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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높은 곳에 올라간 허수아비 [ 1 ] [ 2 ] [ 3 ]

淸山에 2013. 8. 17. 06:51

기**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간 허수아비 [ 1 ]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userId=xqon&logId=7094848 자료 출처

 

겉만 대단한 자리

 

역사 이래 지금까지도 모든 권력에는 분명한 서열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명목상 서열이 권력의 순위를 뜻하기도 하지만, 내각책임제를 실시하는 영국처럼 설령 절대 지존이 있더라도 단지 군림만하고 실제로 권력을 행사할 수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난 1인자의 자리가 상징적인 경우도 흔한데, 하물며 형식상 2인자의 위치라면 단지 허울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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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부통령은 정작 두 번째 권력자로 대접받지 못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

 

고도로 민주화된 사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부통령은 법률상 권력 서열 2인자지만 '대통령의 유고(有故)시에만 필요한 존재'라는 냉소적인 이야기가 있을 만큼, 평소에 그 누구도 부통령을 미국의 2인자로 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예는 더욱 흔한데, 오너 다음의 명목상 2인자인 월급쟁이 CEO가 향후 경영권 승계 예정인 직급 낮은 젊은 재벌 2세보다 입김이 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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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목상 2인자인 월급쟁이 CEO가 직급 낮은 후계자의 힘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

 

독재국가의 경우는 명목상의 직위나 직급과는 전혀 상관없이 실세의 의중에 의해 진짜 권력 서열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겉으로 드러난 2인자의 위치는 단지 형식적인 자리로만 그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이렇게 표면상으로는 그럴듯한 2인자이지만, 실제로 그에 합당한 권한이 없는 경우가 허다한 이유는 바로 유기체와 같은 권력의 속성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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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재국가에서는 단지 명목상 2인자들이 많습니다 ]

 

권력을 거머쥔 자는 도전으로부터 최대한 자리를 지키고 보호하고자 합니다.  도전은 외부에서 올 수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내부에서의 도전이 더 많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설령 명목상 2인자라도 유사시에 1인자를 무너뜨릴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이 큰 위치입니다.  때문에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같은 절대 권력자들은 형식상 2인자라도 크게 대두되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방비를 단단히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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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 권력자일수록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고심하였습니다
2인자 저우언라이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 화를 모면한 인물입니다 ]

 

따라서 명목상 2인자인 경우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 달리 속된말로 바지사장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실제 권한은 크지 않지만 막상 일이 터지면 1인자를 대신하여 책임을 지는 역할을 주로 담당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초부터 권력에 도전할 의사가 없거나, 절대자에 절대 충성을 맹세하는 경우라면 단지 형식적인 2인자 위치도 가문의 영광으로 삼을 만큼 좋은 자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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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국무총리는 권한보다 책임만 큰 2인자이지만
개인사를 놓고 본다면 가문의 영광으로 기록 될 만큼 명예스런 자리입니다 ]

 

계급사회인 군은 권력의 순서가 어느 곳보다 확연히 구분되고 계급과 직급별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이 분명히 나누어집니다.  당연히 계급이 높고 편제상 상위 보직에 있는 군인일수록 행사할 수 있는 힘이 큽니다.  그런데 군 조직 또한 앞서 언급한 다른 조직처럼 반드시 겉으로 드러난 계급이나 직위와 상관없이 실제로 그러하지 못하였던 예를 전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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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동군사령관 맥아더는 존슨 국방장관(左)와 브래들리(右) 합참의장보다
분명히 하위직이었지만 이들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군의 최고 통수권자는 국가원수입니다.  따라서 쿠데타 등으로 군이 권력 전면에 나선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 군에서는 서열 상 최고 보직자가 통수권자 다음으로 권력을 행사합니다.  위 사진의 경우는 맥아더가 워낙 대선배여서 예외적인 대접을 한 것이지, 당시 블래들리는 미 군부를 문제없이 통솔하였습니다.  하지만 서열이 명확한 군이라도 바지사장처럼 겉으로만 그럴듯하였던 경우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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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헬름 카이텔 ]

 

제2차 대전 당시의 독일군도 그러하였습니다.  군에서 히틀러 다음의 최고 서열이었고 그것도 나치 정권 등장부터 몰락시점까지 계속 그 자리를 유지한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국방군 총사령관 빌헬름 카이텔(Wilhelm Bodewin Gustav Keitel, 1882~1946)입니다.  하지만 정작 모두가 그를 바지사장으로 여겼으며 그 스스로도 그렇게 행동하였습니다.  앞으로 소개 할 내용은 가장 높은 곳에 있었지만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한 인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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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높은 곳에 올라간 허수아비 [ 2 ]

