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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더 가까이서 전장을 본 눈은 없었다 (로버트 카파)

淸山에 2013. 8. 16. 12:10

 

 

 

 

 

 

그보다 더 가까이서 전장을 본 눈은 없었다
로버트 카파 탄생 100주년 사진전
  
  

  “그의 죽음은 모두에게 불운이다. 카파에게는 더욱 그렇다. 생전 그는 아주 활기찬 사람이었기에,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 하루는 너무나 길고 힘들었다.”(어니스트 헤밍웨이)

 

 
 
▲ 스페인 내전 당시 카파가 찍은 ‘어느 공화파 병사의 죽음’. 포토저널리즘 역사상 가장 치열한 논란을 불러왔다(왼쪽).

1938년 12월호 ‘픽처 포스터’에 실린 카파의 모습(오른쪽).
뉴욕 ICP 제공 
 
 

 

1954년 5월 25일, 베트남 독립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전장에서 비보가 날아왔다. 후퇴하던 프랑스군의 호송차량에 타고 있던 로버트 카파(1913~1954)가 차량을 벗어나 수풀 속을 걷던 병사들을 취재하다 대인지뢰를 밟고 숨졌다는 소식이었다. ‘차량을 떠나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한 그는 한 걸음이라도 더 병사들 곁으로 다가가려 했다.

 

생전 그의 좌우명은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충분히 다가서지 않아서다’였다.

카파는 베트남에서 죽은 최초의 미국 종군기자로 기록됐다. 스페인 내전을 시작으로 중일전쟁, 2차 세계대전, 1차 중동전쟁, 인도차이나전쟁 등을 누비던 카파는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사진기로 담아낸 유일한 사진기자이기도 했다.

 

로버트 카파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사진전이 오는 10월 28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디지털 프린트가 아닌 오리지널 프린트로 출력된 첫 전시로, 160점이 나왔다.

 

카파는 191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앙드레 프리드먼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1931년 좌익 학생운동으로 헝가리에서 쫓겨났고, 베를린으로 건너가 사진작가의 심부름꾼으로 사진계에 입문했다.

 

1933년 히틀러의 독재를 피해 파리로 건너온 그는 평생지기인 앙드레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시무어를 만나 교류한다.

1936년부터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으로 사진을 팔기 시작했는데, 그해 10월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코르도바에서 찍은 ‘한방’의 사진이 그를 스타덤에 올려놨다. 전선에서 막 돌격하려던 병사가 머리에 총알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아직까지 진위 논란이 이어지는 ‘어느 공화파 병사의 죽음’이다. 23세 때 찍은 이 사진은 여러 신문에 실리며 호응을 얻었다.

 
카파의 동생인 코넬 카파가 1974년 설립한 뉴욕 국제사진센터(ICP)의 크리스토퍼 필립스(61) 수석 큐레이터는 “이 사진을 놓고 지금도 단순히 넘어지는 모습을 찍은 것이란 주장부터 조작된 것이라는 얘기까지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면서 “향후 100년간 궁금증이 더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의학자, 스포츠운동학자 등이 모여 사진 속 병사의 근육 움직임까지 분석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카파가 생전에 꼽은 가장 안타까운 사진은 1945년 4월 18일 찍은 ‘독일 저격수에게 희생된 미군 병사’. 종전을 앞둔 라이프치히의 아파트 발코니에서 기관총을 장전하던 어린 병사가 앳된 웃음을 품은 채 독일군 저격수의 총탄에 거꾸러진 사진이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언한 듯하다. 7000~1만 2000원.  (02)3701-1216 .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전쟁을 혐오했던 전설적인 전쟁사진가

로버트 카파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


 

