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파헤친 歷史

고려말 왜구는 정예부대였다

淸山에 2013. 10. 7. 15:02

 

 

 

 

 

 

 

1. 14세기 고려말, 왜구의 출몰!~

 

 

1352년 공민왕 원년 3월.

고려의 수도 개경에 계엄(戒嚴)령이 선포되었다.

 

백성들의 통행이 통제되었고

궁궐을 지키는 군사들에겐 급박한 경계령이 내려졌다.

 

내란도 아니고 전쟁도 없었던 평화시에 고려의 수도 개경에 내려진 계엄령.

계엄령이 내려지게 한 장본인은 바로 왜구였다.

 

 

"여러분은 왜구하면 어떤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해안가에 나타나서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이는 노략질을 해대는 해적집단, 뭐 이런 거 아닐까요?

 

앞머리는 밀고, 웃도리는 벌거벗은 야만인,

아마 이런 모습의 왜구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해적이 수도 개경에는 왜 나타났으며

또 이 해적이 나타났다고 하여 개경에 계엄령이  내려진 건 무슨 까닭일까요?

 

지금 보시는 것은 당시 고려의 상황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이 왜구는 전라도, 경상도 해안 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강원도 내륙 깊숙이까지 들어와서 40여 년 동안 온 강토를 유린했습니다.

 

백성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고

급기야 수도 개경에 계엄령이 발령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되죠.

 

자, 40년 이상 국토를 유린하고 수도 개경에 계엄령까지 발령하게 한 의문의 집단, 왜구!

오늘 역사스페셜에서는 고려말 왜구의 실체를 밝혀보도록 하겠습니다."

 

 

2. 벌거벗은 해적, 야만인 왜구?

               아니다!~왜구장수는 완전무장하고 있었다!~

 

 

왜구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가 처음 찾은 곳은 도쿄.

도쿄대학교 사료편찬소에는 왜구와 관련된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철제문을 열고 수장고로 들어가니, 안쪽에 삼나무로 만든 상자 형태의 방이 나왔다.

몇 개 상자를 열고, 몇 겹의 천을 펼친 후에야 우린 그 자료를 볼 수 있었다.

 

<왜구도권(倭寇圖卷)>.

16세기 명나라 해안에 나타나 노략질하던 왜구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가로  5.2미터, 세로 32센치의 이 그림엔

왜구들의 얼굴과 복장, 그리고 활동 모습이 자세히 담겨있다.

 

"이 그림은 왜구의 활동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유례가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 쓰루다 게이, 사료편찬소 조교수

 

그림의 왜구는

아랫도리를 벗은 채 칼이나 창을 들고 있고,

왜구들은 가는 곳마다 약탈이나 방화를 일삼으며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16세기 명나라 해안에 나타났던 왜구.

그렇다면 고려에 침입했던 왜구도 이와 같은 모습이었을까?

 

<고려사>에는 왜구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기록해놓은 대목이 있다.

1380년에 벌어진 황산대첩의 한 장면이다.

 

아기발도라는 장수는

온몸에 갑옷을 두르고, 얼굴엔 동으로 만든 보호대를 하고 있다.

 

또 다른 장수는 얼굴에 큰쇠투구를 쓰고

손과 발까지 덮는 갑옷을 입었다고 되어 있다.

 

"그는 견고한 갑옷을 입었고, 얼굴에는 동면구를 쓰고 있어서 조금도 틈이 없었다."

                                                                                               - 고려사 권 126

 

"적의 괴수 폐가대만호가 큰쇠투구를 쓰고 손과 발까지 모두 갑옷을 입은 다음..."

                                                                                               - 고려사 권 146

 

<고려사>에  나타난 왜구의 모습을 알아볼 방법은 없을까?

 

취재진은 일본 도쿄에 있는 유치관 박물관을 찾았다.

이곳엔 각 시대별 일본 무사들의 갑옷들이 전시되어 있다.

 

고려말에 해당하는 14세기 무사들의 복장에서

<고려사>에 언급한 장수들의 모습이 그대로 들어났다.

 

"(장수의 복장은)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투구가 있다거나 얼굴을 감싸주는 마스크가 있고

목주변을 고정시키는 장치와 팔, 다리까지 보호해주는 장비로 구성돼 있다.

 

또 끈으로 각 부분을 연결시키는데,

색깔이 화려해 몸을 보호함과 동시에 위엄있게 보일 수 있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 후꾸이, 시가현립 박물관  학예사

 

<고려사>의 기록과 비교해보자.

 

커다란 쇠투구와,

얼굴 전체를 감싸고 있어 화살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는 얼굴보호대 동면구(銅面具),

온몸을 뒤덮었다는 크고 견고한 갑옷,

팔다리 뿐만 아니라 손발을 모두 감쌌다는 보호대,

이런 복장을 한 장수들은 말을 타고 병졸의 호위를 받았다고 했다.

 

"말을 탄 사람은 총사령관이라 불리는 지휘관으로써 지상으로 내려와서 싸우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니까 무장방법이 남다르다.

갑옷도 대갑옷이라해서 크고 화려한 것을 입으며

투구를 쓰고 말에 올라 타 긴 칼을 차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었다."

