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그전까지 제가 작성했던 유럽각국의 근현대사 편을 종합해 링크하겠습니다.
<껌날두의 근현대사 시리즈 영국,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네덜란드 편> 보러가기▼ (순서대로)
제 1편. 영국
제 2편. 프랑스
제 3편. 스페인
제 4편. 이탈리아
제 5편. 네덜란드
이번편은 제목대로 대항해시대의 강국 '포르투갈'입니다. 원래 이 시리즈를 쓰기로 결심했던게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
플레이할 수 있는 '유럽' 국가들은 전부 해보자. 라는 각오였는데 오늘 포르투갈을 끝으로 유럽 6국은 모두 완료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편은 '오스트리아'로 정했는데 나중에 독일을 써보고 싶습니다만.. 예전에 어떤분이 올리기도 하셨고
또 독일 역사가 매우 복잡해서 일단 고민중입니다.
아래 사진은 이탈리아편부터 추가된 유럽지역 구분입니다. 서+남유럽과 북+동유럽으로 매우 단순한 구분입니다.
(작업이 원할히 이루어질라면 애매하고 복잡한 유럽의 지역구분을 보다 단순화 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에..)
제 시리즈를 조금이라도 보신분이면 아실겁니다.
※ 지난 네덜란드편에서 어처구니님과 다른분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지역구분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그리스 등)
그리스가 '서+남유럽'으로 편입되었습니다. 터키는 유럽이 아니므로 제외합니다.
늘 그렇듯이 소개할려는 국가의 국가國歌부터 들으시겠습니다.
포르투갈도 스페인만큼 꽤 웅장하군요.
그리고... 포르투갈 하면 역시.
인류의 역사에 가장 큰 획을 그은 시기. 바로 '대항해시대'가 떠오르죠.
바로 위 영상이 바로 그 포르투갈의 영광의 시대를 찬미하는 영상입니다. 노래는 역시.. '1492'의 바로 그 노래죠.
영상 볼 시간이 없으신분은 아래 노래나 위의 영상만 키고 글 읽으셔도 좋습니다.
뭔가 낯설지 않다.
(읽으시면서 들으시면.乃)
이제 바로 그 포르투갈이란 나라의 근현대사를 집중적으로 탐구해보겠습니다.
포르투갈의 국기
국기의 문장을 구성하고있는 노란 구체가 바로 항해의 필수도구인 '혼천의'이다.
포르투갈인에 의해 열린 '대항해시대'를 그들이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 보여준다.
2:3의 비율로 국기를 구성하는 짙은 녹색과 빨간색은
1910년 10월 5일에 일어난 '공화당 혁명'의 강령에 의해 채택된 것이다.
녹색은 군주제가 아닌 공화정으로 포르투갈을 통치하겠다는 애국심,
빨강은 혁명과정에서 흘린 희생자들의 피를 상징한다.
포르투갈의 국장
혼천의 안에 들어가있는 문장안의 7개의 노란성들은 포르투갈이 무어인들에게서 되찾은 포르투갈의 7개성을 의미하며,
가운데 흰색 바탕의 파란 방패는 아폰소 1세Afonso Henriques가 무어인들과의 전투인
'Batalha de Ourique오리케 전투'에서물리친 5명의 무어인왕과
그때 방패에 수호문장으로 그려져있던 5가지 예수의 성흔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황금 올리브가지는 포르투갈의 전성기인 포르투갈제국때의 영광을 상징한다.
포르투갈의 위성지도. 왼쪽이 바로 대서양이다. 오른쪽은 당연히... (이 지도만 봐도 어디론가 뻗어나가고 싶다.)
유럽인에게는 영광과 부를, 유럽을 제외한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치욕과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전 세계의 역사를 단숨에 뒤바꾸어 버린 역사가 시작된 땅이다.
포르투갈에 의해 촉발된 탐험은 시간이 흐를수록 금과 은, 세계의 부를 착취하는 식민통치의 잔재로 변질되었으며
이것은 유럽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근대,현대로 가는 험난한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그리고, 이 땅에서 항해가 시작되었다.
Grandes Navegacoes
(그란졔스 나베가소-i스)
대항해시대 大航海時代
현 인류의 근,현대역사의 밑거름이 된 대항해시대 (1492~15세기 말)
스페인보다 빨리 자국에서 무어인들을 추방하는데 성공한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국경을 확정짓고 수도를 북부의
'기마랑이스(Guimaraes)'에서 현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Lisboa)'로 천도한다.
포르투갈인들은 독립 후 이웃나라인 스페인의 힘에 눌려 자국을 지키는데도 벅찰 지경이었으나,
건국왕인 '아폰수 1세'의 통치하에 빠르게 국내사정이 안정되고 스페인과의 국경확정조약과 교황으로부터
정식 독립국가승인도 확인받음으로써 국가의 틀을 갖추어 나간다.
그 뒤 아폰소 1세와 그 뒤의 포르투갈의 왕들은 일찌감치 포르투갈이 부강해지기 위해선 '바다로 뻗어나가는 것'
이라고 생각하였고, 이는 매우 정확한 판단이었다.