 

독일을 대표하여 항복한 인물

 

1945년 5월 7일, 독일과 가까운 프랑스의 국경 도시 랑스(Rheims)에서 타전 된 소식은 세계를 즐겁게 하였지만 스탈린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독일이 무조건 항복 하였다는 뉴스는 지긋지긋한 전쟁이 종결되었음을 뜻하는 커다란 사건임에 틀림없었으나, 독일이 소련을 배제하고 미국, 영국이 주축이 된 연합국 사령부에 찾아가 항복하였다는 사실은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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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항복 소식에 세계는 환호하였습니다 ]

 

히틀러가 자살한 후 대통령에 오른 되니츠(Karl Donitz)는 OKW(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Wehrmacht) 작전부장인 상급대장 요들(Alfred Jodl)을 그의 대리인으로 지명하여 연합국 측에 무조건 항복하였는데, 최대한 많은 독일군을 미국 측에 항복시켜 안위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독일은 그들이 소련 땅에서 벌였던 죄과를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복수심에 눈이 뒤집힌 소련군의 자비를 바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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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에게 항복한 독일군. 이들은 행운아였습니다 ]

 

명령을 받들어 요들은 랑스에 있는 SHAEF(연합군최고사령부-Supreme Headquarters Allied Expeditionary Force)에 직접 찾아가 항복하였습니다.  이곳에 소련군 연락관 수슬로파로프(Ivan Susloparov)가 파견 나와 있었지만 옵서버수준이었고 실제 독일의 항복을 받는 주체는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와 몽고메리(Bernard Montgomery)였습니다.  이런 눈에 보이는 독일의 꼼수를 뻔히 읽은 소련의 분노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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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랑스에서 벌어진 항복 조인식에서 서명하는 요들 ]

 

물질적으로 연합국 측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소련은 전쟁 내내 독일군의 80퍼센트를 상대하였고, 그 대가로 무려 2,0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인민들의 목숨과 폐허로 변한 국토를 포연에 날려버렸습니다.  더구나 마지막으로 30만 명의 희생과 2,000여대의 탱크 1,000여기의 전투기를 가져다 바치면서 지난 5월 2일 제3제국의 심장인 베를린에 적기를 꽂아 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것도 소련의 붉은 군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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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에서의 마지막 격전이었던 베를린 전투 ]

 

소련은 연합국 일방이 독일과 단독강화하지 않겠다는 얄타 회담을 근거로 연합국 측에 별도로 독일의 항복을 받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였습니다.  그 결과 다음날인 5월 8일, 베를린에서 또 다른 항복조인식이 열렸습니다.  이번 행사의 주인공은 스탈린의 대리인으로 참석한 독일 점령군 총사령관인 주코프(Georgy Zhukov) 원수였고 반면 연합국 참석자들은 참관자에 불과한 오로지 소련만을 위한 행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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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독강화를 금지한 얄타 회담에 의거 소련은 랑스의 항복식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

 

소련은 그들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독일에게 요들보다 상급자가 항복 서명을 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련 점령군 사령부로 쓰인 베를린 칼스호르스트(Karlshorst)의 공병학교에서 열린 조인식에 일단의 독일 대표단이 나타났습니다.  해군의 프리데부르크(Hans-Georg von Friedeburg) 제독과 공군의 스튬프(Hans-Jurgen Stumpff) 상급대장을 이끌고 등장한 최고 책임자는 카이텔 원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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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이 주관한 항복식에 참석한 독일 대표단 ]

 

카이텔의 직위는 국방군 총사령관이었는데 이는 육, 해, 공군을 모두 망라하는 OKW의 수장이라는 의미고, 전날 서명한 요들도 그의 참모장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지난 1933년,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전쟁성의 무력국 국장에 오른 후 지금까지 계속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히틀러 다음으로 독일 군부의 최고 권력자라는 의미여서, 이런 인물로부터 항복 사인을 받아낸 소련은 득의양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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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을 대표하여 문서에 서명하는 독일 국방군 총사령관 카이텔 원수 ]

 

