 다쳤을 것이다. 특히 잉글랜드 군의 피해가 컸다. 잉글랜드 지배층을 대표한 기사단은 이 전투와 이어진 여러 전투에서 궤멸되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국가의 지배층이 전면적으로 교체되어 버린 희귀한 사례이다. 윌리엄 공은 1066년 런던으로 입성, 영국 왕으로 즉위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어를 하는 노르만 戰士들의 지배 하로 들어간 것이다. 7000명의 戰士(전사)들이 전투에서 이기자, 200만(당시 영국 인구)의 잉글랜드 人과 국토, 그리고 한 문명이 수중으로 들어온 셈이다. 세계사에서 보기 힘든 성공적 벤처 투자였다.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 이전 지금의 영국은 침공을 당하는 나라였다. 로마, 앵글로, 색슨, 바이킹, 노르만 세력이 차례로 이 섬을 침공하였다.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는 나라의 성격이 침략 받던 나라에서 침공하는 나라로 바뀐다. 18세기에 가면 해가 지지 않는 해양 제국이 되고 산업혁명과 민주발전의 모범으로서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 시스템을 만든다. 그 원동력은 노르만 지배세력의 국가 통치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