이후 역대 왕들의 지원을 받아 탄생된 앞선 조선기술력과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 그에따른 노력으로
한 때 스페인을 제치고 유럽 제 1강국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대항해시대를 주름잡고 한 때 전세계를 호령했던 포르투갈 왕국
(Reino de Portugal 1492~1910)
]여기가 끝
포르투갈 왕국의 국장
1139년 건국왕 '아폰수 1세'에 의해 건국된 포르투갈 왕국은 먼저 해양산업, 특히 '선박제조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는 앞서 말한대로 '포르투갈의 발전을 위해선 해양으로 나가야 한다'라는 역대 왕들의 신념과 국정인사들의
일관된 견해였다.
그리고 그 중심으로 바로 '항해왕자 엔히크'가 있다.
비제우 대공 동 엔히크 왕자(Infante Dom Henrique, Duque de Viseu, 1394년 3월 4일~1460년 11월 13일)
<항해왕자 엔히크>
포르투갈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동시에 사실상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를 일으킨 선구적인 인물. 바로 그가 엔히크 왕자이다.
엔히크 왕자는 포르투에서 아비스 왕가의 시조 포르투갈의 주앙 1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그는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은 거의 없음을 일찌감치 깨닫고 광활한 대서양을 개척할 생각을 품게된다.
엔히크 왕자는 가장 먼저 후방을 안정시켜야 함을 인지하고 모로코의 무어인들을 선제공격하여 '세우타'시를
획득한다.
이때 엔히크 왕자가 함락시킨 '세우타(Ceuta)'시가 도중에 스페인-포르투갈 동군연합으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스페인령'으로 남아있다.
때문에 스페인이 줄기차게 반환을 요구하는 '영국령 지브롤터'에 대해 영국은
'스페인이 점유하고 있는 북아프리카의 세우타와 멜리야(또다른 북아프리카의 스페인령 도시)를 모로코에
먼저 돌려준다면 지브롤터 반환에 대해 고려는 해볼 수 있다...' 이라고 맞받아 치고있다.
(세우타와 멜리야는 모로코가 스페인에 줄기차게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스페인이 현재까지도 북아프리카에 점유하고 있는 세우타시의 깃발,
엔히크를 기려 스페인령임에도 시의 상징인 깃발에 '포르투갈 국장'이 새겨져 있다.>
북아프리카의 무어인 공략에 성공에 힘입어 엔히크 왕자는 본격적으로 정복사업에 착수하게 된다.
엔히크 왕자는 그 후현재 포르투갈령인 대서양의 '아조레스 제도'와 '마데이라 섬'을 발견하고 포르투갈령으로 삼는다.
서아프리카에도 눈을 돌린 그는 현 스페인령인 카나리아 제도를 발견하고 더 남쪽의 '카보베르데 제도'를 식민지로
삼는다. (카보베르데는 포르투갈어로 '베르데 곶'이라는 의미다. 베르데 곶은 서아프리카 최서단의 뾰족한 곶이다.)
그리고 그는 서아프리카의 수많은 포르투갈 식민도시를 개척하는데도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엔히크 왕자의 지원으로 결성된 수많은 포르투갈의 원정탐험대는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희망봉까지 가는 항로를 발견,
독자적인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는데 성공하여 차후 동아프리카, 인도까지 이어지는 포르투갈 해상교역루트를
완성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또한 그는 엔히크는 사그르스의 ‘빌라 두 인판트(Vila do Infante, 왕자의 마을)’에 항해가와 지도업자들을 모아
이들의 후원자가 되어 포르투갈이 대항해 시대를 열 수 있게 하였다.
이 숙련된 기술자들은 항해학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특히 그중에서도 선박에 대한 기술력의 혁신으로 나타내게 된다.
결국 이것은 초기 대항해시대를 주름잡게 될 '카락', '캐러벨' 등의 우월한 성능의 선박개발과 16~18세기까지 포르투갈뿐 아니라 유럽 해상국가들의 주 선박으로 쓰이게 될 '갤리온' 선박등의 성능개선을 가져오게 된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포르투갈에서 개발한 '카락' 선박을 중심으로 한 선단으로 항해했다.)
콜럼버스가 항해한 선박이 바로 포르투갈 기원의 '카락'인 점을 생각해볼때, 당시 포르투갈의 선박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잘 알게 해준다.
(카락은 영어로 'Carrack(캐럭)', 스페인어로 'Carraca(카라카),혹은 'navio(나비오)', 원조국 포르투갈에선 'Nau(나오)'로 불렸다.)
콜럼버스가 항해했던 캐럭선인 '산타 마리아(Santa Maria)호'
복원된 '산타 마리아' 호
카스티야 문장이 걸려있는것으로 보아 이것은 스페인에서 복원된 듯 하다.
실제 나오(카락)이 정박해있는 모습.
포르투갈 국기가 달려있는것으로 보아 산타마리아호가 아닌 나오의 원형 그대로 복원한 것 같다.
이와 같은 앞선 선박 개발로 인해 포르투갈은 아직은 힘이 미약한 스페인 해군의 경쟁을 물리치고 아프리카 서부의 여러 식민지를 개설하는데 성공하고, 이에 탄력을 받아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는데 성공한다.
최초의 대항해시대 인, 항해왕자 엔히크가 서막을 열고 서양이 동양을 앞지르기 시작한 바로 그 시점.
