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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야 무엇을 입든

淸山에 2009. 8. 24.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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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이야 무엇을 입든 ***

- 글 / 미우라 아야꼬 -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가장 반가운 것은 독자의 편지다.

《길은 여기에》가 출판된 이후

하루에 10통 가량은 독자의 편지가 날아든다.

 

나는 편지의 격려를 받고 다시 새 작품을 구상하게 되는 셈이지만,

더러는 격려라고 생각할 수 없는 편지도 있다.

 

작년 봄이었던가.

《사랑하며 믿으며》에 대한 팬 레터가 많이 오던 무렵이었다.

 

한 젊은 여성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역시 감격한 편지려니 하고 나는 기분이 좋아서

봉투를 뜯으니 나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글이었다.

정면으로 칼을 들이대는 말들이 늘어서 있었다.

 

《사랑하며 믿으며》를 읽고 우롱당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옷을 뒤집어 입고 시장에 갔다느니,

스커트의 허리가 열린 채 차에서 내리다가 스커트가 벗겨졌다느니

등의 어리석은 일들을 늘어놓고 기분이 좋아져 있습니다.

 

자기가 옷을 뒤집어 입었는지 어떤지 조차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조금도 부끄럼없이 그것을 글로 쓰고 있으니…

여자는 옷매무시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결코 당신처럼 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상당히 야무지게 나무라는 말이었다.

나는 다소 놀랐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성서에는 씌어있다.

 

나는 나의 보물이 장롱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 글을 쓴 것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나의 참뜻을 알아주었지만

그 중에는 이렇게 화를 내는 독자도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 독자의 생활이나 배경을 모른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보는 독자가 있다는 것은

나로서는 매우 분한 노릇이다.

 

2, 3년 전의 일이었다.

나는 오비히로(帶廣) 시의 교외,

오토후케(音更)에 강연을 하러 갔는데,

그곳에서 여학교 시절의 동급생인 스가하라(菅原) 기미 씨가

농사 개량 보급원(農事改良普及員)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학교 시절의 회고담을 이렇게 말했다.

“너는 참 별난 아이였지.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네가 스키 바지를 입은 위에다

스커트를 입고 유유히 학교에 나온 일이야.”

그것은 나 자신도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나는 류머티즘 기운이 있어서

무릎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추위가 무서웠다.

그래서 아마 바지를 입은 데다가 스커트를 입고 있었으리라.

단발머리 여학생이 바지 위에

스커트를 겹쳐 입은 모습을 상상하니 아무래도 기묘하다.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꼴이 퍽 우스웠지?”

“그야 우습고말고. 하지만 너는 태연한 얼굴이었지 뭐니.”

그녀도 웃었다.

 

아마 나는 그러한 나 자신의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그 소리를 듣기까지 그 일이 생각나지 않은 것은,

그때 내가 아무런 부끄럼이나 저항도 없이

그런 매무시로 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것은 내가 옷에 관해서 무관심한 인간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에피소드라고도 하겠다.

사치미 후미(辛田文)의 소설에 《기모노》라는 것이 있다.

그 여주인공은 옷이 몸에 맞지 않으면

학교에도 가기 싫어한다고 씌어 있었다.

 

남편 미우라도 사실은 초등학교 때부터 입는 것에 대해서

까다로운 성질이었던 모양이다.

혁대가 맞게 매어지지 않거나 옷이 몸에 맞지 않은 날은

학교에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부모님에게 야단을 맞고 나서야 할 수 없이 등교했다고 한다.

 

그러했던 만큼 지금은 신사복이든 기모노든,

혹은 스웨터든 작업복이든 몸에 맞게 옷을 잘 입는다.

그는 어떠한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리고 멋이 있다.

나는 언제나 그의 옷 입는 모습에 감탄하곤 한다.

 

그의 외투는 4,5년 전에 3,000원을 주고 산 싸구려 옷이다.

또한 그의 신사복도 5,000원짜리밖에 되지 않은 싼 옷이었다.

그래도 그가 입으면 옷이 무척 돋보인다.

10년 전에 산 신사복도,

“새로 맞추셨습니까?”

 

하고 누가 물을 만큼 아직 새 옷이다.

미우라는 자기가 입는 옷에 바늘 끝만한 얼룩이 져도

즉시 세탁소에 맞게 깨끗이 해야만 그 옷을 다시 입는다.

빵을 먹을 때는 빵 부스러기가 바지 위에 떨어지지 않도록

자세에도 신경을 쓴다.

 

그리고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바로 옷을 갈아입는 것은 물론이다.

나는 참 대단한 일이라고 늘 감탄한다.

그 반면에 나는 어제 산 옷도

단박에 3년 전에 산고물로 만들어버린다.

 

갈아입을 줄도 모르고 얼룩이 져도 거리끼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의 마음은 입는 것에 향해 있지 않은가 보다.