                                                                                - 아키오, 도쿄대 인문사회대학원 교수

 

이것이 바로 고려말 이땅에 쳐들어온 왜구장수를 복원한 모습이다.

아기발도는 커다란 투구와 갑옷으로 완전무장을 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해적의 모습은 아니다.

 

 

3. 기병, 보병 합동작전을 벌이는 정예집단, 왜구!~

 

 

" 앞에서 본 고려사에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나옵니다.

이 황산싸움에서 아기발도와의 싸움으로 고려군이 주춤하고 있을 때였지요.

고려 병사들이 아무리 활을 쏘아도 아기발도는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온몸에 갑옷을 입고 철가면까지 썼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요.

 

제가 한 번 쏘아보도록 하죠.

역시 어림도 없군요.

 

이 아기발도와 싸우는 과정에서 이성계는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를 보여줍니다.

달리는 말에서 활을 쏘아서 아기발도의 투구의 끈을 끊어지게 하여

살짝 벗겨지게 한 다음에 다시 활을 쏘아서 아기발도의 얼굴을 명중시키고,

결국 고려는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참 대단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일은 이성계의 활솜씨가 아니라, 아기발도의 무장 수준입니다.

 

갑옷에 투구에, 철가면까지...,

분명한 것은 일부 장수들이 이렇게 완벽한 무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무장은 당시 일본 무사들의 복장과 아주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왜구들은 일본의 무사부대와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요?"

 

 

전라북도 군산과 충청남도 장항을 잇는 금강하구원(옛 진포).

취재진은 이곳에서부터 왜구의 실체를 추적해보기로 했다.

 

고려시대 왜구의 최대 침입지로 기록된 진포는 어디쯤일까?

 

"왜선 5백척이 진포어구에 침입하다." - 고려사 권 114

 

지형이 많이 변했지만, 군산과 장항 사이 일대가 옛 진포 자리인 것만은 확실했다.

 

"적의 대선단 5백척이 큰 동앗줄로 서로 묶여져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왜구의 주력부대가 이미 금강을 벗어나서 옥천에 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약탈해온 사람과 쌀, 재화들이 쌓여있었고

그리고 5백척의 배를 지키는 왜구의 수비병이 있었습니다."

                                                                                    - 이 영 교수, 한국방송통신대

 

5백척 선단이라면 어느정도의 규모였을까?

 

일본 도쿄.

5백척 배의 규모를 짐작해보기 위해 우리는 도쿄에  있는 배 박물관을 찾았다.

 

일본의 선박술과 항해술은 8세기 이후부터 크게 발전한다.

이 박물관엔 시대별로 많은 배들이 전시되어 있다.

 

당시 왜구들은 약탈을 위해 고려 뿐만 아니라 멀리 명나라까지 나가곤  했다.

고려에 출몰하던 왜구의 배는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다.

 

견명선 - 일본 남북조 시대 14세기의 무역선.

 

하지만 같은 시대의 이 배들을 통해 그 크기나 기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면 실제 크기는 얼마나 되나?)

크기는 미터로 하면 15미터에서 20미터쯤 된다.

 

(그 정도면 몇 명 정도나 탈 수 있나?)

사람은 십여 명 정도 탄다. 13~14명 정도."

                                                               - 시미즈, 남북조 시대관 담당

 

적게 잡아 한 배에 열 명이 탔다고 가정했을 때

500척에 올라탄 왜구의 수는 5천이 된다.

 

10명 X 500척 = 5,000명.

 

개중엔 100여 명이 탈 수 있는 큰배도 있다.

 

5천이라는 숫자는

말과 무기, 그리고 보급물자, 또 약탈한 물건을 싣고 올 공간을 남겨 계산한 수치다.

 

배의 숫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말에 대한 대목이다.

 

이성계의 황산대첩에서는

적의 말을 1만 6천필이나 사로잡았다는 기록이 있고,

 

이보다 앞서 진주 침입시에는

말을 탄 기병이 700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포획한 말이 1,600필이다." - 고려사 권 126

 

"왜적의 기병이 700명, 보병 2,000명이 진주에 침입했다." - 고려사 권 37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보병 2천, 기병 7백이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보병과 기병의 비율을 3:1로 봤을 경우에

기병이 1천 6백명 가량 있었다고 한다면, 보병은 약 4천, 그럼 기병을 포함하면 6~7천 되지요.

거기다가 진포입구에서 죽은 왜구까지 포함한다면 거의 만 명에 가까운 병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 명의 병력이라고 하는 것은

500척의 대선단에 어울리는 병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대병력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도적떼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 이 영 교수

 

일본 남북조 무사들의 전투도.

 

당시 전투에서 말이라는 존재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왜구들은 뛰어난 기동력으로 불시에 공격을 감행하고

고려군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다.

 

"보병과 기병의 이런 합동전술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의 협조체제가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처럼 산악이 많은 곳에서

보병과 기병이 합동작전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들이 평소에 얼마나 강도 높은 훈련을 했던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하나의 예가 됩니다."

                                                                            - 이재범 교수, 경기대

 

500척 대선박.