그 업적을 물려받은 사람은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스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s)'의 업적이었다.
'희망봉을 발견한 바르톨로뮤 디아스'
리스본 태생인 그는 항해왕자 엔히크를 깊이 존경하고 있었으며 일찍이 그처럼 해양을 통한 부국강병을 이루고 싶어했다.
마침내 국왕인 주앙 2세(Joao II) 로부터 '전설속의 프레스터 조안 왕국을 발견하라!' 라는 칙명을 하사받고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제국이 버티고 있던 소아시아와 근동지역을 피해 아프리카를 돌아 현재의 '에티오피아'인
기독교 왕국 프레스터 조안 왕국을 발견하기 위해,
1487년 리스본을 출항해 마침내 1488년 2월경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발견하는데 성공하지만
선원들의 폭동기미와 식량부족, 당시까지 미지의 세계였던 인도로 가는 항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결국 희망봉에서 회항하게 된다.
디아스의 항해
여기까지의 루트는 이미 엔히크왕자가 후원한 원정대들이 건설한 포르투갈 식민도시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항해할 수 있었다.
그 뒤 포르투갈로 귀항한 디아스는 주앙 2세에게 '폭풍의 곶'만 돌면 인도로 가는 길이 있음을 확신한다.
하지만 그 곶은 너무나 사나운 기후와 험한 조류때문에 더 이상 나가는것은 극도로 위험하다.라고 보고하였고
후에 포르투갈 국왕은 '폭풍의 곶(Cabo Tormentoso)이 아닌 희망봉(Cabo da Boa Esperanca)으로
수정하라.' 라고 칙령을 내린다.
그렇게 해서 남아프리카의 유명한 관광지이자 아프리카의 희망봉은 아직까지 당시 수정된 이름 그대로 불리고있다.
(참고: 아프리카의 최남단은 희망봉에서 150여km 떨어진 '아굴라스 곶')
<Cabo da Boa Esperanca, Cape of Good Hope. 희망봉>
토르데시야스 조약(스페인어:Tratado de Tordesillas,
포르투갈어:Tratado de Tordesilhas 트라타도 데 토르데질랴스)
수많은 항해자, 그 중에서도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인들의 식민지 개척이 활발했다.
그들은 이미 콜럼버스와 엔히크왕자, 디아스에 의해 존재가 확인된 남아메리카와 서아프리카에서
무작위로 식민지를 세워 나가기 시작했고, 그 중 일부 식민지에서 양국 군대끼리 충돌하는 사태도 벌어진다.
이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원활한 식민지 개척과 관리를 위해 상호 조약을 맺을것을 구상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이다.
조약 선언문
당시 제작된 세계지도, 포르투갈인이 식민지로 삼은 아프리카들의 식민도시들이 빼곡한 점이 인상적이다.
(당시 포르투갈 국기가 꽂혀있다.)
포르투갈의 식민도시들은 내륙까지 깊숙히 파고드는 스페인의 식민정책과는 사뭇 판이했다.
좁은 국토때문에 어쩔수없는 국력의 차이와 적은 인구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쪽의 '파란선'이 바로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인한 세력 구분선이다.
스페인의 토르데시야스에서 맺은 이유로 그 이름이 명명된 이 조약은 '세계 최초로 서구 열강이 제멋대로 지구상
영토를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조약이 되었다.
(이후 이 조약은19세기 '제국주의'의 전성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이 선례를 참고하는데 아주 좋은 자료가 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대항해시대 최초의 해상 강국이자 열강이었던 이 두 세력에 의해 전 세계는 분할되기 시작한다.>
점선이 원래 스페인출신인 교황 알렉산더 6세가 스페인에 유리하도록 일방적으로 선포한 '식민지선',
두번째 선이 양국간 협상에 따라 재조정된 '식민지선'이다.
이 조약은 두 강국이 식민지를 끝없이 확장해가던 '대항해시대'의 전성기인 1529년에 '사라고사 조약'으로 갱신된다.
그 후 포르투갈의 또다른 항해자인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가 선구자인 디아스의 업적과 조언에 따라
유럽인들이 꿈에도 그리던 인도에 유럽인 최초로 상륙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바스코 다 가마의 초상화
바스코의 항해루트
바스코 다 가마는 1498년 인도의 고아에 도착하여 고아를 포르투갈의 영토로 선포하고 일부 상인을 남겨둔채
그토록 찾아 헤매던 후추를 실고 귀환하게 된다.
그러나 과한 욕심으로 저물자 고후추로 채운 항해에서 때마침 몬순(인도양 계절풍)을 만나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때 다 가마는 선원의 절반이상을 괴혈병과 기타 질병등으로 잃고 1499년 다 가마가 승선한 배를 포함한 겨우 2척만이
포르투갈로 귀국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때 가져온 후추는 유럽인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수백배의 이익을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본격적인 유럽인의 해외 식민지 경영에 뛰어들게 되는 결정적인 시점이었다.
<후추와 후춧가루. 이것이 바로 대항해시대와 유럽의 식민팽창주의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후에 바스톨로뮤 디아스와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는 많은 포르투갈의 항해자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으며,
결국 또다른 포르투갈인인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함대가 '세계 최초로 세계일주에 성공' 하게 된다.
