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한기흥] 워털루 전투 200주년을 맞으며 한기흥 논설위원 입력 2015-01-03 03:00:00 수정 2015-01-03 03:00:00
한기홍 논설위원
팝그룹 아바의 ‘워털루’는 운명적인 사랑을 워털루 전투에 빗댔다. “어머, 나폴레옹이 항복한 워털루에서, 오예, 나는 아주 비슷하게 내 운명을 만났어요∼.” 올해 6월 18일이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몰락시킨 그 전투가 벌어진 지 꼭 200년이 된다.
세상을 혁명으로 들끓게 한 카를 마르크스도 나폴레옹이 없었다면 변호사 아버지 밑에서 명쾌한 논증으로 세상을 분석하는 기법을 배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폴레옹이 점령지마다 특권과 차별을 폐지한 덕에 유대인들은 금지됐던 전문직종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독일 유대인 공동체에서 살던 마르크스의 아버지 허셸 레비는 아예 국교회로 개종하면서 성을 마르크스로 바꿨고 법조인이 됐다.
나폴레옹이 펴낸 민법전은 만민이 법 앞에 평등하고, 모든 국민이 근로와 신앙 양심의 자유를 갖는다고 선언했다. 또 사유재산은 신성불가침하다고 천명했다. 이는 근대사법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토대 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물론 나폴레옹이 전쟁밖에 몰랐던 정복자로 숱한 사람들에게 참혹한 고통을 준 것도 분명하다.
나폴레옹의 부상은 유럽의 내셔널리즘을 크게 자극했다. 그는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 혁명 정신을 유럽에 확산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것을 정당화했다. 절대왕조를 무너뜨리면서 국민의 자의식에 눈을 뜬 프랑스인들은 애국심을 호소하는 나폴레옹에게 열광했다. 이에 맞서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곳곳에서도 민족의 통일과 부흥을 외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1815년 6월 18일 프랑스군과 영국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연합군이 맞붙은 워털루 결전에서 나폴레옹은 참패했다. 어느 나라도 홀로 프랑스를 이기기 어려웠지만 힘을 합쳤기에 천하의 나폴레옹을 꺾을 수 있었다. 역사를 바꾼 전투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것인가는 후대의 몫이고 해석은 분분하다. 나폴레옹은 연전연승할 때 “유럽에 하나의 법전과 한 개의 대법원, 한 가지 통화, 같은 무게와 측량 단위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유럽의 모든 민족을 하나의 백성으로 만들고, 파리를 유럽의 수도로 만들 것”이라고 호언했다. 하지만 죽기 전엔 “나는 유럽을 군대로서 강하게 다룰 수밖에 없었으나 오늘날의 유럽은 설득을 해야 한다”며 아들인 나폴레옹 2세에게 자신처럼 하지 말고, 그와 반대로 평화롭게 다스리라는 말을 남겼다.
나폴레옹이 꿈꾼 대로는 아니나 실제로 유럽연합이 출범한 것은 1993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가 또 다른 전쟁을 막기 위해 제안한 지 47년 만에 유럽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하나가 됐다. 새해에 내셔널리즘이 더욱 고조될 것이란 우려가 크다. 동북아에서도 중국 일본 러시아와 남북한이 모두 내셔널리즘으로 뜨겁다. 핵무기를 갖고 있거나 막강한 핵 잠재력, 재래식 군비를 갖춘 나라들이다. 게다가 내셔널리즘을 부추기며 군사력 증강에 몰두하는 야심만만한 정치인들도 역내에 여럿이니 지금이 어느 시대냐고 안이하게 넘길 일이 아니다. 내셔널리즘이 군사력과 결합하면 폭발력이 얼마나 큰지는 나폴레옹 이후 세계사가 보여준다. 동북아가 위태로운 건 그래서다.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 태어났다. 광복절에도 전쟁과 평화를 생각하며 그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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