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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인민군복 차림에 북한 무기를 소지한 공작원들이 훈련 중 한자리에 모였다.
⑩ 야간 철조망 침투훈련. [사진 특수임무유공자회]
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북파 형식의 대북 특수임무 수행은 공식적으로 종결됐다. 하지만 요원 양성과 비공개적인 특수활동은 상당 기간 계속됐다. 2000년대 들어서도 AN-2기를 이용한 대북 침투 훈련이 이뤄졌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북한이 대남 침투용으로 보유한 이후 우리 군도 교란작전 등 대응을 위해 비밀리에 도입해 운용 중이란 설명이다. 2004년에는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돼 보상이 추진됐다. 그런데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거나 잊힌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게 관련 단체의 지적이다. 가족이 북파공작·훈련 참가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당사자가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북파공작원 출신 인사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수행했던 임무에 대해 털어놓기를 꺼린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절대 비밀을 유지한다는 보안서약을 지키려는 생각에서다. 북파공작 훈련을 받은 부친으로부터 숨지기 직전에야 관련 사실을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는 백승민씨는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말없이 소주를 들이켜며 먼 산만 바라보시던 아버님의 고독과 아픔을 이젠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90년대 말까지도 국가 비상사태 때마다 소집명령을 받았다. 74년 8월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이나 96년 9월 강릉 잠수정 침투 사건 등이다. 아직도 소집명령에 대한 해제 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대부분 60~70대 나이인 북파공작원 출신들은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8000명 가까운 젊은이들이 나라를 위해 청춘과 목숨을 바친 일에 대해 국가가 제대로 된 공적평가를 해달라는 주문이다.
공적에 합당한 훈·포장 수여와 함께 조국을 위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국민들이 함께할 수 있는 추모묘역이나 공원 조성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790여 명이 숨진 4·19 혁명은 9만6837(약 3만 평), 4090여 명이 사망한 5·18 민주유공자의 경우 16만6734(약 5만 평)의 국립묘지가 조성돼 있다. 국방부는 전사자의 공적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기 곤란하고, 6·25와 베트남전·학도병 등과의 형평성 문제 등을 제기하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북파공작원 출신 인사들은 2008년 1월 특수임무유공자회를 결성했다. 추모공원 건립과 서훈 등 숙원사업 외에 유해 발굴, 재난 구조 등 사회공헌 사업도 벌이고 있다. 그들은 ‘나는 오늘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를 활동 모토로 하고 있다. 국가는 그들을 잊었지만 영원한 현역으로서 조국을 위한 헌신을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7726명의 동료들이 모두 돌아오기 전까지 전쟁은 결코 끝난 게 아니다”라고.
김희수 특수임무유공자회장
"1969년 사망한 요원 2002년에야 전사 통지
가스통 시위, 억울한 마음서 나온 거친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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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못한 동료들과 매일 아침 이곳에서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눕니다. 혼자 살아남아 미안하다고. 그리고 즉각 무사귀환하라고.”
김희수(61) 특수임무유공자회장은 미귀환 북파공작원 7726명의 이름이 빼곡히 담긴 검은 대리석 명패를 어루만지며 눈물을 보였다. 서울 녹번동 유공자회 내부 추모시설에서 만난 김 회장은 “북파공작과 관련한 모든 건 기억하지 말 것을 강요받은 우리가 이젠 그 아픈 역사를 기억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이름 위에 태극마크가 붙여진 명패가 눈에 띈다. 뭔가 구별하기 위한 것 같은데.
“2004년부터 국군정보사령부가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유가족 찾기를 해왔다. 8000명 가까운 사망·실종자 중 800명 정도만 가족·친지를 찾았고, 그분들을 태극 표시해둔 것이다.”
- 임무 수행 중 전사했는데 가족에게 즉각 통지되지 않았다는 건가.
“1969년 사망한 요원이 2002년에야 전사 통지를 받았다. 군 당국이 등기우편으로 달랑 보냈다. 80대 고령인 부친이 사망신고를 하러 갔더니 면사무소 직원이 과태료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더라. 한을 품고 있는 유족들에게 두 번 상처를 준 것이다.”
- 어떻게 북파공작원에 선발됐나.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벌어진 지 두 달이 지난 68년 3월 물색관의 제안에 응했다. 고등학고 1학년이니까 16세였다. 5급 공무원을 시켜주고 당시 돈으로 500만원도 준다는 제안에 선뜻 응했지만 71년 전역 때 겨우 3만원만 받았다.”
- 집무실에 고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사진을 놓아둔 건 뜻밖이다.
“다들 우리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원망이 가득할 거라고 생각하더라. 하지만 우린 그분을 존경한다. 고인께서 다시 살아와서 명령한다면 우린 또 북으로 갈 것이다. 남북 대결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 국가를 위해 희생했는데 잊혔다는 서운함은 없나.
“최근 이석기 사태 등 종북세력의 행태를 보면 걱정이 크다. 그들에게 막대한 국민 세금이 지원됐다는 점도 문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뜻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부터 앞장설 것이다.”
- 북파공작원 하면 광화문 사거리에 모여 가스통에 불을 붙인 채 과격시위를 벌였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과격·폭력 이미지로 비쳤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젊음을 다 바쳐서 희생한 데 대해 국가가 외면하자 욱하는 마음에서 거친 행동을 한 것으로 이해해 달라.”
- 지금도 유사시를 대비한 특수부대를 운용 중이라던데.
“과거와 같은 일이야 가능하겠나. 얼마 전 우리 후배들이라 할 수 있는 특수정보부사관들이 근무하는 부대를 방문했다. 60대1의 경쟁률에 3개 국어를 해야 한다고 하더라. 우리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시설과 지원이 이뤄지는 걸 보고 가슴 뿌듯했다.”
- 군 당국은 북파공작원 위령탑은 이미 건립됐다는 입장인데.
“판교 정보사 교육단 영내 쓰레기 소각장터 옆에 충혼탑이 세워졌다. 부내 내에 있어 유족과 일반인의 접근이 어렵다. 단위부대장이 추모행사를 하고 있다. 국립현충원 등으로 옮기거나 새로 건립해 국방부 등이 관리하는 게 맞다고 본다. 이들을 예우해야 우리 후세들도 나라가 어려울 때 기꺼이 나서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이영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