(마젤란이 끝까지 세계일주에 성공해 유럽에 당도한것은 아니나,
그의 함대중 일부가 살아남아 스페인으로 돌아옴으로써 마젤란의 업적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하지만 마젤란이 죽기직전에 도착한 필리핀제도는 생전에 와본적이 있는 인도네시아의 '몰루카제도'보다
더 서쪽에 있는 곳이었으므로 사실상 마젤란이 세계일주를 한 것이 맞다고 볼 수 있다.)
인류 최초의 세계일주자, 페르디난드 마젤란
(포르투갈어 '페르낭 드 마갈량이스 'Fernao de Magalhaes')
<마젤란의 초상화>
<마젤란의 항해도>
마젤란은 또한 포르투갈의 왕실에 인도와의 향신료 중계무역을 허가해달라는 요청을 3번이나 거절당하자
불타는 열망을 참지 못해 결국 스페인으로 망명하게 된다.
스페인으로 망명한 마젤란은 곧바로 스페인 국왕이었던 '카를 5세(스페인: 카를로스 1세)'의 원조를 받아
'남아메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세비야를 출항한다.
험난한 항해끝에 대서양의 험하고 난폭한 날씨와는 너무도 대조되는 평온한 날씨와 잔잔하면서도 끝이 없을 정도로
거대한 태평양을 유럽인 최초로 발견하게 되고, 이에 감탄한 마젤란은 '평온하고 광대한 바다'라는 뜻의
'Mar Pacifico(太平洋)'이라는 이름을 직접 붙인다.
포르투갈 제국, 영광, 그리고 몰락
대항해시대를 통해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간 포르투갈 항해자들은 오세아니아를 제외한 전 지구상에
식민지를 건설하게 되었다.
초기 항해자들은 인도와의 무역을 독점하며 어마어마한 수익을 창출해내는 '향신료무역'을 바탕으로
막대한 부를 쌓게 된다.
이는 곧 포르투갈 경제의 전면적인 부흥으로 이어졌으며 유럽 제일국의 지위를 다투게 되는 포르투갈 역사상 가장
전성기가 되는 시기를 맞게된다.
<대항해시대 당시 포르투갈 제국과 19세기 말까지의 최대 영토>
제국은 눈부시게 팽창하여 15~16세기의 서아프리카,동아프리카 해안도시는 거의 포르투갈의 영향아래 있었으며
또한 스페인이 남미지역 전체를 장악했음에도 브라질만은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남아 19세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포르투갈령 브라질과 서양문명 최초로 동아시아 문명권에 도착한 포르투갈 선원일행>
때마침 브라질에서 '금과 은'이 대규모로 발견됨으로써 포르투갈은 후추와 아메리카 산 귀금속의 유입으로
유례없는 대 호황을 누리게 된다.
16세기의 위기
1578년, 오스만의 후원을 받은 모로코의 영주들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대항해 대규모 군대를 일으켜 포르투갈의
식민항구들을 위협하게 되자 포르투갈 또한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다.
당시 포르투갈은 아비스 왕조의 '주앙 3세Joao III'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1557년 그가 사망하자 손자인
'돈 세바스티앙 1세'가 불과 3세의 포르투갈의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모로코의 알카세르키비르 전투에서 사망한 세바스티앙 1세>
1578년 세바스티안 1세가 즉위한지 20세가 되는때에, 모로코의 무어인을 제압하기 위해 혈기로 끓는 그가 직접 출정하게 된다.
그러나 호기롭게 출정한 젊은 세바스티앙 1세가 '알카세르키비르 전투(batalha de Alcacer-Quibir,)'에서 전사하자 포르투갈은 참패하게 되고 이는 158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과 동군연합을 맺게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한다.
위대한 선조들과 아버지 주앙 3세때 이룩한 거대한 포르투갈의 해상제국이
고스란히 스페인의 왕에게 귀속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스페인의 통치 시작
아비스 왕조의 마지막 왕인 세바스티앙 1세의 어이없는 죽음으로 포르투갈 왕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결국 할아버지 마누엘 1세의 아들이자 세바스티앙 1세의 종조부가 되는 '엔리케 추기경'이 국왕에 즉위하게 된다.
그러나 거의 70에 가까웠던 나이와 병환으로 살날이 머지 않았음을 직감한 국왕 엔히크는 한시라도 빨리 후계자를
결정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엔히크 국왕에게는 평생 추기경으로 독신으로 살아온터라 자손이 없었으며 결국 조카들 중에서
왕위계승자를 선택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엔히크 국왕의 조카들 중에는 하나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였고, 다른 하나는 안토니오, 마지막은 세바스티앙 1세의
섭정을 맡았던 카타리나가 있었다.
원래 펠리페 2세를 생각지도 않았던 엔히크는 파산 직전에 몰려있던 포르투갈 귀족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스페인의 펠리페 2세'를 제 1포르투갈의 국왕후보로 선정한다. (그러나 직접 후계자지명을 내린것은 아니다.)
펠리페 2세, 펠리페 1세로
자신들의 향신료무역을 지키기 위해 스페인의 막강한 해군, 즉 '무적함대'의 힘을 빌리려 했던 포르투갈 상인들은
엔히크국왕의 조카였던 안토니오와 카타리나를 버리고 '스페인의 펠리페 2세'를 국왕으로 추대한다.