그리고 전문적인 기병부대의 존재.

고려말 왜구는 본토의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정예부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4. 왜구들은 일본 무사들의 전법을 구사,

               수도 개경을 공략한 전문 군사집단이었다!~

 

 

"진포에 몰려온 왜구의 숫자가 최소한 3천에서 5천 명이란 계산을 해봤는데요,

그것은 최소로 잡은 것이고, 학자들에 따라서는 만 명 이상으로 잡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적게 잡는다면 연대 이상,

많이 잡는다면 사단 이상의 병력이 여기 진포로 몰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이 기병의 존재입니다.

이 기병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히 지켜봐야 될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은 일본 무사의 전투장면을 그린 그림인데요,

말을 탄 이 기병들이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며 적의 대열을 흩트러 트리면

뒤에 있던 보병들이 달려들어 육탄전을 벌이는 그러한 형태입니다.

 

왜구들은 고려땅에 들어와서 기병과 보병의 합동작전을 펼쳤습니다.

그것은 이 왜구들이 단순한 해적이 아니라

고도의 전문훈련을 받은 전투집단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완전무장에다가 엄청난 규모를 가지고 있었던 의문의 집단, 왜구.

이 왜구들이 고려땅에 들어와 어떻게 싸움을 벌였을까요?"

 

 

김천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3번 국도.

 

지금은 그나마 완만해졌지만 고려때 이 길은 경사가 심한 고개길이었다.

고개이름은 왜유령, 혹은 왜너미재로 불린다.

 

"왜너미재라고 합니다.

확실히 내막은 몰라도 왜놈들이 넘어갔다고 해서 왜너머재라 부르는 모양이라요."

                                                                 - 김기식(74세), 김천시 어모면 주민

 

왜너미재는

6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고려말 왜구에서 비롯된다.

 

1380년, 진포에서 패배한 왜구들은

옥천, 영동, 김천을 지나 상주로 흘러든다.

 

그리고 운봉에서 패배한 뒤

마지막 남은 70여 명이 이곳 무등산으로 숨어든다.

 

진포에 침입했던 왜구들의 최후 은거지.

무등산의 규봉암은 험한 산이었다.

 

왜구가 은신했던 규봉사.

이 절은 신라때 지은 고찰이다.

이곳은 삼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다.

이곳에서 왜구는 추격하는 고려군을 맞아 최후까지 저항한다.

 

"단순히 산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산으로 들어가 방어하기에 좋고,

또 상대방이 방심한 틈을 타서 공격하기에 좋은 이런 바위라든지,

특히 삼면이 바위로 둘러싸인 이런 천혜의 요새에 웅거한 것이죠."

                                                                                     - 이 영 교수

 

그런데 규봉암에서 왜구들이 보여준 전술은

놀랍게도 일본 무사들의 전법과 일치한다.

 

당시 무사들의 전술을 나타낸 기록들을 보면

규봉암과 너무도 흡사한 지형이 나온다.

 

14세기 일본무사들의 공성(攻城) 및 농성전(籠城戰) 그림.

 

자연지형을 방패 삼아 산 위에 성을 구축하고

돌이나 나무가지를 던지면서 저항하는 전술.

 

이것을 농성전술이라 부른다.

이것은 당시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전술이었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방어를 하는 전쟁방법은

14세기 일본 남북조 시대 무사들의 일반적인 전쟁모습이다.

 

특히 이 시대는 무사들이 서로간에 격렬히 싸웠던 시대였기 때문에

산에 목책을 두른 성을 쌓고 공격을 하거나, 공격을 당하는 상황이 반복되곤 했다."

                                                            - 아키오, 도쿄대 인문사회대학원 교수.

 

충남 부여군 홍산면.

이곳은 최영장군의 유명한 홍산대첩이 이루어진 곳이다.

 

여기서 왜구의 또 다른 전술을 살펴볼 수 있다.

 

1376년 연전연승을 거듭  하던 왜구의 부대와

토벌대 최영의 부대가 홍산에서 맞붙게 된다.

이때 환갑을 넘긴 최영장군은 화살을 맞고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태봉산 - 최영장군이 왜구를 격퇴한 홍산대첩 전승지

 

정상에 오르면 당시 일본 무사들이 이용했던 지형과 똑같은 모습이 드러난다.

 

"자기 나라도 아니고 외국인 고려에 와서 이런 지역을 발견하고,

이런 지형을 자기들의 군사적인 거점으로 활용하는 그런 눈을 가진,

따라서 전문적인 전투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 영 교수

 

동진교 하류에는 동진교(전라북도)라는 다리가 있다.

600년전 고려시대에도 이 자리에 다리가 있었다.

 

당시 왜구는 곰소에서 적현을 넘어 부안으로 들어온 후

고려 토벌대와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동진교를 끊고 도주를 한다.

 

원래 일본에선 강을 이용한 방어전술이 있었다.

 

다리를 끊고 도망하는 것은

추격하는 군사를 따돌리는데 가장 효율적인 전술인 것이다.

 

"왜선 50여 척이 부여현을 침범하고

 동진교를 파괴하여 아군이 진공하지 못하게 하였다."  - 고려사 권 27

 

수도 개경을 코앞에 두고 있는 강화도.

