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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淳台의 6·25 南侵전쟁이야기(17)/ 백선엽 사단장의 “나를 따르라!”

淸山에 2013. 9. 20. 20:59

 

 

 

 

 

 

鄭淳台의 6·25 南侵전쟁이야기(17)/ 백선엽 사단장의 “나를 따르라!”
남한서 강제 徵募(징모)한 병력을 총알받이로 세운 김일성

鄭淳台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사상 초유의 사단장 돌격 “나를 따르라”
 
韓美군은 이런 북한군의 야습을 매일 밤 격퇴했지만, 22일 생각지도 못했던 돌발사고가 발생했다. 국군 제11연대의 제2대대는 진지 전방 1km의 고지의 탈환을 명받았지만, 그 정찰을 위해 전방으로 나간 장병들이 북한군으로부터 포격을 받고 말았다. 이때 사상자들을 후송하는 모습을 본 제2대대의 장병은 부대가 후퇴하는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뿔뿔이 흩어져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런 급보를 접하고 현지로 달려온 백선엽 사단장은 후퇴하는 병사들을 불러 세워 고추밭에 앉히고 이렇게 타일렀다.

 

“그동안 잘 싸워 주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다부동을 잃으면 대구가 떨어지고 곧 부산을 잃고 만다. 그리 되면 우리는 갈 곳이 없다. 이제 조국의 존망이 우리들에게 걸려 있다. 죽더라도 여기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바로 저 아래 골짜기에서는 멀리 지구의 반대 쪽으로부터 우리를 도우러 온 미군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다. 우리를 믿어준 미군을 버리고 도망칠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 돌격이다.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 이것은 그 후 우리 육군 장교 또는 후보생이 교육을 받는 육군보병학교 장병들의 肩章(견장)에까지 새긴 교훈이 되었다. 사단장의 비장한 결의에 뭉클해진 장병들은 오연히 일어섰다. 드디어 사단장을 선두로 한 돌격을 개시, 적의 저항을 배제하고 목표를 탈취했다. 이것을 본 마이켈리스 연대장은 감탄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것이 6·25전쟁, 아니 근대 이후 세계전사를 통틀어 찾기 어려운 사단장의 돌격이었다.


적 포병연대장 鄭鳳旭 귀순― 훗날 논산훈련소장이 되다

 

다부동 전투 도중 국군 제11연대 제2대대(대대장 차갑준 중령) 진지로 북한군 제13사단 포병연대장 鄭鳳旭(정봉욱) 중좌가 병사 1명과 함께 귀순해 왔다. 그는 한 손에 백기를 들고 어깨에서 허리에 찬 가죽가방 안에는 작전지도가 들어 있었다. 그는 곧 연대본부로 후송돼 조사를 받았다. 귀순 동기는 이러 했다.

 

북한군 제13사단장은 그들의 공격이 실패하고, 패색이 짙어지자 포병연대장에게 유학산-다부동 일대에 대한 포격에 잘못이 있었다고 책임을 추궁했다. 당시 하판동 부근의 과수원에 구축된 적 포병진지에서는 다부동-眞木亭(진목정)이 死角(사각)지대에 들어감으로 그 일대를 포격하려면 진지를 옮겨야 했다.

 

그렇게 하면 노출되어 미군 항공기의 표적이 되기 때문에 그 과수원을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이런 실정을 들어가며 사단장에게 항의했으나 책임 추궁은 더욱 신랄했다. 이에 평소 사단장과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커져 귀순을 결심했다.

 

귀순한 정봉욱 중좌는 하판동 부근 과수원에 교묘하게 위장된 적 포병 진지에는 122mm곡사포 7문과 76mm 곡사포 13문이 배치돼 있다고 진술하면서 그 위치도 정확히 찍어 주었다. 이 정보에 따라 미군 전폭기의 폭격과 미군 155mm 곡사포 포격에 의해 적 포병을 침묵시켰다.

 

정봉욱 중좌는 국군으로 전환하여 육군 소장까지 누진했다. 1970년 논산(제2)훈련소의 소장으로 가서는 매우 엄한 지휘력으로 훈련소의 유명짜한 부정부패를 일소하여 깨끗한 ‘국군의 요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훈련병의 금품을 뜯은 조교·내무반장·교관·중대장 등도 검은 고무신을 신겨 영창에 집어넣었다.