이 요청만을 기다리고 있던 펠리페 2세는 엔히크 국왕이 어전회의에서 후계지명도 없이 급작스럽게 서거해버리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대를 파견.
정통 포르투갈 국왕임을 주장하던 안토니오를 프랑스로 망명시키게 만들고 포르투갈 전역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1년도 안돼 포르투갈 전역을 접수하는데 성공한 펠리페 2세는 1580년 이베리아연합의 국왕으로 즉위한다.
<이베리아연합의 국왕, 펠리페 2세(포르투갈에서의 명칭:펠리페 1세)>
그러나 포르투갈을 접수한 펠리페 1세(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인의 모든 해상활동은 스페인이 직접적으로 관리하진 않을것이며 기존 포르투갈령 식민지들은 모두
포르투갈인이 자체적으로 관리한다. 단, 본국과 식민지총독은 스페인에서 임명한다."
라는 정책으로 포르투갈인들의 저항을 억누르는데 성공한다. 이미 포르투갈은 그만큼 쇠퇴해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포르투갈이 막대한 부를 쌓게 해주었던 향신료무역은 이익에 비해 그 리스크가 너무도 커 포르투갈이 점점
인적, 물질적 손해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막대한 선박건조비와 숙련된 항해자들의 보급이 이제 더 이상 지속될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당시 스페인은 스페인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다스린 펠리페 2세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포르투갈을 능가하는 막대한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결국 포르투갈은 스스로 몰락하고 만 것이다.
1640년, 재독립
포르투갈의 주권을 스페인에게 바친 포르투갈 상인들은 처음엔 '무적함대가 스페인상선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의
상선 또한 보호해 줄 것이다.' 라는
허망한 꿈을 꾸었지만 결국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자국 상선만을 보호하기 바빴고 포르투갈이 주력하던
아프리카,인도 무역루트로는 발도 들여놓지 않고 있었다. 스페인이 철저히 포르투갈을 외면해버린 것이다.
결국 포르투갈 상인들이 기대했던 '스페인 효과'는 오히려 치명타가 되어 포르투갈 상인들을 위협했고,
결국 전세계에 흩어진 포르투갈의 식민지들은 후발주자인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등의 무차별 공격으로
사실상 '폐허'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영국의 해적들과 네덜란드 해군은 더욱 맹렬히 스페인과 포르투갈, 즉 이베리아 연합의 상선들과
식민지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결국 칼레해전에서 무적함대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자 포르투갈의 귀족들과 상인들은
'무능하고 압제적인 스페인의 지배는 더 이상 받을 수 없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결국 1640년, 주앙 4세를 중심으로 한 국가복원운동이 포르투갈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발생, 스페인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1580년 펠리페 1세(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 의해 동군연합이된 뒤 1640년 펠리페 3세(스페인의 펠리페 4세)로부터
독립하기까지 약 60년간을 스페인의 치세하에 지내온 것이다.
<1580년 성립된 이베리아연합의 영토와
이베리아연합을 이루고 있던 포르투갈,스페인 두 핵심국가의 식민지들>
<포르투갈 국가 복원 혁명으로 새 국왕으로 추대된 주앙 4세와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아들 아폰수 6세>
스페인의 포르투갈 통치방식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과 시민들은 결국 1640년 반 스페인 혁명을 일으켜
포르투갈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시작하게 된다.
이에 사실상 포르투갈은 스페인으로부터 해방되었고, 포르투갈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한다.
그러나 스페인 왕은 이를 당연히 거부하였고, 군대를 파견하게 되나 포르투갈인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막아낸다.
그 뒤 스페인국왕은 강대한 프랑스와 영국을 상대하기에도 벅차 1666년 포르투갈의 독립을 승인하게 되어 포르투갈은 브라간사 왕조 치하의 독립국으로 탄생되게 된다.
명실상부한 독립국으로, 그러나 시련과 고난의 길
리스본 대지진
향신료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으나 지배층의 무능과 일관되지 못한 산업정책의 부재는 결국 포르투갈을
60여 년간의 스페인 지배를 가져오게 되었고,
그 뒤 독립한 포르투갈은 식민지를 유지하기에도 벅찬 상태에 들어서게 된다.
그 와중에 1755년에 일어난 리스본 대지진은 포르투갈인들에게 큰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과거 전성기때의 포르투갈의 영광을 상징하던 구 리스본의 건물들은 이 때 거의 소멸되고 만다.
<1755년 일어난 리스본 대지진을 묘사한 그림. 단순한 스케치만 한 작품으로
당시 포르투갈이 얼마나 큰 비통에 빠졌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날의 지진으로 유럽에서도 화려하기로 소문났던 아름다운 항구도시 리스본의 70%가 파괴되어 많은 건물들과
예술작품등이 소실되어버렸고, 특히 인명피해가 엄청나 최소 3만에서 7만명에 이르는 인구가 사망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유명한 공작 퐁발 후작
(Sebastiao Jose de Carvalho e Melo, 1st Marquess of Pombal 1669~1782)
휘하의 체계적인 복구작업으로 대서양의 아름다운 도시 리스본은 재건되게 된다.