고려사에는 이 지역을 무대로 왜구가 벌였던 치열한 전략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양광도 각 고을에 침입하면

최영이 반드시 내려올 것이니

그때에 빈틈을 타서 개경을 공격하면 성공할 수 있다."

                                                                                              - 고려사 권 126

 

수도인 개경에는 수도방위사령부라고 할 수 있는

최영의 정예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1377년, 왜구는 개경 주변의 양광도 지역을 집중 공격한다.

그 이면에는 최영의 주력부대를 유인해서 개경에서 외곽으로 빼어내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개경에서 최영의 부대가 빠지면 그 공백을 이용해 개경을 친다는 것이 이들의 계획이었다.

 

"왜구는 고려의 정규군을 격파하고 있습니다.

고려의 정규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있지요.

 

그것은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런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한다든지,

또는 다리를 끊어 적의 진입을 차단한다든지 하는 개별적인 전술이 아니라,

 

고려의  정규군을 남쪽으로 유인을 해서

고려의 심장부인 수도 개성을 공략하겠다는 큰 전략을 세울 수 있을 정도로

전문적인 정예부대, 군사집단이란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 이 영 교수

 

왜구가 고려땅에 와서 사용한 전술을 보면

본토의 정예부대와 거의 같은 것들임을 알 수가 있다.

 

남의 땅에 들어와 이런 전략과 전술을 구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왜구가 뛰어난 정예부대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5. 왜구들의 침략 목적?

              쌀과 재물, 젊은 남자, 그리고 불교문화재까지!~

 

 

"산에서의 농성전, 간첩을 이용한 첩보전, 험한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전,

왜구들은 이렇게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며 고려땅을 유린하고 다녔습니다.

 

'아무도 막는 자가 없으니 여기가 바로 낙토로구나'

무방비상태의 고려땅이 왜구들에겐 낙원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왜구들의 낙원이 된  고려땅에서는 수많은 비극들이 생겨났습니다.

<고려사>의 한 대목을 보겠습니다.

 

어떤 군수가 새로 부임하여 동네를 도는데

한 여인의 슬피 우는 울음소리가 밤새 끊이지 않아 물어보았더니

새신랑이 왜구에게 잡혀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가슴 아픈 대목은 <고려사>에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새신랑이 왜구에게 잡혀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거나 다친 것이 아니라 잡혀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왜구는 왜 고려의 젊은이들을 잡아가 돌려보내지 않고 있었던 것일까요?

또 그들은 무엇을 얻으려고 바다를 건너 고려에 들어와 만행을 저질렀던 것일까요?"

 

 

"1350년 2월. 왜구가 고성, 죽림, 거제 등에 침입했다.

 이것이 왜구 침입의 시작이다."

                                                                            - 고려사 권 37

 

충정왕 20년,

<고려사>는 이때를 왜구 침입의 시작으로 적고 있다.

 

왜구 침입지의 하나인 전남 순천시 해룡면을 찾아갔다.

지금은 간척지가 되었지만 그 당시 산 아래 마을은 바다였다.

 

간척지 아래 홍두마을(옛지명 말터)은

왜구들이 자주 침입하던 곳이었다.

 

여기에서 13대를 살아온 할아버지가 기억하듯이

이곳은 국가에 세금으로 낼 곡식과 재물을 모아두던 창고, 즉 조창이 있었다.

 

이곳 혜룡창은

고려시대 해안가에 13개의 조창 중에 하나였다.

 

* 조창 - 국가에 낼 조세인 쌀이나 지역 특산물 등을 선박으로 운송하기 위해 만든 바닷가의 창고

* 조운선- 조세를 실어 나르는 배

 

"조운선이 모이는 곳이 조창입니다.

딴곳에 쳐들어가는 것보다 이런 곡식이라든지,

지방의 소위 경제적 가치가 모이는 이런 창고를 접수한다면,

손쉽게 양곡과 각종 재물을 가져갈 수 있는 거죠."

                                                                                             - 이 영 교수

 


왜구의 침입은 조창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왜구의 가장 큰 목적은 조창에 모여있는 쌀과 재물이었던 것이다.

 

진성창 터 - 전북 군산시 성산면.

 

왜구들이 조창을 공격하자

고려는 조창을 해안가에서 내륙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산 아래 깊숙히 지어진 진성창은

창고를 보호하기 위해 입구부터 성을 쌓았다.

 

이곳은 주변의 만경강과 금강유역에서 나는 쌀을 모으던 조창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공민왕7년, 1358년에 전라도 진변사 고영현이라는 사람이

조정에 연해에 있는 조창을 내지로 옮길 것을 건의를 하게 되고,

 

그 건의가 받아들여져서 이곳의 진성창도 내지로 옮겨지게 되고

1376년, 우왕2년까지 연해의 조창들이 모두 내지로 옮겨지게 됩니다."

                                                                                                  - 나종우 교수, 원광대 사학과

 

조창이 내지로 옮겨지게 되자

왜구의 침입도 조창을 따라 내륙 깊숙히 들어오게 된다.

 

광양만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섬진강 하류.

