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의 침입은 조창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왜구의 가장 큰 목적은 조창에 모여있는 쌀과 재물이었던 것이다.
진성창 터 - 전북 군산시 성산면.
왜구들이 조창을 공격하자
고려는 조창을 해안가에서 내륙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산 아래 깊숙히 지어진 진성창은
창고를 보호하기 위해 입구부터 성을 쌓았다.
이곳은 주변의 만경강과 금강유역에서 나는 쌀을 모으던 조창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공민왕7년, 1358년에 전라도 진변사 고영현이라는 사람이
조정에 연해에 있는 조창을 내지로 옮길 것을 건의를 하게 되고,
그 건의가 받아들여져서 이곳의 진성창도 내지로 옮겨지게 되고
1376년, 우왕2년까지 연해의 조창들이 모두 내지로 옮겨지게 됩니다."
- 나종우 교수, 원광대 사학과
조창이 내지로 옮겨지게 되자
왜구의 침입도 조창을 따라 내륙 깊숙히 들어오게 된다.
광양만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섬진강 하류.
왜구들은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하동, 산청, 화계를 지나 내륙으로 들어오고,
민가를 약탈하고, 지방 관청을 습격하기까지 한다.
"하류에서 쭉 올라가서 목적지에 도착해서 또 약탈을 하고
강가에 없으면 말을 타고 들어가 인근에서 약탈을 하여 배에 싣고 도망을 가는 겁니다."
- 이 영 교수
왜구의 침입은 더욱 기승을 부려
1377년에는 강화도를 함락시킨다.
강화도는 개경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전국의 조운선들은 이곳 해로를 따라 개경으로 들어간다.
한마디로 이곳은 고려의 세금이 모이는 요충지였다.
"고려의 조세를 거둬들이는 조운선이
바로 이곳 바다와 강을 이용해서 개경으로 들어왔는데,
강화 교동도는 개경에서 아주 가까운 코앞에 있는 섬으로써
이곳이 장악 당하게 되면 남해안과 서해안에서 오는 조운선의 출입이 금지가 됩니다.
따라서 왜구들은 침략 목적인 식량 획득을 위해
이곳에서 조운선을 쉽게 탈취할 수 있기 때문에
교동도를 하나의 침략 목적지로 삼았다고 생각되어집니다."
- 이재범 교수, 경기대
왜구들이 노렸던 것은 쌀과 재물만이 아니었다.
원산부의 최씨 부인은 겁탈하려던 왜구에게 저항하다 팔다리가 잘리고 살해되었다.
영암의 최씨 부인은 왜구들이 쫓아오자 아이들을 산으로 피했다가 결국 잡혀 죽임을 당했는데
갓난아이가 어미젖을 빨다가 따라 죽게 되었다.
"일본이 당시 계속 내란을 겪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전쟁이 사람들의 가치관을 전도시켜서
결국 사람들을 잔인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려사>에 그런 내용이 있는데,
서너살 먹은 여자아이를 잡아서 배를 갈라서
내장을 꺼내고 깨끗이 씻어서 쌀을 넣고 고사를 지낸 다음에
그 쌀을 꺼내어 밥을 해먹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 정도로 잔인했으니까,
그 사람들이 여자들을 겁탈한다든가,
쌀을 빼앗고 불지르고 하는 것은,
그렇게 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잔인했습니다."
- 손홍열 교수, 청주대 사학과
그러나 왜구들이 노린 것은
여자보다 젊고 힘센 남자들이었다.
<고려사>에는 포로로 잡혀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고려사>에 나온 사례들을 다 모으면
잡혀간 사람의 수가 3만 여명에 이른다.
잡혀간 장정들은 대부분 노예로 팔리거나 왜구의 노를 젖는데 이용되었다.
또 고려군과의 전투에 동원되기도 했다.
"왜선 50여 척이 강화에 침입하여 부사 김인귀를 죽이고, 천여 명을 잡아갔다." - 고려사 권 114
"정몽주가 국내로 되찾아온 포로가 수백명이었다." - 고려사 권 117 정몽주전
왜구들이 노린 또 하나의 목표는
고려의 값진 문화재였다.
왜구의 근거지로 지목된 대마도.