<오른쪽의 그가 가리키고 있는 곳이 바로 그에 의해 재건된 리스본이다>
<리스본 복구작업의 지휘자, 퐁발 후작과 그가 재건한 리스본의 퐁발 광장>
나폴레옹 전쟁, 그리고 브라질의 독립
그 뒤 포르투갈은 별 볼일 없는 유럽의 2류 국가로 전락하여 심지어 영국의 비호까지 받던 포르투갈은 1807년
결정적인 위기를 맞게 된다.
나폴레옹이 영국에 대한 해상무역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대륙법을 제정하자 영국과의 무역에
상당한 부분을 의존하고 있던 포르투갈이 이를 따르지 않게 된 것이다.
포르투갈에서야 어쩔 수 없는 입장이었겠지만 손닿으면 엎어지는 곳에 있는 약소국인 포르투갈이 유럽의 지배자인
자신을 거역하면서까지 영국과의 무역을 계속하자 나폴레옹은 직접 포르투갈 원정을 계획하게 된다.
다급해진 포르투갈 왕실과 정부는 영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프랑스의 막강한 군사력에 영국 해군은 상륙조차 하지
못한채 본토로 되돌아가 버린다.
나폴레옹 휘하의 막강한 프랑스 육군은 스페인을 가로질러 포르투갈을 점령하게 되고
포르투갈 왕실은 울며 겨자먹기로 가장 살기 좋은 브라질 식민지로 대피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포르투갈의 왕위를 보존하기 위해 당시 포르투갈의 왕이었던 주앙 6세가 '포르투갈-브라질 왕국연합'
이라는 새로운 작위를 만들어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 수도마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로 천도한다. (1808~1821)
그 뒤, 브라질에 있던 주앙 6세는 나폴레옹이 실각한 1821년 본국 포르투갈로 귀환해 의회에서
'포르투갈-브라질 왕국연합'의 해체를 추진하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브라질인들은 더 이상 포르투갈의 장단에 맞춰줄 순 없다고 판단, 브라질에 남아있던 주앙 6세의 아들인
페드루 1세(Pedro I, 1798년 10월 12일 ~ 1834년 9월 24일)를 브라질 제국의 황제로 추대하고
독립을 천명한다.
브라질 제국
<1822년 독립한 '브라질 제국'의 국기>
<'브라질 제국'의 국장>
<브라질 제국의 초대 황제, '페드루 1세'(포르투갈: 페드루 4세)>
현재까지도 페드루 1세는 포르투갈에선 군인왕 (o Rei-Soldado), 혹은 페드루 4세,
브라질 본국에선 황제 (o Rei-Imperador), 혹은 해방자 (o Libertador)로 불린다.
양측의 분명한 시각차를 볼 수 있다.
포르투갈 식민지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던 브라질의 독립은 이 지역에서 나는 사탕수수 및 고무 등과 같은
천연자원으로 제 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포르투갈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입히게 된다.
1640년 제 2의 독립이래 꾸준한 발전을 이뤄오던 포르투갈은 결국 브라질 독립이라는 치명타를 맞아
사실상 현재의 유럽 2류 국가라는 위치로 내려앉게 된다.
<브라질의 독립으로 포르투갈은 사실상 유럽의 2류 국가로 전락하였다.>
내란, 그리고 쿠테타
브라질 상실이라는 큰 타격을 받은 포르투갈에 이번에는 지배층간의 내부 분열이 가속화되게 된다.
당시 포르투갈의 국왕이었던 '주앙 6세'가 브라질 독립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1821년 포르투갈로 돌아온 이래
5년만인 1826년 사망하게 된다.
이 때 포르투갈 국왕은 아들인 '브라질제국의 황제 페드루 1세'가 물려받게 되어 있었지만
페드루 1세는 이 왕위를 2개월간 잠깐 물려받았다가 곧 딸인 '마리아 2세'에게 넘겨준다.
(당시 교통수단의 한계로 포르투갈 본국에서 브라질로 가는데 1개월,
돌아오는데 1개월이 걸렸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소식이 전해지는 순간만 자신도 모르게 재위한 것이다.)
마리아 2세는 브라질에서 포르투갈로 건너와 마리아 2세로 즉위한 뒤 통치하였으나
그녀와 결혼하기로 되어있던 숙부 미겔 (미겔 1세)에게 왕위를 찬탈당한뒤 외국으로 쫒겨난다.
미겔은 오스트리아에서 당시 수상이었던 메테르니히에게 감화되어 보수반동정치를 실시하고 전제군주화를 꾀했다.
이 소식을 들은 브라질제국의 황제 페드루 1세는 분노하여 직접 군대를 이끌고 포르투갈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작전은 성공을 거두어 리스본을 회복하는데 성공하였고 적통자인 마리아 2세도 귀국한다.
마리아 2세의 뒤를 이은 아들 페드루 5세는 포르투갈의 산업화에 힘쓰고 식민지였던 브라질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페드루 5세의 뒤를 이은 루이스 1세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포르투갈의 산업화에 노력하였고
마리아 2세-페드루 5세-루이스 1세의 포르투갈은 겉으로 보기에는 일면 평온한 듯 보였다.
그러나 포르투갈 대중, 서민들은 빈곤과 가난에 시달렸으며 이에 대조해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왕족들의 삶은 분노의 대상이었다.