왜구들은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하동, 산청, 화계를 지나 내륙으로 들어오고,

민가를 약탈하고, 지방 관청을 습격하기까지 한다.

 

"하류에서 쭉 올라가서 목적지에 도착해서 또 약탈을 하고

 강가에 없으면 말을 타고 들어가 인근에서 약탈을 하여 배에 싣고 도망을 가는 겁니다."

                                                                                                          - 이 영 교수

 

왜구의 침입은 더욱 기승을 부려

1377년에는 강화도를 함락시킨다.

 

강화도는 개경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전국의 조운선들은 이곳 해로를 따라 개경으로 들어간다.

한마디로 이곳은 고려의 세금이 모이는 요충지였다.

 

"고려의 조세를 거둬들이는 조운선이

바로 이곳 바다와 강을 이용해서 개경으로 들어왔는데,

 

강화 교동도는 개경에서 아주 가까운 코앞에 있는 섬으로써

이곳이 장악 당하게 되면 남해안과 서해안에서 오는 조운선의 출입이 금지가 됩니다.

 

따라서 왜구들은 침략 목적인 식량 획득을 위해

이곳에서 조운선을 쉽게 탈취할 수 있기 때문에

교동도를 하나의 침략 목적지로 삼았다고 생각되어집니다."

                                                                                             - 이재범 교수, 경기대

 

왜구들이 노렸던 것은 쌀과 재물만이 아니었다.

 

원산부의 최씨 부인은  겁탈하려던 왜구에게 저항하다 팔다리가 잘리고 살해되었다.

영암의 최씨 부인은 왜구들이 쫓아오자 아이들을 산으로 피했다가 결국 잡혀 죽임을 당했는데

갓난아이가 어미젖을 빨다가 따라 죽게 되었다.

 

"일본이 당시 계속 내란을 겪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전쟁이 사람들의 가치관을 전도시켜서

결국 사람들을 잔인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려사>에 그런 내용이 있는데,

서너살 먹은 여자아이를 잡아서 배를 갈라서

내장을 꺼내고 깨끗이 씻어서 쌀을 넣고 고사를 지낸 다음에

그 쌀을 꺼내어 밥을 해먹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 정도로 잔인했으니까,

그 사람들이 여자들을 겁탈한다든가,

쌀을 빼앗고 불지르고 하는 것은,

 

그렇게 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잔인했습니다."

                                                          - 손홍열 교수, 청주대 사학과

 

그러나 왜구들이  노린 것은

여자보다 젊고 힘센 남자들이었다.

 

<고려사>에는 포로로 잡혀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고려사>에 나온 사례들을 다 모으면

잡혀간 사람의 수가 3만 여명에 이른다.

 

잡혀간 장정들은 대부분 노예로 팔리거나 왜구의 노를 젖는데 이용되었다.

또 고려군과의 전투에 동원되기도 했다.

 

"왜선 50여 척이 강화에 침입하여 부사 김인귀를 죽이고, 천여 명을 잡아갔다." - 고려사 권 114

 

"정몽주가 국내로 되찾아온 포로가 수백명이었다." - 고려사 권 117 정몽주전

 

왜구들이 노린 또 하나의 목표는

고려의 값진 문화재였다.

 

왜구의 근거지로 지목된 대마도.

대마도 관음사에는 고려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금동관음보살 좌상 - 고려말기, 1330년경 제작

 

1970년대 전반, 이 불상안에서 제작 연대와 경위,

시주한 사람 등을 기록해 불상 내부에 보관한 문서, 복장기(腹贓記)가 발견되었다.

 

원래 불상이 있던 곳은 고려의 부석사였다.

제작한 연대는 천력3년 1330년, 서른 두명이 시주해 제작되었다.

 

제작연대는 물론, 시주자까지 밝혀진 고려 불상이 대마도에 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국 서주 부석사(高麗國 瑞州 浮石寺)'

 

"어떻게 이 절에 오게 되었는지 명확치 않다.

우리도 그게 궁금하다.

이 기록에는 불상을 만들 당시의 과정이 적혀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언제 건너왔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 이 절에 보관되게 됐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다."

                                                                                       - 코마쓰, 대마도향토사학자

 

대마도 곳곳에는 이런 고려의 문화재들이 수없이 널려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불상만 130여 점.

개인들이 소장한 것까지 합치면 훨씬 많은 불교문화재가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동조여래입상 - 통일신라, 대마도 가이진 신사 소장.

부처님 탄생불 - 고려시대 전기, 대마도 대흥사 소장.

약사여래좌상 -                  "

고려청자 - 대마도 가이진 신사 소장

 

전문가들은 이것들이 대부분 왜구가 가져온 것으로 보고 있다.

깨지고 손상된 이 청자 문화재들이,

정상적인 방법 이외의 경로를 들어왔음을 반증해주고 있는 게 아닐까?

 

"처음엔 식량을 약탈하기 위해 고려 해안에 왔겠죠.

그네들이 실제 불교, 불상을 대할 기회가 없었어요.

 

모든 문화라는 것은 높은 수준에서 낮은 곳으로 가는 법입니다.