1937년 세고비아전선 스페인/게르다 타로            ⓒ국제사진센터/매그넘포토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사진가로 불리는 로버트 카파의 사진전이 경향신문사 주최로 8월 2일부터 10월 28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린다. 로버트 카파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전시는 로버트 카파의 친동생  코넬 카파가 만든 뉴욕국제사진센터 소장 원본 프린트 160여점과 함께 로버트 카파의 마지막 카메라 등 다양한 소품들도 소개된다. 1913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로버트 카파는 1936년 스페인 내전에 처음 종군했다. 전세계의 지성이 반파시스트대열을 형성하여 참전한 스페인 내전은 스페인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스페인에서 자행된 야만성을 고발하기 위해 헤밍웨이는 기자로 종군하면서 훗날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썼고 피카소는 대작 ‘게르니카’를 그려 학살을 전세계에 알렸다. 사진가 로버트 카파는 이 전쟁에서 ‘코르도바 전선에서 쓰러지는 병사’를 찍어 죽음의 순간을 정지화면 속에 얼어붙은 것처럼 묘사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했다. ‘코르도바 전선에서 쓰러지는 병사’를 둘러싼 진위논쟁은 포토저널리즘 사상 가장 유명한 것으로 2013년 현재까지 새로운 주장과 증거자료가 등장하여 “연출인지 아닌지”에 대해 공방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로버트 카파는 생전 이 사진에 대해 말을 아꼈다.

 

1936년 코르도바 전선 스페인/로버트 카파        ⓒ국제사진센터/매그넘포토스

 

 이 사진 한 장으로 일찍 전설이 된 카파는 이후 전쟁을 찾아다녔고 용감하게 사진을 찍었다. 총알이 그를 피해다녔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일본이 중국을 침공하자 중국으로 달려갔으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다시 유럽으로 건너갔다. 로버트 카파의 또다른 대표작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1944년 6월 6일 총을 든 병사들과 함께 카메라를 든 카파가 첫 상륙정을 타고 독일군의 기관총 세례를 뚫고  해변으로 뛰어들어 찍은 사진이다. 이 상륙작전 첫날 2,400여명의 전사하고서 미군은 간신히 작은 교두보 하나를 만들 수 있었다.. 카파는 책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에서 이날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쏟아지는 총탄은 나를 둘러싼 바닷물에 구멍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장 근처에 있는 강철 방해물을 찾아야했다. 한 병사가 나와 동시에 그 방해물에 뛰어들었다. 우리는 아주 짧은 순간 총탄으로부터 은폐하기 위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그 병사는 방수처리가 된 소총을 꺼내 채 조준도 하지 못한채 연기 자욱한 해변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 총소리가 그 병사에게 기운을 불러일으켰는지 그는 은폐물을 나에게 남겨둔채 해변으로 전진했다. 은폐물은 아주 조금 넓어졌고 나는 나처럼 은폐하고 있는 다른 병사들을 찍을 수가 있었다. 여전히 이른 시간이었고 날씨는 흐렸다. 그러나 회색의 바닷물과 회색의 하늘은 히틀러의 참모들이 만들어둔 초현실적으로 보이는 상륙저지용 구조물 아래서 몸을 피하고 있는 (작게보이는) 군인들 사진을 아주 그럴싸하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사진을 마무리했고 바지속으로 스며든 바닷물은 추웠다. 주저하면서 나는 은폐물에서 빠져나오려고 시도했다.


 

1944년 6월6일 오마하해변 노르망디 프랑스/로버트 카파   ⓒ국제사진센터/매그넘포토스

 


그러나 매번 총탄은 나를 따라다녔다. 주검들이 떠다니는 사이에서 나는 다음 은폐물인 탱크로 향했고 몇 장의 사진을 더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해변으로 돌격하기 위해 마지막 용기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이제 독일군들은 그들이 가진 모든 화력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나는 포탄과 총탄 사이에서 남은 거리를 돌진하기 위한 어떤 틈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탱크 뒤에 머물렀다. 스페인내전시절 내가 읊조리던 구절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이거 참 큰일이군…….’ (중략) 다음 박격포탄은 철조망과 바닷물 사이에 떨어졌다. 파편의 모든 조각들이 몸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사진을 찍었다. 다음 포탄은 조금 더 가까이 떨어졌다. 나는 감히 내 눈을 콘탁스에서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한 컷 한 컷 찍어나갔다. 30초쯤 지나자 내 카메라는 고장이 나버렸고 필름이 끝나버렸다. 가방을 뒤져 새 필름을 꺼냈다. 그러나 내 손은 젖었고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카메라에 필름을 넣기도 전에 망치고 말았다. 나는 잠시 멈췄다. 나는 망쳐버린 것이다. 빈 카메라가 내 손에서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공포였고 나는 발가락부터 머리끝까지 떨고 있었다. 나는 삽을 꺼내 호를 팠다. 삽끝이 돌멩이에 부딪혔다. 내 옆의 사람들이 통나무 쓰러지듯 넘어졌다. 바닷물엔 주검만이 떠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그리고 무작정 보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물이 목까지 차올랐다. 나는 내 카메라가 젖지 않게 하늘위로 들어올리고 뛰었다. 해변을 다시 바라보려고 했지만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 타일렀다. “나는 보트로 가서 내손을 말려야해”


