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전화 옆에 은행 현금지급기를 설치해 전화 부스의 활용도를 높였다. [중앙포토]
지난 2일 늦은 오후 서울역 서쪽 출입구(옛 서부역). 매일 이맘때 여행장병라운지 부근 공중전화엔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날도 나란히 4대가 붙어 있는 전화부스에 군복 차림의 군인들이 길게 줄지어 섰다.
“나 이제 부대로 들어간다. 가서 전화할게.”
딸깍 전화가 끊어지면서 동전 반환구가 또르르 잔돈을 토해냈다. 닷새 휴가를 보내고 육군 25사단에 복귀하려던 장익진(20)씨는 쉽게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장씨에게 공중전화는 애틋한 존재다. 입대 직전 만난 여자친구와의 끈을 2년여 이어준 게 공중전화라고 했다. 하늘색 전화부스만 보면 여자친구 생각이 먼저 난단다.
한 층 위 전화부스에선 미국 시애틀에서 온 교포 피터 리(29)가 기차에 오르기 5분 전까지 수화기를 붙들고 서 있었다. 부산에 사는 단짝 친구의 사망 소식에 급히 귀국한 그에겐 공중전화가 휴대전화 대용이었다. 그는 “이렇게 휴대전화가 없고 위급한 상황에선 공중전화가 구세주”라고 말했다.
"주차공간 모자란다” 철거 요청
사용하지 않는 전화 부스에 책을 채운 서울 금천구 호압사의 ‘풍경소리 도서관. [중앙포토]
역 안팎의 공중전화 이용률은 천차만별이다. 군인들이 주로 쓰는 옛 서부역의 공중전화는 지난 5월 최고 82만원을 벌어들였다. 하지만 인접한 지하철 4호선 서울역 안에 있는 다른 공중전화는 월 수익이 3000원이다. 이 공중전화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이곳 유지보수 담당자는 “오갈 데 없는 노숙자들이 들어가 자거나 유리를 깨고 노상방뇨까지 해 훼손된 부스를 복구시키는 게 큰일”이라고 털어놨다.
공간 확보를 위해 철거되기도 한다. 최근 서울 노원구의 인제대 상계백병원에선 응급의료센터 앞 공중전화가 모두 없어졌다. 병원 측이 “주차 공간이 협소하다”며 2대 다 철거해 달라고 KT 측에 요청해서다. 병원 정문 근처 전화부스들도 대리주차 사무실이 생기는 과정에서 절반 가량 철거돼 3대만 남았다. 노모가 4년 전 쓰러져 이 병원에 장기 입원 중이라는 김숙자(51)씨는 “응급실에 공중전화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며 정문까지 나가 줄 서서 전화했던 아찔한 기억이 있다”고 했다.
서울역 광장에 있던 30여 대의 공중전화는 8년 전부터 차례로 철거됐다.
사진은 철거 이전인 2003년 서울역 광장 전화 부스의 모습. [중앙포토]
공유지의 공중전화도 ‘흉물’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다. 올해 초 서울 지하철 1호선 석계역 광장의 공중전화는 철거 위기를 맞았다. 역을 관리하는 노원구청은 노점 상인들과의 마찰로 철거를 원했다. 한종찬 KT링커스 서울 강북지사 과장은 “구청이 강제 철거하겠다는 것을 역 유동인구의 사용률이 높다고 설득해 수차례 위치를 바꿔가며 겨우 존속시켰다”고 말했다. 한씨는 수락산 요양원에 머물던 80대 노인을 기억했다. 요양원에 하나뿐인 15년 된 공중전화가 노인에겐 유일한 통신 수단이었다. 그는 “요양원 측에서 쓸모없다고 해 철거했더니 이후 건물주가 자동판매기를 설치했더라”며 “그 노인이 어떻게 가족들과 연락했는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씁쓸하다”고 했다.
"통신 약자 위해 공중전화사업 유지”
실제로 공중전화는 살아남기 위해 변신하고 있다. 일부 전화부스들은 첨단화되기 시작했다. 은행 현금지급기가 접목된 멀티형 부스가 대표적이다. 경인선과 경부선, 과천선, 안산선 등 수도권 주요 역사에 이미 보편화됐다. 낡은 옷을 벗고 도시 미관에 맞는 새로운 옷을 입고 재탄생하기도 한다. 서울 강남구 코엑스의 공중전화는 3년 전 단순한 갈색 유리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서울 이태원 공중전화의 경우 진회색 외벽에 어느 아마추어의 그래피티 아트(낙서 예술)가 덧입혀져 이태원다운 감성을 갖췄다.
동네 명물이 된 폐부스도 있다. 서울 성동구 왕십리 광장에 가면 무인도서관 ‘책뜨락’으로 변신한 전화부스를 볼 수 있다. 성동구는 지난해 2월부터 폐부스에 책 200여 권을 채웠다. 주민들에게 도서를 자율 대여하고 있다. 서울 금천구에는 산책길 옆에 ‘산사도서관’이 있다. 서울 둘레길을 끼고 있는 호압사의 ‘풍경소리 도서관’이다. 이 역시 금천구가 지난해 6월 폐부스를 다시 꾸민 것이다. 서울 송파구에서도 이용률이 낮은 전화부스 8개 정도가 주민들의 도서관으로 쓰이고 있다.
폐부스는 자전거 라이더들의 쉼터가 되기도 한다. 경기도 김포시 아라김포터미널에 위치한 부스엔 4대강 자전거도로를 종주한 라이더들을 위한 무인인증센터가 마련됐다. 군인들 바람막이 용도로 쓰도록 재활용한 군 초소형 부스도 있다.
이지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