 

청렴결백한 韓信(한신) 장군은 1960년대 말 ‘장교의 요람’인 전투병과교육사령부(CAC)를, 一罰百戒(일벙백계)의 정봉욱 장군은 ‘병사의 요람’인 논산훈련소를 남 부끄럽지 않게 육성한 一流 군인이었다.     


韓美 연합작전의 試金石 

 

사단장의 돌격 이후, 한미 양군의 신뢰관계는 보다 깊어졌다. 생각해보면 양군 최초의 연합작전였던 만큼 처음부터 서로 신뢰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서로가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신뢰감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부동 전투는 8월의 결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미연합작전의 試金石(시금석)이 되었다.

 

‘연합작전의 모범생’ 백선엽 준장은 후일 북진시 평양 入城(입성) 1번을 기록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워 1953년 1월 국군 최초의 대장이 되었고, 두 번에 걸쳐 육참총장을 역임했다. ‘미8군의 소방수’로 회자된 마이켈리스 대령도 후일 대장으로 진급하고 미 육군사관학교장·8군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다부동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18일 새벽, 적의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져 역원 1명이 사망하고, 7명의 시민이 부상했다. 다행히 기차선로의 피해는 없었으나 역구내 시설 일부가 파괴되었다. 다부동 동남쪽 架山(가산)까지 진출한 敵 제1사단 제14연대의 일부가 대구 도심 바로 북쪽의 금호강변에서 120mm 重박격포를 쏘아댄 것이었다. 박격포탄 7발은 인구 70만의 대구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시민들은 동요했다 당시 70만 명의 대구 시민 중 40만은 서울 등지에서 내려온 피난민이었다. 다음과 같은 유언비어도 나돌았다.

 

— 북괴군 대부대가 금호강까지 쳐들어왔다.
— 국방부와 육군본부도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다.
— 미군들도 일본으로 철수하려고 東村(동촌)비행장으로 몰려가고 있다.
 
육군본부 對民선무대는 거리로 나가 이렇게 외쳤다. 

 

“국방부·육군본부 그리고 미8군은 절대로 대구를 떠나지 않는다. 또 다부동 전선에서는 곧 반격이 시작되어 북괴군을 격멸할 것이다”

趙炳玉(조병옥) 내무장관도 직접 마이크를 들고 “내무부는 끝까지 대구를 떠나지 않는다”고 외쳤다. 신성모 국방장관도 나섰다.

“우리 국군과 미군을 믿으시오. 이런 때일수록 시민 여러분들은 국군 장병들을 뒷받침해 주어야 합니다”

 

대구방위사 병력과 경찰병력이 즉각 출동했다. 금호강변에서 박격포를 쏘아댄 적은 곧 소탕되었다. 대구 북쪽 22km지점에서 사투를 벌이던 다부동의 위기는 서서히 극복되었다. 북한군은 대구의 문 앞에서 기진맥진했다. 8월23일, 국군 제1사단은 마침내 다부동을 지켜냈다. 제1사단은 8월30일 다부동을 미 제1기병사단에 넘기고, 팔공산 북동쪽 기슭으로 이동했다.
  
 
다부동 전투의 戰場 답사

 

유학산 격전지 답사는 자동차를 타고 올라가 팥재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팥재 주차장에서 도봉사를 거쳐 유학산 제1봉인 839고지까지의 1km가 오르막길이다. 839고지 팔각정으로부터 837고지를 거쳐 674고지까지는 3.2km는 약간의 기복은 있으나 내리막길이다. 유학산 제2봉인 837고지는 피아의 쟁탈전으로 屍山血海(시산혈해)를 이룬 현장이다. 難攻不落(난공불락)의 837고지는 남쪽은 매우 가파르고, 특히 8부 능선부터는 상투바위 혹은 촛대바위로 불리는 암벽지대를 이루고 있다. 837고지에 점령하려면 그 암벽 사이의 오솔길로 오를 수밖에 없다.

837고지를 점령한 적은 그 동쪽으로 내려가 대구-안동 간 5번국도를 감제할 있는 674고지까지 점령했다. 674고지에서 1.6km를 내려오면 다부동 전적기념관이다.