 

1944년 6월 6일 오마하해변 노르망디/로버트 카파              ⓒ국제사진센터/매그넘포토스


 보트에 도착했다. 데크에 오르자 나는 쇼크를 느꼈다. 선장은 울부짖고 있었다. 조수의 온몸이 날아가버리면서 선장을 덮쳤고 그는 엉망이 되어있었다. 우리가 탄 보트는 모선으로 향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고 나는 엔진실로 가서 손을 말렸다. 그리고 두 카메라에 새 필름을 갈아끼었다. 연기로 가득찬 해변을 찍었다. 중상자를 배로 옮기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았다. 같이 들것을 옮기느라 바빴다. 16사단의 마지막 상륙팀이 배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배의 데크는 부상자와 사망자로 가득차있었다. 내가 해변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그때였다. 그러나 나는 가지 않았다.
 7일이 지나서 나는 내가 해변에서 찍은 사진이 상륙작전에서 최고의 사진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흥분한 암실조수가 필름을 말리다가 너무 심하게 온도를 가하는 바람에 유제가 흘러내려 106컷 중에 단 8컷만 살아남았다. 열 때문에 흐릿해진 나의 필름 아래에 사진설명이 적혔다. “카파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로버트 카파는 사진을 찍기 위해 필요하다면 뭐든지 했다. 공수부대와 함께 낙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쟁을 부정하기 위해, 전쟁을 싫어해서, 전쟁의 참상을 인류에게 알리기 위해 전쟁터를 찍었던 그는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퇴각하는 프랑스부대를 찍다가 지뢰를 밟고 세상을 떠났다. 최후의 순간까지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1937년 빌바오 스페인. 공습 경보가 울리자 대피소로 향하는 군중/로버트 카파      ⓒ국제사진센터/매그넘포토스

 

 


 
 

잃어버린 것으로 알려졌다가 1990년대 후반에 우연히 발견된 <멕시칸 수트케이스> 로버트 카파와 카파의 연인이자 사진가였던 게르다 타로와 매그넘의 창설 멤버 중 한 명인 데이비드 세이무어가 스페인 내전 동안 찍었던 필름이 들어있었다. 이 사진들도 국내 최초로 공개된다.

 

전시장엔 전쟁의 현장 외에도 다양한 사진들이 걸린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파블로 피카소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하면서 찍은 스냅사진들이 흥미를 끈다. 또한 세기의 연인이었던 잉그리드 버그먼과의 연애하던 시절 할리우드를 담은 사진도 찾아볼 수 있다.
 로버트 카파의 사진인생과 사진철학은 카파이즘으로 살아남았다. 카파이즘은 “현장에, 그것도 가까이 있을 것”으로 귀결된다. 위대한 전쟁사진가라는 호칭은 카파가 우연히 그 장소에서 멋진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그의 현장이었던 전쟁터는 모두 그가 몸을 던지는 심정으로 찾아간 곳이었고 그 속에서 건져낸 사진이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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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카파


본명은 앙드레 프리드만(Andre Fridmann)으로 1913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점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7세 때 유태인 차별 정책과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다.


1931년 독일 베를린에 온 로버트 카파는 정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조국에서 쫓겨났고, 타국에서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할 수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의 이런 처지는 그로 하여금 세계 공통의 언어인 사진의 세계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알프레드 아이젠슈타트(Alfred Eisenstaedt)의 암실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히틀러의 등장으로 더이상 베를린에 머물 수 없게 된다.

1933년에 그는 다시 파리로 흘러든다. 그는 이곳에서 평생의 연인 겔다를 만나게 된다.


포르투갈 출신의 사진작가였던 겔다는 카파에게 있어 그림자와 같은 존재였다.