대마도 관음사에는 고려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금동관음보살 좌상 - 고려말기, 1330년경 제작
1970년대 전반, 이 불상안에서 제작 연대와 경위,
시주한 사람 등을 기록해 불상 내부에 보관한 문서, 복장기(腹贓記)가 발견되었다.
원래 불상이 있던 곳은 고려의 부석사였다.
제작한 연대는 천력3년 1330년, 서른 두명이 시주해 제작되었다.
제작연대는 물론, 시주자까지 밝혀진 고려 불상이 대마도에 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국 서주 부석사(高麗國 瑞州 浮石寺)'
"어떻게 이 절에 오게 되었는지 명확치 않다.
우리도 그게 궁금하다.
이 기록에는 불상을 만들 당시의 과정이 적혀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언제 건너왔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 이 절에 보관되게 됐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다."
- 코마쓰, 대마도향토사학자
대마도 곳곳에는 이런 고려의 문화재들이 수없이 널려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불상만 130여 점.
개인들이 소장한 것까지 합치면 훨씬 많은 불교문화재가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동조여래입상 - 통일신라, 대마도 가이진 신사 소장.
부처님 탄생불 - 고려시대 전기, 대마도 대흥사 소장.
약사여래좌상 - "
고려청자 - 대마도 가이진 신사 소장
전문가들은 이것들이 대부분 왜구가 가져온 것으로 보고 있다.
깨지고 손상된 이 청자 문화재들이,
정상적인 방법 이외의 경로를 들어왔음을 반증해주고 있는 게 아닐까?
"처음엔 식량을 약탈하기 위해 고려 해안에 왔겠죠.
그네들이 실제 불교, 불상을 대할 기회가 없었어요.
모든 문화라는 것은 높은 수준에서 낮은 곳으로 가는 법입니다.
그러니 불교의 그 신비로운 종이라든가,
불상 같은 많은 문화재를 접하면서 탐이 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훔치거나 빼앗아 가지요.
가지고 갔을 때,
일본 본토의 부호들이나 토호들은
아주 귀중한 유물을 가지고 왔다해서
왜구들에게서 많은 돈을 주고 사들였겠죠.
그러니 이것이 재물이 되고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겠고,
그러니 왜구들은 점점 우리 문화재를 약탈하는 도가
높아지고 넓어지고 그랬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정영호 명예교수, 한국교원대 고미술사
고려시대엔 불교문화가 융성했다.
일본은 물론 중국에서도 흉내낼 수조차 없었던 고려만의 자랑 불화.
고려불화는 지금 전 세계에 100여 점 남아있는데
그 중에 90여 점이 일본에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은 10점이 채 안 된다.
양유관음상(수월관음상) - 고려, 일본 큐슈 사가현 박물관 소장
미륵하생경 변상도 - 고려, 일본 천왕원 소장
관경 변상도 - 고려, 일본 서복사 소장
6. 14세기 일본은 남북조 쟁란기!~
일본의 무사집단(쇼니)은 왜구와 결탁, 고려를 약탈한다!~
"왜구들이 노렸던 것은 결국 경제적 가치가 있는 쌀과 사람, 그리고 재화들이었습니다.
이 왜구들의 침입이 극심했던 40여 년간 고려가 입은 피해는 정말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고려의 불경, 불상, 탱화는 돈주고 살 수조차 없는 세계적인 보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을 마음대로 볼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왜구에게 입은 피해는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에게 아주 안타까운 현실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왜구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가지 측면에서 접근을 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첫째, 왜구는 우리가 생각해왔던 것처럼 해적집단이 아니라 체계적인 조직을 가진 대규모집단이다.
둘째, 그들의 전술을 보면 본토의 정규군과 거의 같은 전투력을 갖춘 집단이다.
셋째, 어떤 계기로 인해, 돈이 될만한 것을 찾아서 고려를 쳐들어왔다는 그런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 어떤 계기가 무엇인지, 그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진짜 왜구의 실체를 확인해볼 차례입니다."
14세기 큐슈지방의 중심지였던 후쿠오카(옛 하까다) 다자이후 터.