결국 루이스 1세의 뒤를 이은 카를루스 1세때 지나치게 해외 무역의존도가 높고 국내의 자원과 산업이 빈약한
포르투갈은 결국 국가 파산선언을 연이어 하게되고 이는 사회주의, 좌파운동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사회가 양극화되어 온갖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는 와중에,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 바로 전인 1910년 국왕이
암살되는 비극과 함께 '공화국혁명'이 발발하게 되어 왕정은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된다.
(카를루스 1세의 암살 후 포르투갈의 마지막 국왕은 '마누엘 2세'가 승계받았으나 혁명으로 2년만에 퇴위한뒤
브라질로 망명한다.)
<이상의 포르투갈 마지막 국왕들, 순서대로
마리아 2세-미겔 1세(사진없음)-페드루 5세-루이스 1세-카를루스 1세- 미구엘 2세>
포르투갈 왕국에서 포르투갈 제 1공화국으로, 그리고 독재자의 출현
그러나 지배자들과 국명만 바뀌었을 뿐 달라진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더욱이 이를 해결할 정부는 극 좌파적인 정책으로 오히려 지지자들인 노동자들과 서민들에게 마저 신임을
잃어버리게 되고, 이는 결국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라는 독재자를 낳게 된다.
살라자르 치하의 포르투갈과 Estado novo(에스타드 노부,신국가)
위키인용
에스타두 노부 (포르투갈어: Estado Novo, 新國家라는 뜻) 또는 포르투갈 제2공화국은 1933년부터 1974년까지
포르투갈에 있었던 권위주의 체제이다.
1926년 5월 28일 군 주도의 쿠데타로 제1공화국이 무너진 것을 배경으로 하여 성립되었다.
이 기간 중 사실상의 실권자는 1932년부터 1968년까지 총리를 지냈던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였다.
에스타두 노부 체제 기간 중, 포르투갈은 수세기에 걸쳐 여러 대륙에 건설한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체제의 특징
에스타두 노부 체제는 국민들에게 국가주의와 가톨릭의 가치를 강조했다. 모든 교육 체계는 포르투갈 조국 그리고
대항해시대 이래 5세기 동안 포르투갈이 보유하고 있는 해외영토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경제면에서는 조합주의(組合主義: corporatism)를 받아들였으며, 정치면에서는 넓은 범위의 우파에 왕당파,
국가주의자, 자본주의자 등을 포괄한 국가연합당(포르투갈어: Uniao Nacional이 유일 정당이 되었다.
외곽 단체로는 포르투갈 여단(포르투갈어: Legiao Nacional)은 이탈리아의 검은 셔츠단을 모방한
준군사 조직이었으며, 청년단체로는 포르투갈청년단(포르투갈어: Mocidade Portuguesa이 있었는데
이것은 히틀러 유겐트의 조직(이념이 아닌)을 모방한 것이다.
에스타두 노부 체제의 또다른 기둥은 비밀경찰 PIDE였다. 에스타두 노부 시대 동안 포르투갈의 많은 정치범들은
카보베르데 군도에 있는 타라팔(tarrafal) 감옥으로 보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포르투갈은 영국 등 연합국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켰는데, 이는 1386년 체결되어 550년 이상 이어진
윈저 조약(영국-포르투갈 동맹)에 따른 것이다.
<우리나라의 박정희처럼 그도 독재정권의 우두머리이자 경제개발을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때문에 현재까지도 포르투갈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박정희처럼 극과 극이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총리 임기 1932년 7월 5일 - 1968년 9월 25일)는 1932년부터 36년간이나
총리로 재임하며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1926년, 제 1공화국을 뒤엎는 쿠테타가 일어나 'Ditadura Nacional'이라고 하는 군사정부(포르투갈 제 2공화국)가
출범하게 되고 이때 경제전반을 책임지는 재무장관으로 살라자르가 취임하게 된다.
그는 코임브라 대학교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했으나 그 후 코임브라 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교수로 재직한 경험을
살려 포르투갈의 경제에 기여하게 된다.
그 뒤 1951년 마침내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다음 정권에선 다시 총리로 내려와 사실상의 포르투갈 독재정권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그의 성공적인 경제정책에 힘입어 포르투갈은 1929년의 대공황에서도 나름대로 착실한 경제성장을 일궜으나
모든 권력을 그에게 집중시키고 마침내는 대통령마저 그의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린다.
엔하위키와 위키백과 인용.
"경제학 교수라는 경력에서 볼 수 있듯이, 일반적인 독재자와는 달리 그는 경제학자 출신으로
군사정권의 재무장관이 된 인물이었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세계 대공황의 파고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포르투갈의 경제를 되살리면서 엄청난 명성을
얻었고, 그의 드높아지는 권세 앞에 군사정권의 실력자들조차 꼭두각시로 전락, 사실상 포르투갈을 한손에 쥐었다.
그는 자신의 정책을 유지하지 위해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통치를 했으며
3F정책(Fado, Futebol, Fatima)이라 불리는 우민화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기간 동안 포르투갈은 호황을 누렸다."