이 무렵 그의 생활은 카파가 사진을 촬영해오면 동생 코넬이 암실 작업을 하고, 겔다가 원고를 들고 잡지사를 찾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던 중 1936년 스페인 내란이 벌어지자 카파는 겔다와 함께 인민전선파에 가담한다.


그는 평생을 종군 사진가로서 전쟁으로 시작해서 전쟁으로 끝나버린 삶을 살았다.

그는 스페인 최전방의 참호에서 혹은 적진 깊숙이 뛰어드는 병사들과 함께 했다.

 

그는 단순히 보도사진가로 스페인 내란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회고록인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를 보더라도 그가 스페인 내란 당시 인민전선파에 대해서  정치적인 지지의 입장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페인 내란은 켄 로치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유럽의 지식인들의 절대 다수가  인민전선파를 지지했으며 실제로 의용군을 결성해 참전하기도 했다.

 심지어 머나먼 동양(일본)에서도 일부 지식인들이 멀리 스페인까지 날아와 인민전선파를 지원해 의용군에 참전했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스페인 내란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잊지 못하고 있었고, 심정적으로 공산주의보다는 차라리 파시스트들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파시스트였던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는 스페인의 프랑코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

 

그 유명한 사진인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과 연인 겔다의 죽음

  로버트 카파란 이름이 마치 종군기자 혹은 전쟁 사진 전문가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가 전쟁만을 찍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겪어내야 했던 시대적 상황이 계속되는전쟁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는 사진의 주된 소재로 전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로버트 카파의 이름을 전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것은 1936년 스페인 내란 중에 찍은<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 Spanish Loyalist at the Instead of Death> 이었다.

  이 사진을 시작으로 로버트 카파는 포토저널리스트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한 병사가 돌격하기 위해 참호 속에서 뛰쳐나가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을 보여준 이 사진은 마침 돌격하는 병사 가까이 있었던 로버트 카파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로 잡아냈고,

이 사진이 1936년「라이프Life」지에 게재(이 해에 라이프지가 창간되었다)되면서 로버트 카파는 하루아침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병사의 죽음>은 후세에 연출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사기는  했지만 그것은 마치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이  너무나 리얼한 나머지 실제 사람의 본을 뜬 것이라고 의심했던 것처럼 인위적인 연출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사진으로 카파는 국제적 명성을 얻었지만 스페인 내란에서 자신의 아내 겔다를 잃고 만다.

 

카파와 겔다.

 

그와 겔다가 아군 진지를 촬영하던 중 전선에서 후퇴해 온 아군 전차가 촬영 중인 겔다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겔다를 치어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카파는 얼이 빠져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전쟁이구나." 겔다는 빌드락, 장 르느와르, 피카소, 아라공, 말로, 니생 등에 의해 정성껏 장례를 치뤄 주었지만 겔다의 죽음에 상심한 카파는  반 달 동안 숙소에 엎드려 계속 울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평생동안 독신으로 지냈다.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평생 전쟁터를 떠돌 자신의 운명을 미리 예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스페인 내란을 필두로 그는 1938년에 일어난 중일전쟁 때는 일본군의 잔학한 학살 참상과 비탄에 빠진 중국인들의 모습을 전세계에 알렸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더 이상 유럽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카파는 그의 헝가리 국적으로 인해 적성국가 국민으로 분류되어 카메라조차 뺏길 형편에 처한다.

그러던 중 <커리어즈>에 의해 채용되면서 극적으로 종군기자에 복귀하게 되는 행운을 만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장면을 촬영한 사진이 있는데 그때 사진은 상당히 흔들려서 사진이 떨린 상태이고 핀트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이 사진에서는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더욱 절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제2차세계대전의 보도사진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간주되는 작품이다.

 

 1945년 그는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되었고, 1947년에는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과 함께 <매그넘MAGNUM>을 결성한다.

 


그는 이 무렵 존 스타인 벡과 함께 소련에 촬영여행을 간다. 1949년과 51년에는 피카소의 가정생활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평화는 잠깐이었다.

1948년부터 50년까지는 이스라엘 독립전쟁을 취재하였고 1954년 풍물사진 촬영차 일본에 가 있던 중 <라이프>지의 요청을 받게 된다.

 

1954년 카파는 일본의 한 신문사 초청으로 일본에 가 있었다. 그러나 <매그넘> 회원인 친구  잔 모리스가 뉴욕에서 그를 불렀다.