이것은 인간이 벌거벗고 살았던 무렵의

정신 상태에 멈춰 있지 않은가 싶어서

나 자신도 다소 안됐다는 느낌이 든다.

 

옷을 새로 맞출 생각도 않기 때문에,

소설을 쓰게 되면서부터 파티에 나다닐 일도 많아졌으나

당장 외출복조차 없다.

 

마침내 보다못한 언니가

요전에 보랏빛 파티용 옷 한 벌을 선물로 주었다.

10년이나 입은 것이니 내게 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언니는,

“옷을 너무 안 해 입어도 주위 사람들에게 창피하단다.”

하고 나를 나무랐다.

 

어머니도 말씀하셨다.

“너는 무엇을 만들어주어도 좋아하지 않아서

장롱 속에 말없이 띠를 넣어놓았단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 그걸 모르고 있으니 참 기가 막히는구나.”

이러한 까닭에 남에게 받은 다이아몬드로 테를 두른

값진 에메랄드 장신구를 어머니에게 주어버리거나,

역시 남에게서 받은 국화꽃을 수놓은 몇 만 원짜리 띠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채 언니에게 주어버림으로써,

“참, 욕심없는 사람도 다 보았지 뭐냐.”

하고 입을 딱 벌리게 만들었다.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성서의 고린도인에게 보낸

바오로의 편지처럼 나도 할 말이 있다.

 

아무도 나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자로 취급된 김에

나도 자랑을 하게 해주기를 바란다.

 

지금 하는 말은 주에 의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어리석은 자처럼 자기의 자랑을 믿고 하는 소리다.

여러 사람이 육신(肉身)에 의해서 자랑하고 있으니까

나도 자랑하리라.

 

당신들은 현명한 사람들이니까.

기꺼이 어리석은 자를 참아주리라.

내가 입는 것, 몸에 두르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장점 중의 하나라고 자랑해도 좋지 않을까?

 

예수님도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렇게 되풀이하여 말씀하셨다.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염려하지 말아라.”(제7장 25절)

“어찌하여 옷 걱정을 하느냐!”(제7장 27절)

그러므로 내가 옷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 것은

정말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닌가 하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나는 잠깐 다시 생각해야겠다 싶어진다.

옷도 역시 신이 내주신 것이다.

신이 주신 것을 아무렇게나 다뤄도 좋단 말인가.

 

역시 미우라처럼 밖에서 돌아오면 바로 갈아입고서

될수록 더럽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10년 전에 해 입은 옷도 새로 해 입은 옷처럼 보이도록

아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처럼 ‘옷매무시 무관심회(會) 회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복장에 무관심한 것도 결코 칭찬받을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옷을 아끼면서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일이다.

결혼한 해의 일이었다.

 

미우라의 신사복 한 벌을 세탁소에 갖다주었더니

며칠이 지나도 도무지 가져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전화로 재촉하니

도둑이 들어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색깔이며 옷감이며 상당히 좋은 것이었으므로

나는 매우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세탁소에서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러 오지도 않았다.

나는 분개하여 변상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우라에 대해서도 미안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옷이라면 다시없이 아끼는 미우라가 아닌가.

마음에 드는 그 신사복을 도둑맞았다고 하면 얼마나 낙심하랴.

나는 미우라에게 모든 사실을 말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미우라는,

“세탁소 주인을 너무 문책하지 말아요. 변상시키지도 말고.”

하고 말했다.

그 옷이 아깝다고도 하지 않고

세탁소 주인이 조심성이 없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이제 나는 다시 말한다.

 

미우라처럼 옷을 아껴 입고 집착하지 않을 것!

이것이 옷에 대한 태도여야 한다.

나는 애초부터 무관심하기 때문에

남에게 옷을 주는 것도 예사였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돌을 주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미우라도 남에게 옷을 주지만

그는 자신이 아끼는 물건을 주는 것이다.

미우라야말로 진실한 의미에서

입는 것에 대해 자유롭다고 말하고 싶다.

 

입는 것을 아끼면서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생활에 관계되는 일이다.

입는 것, 먹는 것, 사는 곳, 즉 의(衣) 식(食) 주(住)라는,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생활 속에서

근면하고 주의깊게 살아가면서도,

결코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는 것!

 

신을 위해서는

‘그 자리에서라도 그물을 내던지고 예수를 따라나선’

그리스도의 제자처럼 온 생활을 신에게 바칠 수 있다는 것!

자유로운 순종의 생활이야말로 진실로 소중한 것이다.

 

나는 내가 자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

옷에 대한 무관심도 실은 내용이 따르지 않은

무관심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되어

다소 쓸쓸한 느낌도 드는 것이다.

 

 


* 게시자 (註) :

-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 (1922-1999) -

출생지 : 日本

직업 :소설가, 수필가

기타 : 기독교 신자

대표작: 소설 <빙점>,<속 빙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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