 

多富院(다부원) 앞에서 북쪽 천평리까지의 약 5km(5번국도)가 미 제27연대와 북한군 제13사단이 6·25 전쟁 최초의 전차전을 전개한 ‘볼링계곡’이다. 당시는 2차선 砂利道(사리도)였으나 지금은 6차선 고속화도로다. 5번 국도와 병행해서 55번고속도로가 달리지만 물론 6·25전쟁 때는 없던 길이다. 도로 동쪽으로 眞木亭(진목정)·새술막(新酒幕)·泉坪(천평)삼거리 등 다부동 戰史(전사)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들이 눈에 띈다.

 

천평삼거리에서는 안동으로 가는 5번국도와 상주로 가는 25번 국도로 갈라진다. 천평삼거리에서 5번국도를 南行(남행)해 다부동 전적기념관으로 되돌아왔다. 여기서 5번국도를 따라 1km 쯤 내려가면  ‘제8군의 소방대’로 이름난 미 제27연대의 본부가 포진했던 所也(소야)고개이다.

 

소야고개를 넘어 5번국도를 1.5km만 더 달리면 鶴鳴洞(학명동), 1950년 8월19일 다부동의 위기를 구원하기 위한 증원부대로 달려온 미 제23연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연대장 폴 프리먼 대령은 한국전쟁 중 그 유명한 ‘지평리’전투(1951년 2월13~15일) 당시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격퇴한 파이터로서 후일 대장으로 누진, 유럽 주둔 미군 총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群鷄一鶴(군계일학)이 우는 마을인 鶴鳴洞에서 飛翔(비상)을 했던 셈이었다. 다음은 백선엽 장군이 필자와의 회견에서 했던 말이다.

 

<연대장 폴 프리만 대령은 투지가 있어 보이는 군인이었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유창한 만다린(北京표준어)으로 “우리 중국어로 말하자”고 했다. 그는 내가 만주군 출신인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한국인과 미국인이 중국말로 얘기하는 것도 그렇고 해서 “그냥 영어로 하자”고 했다. 미 제23연대를 도착 즉시 다부동 남쪽 鶴鳴洞(학명동)에 사단 예비연대로 투입했다. 전쟁 중 한국 사단에 미군이 두 겹으로 중첩 투입된 것은 다부동전투가 유일한 경우였다. 그만큼 대구의 관문 다부동은 중요했다.>
 

사단장을 잡으러 온 특공대
     
학명동에서 5번국도를 5km 쯤 내려오면 칠곡군 東明面(동명면)에 닿는다. 이곳 동명초등학교는 다부동전투 당시 국군 제1사단의 사령부가 설치된 곳이다.

 

다부동 전투의 클라이막스로 치달을 8월19일 밤, 적 특공대는 제1사단 사령부(동명초등학교)를 습격했다.  나중에 포로 심문을 통해 밝혀진 사실이지만, “사단장을 생포하러 야습했다”는 것이었다. 중대 규모의 적이 제1사단사령부를 급습했을 때 부관 김판규 대위가 백선엽 사단장을 급히 흔들어 깨웠다. 가까이에서 따발총·기관총 발사음, 수류탄 폭음이 들려왔다. 벌써 미군 통신병 등 몇 명이 전사해 사령부 안은 혼란에 빠졌다. 평소 사단사령부에는 경비 병력이 거의 없었으나 때마침 증원부대가 19일 저녁 무렵에 도착해 운동장에서 宿營(숙영)하고 있었다. 白사단장은 운동장 쪽으로 달려나가며  고함쳤다.

 

“순기야!,  빨리 돌격!”     