<라이프>지에서 베트남 전세가 긴박해지자 카파에게 그곳에 가줄 것을 화급히 간청한 것이다.

 


카파는 베트남 행을 말리는 친구에게, "삶과 죽음이 반반씩이라면 나는 다시 낙하산을 뛰어내려 사진을 찍겠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로버트 카파는 41살의 젊은 나이에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와 베트남간의)을 촬영하던 중 지뢰를 밟아 폭사하고 말았다.

 


1954년 5월 25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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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케빈카터" 위에 사진 찍은 사람입니다.

이 사진으로 인해 명성과 함께 비난에 시달리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과 더불어 아직까지 그 이름 널리 알려진 사람이 "로버트 카파" 입니다..

8월 1일 부터 세종문화회관에서 카파탄생 100주년과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기념해 "로버트 카파 사진전"을 개최한다고 합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미국뉴욕국제사진세터가 소장한 오리지널 프린트 160점과 카파와 관련된 다큐멘터리 영상, 카메라등

다양한 자료가 구성됐다고 하니 관심있으신분 가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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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파의 마지막 사진이다.

이곳은 베트남!! 베트남 전쟁을 기록하기위해

이 흑백 장면을 찍은 직후 카파의 발밑에서 지뢰가 터졌고

로버트 카파는 더이상 카메라 셧터를 누를수 없었다고 한다.


<<로버트 카파 탄생 100주년과 한국전쟁휴전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오는 8월 1일 부터 10월 29일 까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 개최 된다.

이번 사진전은 로버트 카파의 일대기를 총망라한 사진 160여점을 전시 한다고 한다.>>

 

 

 

 

 

 

 

 

 

 

[‘로버트 카파’전 리뷰](1)
“내겐 너무 익숙한 이름, 카파… 그러나 전율하고 말았다”
박주석 | 명지대 교수                  
ㆍ목숨과 바꾼 장면들·손때 묻은 오리지널 프린트 감동

1. 지금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로버트 카파 100주년
사진전’을 구경했다. 개막식에 맞추어 특별히 초대된 자리였다. 그런데 가는 길은 ‘또 로버트 카파야’ 하는 지겨운 마음 반, 설렘 반 정도의 기분이었다. 사실 사반세기 이상을 사진 동네에서 일했고 소위 전문가 소리를 듣고 있는 나로서는 너무 흔하고 지겨운
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대사진이란 로버트 카파나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같은 매그넘 그룹 소속으로 20세기 사진저널리즘을 이끈 대가들의 순간미학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평가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오래전 사진관 하고 싶으냐며 빈정대는 (이 부분 훌륭한 문화 전도사인 사진관 사장님들께 죄송) 아버지의 멸시를 받아가며
대학 전공으로
사진학과
를 선택했다. 그때 아버지를 설득한 논리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전설이 되어버린 로버트 카파와 같은 사진저널리스트의 길이 있다는 것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이미 대학의 사진학과를 다니던 친구 누나에게 주워들은 풍월이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카파는 내게 선망이었고 공부의 대상이 되었다. 그로부터 30년 이상이 훌쩍 지났으니 그 이름이 지겨울 만도 했다. 하지만 구경을 마치고 나올 때 기대하지 못한 감동을 선물받고 흥분해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연합군이 들어오기 전, 14일 동안 독일군에 맞서 싸우다 죽은 20명의 나폴리 소년들의 장례식에서 오열하는 어머니들.

1943년 8월2일, 이탈리아 나폴리.



2. “당신의 사진이 좋지 않다면 그것은 당신이 대상에 최대한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시
의 주인공 카파가 남긴 말로, 저널리즘 사진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한 말이다. 전시를 잘 들여다보니 “한 발짝 더… 카파처럼 다가서라”를 부제로 삼았다. 기획자가 카파를 제대로 알긴 알았다. 카파 사진미학의 핵심을 짚어냈다. 카메라를 들고 대상에 최대한 접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찍는 사람과 대상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심리적 거리를 동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리적 거리를 좁히는 일은 사진가가 대상을 품에 안는 일에 다름 아니다. 더욱이 전쟁이라는 무서운 상황에서 말이다.

