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취산 정상부는 큰 나무가 없어 시야가 탁 트인다. 북쪽으로 여수 국가산업단지와 묘도가 내려다보인다. 억세고 질긴 진달래의 운명
지난 4일 닷새 만에 다시 영취산을 찾았다. 찬란한 분홍 물결을 충분히 못 본 게 아쉬웠다. 이번에는 상암초교에서 출발했다. 축제 기간이라 봉우재 주변에는 이른 아침부터 인산인해였다. 등산로에 빈 틈이 보이지 않았다. 닷새 전과는 사뭇 달랐다. 길도 가팔랐고, 도솔암을 지나 진례봉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울퉁불퉁한 바위 길이었다. 가파른 벼랑, 바위 틈틈이 피어난 진달래꽃이 기암괴석과 어우러지며 절경을 빚었다. 봉우재~진례봉 코스가 돌고개~진례봉 코스보다 훨씬 남성적이었다.
여수시청에 따르면 이날 진달래 개화는 90%까지 진행됐다. 꽃만 많이 핀 게 아니었다. 분홍 빛깔도 더 진해졌다. 하늘에서 진한 분홍 물감을 끼얹은 것 같았다. 수줍은 소녀의 발그레한 낯빛을, 처녀가 빼입은 단아한 분홍 저고리를 떠올렸다면 너무 낡은 감상인 걸까? 어쨌든 진분홍 진달래는 사람의 가슴을 뛰게 했다.
1시간 만에 정상에 닿았다. 진례봉은 뾰족한 암봉이었지만 데크로드와 철계단이 있어 걷기에 어렵지 않았다. 정상에 서니 일망무제의 비경이 펼쳐졌다. 바다와 섬, 육지가 뒤섞인 여수의 독특한 지형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1960년대에 조성한 국가산업단지였다. 공장에는 육중한 탱크와 거미줄 같은 파이프가 빼곡했고, 굴뚝에서는 희뿌연 연기가 연신 뿜어져 나왔다. 분홍빛 산과 잿빛 공장이 어우러진 모습이 낯설었다.
영취산에 진달래 군락지가 생긴 게 산업단지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공장 매연으로 산이 산성화되면서 나무 대부분이 죽고, 억척스러운 진달래만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다. 김미정 문화관광해설사는 “영취산은 원래 나무가 자라기 힘든 돌산”이라며 “먼 옛날 큰불이 난 뒤 진달래가 산을 덮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고 설명했다.
무엇이 저 가멸찬 분홍 물결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라는 김훈의 문장만 계속 뇌리에 맴돌았다.
●여행정보=영취산 등산로는 다양하다. 돌고개~진례봉 2.2㎞, 상암초교~봉우재~진례봉 2.3㎞코스가 기본이고, 원상암·골명치 등으로 빠지는우회로도 있다. 진달래 감상이 목적이라면 상암초교나 흥국사로 진입해 봉우재까지만 다녀와도 된다.
종주 코스는 돌고개~진례봉~봉우재~흥국사로 이어지는 4.3㎞ 길이다. 약 3시간 소요. KTX를 타고 여천역에서 내리면 영취산이 가깝다. 서울시청에서 영취산 입구까지는 자동차로 약4시간30분 걸린다.
산행 뒤에는 여수의 진미를 맛봐야 한다. 봄철엔 도다리쑥국·서대회도 좋고, 밥상에 향긋한 돌산갓김치만 있어도 밥 한 그릇 뚝딱 비울 수 있다. 이번엔 장어탕을 먹었다. 교동 ‘진미장어탕’은 붕장어를 통으로 넣고 숙주·미나리와 함께 끓여낸다. 1만2000원. 061-664-9723. 새조개는 먹을 수 있는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여서동 ‘세자리’는 새조개 샤브샤브 한가지 메뉴만 다룬다. 새조개와 채소를 육수에 담가 먹은 뒤 매생이라면으로 입가심을 한다. 12~5월에만 식당을 연다. 새조개 샤브샤브 한 접시 8만원. 061-652-4828. 여수시청 관광과 061-690-38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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