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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품었던 여인 장칭, ‘마지막 자유’는 사과 따기

淸山에 2013. 10. 27. 15:14

 

 

 

 

 

태양 품었던 여인 장칭, ‘마지막 자유’는 사과 따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45>

김명호 | 제346호 | 20131027 입력  

 

 

 

 

마오쩌둥 사후 마오와 후계자 화궈펑의 사진이 중국 전역에 나란히 내걸렸다. 1977년 1월에 완성된 마오와 화궈펑의 표준 초상화. 한동안 부자관계라는 설이 나돌 만큼 생김새가 비슷했다. [사진 김명호]  


문혁시절 마오쩌둥과 4인방은 군과 언론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마오가 세상을 떠난 후 군은 당 원로들에게 순종했다. 4인방의 몰락은 시간문제였다.

 

화궈펑의 제안으로 예젠잉이 기획하고, 왕둥싱이 주관한 4인방 체포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것도 30분짜리 단막극이었다. 워낙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다 보니, 행동조장의 구술이 있기 전까지 달 밝은 가을밤, 중국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일을 놓고 수십 년간 온갖 추측들이 난무했다.

 

마오쩌둥 사망 당시 베이징에는 13명의 정치국원이 있었다. 홍위병들에게 얻어맞아 식물인간이 된 원수 류보청(劉伯承·유백승)과 4인방을 제외한 8명이 4인방 제거를 화궈펑에게 건의했다. 표결로 처리하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화궈펑과 예젠잉은 묵살했다. “그간 4인방은 정국을 좌지우지했다.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우리가 다수라도 안심할 수 없다. 이런 일은 참여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베이징을 떠나지 말고 소식을 기다려라.”

 

1976년 10월 6일 오후 7시10분 남짓, 4인방 체포를 위해 중난하이(中南海)의 화이런탕(懷仁堂)에 도착한 예젠잉을 왕둥싱이 영접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배치를 끝냈습니다.” 예젠잉은 신중한 모략가였다. 사방에 눈길을 준 후 “우리는 배수진을 친 거나 마찬가지”라며 36계의 한 구절을 속삭였다. “적의 가장 견고한 부분을 공격해서(催其堅), 상대편 두목을 제압하면(奪其魁), 그 조직은 해체된다(解其體).”

 

예젠잉은 시인이기도 했다. 애독자였던 왕둥싱은 이날 따라 예젠잉의 시 중에서 적당한 대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두보(杜甫)의 시로 화답했다. “사람을 쏘려면 말부터 쏴야 하고, 도둑을 잡으려면 괴수부터 잡아야 한다(射人先射馬, 擒賊先擒王).”

 

예젠잉은 만족했다. “오늘 밤 중요한 무대가 펼쳐진다. 네가 노래해라. 나는 들으며 즐기겠다”며 농담을 건넸다. 왕둥싱은 “저는 당 중앙의 명령에 따를 뿐”이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4시간 전, 왕둥싱은 4인방 체포 담당조를 조직했다. “당 중앙의 결정사항이다. 오늘 밤 4인방에 대한 격리심사를 실시한다. 당과 국가의 운명이 우리 손에 달렸다.” 간 큰 부하가 있었다. “누구의 명령을 받았습니까?” 당연한 질문이었다.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이다. 화궈펑 총리와 예젠잉 원수의 명령이다.” 이 한마디에 다들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왕둥싱은 준수사항을 선포했다. “비밀을 엄수해라. 누설했을 경우 엄중한 제재를 각오해라. 명령에 복종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총성이 울려선 안 된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가족은 물론, 외부와의 접촉을 금한다. 6시30분까지 정해진 위치에 가서 대기해라.” 또 질문이 있었다. “왕훙원 부주석은 항상 총을 차고 다닙니다. 사격 솜씨도 백발백중입니다. 사격을 해오면 어떻게 할까요?” “그래도 총을 쏘지 마라. 몰려가서 때려죽여라. 맞아 죽어도 너희들 책임이 아니다.”

 

 


 체포 몇 시간 전, 사과를 따며 생애 마지막 자유를 누리는 장칭. 1976년 10월 6일 오후 5시 무렵.   

비슷한 시간, 장칭은 측근들과 베이하이(北海)공원을 산책했다. 가을 햇살이 따가웠다. 사과나무에 눈길이 갔다. 나무에 올라가 사과를 땄다. 다섯 광주리에 탐스러운 사과가 가득하자 천천히 내려와 옷깃을 털었다. “그만 가자. 머지않아 성대한 축제가 열릴 거다. 나머지는 그때 쓰게 내버려두자.” 남편을 잃은 지 27일, 한때 태양을 품었던 62세 여인이 누린 마지막 자유였다.

 

7시45분, 회의 시작 15분을 남기고 화궈펑이 도착했다. 화궈펑과 예젠잉이 소파에 앉자 왕둥싱은 자리를 떴다. “저는 정치국 상무위원이 아닙니다. 병풍 뒤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겠습니다.”

 

장춘차오가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행동조원들에게 몇 대 얻어터지며 끌려온 장춘차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화궈펑이 자리에 앉은 채 문건을 읽어 내려갔다. “너는 중앙의 경고를 무시하고 당파를 결성해 불법활동을 자행하며 당권을 찬탈하려 했다. 당 중앙은 너의 격리심사를 결정했다. 즉각 집행한다.” 잠시 후 왕훙원이 단정한 복장에 번쩍거리는 구두를 신고 나타났다. 행동조들에게 제압당하자 “뭐하는 짓들이냐. 나는 회의에 참석하러 왔다”며 저항했지만 잠시였다. 장춘차오와 비슷한 절차를 밟았다. 끌려 나가며 가볍게 탄식했다고 한다. “너희들이 이렇게 빨리 손쓸 줄은 상상도 못했다.”

 

왕훙원과 장춘차오, 4인방 중 두 명을 10분 만에 처리한 예젠잉과 화궈펑은 뜨거운 물수건과 진한 차로 피로를 풀었다. 남은 건 야오원위안과 장칭이었다. 상무위원이 아닌 두 사람은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