‘순기'는 증원부대로서 永川(영천)으로부터 행군해서 19일 저녁 동명국민학교에 도착한 제8사단 제10연대의 선발 대대장 김순기 소령이었다. 김순기 소령은 白사단장이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재임할 때 局員(국원)으로서, 그때부터 형제처럼 터놓던 사이였다. 당초, 지원부대를 애타게 기다리던 제1사단 작전참모 文亨泰(문형태) 소령은 “증원부대를 즉시 전방에 배치할까요”라고 사단장에게 물었다. 다음은 백선엽 장군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무더위 속에서 이곳까지 행군해 온 부대를 차마 바로 투입할 수 없어 ”일단 잘 먹여 재운 뒤 새벽에 출발시켜라“고 지시한 터였다. 이들을 바로 출발시켰디면 사령부는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도 하나의  전쟁운이라 할 수 있다. 며칠 후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이 제1사단을 격려 방문했는데, 그때 사단사령부가 깨져 있었더라면 참으로 체면이 서지 않을 뻔했다.>
 
국군 증원부대인 제10연대(연대장 高根弘 중령)는 사단 우익 架山山城(가산산성)에 투입되어, 인접 국군 제6사단과의 접촉부를 담당했다. 적 특공대도 가산의 험준함을 뚫고 사단사령부를 야습한 것이었다. 가산산성은 해발 901m의 架山(가산)에 쌓은 석축산성이다.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전쟁을 겪은 조선왕조는 有備無患(유비무환)의 생각에서 10만 명의 장정을 징발해 골짜기와 능선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산성을 쌓았다. 이곳은 1640년 內城(내성)의 완공과 더불어 이후 80년 가까이 종3품 칠곡 都護府使(도호부사)가 다스리는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필자는 동명초등학교를 뒤로 하고, 79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산으로 향했다. 꾸불꾸불한 산허리길을 달리다 가산산성 입구를 지나‘한티순교성지’앞에 이르렀다. 조선  말기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격심해지자 천주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모여 살았던 곳인데, 관헌에 들켜 많은 순교자를 냈다.

 

여기서 조금 가면 한티재(784m)휴게소이다. 이곳에서 전방을 바라보면 군위군의 ‘제2석굴암’이 보인다. 제2석굴암에는 국보 제109호인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삼존불은 아미타불·대세지보살·관음보살이다. 제2석굴암은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에 앞서 7세기 말에 창건된 先行(선행)양식이다. 한티재에서 가산산성 입구로 되돌아 나와 가산산성 남문에 이르렀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다부동전투》에서 관련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적은 국군 제1사단의 主저항선을 돌파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듯 가산산성에 1개 연대를 은밀히 침투시켜 사단 후방지역을 교란하려 했다…(중략)


미 제23연대는 적의 공격이 시작되자 모든 화력을 총동원하여 그들의 접근을 저지하는 한편 긴급 항공지원을 요청했다. (중략)미국과 호주의 항공기가 대거 출격하여 가산산성에 40톤의 폭탄을 투하하고 5번국도 동쪽 일대의 고지도 맹타했다. 가산산성 일대는 피비린내 나는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중략)


8월23일,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이 정일권 참모총장의 안내로 제1사단사령부를 방문한 후 제11연대 본부로 가던 중 적 포탄이 떨어져 양국 총장이 같은 호 속에 대피한 토막극도 있있다… (중략)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른 (국군 제10연대 제1대대) 제4중대는 180여 명의 병력 중 몸이 성한 자는 장교 1명과 병사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고… (중략)


대대 방어진지 내외에는 약 300명의 적 시체가 즐비했고, 82mm 박격포 3문을 위시한 소총 250여정이 흩어져 있었다. 대대는 진지 부근에서 미처 도주하지 못한 패잔병 10여 명을 사로잡아 심문한 결과 그들이 북괴군 제14연대(연대장 대좌 崔昌淑)임을 확인했다… (중략)


적 14연대는 8월27일의 교전에서 와해되어, 아군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 병력은 400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국군 제1사단은 적군에 비해 병력이나 장비 면에서 2~3배 열세였고 전방·측방·후방의 3개 방향으로 적의 공격을 받았지만, 이를 극복하고 다부동전투에서 승리했다. 이것은 부대 장병의 높은 사기 때문이었다.

 

제1사단 장병들은 개전 초기 임진강 전투와 지연전을 통해 통한의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낙동강 전선으로 물러난 제1사단은 여기서 신병보충을 받아 병력을 70% 선으로 유지하게 되고, 기관총·박격포·3.5인치 로켓포를 지급받자 이제 싸울 만하다며 사기가 높아졌다. 이것이 다부동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기반이었다.  


남한서 징모한 병력은 총알받이가 되어…

 

8월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한다는 김일성의 희망은 불발로 끝났다. 김일성은 다시 “9월15일까지 부산점령을 끝내야 한다”고 독전하면서 이렇게 협박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軍(군) 지휘관들을 모조리 반동으로 몰아붙이겠다.”