 

그러니 불교의 그 신비로운 종이라든가,

불상 같은 많은 문화재를 접하면서 탐이 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훔치거나 빼앗아 가지요.

 

가지고 갔을 때,

일본 본토의 부호들이나 토호들은

아주 귀중한 유물을 가지고 왔다해서

왜구들에게서 많은 돈을 주고 사들였겠죠.

 

그러니 이것이 재물이 되고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겠고,

그러니 왜구들은 점점 우리 문화재를 약탈하는 도가

높아지고 넓어지고 그랬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정영호 명예교수, 한국교원대 고미술사

 

고려시대엔 불교문화가 융성했다.

일본은 물론 중국에서도 흉내낼 수조차 없었던 고려만의 자랑 불화.

 

고려불화는 지금 전 세계에 100여 점 남아있는데

그 중에 90여 점이 일본에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은 10점이 채 안 된다.

 

양유관음상(수월관음상) - 고려, 일본 큐슈 사가현 박물관 소장

미륵하생경 변상도 - 고려, 일본 천왕원 소장

관경 변상도 - 고려, 일본 서복사 소장

 

 

6. 14세기 일본은 남북조 쟁란기!~

             일본의 무사집단(쇼니)은 왜구와 결탁, 고려를 약탈한다!~

 

 

"왜구들이 노렸던 것은 결국 경제적 가치가 있는 쌀과 사람, 그리고 재화들이었습니다.

이 왜구들의 침입이 극심했던 40여 년간 고려가 입은 피해는 정말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고려의 불경, 불상, 탱화는 돈주고 살 수조차 없는 세계적인 보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을 마음대로 볼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왜구에게 입은 피해는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에게 아주 안타까운 현실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왜구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가지 측면에서 접근을 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첫째, 왜구는 우리가 생각해왔던 것처럼 해적집단이 아니라 체계적인 조직을 가진 대규모집단이다.

둘째, 그들의 전술을 보면 본토의 정규군과 거의 같은 전투력을 갖춘 집단이다.

셋째, 어떤 계기로 인해, 돈이 될만한 것을 찾아서 고려를 쳐들어왔다는 그런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 어떤 계기가 무엇인지, 그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진짜 왜구의 실체를 확인해볼 차례입니다."

 

 

14세기 큐슈지방의 중심지였던 후쿠오카(옛 하까다) 다자이후 터.

다자이후는 그 지방을 다스리던 관청이 있던 곳이다.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영주들이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가마쿠라 시대 후반기에

천황계가 두갈래로 분열되는 일이 생기면서

결국 2개의 왕조로 나뉘게 된다.

 

당시 무사들도 두 왕조를 따라 분열이 되는데,

하나의 집안내에서도 두 계파로 나뉘어 싸우는 일이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뤄지던 시대였다."

                                                                                               - 무라이, 도쿄대 사학과 교수

 

일본 역사상 최대의 혼란기.

역사가들은 이때를 '남북조 쟁란기'라고 부른다.

 

북조 : 쿄또, 고묘천황

남조 : 요시노, 코다이고 천황

 

오하라 전적지(큐슈 오구리市).

지금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 이곳은 남북조시대 최대의 격전지였다.

 

1359년 당시 후쿠오카의 통치자였던 쇼니는

경쟁자 기쿠치의 군대를 맞아 이곳에서 대혈전을 벌이게 된다.

 

쇼니 군이 7만명,

기쿠치 군이 3만명,

 

십만 대군이 사활을 걸고 16시간 동안 혈투를 벌였다.

쇼니군은 기쿠치군의 야간 기습을 받아 패배를 하게 된다.

 

"이곳에서 승리한 기쿠치 세력이 쇼니군을 물리치고 큐슈의 다자이후를 차지한다.

그리고 이후 십수년간 큐슈의 실권을 잡게된다."

                                                                             - 가시이, 오고리시 문화재 담당

 

오하라전투의 패배는 처절한 것이었다.

이 패배로 인해 쇼니는 2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리고 큐슈에서 세력을 잃게 된다.

쇼니군이 흘린 피가 몇날 몇일 지쿠코 강을 피로 물들였다고 한다.

 

"지방사회에서 싸움을 하던 무사들은 계속해서 병사와 군량미가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일본열도는 그렇게 땅이 크지가 않다.

그리고 산이 많은 곳이라 논이나 밭을 만들어 식량을 확보하는 일에 한계가 있다.

 

남북조 내란이 어느 한도를 넘어서서

일본 열도 내부의 식량만으론 감당을 할 수 없게 되면서 

무사들은 밖으로 나가 약탈을 하게 된다."

                                                                                             - 아키오 교수

 

큐슈에서 세력을 잃은 쇼니가 재기할 꿈을 다진 곳이 바로 대마도.

그리고 바다 건너 고려였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농경지가 적어 옛날부터 식량이 많이 부족했다.

대마도 안에서 조달할 수 있는 쌀이나 곡물이 적으니까

자연히 한반도나 중국 또는 큐슈와의 무역에 많이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역이 주된 산업이었다."

                                                              - 코마쓰, 대마도 향토사학자

 

대마도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는 고려였다.

