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금요일]
저무는 '런던 금값' 시대 [중앙일보] 입력 2014.06.20 02:26 / 수정 2014.06.20 02:27
영국서 짐 싸는 황금의 경고 "속지마, 달러는 종이일 뿐이야"
학자들은 날 ‘Au’라고 표시하더군. ‘빛나는 새벽’이란 뜻의 라틴어 ‘아우룸(aurum)’에서 따왔다지. 원자번호 79, 나 금(gold)일세. 물속에서든, 공기 중이든 녹슬지 않는 도도함이 나의 치명적 매력이지. 게다가 난 세계 어느 곳에나 있다네. 교역의 매개수단, 화폐가 된 건 당연했지.
인간과 함께해 온 지난 6000년. 영광과 오욕이 엇갈렸지. 한데 이제 다시 길을 떠나야 하게 생겼다네. 95년이나 정든 런던. 1919년 9월 12일 아침이었지. 전 세계 내 형제가 모이던 런던 세인트 스위딘 가의 로스차일드 사무실이었네. 고풍스러운 오크 탁자에 5명의 큰손이 둘러앉았어. 각자 앞엔 작은 유니언잭(영국 국기)이 놓였지.
의장석의 로스차일드가 먼저 내 몸값을 부르더군. 몇 차례 흥정이 오갔네. 오전 10시30분 5명이 일제히 탁자 위 유니언잭을 내렸어. 사자와 팔자가 맞아떨어진 거야. 1트라이온스(금 무게 단위·1트라이온스=31.10g)에 4파운드18실링9펜스(20.47달러)! 전 세계에서 내 몸값 기준으로 통하는 ‘런던 금값(London Gold Fix)’이 탄생한 순간이었네. 훗날 뉴욕·이스탄불·상하이·도쿄 등지에도 거래소가 생기긴 했지. 그렇지만 전 세계 중앙은행, 광산업자, 보석상 할 것 없이 내 몸값 기준치는 ‘런던 금값’을 써왔다네. 나를 근거로 만든 파생상품 가격도 이걸로 매겼지. 68년부턴 뉴욕거래소가 문 여는 오후 3시에 한 차례 더 가격을 발표해 왔지. 런던이 나의 종주국 노릇을 하게 된 연유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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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돈벌이가 안 된다며 로스차일드가 ‘5인의 원탁 회의’ 자리를 바클레이스은행에 팔아먹은 뒤론 전화 통화로 값을 정하고 있지만 방식은 같아. 1초에 수만 번 주식 거래가 일어나는 광속의 시대, 5명이 작당해 내 몸값을 정해 왔다니 놀랍잖은가? 그래. 가격 조작설이 끊이질 않았지. 조마조마했는데 바클레이스의 얼간이가 기어이 사고를 쳤다네.
2012년 6월 28일이었어. ‘5인 회의’에서 허수 주문으로 ‘런던 금값’을 인위적으로 끌어내렸다가 들켰지 뭔가! 지난달 영국 금융감독청(FSA)으로부터 450억원이란 벌금 폭탄이 날아들었지. 꼴랑 40억원 벌고 10배 벌금을 물었으니 쯧쯧. 덩달아 ‘5인 회의’가 정하는 ‘런던 금값’마저 도마에 오르고 말았다네. 호시탐탐 ‘런던 금값’ 자리를 넘봐 온 미국 친구들, 가만 있었겠나. 소송 걸고 난리야. 미국과 독일 금융당국도 칼을 빼들었어. ‘런던 금값’의 운명도 이젠 다한 듯싶으이.
내 동생 은도 런던에서 짐을 싸고 있네. 1897년부터 ‘3인 회의’가 ‘런던 은값’을 발표해 왔어. 한데 좌장 격인 도이체방크가 두 달 전 폭탄선언을 했어. 오는 8월 14일까지만 ‘3인 회의’에 참여하겠다고 말일세. 117년 이어온 ‘런던 은값’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니! 벌써 세계 은 파생상품 시장은 파랗게 질렸네. 대체 가격이 안 나오면 시장은 무너져. 여기다 ‘런던 금값’마저 끊긴다면 한 세기를 풍미해 온 런던 시대도 막을 내리겠지.
벌써부터 시카고상품거래소(CME)가 런던 ‘5인 회의’ 자리를 눈독 들이나 보데. 하지만 시카고나 뉴욕으로 가고 싶진 않군. 엉클 톰(미국)은 ‘금본위제’라는 믿음을 저버린 배교자야. 44년 7월 22일 톰의 휴양지 브레튼우즈에 44개국 대표가 모였을 때만 해도 톰은 나의 충직한 신도였어. 전 세계 내 형제 75%는 켄터키주 포트녹스 저장고에 모셔져 있었지. 브레튼우즈에서 달러는 나와 맞바꿀 수 있는 유일한 화폐가 됐다네. 그렇지만 톰이 멋대로 찍지 못하게 나를 족쇄로 채워놓았지.
한데 이게 애당초 모순이었네. 전후 세계경제를 먹여살릴 여력이 있는 건 톰뿐이었어. 흥청망청 달러를 풀었지. 전쟁통에 나를 다 잃었던 유럽은 달러가 들어오자 족족 나와 바꿔 갔어. 포트녹스 저장고도 점점 비어 갔네. 게다가 톰은 베트남전쟁에 정신이 팔려 있었지. 달러를 막 찍어야 했는데 나란 족쇄가 거추장스러워진 거야. 결국 71년 닉슨 대통령이 달러와 나의 맞교환(태환) 의무를 헌신짝처럼 내던지더군. 급기야 76년 자메이카 킹스턴 회의에서 난 화폐의 자리에서마저 쫓겨났어. 공식적으로 난 더 이상 화폐가 아니라네. 철·구리와 동격인 ‘상품(commodity)’이 된 거야.
나의 시대는 저물고 달러의 시대가 열렸다는 거야. 그렇게 깨춤 추더니 2008년엔 꼴 좋더군.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라고 하데. 그 바람에 달러는 종이일 뿐이란 불편한 진실이 살짝 드러났지.
달러는 곤두박질하고 내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네. 온 세상이 다시 내 앞에 무릎을 꿇더군. 한데 배교자의 소굴인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반전의 음모를 꾸몄어. ‘양적완화’라는 수사로 혹세무민하면서 달러를 막 찍어댄 거야. 그 바람에 나를 향한 믿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네. Fed의 음모를 깨뜨려 줄 흑기사는 과연 없을까? 난 내심 왕서방(중국)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네. 왕서방은 4조 달러나 되는 외환보유액을 쌓아두고 있지. 한데 그게 거의 대부분 미 국채야. 나는 고작 1.1%밖에 안 돼. 유럽은 외환보유액의 60% 이상을 나로 채우고 있다네. 왕서방이 유럽을 따라간다면 어떻게 되겠나. 이미 장신구용이나 투자 수요론 세계 최대 큰손이 됐지. 런던을 떠나면 난 이제 한물 갈 거라고 수군댄다지? 과연 그럴까. 굳이 왕서방이 아니더라도 온 세상에 넘치는 달러는 이미 인플레이션이란 악동을 잉태하고 있을지 몰라. 내 분신이기도 한 그가 태어나는 날, 세상은 날 다시 보게 될걸세. 두고 봐.
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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