다자이후는 그 지방을 다스리던 관청이 있던 곳이다.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영주들이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가마쿠라 시대 후반기에
천황계가 두갈래로 분열되는 일이 생기면서
결국 2개의 왕조로 나뉘게 된다.
당시 무사들도 두 왕조를 따라 분열이 되는데,
하나의 집안내에서도 두 계파로 나뉘어 싸우는 일이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뤄지던 시대였다."
- 무라이, 도쿄대 사학과 교수
일본 역사상 최대의 혼란기.
역사가들은 이때를 '남북조 쟁란기'라고 부른다.
북조 : 쿄또, 고묘천황
남조 : 요시노, 코다이고 천황
오하라 전적지(큐슈 오구리市).
지금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 이곳은 남북조시대 최대의 격전지였다.
1359년 당시 후쿠오카의 통치자였던 쇼니는
경쟁자 기쿠치의 군대를 맞아 이곳에서 대혈전을 벌이게 된다.
쇼니 군이 7만명,
기쿠치 군이 3만명,
십만 대군이 사활을 걸고 16시간 동안 혈투를 벌였다.
쇼니군은 기쿠치군의 야간 기습을 받아 패배를 하게 된다.
"이곳에서 승리한 기쿠치 세력이 쇼니군을 물리치고 큐슈의 다자이후를 차지한다.
그리고 이후 십수년간 큐슈의 실권을 잡게된다."
- 가시이, 오고리시 문화재 담당
오하라전투의 패배는 처절한 것이었다.
이 패배로 인해 쇼니는 2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리고 큐슈에서 세력을 잃게 된다.
쇼니군이 흘린 피가 몇날 몇일 지쿠코 강을 피로 물들였다고 한다.
"지방사회에서 싸움을 하던 무사들은 계속해서 병사와 군량미가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일본열도는 그렇게 땅이 크지가 않다.
그리고 산이 많은 곳이라 논이나 밭을 만들어 식량을 확보하는 일에 한계가 있다.
남북조 내란이 어느 한도를 넘어서서
일본 열도 내부의 식량만으론 감당을 할 수 없게 되면서
무사들은 밖으로 나가 약탈을 하게 된다."
- 아키오 교수
큐슈에서 세력을 잃은 쇼니가 재기할 꿈을 다진 곳이 바로 대마도.
그리고 바다 건너 고려였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농경지가 적어 옛날부터 식량이 많이 부족했다.
대마도 안에서 조달할 수 있는 쌀이나 곡물이 적으니까
자연히 한반도나 중국 또는 큐슈와의 무역에 많이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역이 주된 산업이었다."
- 코마쓰, 대마도 향토사학자
대마도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는 고려였다.
대마도인들은 대대로 고려에서 물자를 구해왔고
그 때문에 고려의 지리와 물자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더우기 대마도의 통치자였던 소우씨는 쇼니씨의 직속 부하였고
쇼니씨가 요구하는 고려 침입은 소우씨의 이해와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이로써 본토의 정예부대였던 쇼니세력과
소우의 대마도세력이
고려로 몰려오게 되는 것이다.
가네이시성 터 - 옛 대마도주 소우씨의 성
소우 나리쿠니 - 고려말 1350년대 대마도주
사가 현립 박물관.
우리는 취재 도중 쇼니와 소우의 관계를 입증할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냈다.
금을 녹여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해놓은 금자사경, 묘법연화경(1340년 고려 불경).
이 경전은 찬란한 금빛으로 고려 불교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금자사경은 전 세계를 통틀어 열 점이 안 되는 진기한 문화재다.
게다가 뒷부분에는 불경의 제작 경위와 연대, 시주자의 이름이 일일이 적혀 있어 사료로써의 가치도 매우 높다.
이 불경의 제작연대는
왜구의 침입이 시작되기 십 년전인, 지원6년, 1340년이다.
"고려불경을 일본으로 가져와서
그것을 당시 큐슈 통치자였던 쇼니씨가
천만궁이란 절에 기증했다는 식으로 기록이 돼있다.
어떤 경로로 입수를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 미호 혼다, 사가현립박물관 학예사
기증자가 큐슈 영주 쇼니라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이 불경의 입수 경로를 추정할 수 있었다.