대마도인들은 대대로 고려에서 물자를 구해왔고

그 때문에 고려의 지리와 물자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더우기 대마도의 통치자였던 소우씨는 쇼니씨의 직속 부하였고

쇼니씨가 요구하는 고려 침입은 소우씨의 이해와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이로써 본토의 정예부대였던 쇼니세력과

소우의 대마도세력이

고려로 몰려오게 되는 것이다.

 

가네이시성 터 - 옛 대마도주 소우씨의 성

소우 나리쿠니 - 고려말 1350년대 대마도주

 

사가 현립 박물관.

우리는 취재 도중 쇼니와 소우의 관계를 입증할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냈다.

 

금을 녹여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해놓은 금자사경, 묘법연화경(1340년 고려 불경).

이 경전은 찬란한 금빛으로 고려 불교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금자사경은 전 세계를 통틀어 열 점이 안 되는 진기한 문화재다.

게다가 뒷부분에는 불경의 제작 경위와 연대, 시주자의 이름이 일일이 적혀 있어 사료로써의 가치도 매우 높다.

 

이 불경의 제작연대는

왜구의 침입이 시작되기 십 년전인, 지원6년, 1340년이다.

 

"고려불경을 일본으로 가져와서

그것을 당시 큐슈 통치자였던 쇼니씨가

천만궁이란 절에 기증했다는 식으로 기록이 돼있다.

어떤 경로로 입수를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 미호 혼다, 사가현립박물관 학예사

 

기증자가 큐슈 영주 쇼니라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이 불경의 입수 경로를 추정할 수 있었다.

 

결국 고려에서 제작한 이 불경은

고려땅에 침입한 왜구들에 의해 그들의 영주 쇼니의 수중에 들어갔고

다시 쇼니를 통해 천만궁에 들어간 것이다.

 

'1357년, 다자이(큐슈통치자)였던 쇼니씨가 천만궁에 기증'

 

"고려시대의 금자사경이 그 연대를 보니까

천정이라고 하는 일본 연대가 나와요.

그럼 그 연대는 1357년에 해당이 되는데,

 

1340년에 만들어져서,

1350년대 이후에 한참 왜구가 횡횡했을 때 이것이 일본으로 약탈 당해져서,

그것이 왜구들의 주인에게 바쳐져서,

그것은 다시 그 위에 세력 있는 사람에게 바쳐져서,

그에 의해 다시 이것을 절에다가 모시는,

이런 식으로 옮겨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정영호 명예교수

 

그러나 이런 영주와 왜구와의 관계는

큐슈 영주 쇼니에게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남북조쟁란기 동안 영주들은 혼전을 거듭 했다.

거듭되는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주들은 필요한 물자를 고려에서 얻으려 했다.

 

"남북조 쟁란이 특히 큐슈지역에서 격렬하게 벌어졌고 장기화 됐다.

14세기 후반까지 전란이 계속되는 것이 큐슈지역의 상황이었다.

이것과 왜구의 활동이 활발해진 것과는 분명히 상관관계가 있다."

                                                                                               - 무라이 교수

 

모든 세력이 무장을 했던 일본에 비해

당시 고려의 지방 방비는 상대적으로 허술했다.

 

일본에게 고려는

배만 타면 와서 원하는 것을 가져갈 수 있는 낙토와 같은 곳이었다.

 

 

7. 왜구의 침입!~

          신흥무인세력, 이성계 성장!~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고!~

 

 

"'고려말 왜구는 단순한 해적집단이 아니라

일본 본토 남북조 혼란기에

경제적 가치가 높은 쌀과 재물,

그리고 사람을 잡아가기 위해 고려에 온 정예부대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내린 왜구의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이 왜구가 우리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擧國遠征倭乘其虛(거국원정왜승기허)'

'요동을 정벌하려고 군사를 일으키면, 왜구가 그 틈을 타서 기승을 부릴 것이다.'

 

1388년, 고려의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에게 요동을 정벌하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이성계는 위화도까지 갔다가

이런 명분을 내세워 군사를 되돌립니다.(위화도회군)

 

우리 역사에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는 이 급박했던 순간에

왜구의 존재가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고려말 왜구는 우리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80여 년에 걸친 몽고의 침입과 계속된 외침으로

고려의 국력은 쇠퇴할대로 쇠퇴해 있었다.

 

몽고가 물러가자마자

북쪽에서 홍건적이 침입해 수도 개경이 함락시키고 왕궁을 불태운다.

 

한편 남쪽에서는 왜구의 약탈과 방화로

민심이 흉흉해 나라의 기틀이 무너지고 있었다.

 

"고려는 원나라가 1270년에서부터 1351년까지 80년간 지배를 했습니다.

 

원나라가 지배를 하면서

지방에서의 반항, 저항세력을 우려해서

지방군체제를 완전히 와해시켜버렸죠.

 

그리고 이제 수도 개성을 지키는 치안 수준의 경군만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니 1351년 공민왕 즉위와 더불어 나타나기 시작한 왜구에 대해서

고려가 무방비상태일 수 밖에 없지 않았겠나 생각됩니다."