소련은 전날 있었던 문서를 임시적인 것으로 취급하였고, 카이텔의 서명을 받은 항복 문서만을 공식으로 채택하였습니다.  이처럼 국방군 총사령관의 서명으로 전쟁이 정식으로 끝나게 되었고 소련은 여기에 만족해하였지만, 정작 패망한 독일에서 카이텔을 군부의 최고 수장으로 생각하였던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카이텔조차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간 허수아비 [ 3 ]

 

나찌를 지지했던 엘리트

 

카이텔은 1882년 카셀(Kassel) 인근의 소도시인 헬름쉐로드(Helmscherode)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유소년기에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고 1901년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였습니다.  그가 처음 복무한 곳은 제6니더작센(Lower Saxony)포병연대였고 제1차 대전 당시에는 서부전선의 제46포병연대에서 포병장교로 참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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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대전 당시의 독일 포병 ]

 

그는 개전 초인 1914년 벨기에에서 크게 부상을 당했고, 회복 후 복귀하여 참모로 근무하였습니다.  이처럼 카이텔은 초임 장교 시절에 최전선에서 열심히 복무한 역전의 용사였습니다.  전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군이 10만으로 대폭 감군되는 과정 중에서도 군에 남았는데, 당시 엘리트들만 선별되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후일 평판과 달리 카이텔을 무능한 인물이라고 쉽게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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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전선 독일군 진지의 모습 ]

 

관운이 있었는지, 아니면 적어도 그때까지는 능력이 있는 장교로 인정받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1924년 국방성(1933년 전쟁성으로 바뀜) '병무국(Truppenamt)'에서 근무하였는데, 일종의 위장조직이었습니다.  연합국들이 패전한 독일에서 없애버리고 싶어 하던 것들이 많았는데, 그 중 하나가 참모제도였습니다.  비록 독일에서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독일군 특유의 강력한 군사 문화로 자리 잡은 것이 참모제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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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인 1920년대 독일군(Reichswher)의 훈련 모습 ]

 

승전국들은 참모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할 정도로 이를 철저히 없애버리고자 하였지만 제크트(Hans von Seeckt)의 주도로 내실을 다지며 재건에 나선 독일은 비밀리에 참모제도를 유지하였습니다.  형식상 국방성예하 육군지휘부의 일개 부서였던 병무국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일반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구(舊) 독일제국의 총참모본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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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밀히 독일군 재건을 주도한 한스 폰 제크트 ]

 

따라서 카이텔이 병무국에 근무하였다는 자체가 무능하다는 고정 관념과 달리 그가 상당한 엘리트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총참모본부 근무 경력이 있다고 모두 훌륭한 군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보통의 능력으로 이곳에서 근무하기는 상당히 어려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원래 프로이센 이래 독일군의 주류는 귀족 가문이 대대로 차지하고 있던 철옹성과 다름없었는데, 참모조직만큼은 예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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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력을 보면 카이텔이 나름대로 실력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최초의 참모총장인 샤른호르스트(Gerhard von Scharnhorst)이래 독일군의 핵심 브래인 집단으로 자리 잡게 된 참모들은 철저하게 실력으로만 선발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군은 많은 평민 출신들에게 신분을 상승할 수 있는 등용문이 되었는데, 이들은 이후 독일 통일과 제국 창건의 주역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만큼 엘리트 의식이 강한 최고의 조직에 카이텔이 몸담았다는 것은 그를 이해하는데 충분히 주목할 만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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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 12월에 벌어진 독일군의 기동 훈련을 참관하는 외국 무관단 ]

 

카이텔은 1933년 히틀러 집권 초기부터 나찌의 열렬한 지지자였습니다.  어떻게 해서 친 나찌가 되었는지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지만, 이때까지는 그의 정치적 신념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초기만 해도 이단아 같은 나찌에 대해 독일 군부는 대체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고, 아직 기반이 취약한 히틀러도 또 하나의 권력인 군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 카이텔이 나찌를 지지해도 당장 이득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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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뒤를 공손하게 따라갔을 만큼

집권 초기 히틀러의 권력 기반은 그리 공고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

 

나찌가 베르사유 조약 폐기와 재무장을 주장하자 군부는 지지를 보냈습니다.  이처럼 히틀러는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일환으로 친 나찌 성향의 인물들을 군부의 중심으로 만드는 다각적인 시도를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라이헤나우(Walther von Reichenau)를 중심으로 하는 일군의 친 나찌 계열 장군들이 서서히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 와중에 카이텔은 전쟁성의 핵심 부서인 '무력국(Wehrmachtsamt)'의 책임자에 오르게 됩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