결국 고려에서 제작한 이 불경은
고려땅에 침입한 왜구들에 의해 그들의 영주 쇼니의 수중에 들어갔고
다시 쇼니를 통해 천만궁에 들어간 것이다.
'1357년, 다자이(큐슈통치자)였던 쇼니씨가 천만궁에 기증'
"고려시대의 금자사경이 그 연대를 보니까
천정이라고 하는 일본 연대가 나와요.
그럼 그 연대는 1357년에 해당이 되는데,
1340년에 만들어져서,
1350년대 이후에 한참 왜구가 횡횡했을 때 이것이 일본으로 약탈 당해져서,
그것이 왜구들의 주인에게 바쳐져서,
그것은 다시 그 위에 세력 있는 사람에게 바쳐져서,
그에 의해 다시 이것을 절에다가 모시는,
이런 식으로 옮겨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정영호 명예교수
그러나 이런 영주와 왜구와의 관계는
큐슈 영주 쇼니에게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남북조쟁란기 동안 영주들은 혼전을 거듭 했다.
거듭되는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주들은 필요한 물자를 고려에서 얻으려 했다.
"남북조 쟁란이 특히 큐슈지역에서 격렬하게 벌어졌고 장기화 됐다.
14세기 후반까지 전란이 계속되는 것이 큐슈지역의 상황이었다.
이것과 왜구의 활동이 활발해진 것과는 분명히 상관관계가 있다."
- 무라이 교수
모든 세력이 무장을 했던 일본에 비해
당시 고려의 지방 방비는 상대적으로 허술했다.
일본에게 고려는
배만 타면 와서 원하는 것을 가져갈 수 있는 낙토와 같은 곳이었다.
7. 왜구의 침입!~
신흥무인세력, 이성계 성장!~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고!~
"'고려말 왜구는 단순한 해적집단이 아니라
일본 본토 남북조 혼란기에
경제적 가치가 높은 쌀과 재물,
그리고 사람을 잡아가기 위해 고려에 온 정예부대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내린 왜구의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이 왜구가 우리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擧國遠征倭乘其虛(거국원정왜승기허)'
'요동을 정벌하려고 군사를 일으키면, 왜구가 그 틈을 타서 기승을 부릴 것이다.'
1388년, 고려의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에게 요동을 정벌하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이성계는 위화도까지 갔다가
이런 명분을 내세워 군사를 되돌립니다.(위화도회군)
우리 역사에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는 이 급박했던 순간에
왜구의 존재가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고려말 왜구는 우리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80여 년에 걸친 몽고의 침입과 계속된 외침으로
고려의 국력은 쇠퇴할대로 쇠퇴해 있었다.
몽고가 물러가자마자
북쪽에서 홍건적이 침입해 수도 개경이 함락시키고 왕궁을 불태운다.
한편 남쪽에서는 왜구의 약탈과 방화로
민심이 흉흉해 나라의 기틀이 무너지고 있었다.
"고려는 원나라가 1270년에서부터 1351년까지 80년간 지배를 했습니다.
원나라가 지배를 하면서
지방에서의 반항, 저항세력을 우려해서
지방군체제를 완전히 와해시켜버렸죠.
그리고 이제 수도 개성을 지키는 치안 수준의 경군만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니 1351년 공민왕 즉위와 더불어 나타나기 시작한 왜구에 대해서
고려가 무방비상태일 수 밖에 없지 않았겠나 생각됩니다."
- 손승철 교수, 강원대 사학과
왜구의 침입을 맞아 고려가 먼저 힘을 쏟은 건
외교적 노력이었다.
고려는 정몽주(1337~1392) 등 사신을 규슈에 보내
왜구를 근절시키라고 엄중히 요구했다.
적잖은 성과를 봤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없었다.
"정몽주를 외교사절로 폐가대(후쿠오카)에 파견해 왜구 금지를 요청했다."
- 고려사 권 117, 정몽주전
해안은 연일 왜구의 침입으로 소란스러웠다.
"적이 바다에 와도 아군(육군)이 해안에서 바라보고만 있으니,
정병 백만명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
- 고려사 권 115, 우현보전
고려는 수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관리들의 상소가 이어졌고
결국 공민왕3년 수군제도를 만들어, 지방군을 정비하게 된다.
