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8.24 03:11
[잊을 수 없는 전쟁 6·25] "다시 오마, 친구야"… 美 노병 63년 우정, 北도 녹였다
아, 63년 전 그날 장진호
친구 제시의 전투기 추락… 凍傷에다 뼈도 부서졌지만 끝까지 미소 잃지 않은 그…
"꼭 구하러 돌아올게" 약속
7월 訪北 땐 못 데려왔지만…
폭우 때문에 친구가 묻힌 장진호 근처에도 못 가봐…
9월 재방북해 데려오면 무덤에 흙 한줌 뿌려줄 것
"내 기억 속 북한은 잔혹하게 얼어붙은 땅이었다. 추위 때문만이 아니라 적진에 사악하게 총구를 들이대며 인간의 마음까지 얼려버리고 마는 죽음의 땅. 하지만 그곳에도 풀은 자라고 햇살도 비추었다. 63년 전 내가 목격한 게 죽음과 절망이었다면 이번엔 희망을 봤다."
노병(老兵)은 의외로 담담했다. 북한에 두고 온 친구의 유해(遺骸)를 찾아 63년 만에 어렵게 택한 북한행. 지난 7월 말 무섭게 쏟아내리는 빗줄기에 도로가 유실돼 친구가 묻혀 있는 함경남도 장진호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던 그였다. 적지않이 실망했을 것 같았는데, "전사자 유해 발굴에 적극 돕겠다는 북한의 약속을 받아왔다. 날 좋은 9월 중순쯤 북한을 다시 찾을 계획이다"고 응했다. 목소리가 흔들린다고 느낀 건 잠깐이었다. "이번엔 친구를 못 데려왔지만, 다음에 꼭 데려와 그 무덤에 따뜻한 흙 한 줌 뿌려주고 싶다"고 말할 때였다. 그런 걸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 "다음번 북한을 찾을 땐 낚시도 하며 여유 좀 부려 볼 것"이라며 웃었다.
허드너가 북한 평양 '전승기념관'에 놓인 미 함상 전투기 F4U 콜세어 앞에 섰다.
그가 6·25참전 당시 몰았던 전투기와 같은 기종이다. /
ValorStudios.com 제공
6·25 참전 용사 토머스 허드너(Hudner·89) 미(美) 예비역 대령. 해군 조종사였던 그는 당시 몹시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히는 장진호 전투에서 격추당한 친구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비행기를 동체 착륙(crash)시켜 구조를 시도하는 등, 남다른 전우애를 보이며 27번의 전투 임무를 수행한 공으로 미국 최고 군사 훈장인 '명예 훈장(the medal of honor)'을 받았다. 그는 추락으로 조종간에 하반신이 끼어버린 친구를 구해내기 위해 영하 20도의 날씨와 싸우며 혼신을 다했다.
"내 친구 제시는 마지막까지 존엄을 잃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은 이미 동상으로 굽었고, 추락 때문에 온몸의 뼈가 부서진 듯했는데도 아프다는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도끼질을 하며 몇 시간을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더 좋은 장비를 찾아 널 구하러 꼭 돌아올 거야'라고 말하며 그를 떠나야 했다. 제시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미소로 날 보내줬다. 그곳에서 날 계속 기다렸을 거라 믿는다."
그와 나눈 전화 인터뷰는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오는 31일 89세가 된다는 그는 "귀가 잘 안 들린다"고 했다. 대신 이메일로 이어졌다. 그는 꼭 강조하고 싶은 게 있다고 말했다.
"한국전(Korean War)을 다들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하지만 그 전쟁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안다면, 한국 땅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던 수많은 참전 용사를 기억한다면 그렇게 쉬이 말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런 전쟁을 잊는다는 건 전쟁 못지않게 참혹하리만큼 쓰디쓴 일이다."
6·25 전쟁으로 미국 명예훈장을 받은 이는 모두 131명. 현재까지 살아남은 이는 10분의 1도 채 안 되는 11명이다. 해군 출신으론 그가 유일하다. "참전 용사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나다 보면 진짜 잊은 전쟁이 될까 걱정이다. 자유를 위해 자기 목숨도 기꺼이 내놓은 제시 같은 친구들 이야기가 더 널리 퍼져 한국전이 '잊혀진 전쟁'이 아닌 '잊을 수 없는 전쟁'으로 불리길 바란다."
미 해군 첫 흑인 조종사였던 제시 브라운(왼쪽) / 6·25 참전 당시의 토머스 허드너.
◇"북한 사람도 그저 나랑 똑같더라"
허드너는 지난 7월 20일부터 열흘 정도 북한에 머물렀다. "전쟁박물관과 절 등을 다니며 북한의 산천을 눈에 담았다. 북한군 장교 중 몇몇은 영어를 했고, 대체로 조용했지만 밥을 먹으며 소주를 마실 때는 다들 흥겨움에 목소리가 커졌다."
그는 이번 방문으로 북한에 대한 인상이 조금 변했다고 말했다. "사실 북한은 가증스러운 적이란 생각이 앞섰다. 그런데 그들도 나랑 똑같은 인간일 뿐이더라. 제시의 유해를 찾는 데 굉장히 적극적이었고, 도와주려 애썼다. 고인에 대해 존경을 표할 줄도 알았다. 또 평양 시민 눈에서 적개심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무척이나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봤다."