북한군은 8월 공세의 말기에 이미 다음 공세의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9월 공세’는 9월 중순까지 부산 교두보에 대해 감행된 이판사판의 전면 공격이었다. 북한군의 병참은 곤란을 극복해 남한 내에서 노무자 30만 명을 동원해서 수송을 계속했지만, 제1선에 도착하는 보급품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식량의 보급은 거의 없었고, 현지징발도 10월 초의 추수 때까지는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북한군 1개 사단의 1일 평균 보급량이 7월15일까지는 206톤이었던 것이 8월15일에 이르러 그 4분의 1인 51톤으로 감소했다. 특히 9월공세 기간 중의 1일 보급량은 21.5톤으로 급감했다.

 

이로써 낙동강 전선의 적병은 체력의 한계에까지 접근, 공세 실패의 큰 요인이 되었다. 어떻든 북한군은 남한의 논에서 자라는 벼가 수확되는 시기까지 굶주린 배를 졸라맬 수밖에 없었다.

 

병력의 보충은 남한 내에서 강제로 徵募(징모)했지만, 장비도 훈련도 되지 않아 전력이 되기 어려웠다. 북한군 각 사단의 병력은 개전 때로부터 생존한 자가 3분의 1, 북한으로부터 새로 모집한 신병이 3분의 1, 나머지 3분의 1이 남한 내에서 강제 모집된 병력이었다. 남한 내에서 강제 모집한 병력은 거의 총알받이로 남용되었기 때문에 전사상자가 많았다.    

 

8월31일 한밤중에 북한군은 남부 정면에서 1개 군단이 공격을 개시했다. 마산 정면에서는 종심 4km를, 영산 정면에서는 종심 13km를 돌파했고, 야음을 틈타 속속 병력을 전방에 추진하여 전과를 확대하려 했다. 9월2일 밤에는, 북한군의 제2군단이 북쪽 정면에서 공세를 개시했다. 대구 북방 정면에서는 3개 사단이 미 제1기병사단을 맹공으로 퇴각시키고 대구로 돌입하려는 기세를 보였다. 국군 담당 정면은, 1개 기계화여단의 지원을 받은 적 2개 사단이 국군 제1군단과 제2군단의 경계 부근의 국군 제8사단을 돌파하여 永川을 함락시키고, 慶州(경주)를 엿보았다.

 

또 다른 2개 사단은 동해안 정면의 국군 제1군단을 격파하면서 경주를 함락시키려 했다. 9월4일 저녁에는 미 제8군이 한국에서 전면 철수하는 것을 검토할 정도로 북한군은 全 정면걸쳐 맹공을 퍼부었다.

 

한편 미 본토로부터 제2사단의 주력 및 보충부대, 탱크대대 62개 등이 도착했고 영국군 제27여단도 참전했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유엔군 사단이 3개 연대, 3개 대대라 하는 완전 편제를 갖추고, 화력도 증강되었다. 이 무렵 유엔군은 북한군의 병력을 9만8000 명으로 견적하고 병력면에서 2배, 전차에서는 5배로 유엔군 측이 우세하다고 판단했다.


영산·창녕 전투(미 제2사단 VS 북한군 제9·제2·제10사단)

북한군 전선사령관 金策(김책) 대장은 8월20일 예하 각 군단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이에 영산 정면의 북한군 제9사단 등은 영산 지구를 거쳐 밀양에 진출한 다음, 대구와 부산 간의 도로를 차단하라는 임무를 맡았다. 미 제2사단은 8월 하순에 미 제24사단으로부터 작전지역을 인계받아 영산·창녕 지구를 방어했다. 북한군은 이 정면에 제9, 제2, 제10의 3개 사단을 투입해 8월31일 심야, 일제히 기습 도하를 강행했다. 9월1일 아침에는 미 제2사단의 방어선은 거의 全지역에서 돌파되고 말았다.
 