해변 주민 세 명을 한 호로 정하고, 수군 한명씩을 내게 했다.
또 지방군으로 진술군을 편성했다.
"배를 다룰 줄 모르는 연해민을 물에서 싸우게 하므로 매번 패배하게 된다..."
- 고려사 권 115, 이회전
왜구의 침입이 잦은 해안가에는 성을 쌓고 경비를 강화했다.
장암진성은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금강하구에 지어진 성이었다.
장암진성 - 충남 서천군 금강하구
"와해되었던 지방군을 다시 재정비해서 진술군을 편성하게 되구요,
또 바다를 지키는 해군, 성기군을 양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전쟁에 필요한 화약이라든지 병기를 제작해서
1370년 후반기에 가면 왜구와 전면전을 벌여
고려가 승리할만큼 고려의 군사체제가 재정비가 됩니다."
- 손승철 교수
무엇보다 획기적인 일은 화포의 개발이었다.
1377년 우왕3년 10월,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火통都監)이 설치된다.
화약과 함께
대장군, 이장군, 석포, 신포 등 각종 화기가 개발되었다.
화포의 개발과 더불어
고려의 전투력은 눈부시게 진전한다.
1380년 8월.
최무선이 이끄는 선단은 100척의 적은 선단으로 500척 왜구의 대선단을 격파한다.
대왜구전의 양상이 변하는 순간이었다.
"왜선 500척이 진포어구에 침입하다." - 고려사 권 114
"가장 효율적인 왜구 격퇴의 방법을 찾은 것이
바로 최무선의 진포대첩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화포라고 하는 최신 무기로 대승리를 거두었고,
그 이후 이 화포를 이용한 전투에서
정지장군이 남해섬앞에 관음포전에서 또 승리를 합니다."
- 이 용 교수
진포대첩이 바다의 주도권을 잡은 첫승리였다면
전북 남원 운봉에서 벌어진 황산대첩은 왜구토벌사에 한 획을 긋는 전투였다.
황산대첩 전적지.
1380년 9월, 진포에서 배를 잃은 왜구들은
인월면쪽에 몰려와 진을 치고 있었다.
이성계는 왜구의 1/10도 안 되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지휘해 왜구를 맞아 싸워 왜구 대부분을 사상시키고
말 1천 6백필을 사로잡는 대전과를 올렸다.
"이성계장군은 죽기를 각오하고 많은 군사들을 독려해서 여기가 참 힘든 싸움을 하게 되는데
말을 두번이나 갈아타고 허벅지에 활을 맞아가면서 힘든 싸움을 했지만 결국 승리로 이끌게 됩니다."
- 이남일 남원시 향토사학자
황산대첩과 피바위.
황산대첩비.
이때 흘린 왜구의 피가 강을 흘러 일주일 동안이나 그 물을 마시지 못했고
여기서 승리한 이성계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왜구의 출몰, 그로인한 피해,
이것은 이성계와 같은 신흥 무사를 성장시켰고,
또 신흥사대부들이 재정적 압박을 벗어나기 위해 조정에 사전 혁파(과전법)를 주장하게 되고,
거기에 성공해서 결국 구세력을 물리치고 새 왕조를 개창하는데 성공을 했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이라는것은 왜구와 상당히 연관이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 손홍렬 교수
고려말 왜구와의 싸움을 통해 얻어진 경험들은
이후 조선의 대왜구 정책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때로는 회유하고, 때로는 응징을 하면서,
조선은 초기 100년 이상 왜구와의 평화적인 외교를 이끌어가게 된다.
그것은 고려말의 시련속에서 얻어낸 열매였던 것이다.
(교린정책 = 회유.강경책)
"고려왕조는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해서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 결과 지방군체제도 정비하고, 화포도 개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의 건국 주체였던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도
이 왜구 토벌 과정을 통해서 민심과 권력을 동시에 거머쥐게 됩니다.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새 왕조인 조선을 건국하게 됩니다.
이렇듯 고려말 왜구는 단순한 해적집단이 아니라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역사적 전환기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을 했던 것입니다."
- 유인촌의 역사스페셜을 보고(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