허드너와 북한에 동행한 전기 작가 애덤 마코스(Makos)도 전화 인터뷰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정전협정일인 7월 27일에 평양 시내에서 펼쳐진 대형 퍼레이드를 홀로 관람했다. 뙤약볕에 몇 시간 구경한다는 게 90세를 바라보는 톰(토머스)에겐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시민 수천 명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는데, 여성은 꽃을 흔들고 군인들은 배낭을 메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북한군은 인격 없는 로봇 같고, 사람들은 미국인에게 무조건 공격적일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행사가 끝난 뒤 그들도 더위에 지쳐 허덕였다. 우린 너 나 할 것 없이 시원한 물부터 찾았다."
허드너의 북한행은 미 해군 역사상 첫 흑인 조종사인 제시 브라운과 그가 나눈 전우애에 관한 책을 쓰는 마코스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작년 11월이었다. 둘의 이야기를 담은 '디보션(Devotion·헌신)'이라는 책을 쓰다가 톰이 산비탈에 묻어둔 제시를 향해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부분에서 타이핑을 멈췄다. 바로 톰에게 전화를 걸어 '만약 가능하다면 북한에 다시 한 번 가시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아무렴 좋고말고. 함께 갑시다'라고 답했다. 오래전 약속이 드디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작가 애덤 마코스와 토머스 허드너, 북한행을 주선한 한국계 미국 여성 김채연씨. 애덤 마코스가 제시 브라운의 사진을 들어 보이며 북한군 장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 ValorStudios.com 제공
◇"선전에 악용되거나 희화화될 거란 우려도 있었지만…"
허드너는 친구 브라운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북한을 찾았다. 가족은 그의 결정을 반기면서도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허드너의 아들은 "아버지가 혹시라도 북한의 정치적 선전에 이용되지 않을까 두렵다. 농구 스타 데니스 로드먼처럼 희화화되면 어떡하나"하고 걱정했다.
허드너는 중심을 잃지 않았다. 상대를 존중했지만 현혹되거나 무작정 칭송하지도 않았다. "굉장한 환대를 받았지만 북한 사회에 대한 접근도 제한적이었다. 궁금했다. 도시는 깨끗하고 사람들은 친절해 보였지만 그 너머엔 무엇이 있을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이 안치된 평양의 금수산태양궁전을 방문할 때는 금빛 명예훈장을 눈에 띄게 착용했다.
'뼛속까지 공화당원'이라고 스스로를 지칭한 그는 "적이긴 하지만 군인 대 군인으로서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보였던 북한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영화배우 겸 감독이자 미국의 대표적인 합리적 보수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많은 것이 겹쳐 보였다. 심지어 목소리까지도 비슷했다.
"북한군은 날 존경과 경의로 대했다. 과거엔 누구보다 서로를 미워하며 적으로 싸웠지만, 지금은 다른 상황이다. 여행 마지막에 우린 그들에게 커피를 선물했고, 그들은 담배를 줬다. 우리 노력이 긍정적 결실을 볼 거라 믿는다. 이번 방문이 두 나라의 관계 개선의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
지난 7월 말 평양의 북한군 장교들이 제시 브라운의 유해를 찾는 것과 관련해 허드너 일행과 이야기하고 있다. /
ValorStudios.com 제공
◇'잊혀진 전쟁'에서 '잊을 수 없는 전쟁'으로
6·25전쟁은 미국에도 상처를 남겼다. 미군 전사자만 3만3000여명, 부상자 9만2000명, 실종자 8000여명 등이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6·25는 '잊혀진 전쟁'으로 불려왔다.
허드너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2차대전처럼 승전보를 울린 것도 아닌, 베트남전처럼 정치적 논쟁을 크게 불러일으킨 것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여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국지적(局地的) 군사 행동(police action) 혹은 소규모 접전(skirmish) 등 크게 중요치 않은 것처럼 치부되기도 한다. 하지만 몇몇 전투는 유례없이 잔인했고, 평안한 삶을 버려두고 전장에 뛰어든 참전 용사의 뜻을 기억한다면 이대로 잊힌다는 건 전쟁만큼 잔인하다."
사실 그는 6·25가 발발했을 때만 해도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함대에서 '북한이 남한을 기습 공격했다'는 교신을 받았을 때 대부분 '한국? 그게 어디지?'라고 되물었다. 그만큼 정보가 부족했다."
그랬던 그가 이제 6·25전쟁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발발 당시도 공산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 확산되는 걸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죽음이라는 게 자유를 위한 대가라면 언제든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돼 있었다." 그가 사는 콩코드 지역 신문의 킴벌리 후퍼 기자는 "허드너는 한국전이 '잊혀진 전쟁'으로 불리는 걸 너무나도 안타까워했다"며 "최근까지도 재향 군인 모임에 적극 참가하는 등 젊은이들에게 '잊힌 세대'가 되지 않기 위해 에너지 넘치게 활동했다"고 말했다.
허드너는 그의 인생 대부분을 군 관련 생활에 바쳤다. 베트남전이 발발했을 때는 키티호크 항공모함 부장(副長)을 거쳤고, 1973년 대령 은퇴할 때까지 해군 항공훈련단장 등을 맡았다. 그 뒤 기업 컨설턴트로 일하다 1991년부터 1999년 퇴임할 때까지 매사추세츠주 재향군인 위원회 임원을 했다.
지난해 미 해군은 주력 이지스함인 알레이 버크급 유도미사일 구축함(DDG)을 그의 이름을 따 'USS 토머스 허드너'라고 명명했다. 그는 "한국전에 이름 없는 영웅(unsung hero)도 많다"며 "모두가 기억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허드너는 "친구 제시가 고향 품에 안기는 걸 시작으로 나머지 미군 실종자 8000여명도 가족 품에 돌아가길 빈다"며 "아주 저 멀리 이국 땅에서 비명횡사한 이들을 다시 한 번 기리며, 이번이 본보기가 돼서 다른 가족들에게도 희망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