워커 중장은 맥아더 원수의 승인을 얻어 제2사단에 미 제5해병연대를 주력으로 하는 미 제1해병여단을 투입하고, 다시 예비로 되어 있던 제24사단도 전선 후방에 이동시켰다. 9월3일, 제5해병연대를 주력으로 하는 해병대는 미 9연대 방어 지역에서 반격을 개시, 3일간 연속적인 강압을 가해 5일까지 거의 모든 진지를 회복했다. 그러나 제5해병연대는 9월15일이 D데이인 仁川상륙작전의 준비 관계로 5일에는 배속이 해제되어 전선을 제9연대에 넘기고 釜山(부산)으로 이동해 버렸다.

 

미 제2사단은 그 후에도 예하 제23연대의 창녕 방어선을 돌파당했지만, 제23연대는 근접항공지원을 받으면서 본부중대 및 공병대까지 투입, 적을 저지했다. 9일 경부터 북한군의 공격은 드디어 기세가 꺾였다. 전쟁 초기에 그 위세를 뽐냈던 북한군의 T34전차는 유엔 항공기의 밥이 되었고, 미군의 신형 전차가 등장하면서 더 이상 미군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미군의 피해도 컸다. 미 제2사단 제23연대의 경우 전투가 끝난 후 전투력이 38%에 불과할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또한 미 제34연대는 전투력이 감소되어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1950년 7월 한국전선에 출동할 때 2000명이던 병력이 9월 초 184명 만 남아 있었다. 병력의 대부분은 전사·부상·실종이었다. 

 

8월공세와 9월공세 중 영산·창녕전투에서 맹위를 떨친 敵 제4사단과 제9사단의 사령부는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에 설치되었다. 졸자는 신반리를 답사하기 위해 남해고속도로 郡北(군북)IC를 빠져나왔다. 여기서 4km 쯤 달리면 낙동강 최대의 지류인 南江에 鼎巖橋(정암교)가 걸려 있다. 정암교의 바로 동쪽에 옛 정암교가 걸려 있고, 그 아래 남강 위로 솥바위(鼎巖 가 강물 위로 돌출해 있다. 옛 정암교엔 차량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 이 일대의 남강을 ‘거름강’이라고 부르는데,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 郭再祐(곽재우)가 왜병의 西進(서진)을 막은 전승지이다.

 

정암교에서 20번 국도를 따라 10여 km 북상하면 三星(삼성)그룹의 창업주 李秉喆(이병철) 회장의 생가인 正谷面 중교리(정곡면 중교리). 중교리 20번국도 따라 5km쯤 북상하면 곽재우 장군의 생가 마을인 柳谷面 世干里(유곡면 세간리)가 나온다. 세간리에서 20번국도를 또다시 4km 북상하면 낙동강 돌출부를 집요하게 공격한 敵 제4·제9사단의 사령부가 자리잡았던 부림면 신반리이다. 평범한 농촌의 面(면)소재지이지만,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군사적 요충이다. 신반리에서 20번 국도를 타고 10km 쯤 북동진하면 적교. 적교에서 적포교를 통해 낙동강을 건너면 창녕군 이방면. 이방면에서 낙동강 동안을 따라 10여 km 남진하면 젖무덤 같은 낙동강 돌출부가 시작되는 詩南里(시남리)이다. 격전의 현장 그리고 낭만적인 地名, 그래서 그런지 초등학교 시절에 배운 이은상 作詩(작시)의 가곡 ‘낙동강’이 생각났다.
 
산 돌아 들을 누벼 일천삼백리
구비구비 여울 여울 이 강 위에서
조국을 구하려는 정의의 칼로
반역의 무리를 무찔렀나니
오호 낙동강 오호 낙동강
소리치며 흐르는 승리의 낙동강
승리의 낙동강

 
시남리에서 남하하여 기항나루에 이르렀다. 강 건너편 돈지가 바로 남강과 낙동강의 합수지점인 의령군 지정면 돈지이다. 돈지 부근의 合江亭(합강정)을 바라보면서 낙동강 左岸(좌안)을 따라 남진하면 남지읍. 남지읍에서 낙동강 본류는 크게 ‘ㄴ’ 자를 그리며 남지읍-창녕군-밀양군-양산군의 남부 평야를 적시며 흘러간다. 남지읍의 남지철교를 통해 낙동강을 건너면 함안군 칠서면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마산 서쪽 鎭東(진동)까지가 미 제25사단의 방어지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