                                                                                   - 손승철 교수, 강원대 사학과

 

왜구의 침입을 맞아 고려가 먼저 힘을 쏟은 건

외교적 노력이었다.

 

고려는 정몽주(1337~1392) 등 사신을 규슈에 보내

왜구를 근절시키라고 엄중히 요구했다.

 

적잖은 성과를 봤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없었다.

 

"정몽주를 외교사절로 폐가대(후쿠오카)에 파견해 왜구 금지를 요청했다."

                                                                     - 고려사 권 117, 정몽주전

 

해안은 연일 왜구의 침입으로 소란스러웠다.

 

"적이 바다에 와도 아군(육군)이 해안에서 바라보고만 있으니,

정병 백만명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

                                                                    - 고려사 권 115, 우현보전

 

고려는 수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관리들의 상소가 이어졌고

결국 공민왕3년 수군제도를 만들어, 지방군을 정비하게 된다.

 

해변 주민 세 명을 한 호로 정하고, 수군 한명씩을 내게 했다.

또 지방군으로 진술군을 편성했다.

 

"배를 다룰 줄 모르는 연해민을 물에서 싸우게 하므로 매번 패배하게 된다..."

                                                                          - 고려사 권 115, 이회전

 

왜구의 침입이 잦은 해안가에는 성을 쌓고 경비를 강화했다.

장암진성은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금강하구에 지어진 성이었다.

 

장암진성 - 충남 서천군 금강하구

 

"와해되었던 지방군을 다시 재정비해서 진술군을 편성하게 되구요,

또 바다를 지키는 해군, 성기군을 양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전쟁에 필요한 화약이라든지 병기를 제작해서

1370년 후반기에 가면 왜구와 전면전을 벌여

고려가 승리할만큼 고려의 군사체제가 재정비가 됩니다."

                                                                                  - 손승철 교수

 

무엇보다 획기적인 일은 화포의 개발이었다.

 

1377년 우왕3년 10월,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火통都監)이 설치된다.

 

화약과 함께

대장군, 이장군, 석포, 신포 등 각종 화기가 개발되었다.

 

화포의 개발과 더불어

고려의 전투력은 눈부시게 진전한다.

 

1380년 8월.

최무선이 이끄는 선단은 100척의 적은 선단으로 500척 왜구의 대선단을 격파한다.

대왜구전의 양상이 변하는 순간이었다.

 

"왜선 500척이  진포어구에 침입하다." - 고려사 권 114

 

"가장 효율적인 왜구 격퇴의 방법을 찾은 것이

바로 최무선의 진포대첩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화포라고 하는 최신 무기로 대승리를 거두었고,

그 이후 이 화포를 이용한 전투에서

정지장군이 남해섬앞에 관음포전에서 또 승리를 합니다."

                                                                                    - 이 용 교수

 

진포대첩이 바다의 주도권을 잡은 첫승리였다면

전북 남원 운봉에서 벌어진 황산대첩은 왜구토벌사에 한 획을 긋는 전투였다.

 

황산대첩 전적지.

 

1380년 9월, 진포에서 배를 잃은 왜구들은

인월면쪽에 몰려와 진을 치고 있었다.

 

이성계는 왜구의 1/10도 안 되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지휘해 왜구를 맞아 싸워 왜구 대부분을 사상시키고

말 1천 6백필을 사로잡는 대전과를 올렸다.

 

"이성계장군은 죽기를 각오하고 많은 군사들을 독려해서 여기가 참 힘든 싸움을 하게 되는데

말을 두번이나 갈아타고 허벅지에 활을 맞아가면서 힘든 싸움을 했지만 결국 승리로 이끌게 됩니다."

                                                                                                       - 이남일 남원시 향토사학자

 

황산대첩과 피바위.

황산대첩비.

 

이때 흘린 왜구의 피가 강을 흘러 일주일 동안이나 그 물을 마시지 못했고

여기서 승리한 이성계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왜구의 출몰, 그로인한 피해,

이것은 이성계와 같은 신흥 무사를 성장시켰고,

또 신흥사대부들이 재정적 압박을 벗어나기 위해 조정에 사전 혁파(과전법)를 주장하게 되고,

거기에 성공해서 결국 구세력을 물리치고 새 왕조를 개창하는데 성공을 했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이라는것은 왜구와 상당히 연관이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 손홍렬 교수

 

고려말 왜구와의 싸움을 통해 얻어진 경험들은

이후 조선의 대왜구 정책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때로는 회유하고, 때로는 응징을 하면서,

조선은 초기 100년 이상 왜구와의 평화적인 외교를 이끌어가게 된다.

그것은 고려말의 시련속에서 얻어낸 열매였던 것이다.

(교린정책 = 회유.강경책)

 

 

"고려왕조는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해서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 결과 지방군체제도 정비하고, 화포도 개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의 건국 주체였던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도

이 왜구 토벌 과정을 통해서 민심과 권력을 동시에 거머쥐게 됩니다.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새 왕조인 조선을 건국하게 됩니다.

이렇듯 고려말 왜구는 단순한 해적집단이 아니라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역사적 전환기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을 했던 것입니다."

 

 

- 유인촌의 역사스페셜을 보고(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