"그의 재임시절 포르투갈은 안정된 경제를 바탕으로 NATO의 창설멤버로 가담하고 브라질의 경제를 추월한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 식민지들이 대부분 독립한 것과 달리
식민지 정책을 계속 유지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1968년 8월, 낙마 사고로 의식 불능 상태가 되어 그 해 9월 25일에 면직되었다. 1970년 세상을 떠났으며,
민주화는 1974년에야 청년 장교를 중심으로 한 '카네이션혁명'이 일어나면서 이루어졌다."
인용 끝.
살라자르 사후 포르투갈은 1975년 새롭게 수립된 포르투갈 제3공화국(현재)을 거쳐 아프리카의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포함한 모든 해외 식민지를 독립시키면서 의회민주주의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해외 영토인 마카우는 1999년에 중국에 반환된다.
현재 포르투갈의 대통령은 'Pedro Manuel Mamede Passos Coelho(페드로 파수스 코엘류)'로
2011년 평화적인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어 현재까지 재직중이다.
<독립 이후 현재까지 포르투갈 주요사건 연표>
1139년 포르투갈 왕국 성립
1147년 알폰소 1세에 의해 이슬람 지배하에 있던 리스본 해방
1255년 수도를 코임브라에서 리스본으로 천도
1373년 영국-포르투갈 영구 동맹 조약 체결(현재까지 이어지는 가장 오래된 동맹 중 하나)
1415년 모로코 북단의 세우타 공략
1420년 마데이라 제도 발견
1427년 아조레스 제도 발견
1444년 베르데 곶 발견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
1490년 앙골라의 식민지화가 시작
1494년 스페인과 토르데시야스 조약 체결
1497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로 발견
1500년 카브랄의 브라질 발견
1557년 명나라로부터 마카오의 거류권을 획득
1578년 알카세르 키비르 전투에서 세바스티앙 1세 전사
1580년 아비스 왕조 단절,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의 왕이 되어 동군 연합 시작
1629년 모잠비크를 식민지화
1640년 브라간사 왕조가 들어서면서 에스파냐로부터 독립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발생
1807년 나폴레옹의 침입으로 인해 왕실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김
1822년 주앙 6세가 포르투갈로 복귀, 브라질은 왕태자 돈 페드로를 황제 페드로 1세로 옹립하며 독립
1828-1834 포르투갈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전
1887년 마카오의 통치권을 청나라에게서 획득
1910년 혁명으로 마누엘 2세가 퇴위하고 공화정으로 이행
1926년 쿠데타로 군사 독재 정권 성립
1933년 신헌법의 개정으로 살라자르의 독재가 시작
1949년 NATO 창설국 중 하나
1961년 인도군이 고아 주의 포르투갈 식민지를 침공하여 이를 상실함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이 발생하여 살라자르의 독재 정권이 붕괴
1975년 아프리카 대륙 남부의 2대 식민지였던 앙골라와 모잠비크 등 5개국이 차례로 독립,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에 침공하여 점령, 마카오 이외의 식민지를 모두 상실
1986년 유럽 공동체에 가입
1996년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 결성
1999년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
2002년 명목상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동티모르가 독립
-끝-
마치며..
휴...... 엄청 기네요. 다 읽어보실런지 의문입니다 -_; 일단 힘껏 했으니 즐겁게 감상하셨길 바랍니다.
이로써 제가 하는 대항해시대 온라인 6국의 근현대사가 모두 완료되었네요. 다음은 말씀드린대로 '오스트리아'입니다.
뭐 사정상 다른 국가가 될 수도 있지만요.
필자의 인생을 바꿔버린 '대항해시대 온라인'이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사실상
수도의 기능을 하지요. 왜냐하면 게임에서도 리스본이라는 지리적 위치가
카리브, 아메리카, 아프리카, 북유럽, 동유럽등 사실상 전 방향에서 접근성이 가장 용이한 지역
이기 때문입니다. (유럽중심적이지만..;)
때문에 전 포르투갈을 매우 좋아합니다.
같은 이베리아 반도지만 스페인과 정반대인 포르투갈 특유의 Saudade정서도 그렇고, 애수가 넘쳐 흐르는
Fado라던지.. 포르투갈 기타의 감미로운 선율이라던지..
그렇지만 포르투갈은 왠지 유럽내에서 과거에 비해 가장 내려앉은 국가로 폄하되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유로파 여러분들은 모르겠지만 일반인들은 포르투갈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분들이 많으시니까요.
그렇지만 전 언젠가 나의 인생을 뒤바꿔버린, 대항해시대라는 시대를 탐험하러 유럽으로 갈 겁니다. 반드시.
(영어와 경제적기반만 갖춰진다면 언젠간 꼭.................)
대항해시대.. 그거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을텐데? 맞습니다. 결코 낭만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낭만이 없는것도 아닌 묘한 Saudade의 향기가 풍기는 바로 그 대항해시대죠.
대 로마제국의 향수가 곳곳에 남아있는 이탈리아나, 화려한 문화유산과 찬란한 영광, 품격있는 국가 이미지까지
곁들여진 스페인이나 영국, 프랑스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포르투갈은 아름다운 나라임에 틀림없습니다.
대항해시대 만세!!!!!!!!!!!!!!!!!!!!
아,그리고 역사랑은 별로 상관없지만 본인의 아이디로 삼은 분의 고국이기 때문에..
Christiano Ronal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