“한 발짝 더”란 말로 요약되는 그의 사진미학은 한마디로 사진을 찍는 사진가와 찍히는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과 긴장을 카메라를 통해 해체하면서 합일시키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일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일정한 틀, 즉 카메라에 존재하는 프레임을 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프레임을 통해 열려진 세상의 어떤 부분을 어떤 순간에 잘라내느냐의 문제는 사진가의 인생관과 세상을 향한 가치관이 배어나게 되는 사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대상과의 거리를 없애는 방법으로 대상을 이해하고자 한 카파의 미학적 시도는 목숨을 담보하는 일이었다. 전쟁사진을 통해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사진저널리스트가 된 로버트 카파는 인도차이나의 전쟁터에서 전사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카파의 카메라에 비친 극적인 장면의 사진들이 투철한 직업정신에서 나온 것이건 아니면 특종에 대한 욕심 때문이건 간에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를 비롯한 사진저널리스트들의 생사를 초월한 노력 덕분에 우리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마저도 마치 기념사진처럼 여유 있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전시에 걸린 사진들 또한 카파의 목숨과 바꾼 장면이라는 생각에 전율이 느껴졌다. 

 



3. 카파의 사진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스페인 내란 당시 공화파의 한 병사가 총을 맞고 쓰러지는 극적인 장면을 찍은 것으로, 그의 이름을 빼더라도 세계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이다. ‘오마하 해변’이란 작전명으로 불린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과정을 찍은 것 역시 유명한 전쟁사진으로 꼽힌다. 나치에 부역했던 한 여자가 경찰에 붙잡혀 머리를 깎이고 파리시의 길거리로 끌려나오는 사진 역시 전쟁이 안겨다준 비극적인 결과의 기록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스페인 내전’ 사진을 비롯해 중국, 프랑스, 멕시코, 독일 등에서 작업한 일생의 역작이 전시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사진들은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 분초를 다투는 언론사 특유의 속보 경쟁, 현장에서 필름을 비롯한 사진 재료 관리의 미비 등으로 최종 사진 화면의 질이 좋을 수 없었다. 실제 당시 ‘라이프’ 같은 잡지에 실린 그의 사진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장감을 잘 살렸지만, 톤의 풍부함이나 선예도 또는 해상력과 같은 사진 자체의 질을 결정하는 요소에서는 많이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젤라틴은염을 사용한 말 그대로 전통적 사진 방식으로 인화된 오리지널 프린트를 선보였다. 서울에서 그의 오리지널 사진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처음 접하게 한 사건이었다.

기획자의 말을 빌리면 이번 전시의 사진들은 카파가 사망한 후 동생인 코넬 카파가 직접 선택하고 인화한 작품, 즉 카파의 필름으로 직접 인화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 사진을 보니 전혀 다른 열악한 상황에서 찍은 다양한 사진들을 일정한 톤으로 맞춰서 인화한 동생의 노력이 눈물겹기까지 하다. 인화를 해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말이다. 우리가 사진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는 찍힌 대상 못지않게 인화의 질이라든지 액자, 전시 방법 등이 매우 중요하다. 그동안 국내에
소개
된 카파의 사진은 잉크의 질감을 갖는 인쇄물이나 디지털 출력물에 한정되어 있었다. 동생의 손때가 직접 묻어 있고 작가의 열정이 합쳐진 오리지널 사진을 감상하는 것은 그 나름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아닌가 싶다. 카파의 삶을 증거하는 영상물과 그가 쓰던 카메라 실물 등을 보는 일은 유쾌한 보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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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 사진전은 한 편의 명작영화

 
2013 08/20주간경향 1039호

포화가 잠시 멈춘 틈을 타 뜨개질을 하는, 앰뷸런스 운전병들의 모습에서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참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장마와 무더위가 연합해 서울 침공에 나선 8월 둘쨋날 수많은 사람들이 세종문화회관 지하 1층 미술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전쟁을 혐오한 전쟁사진가’ 로버트 카파(Robert Capa·1913~1954)의 사진 속 참혹한 광경들을 통해 전쟁의 죄악상을 뼈저리게 체험할 수 있었다. 전쟁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진 것과 같은 경험을 제공하는 ‘로버트 카파 사진전’(8월 2일~10월 28일)은 모든 인간에게 반복적으로 학습된 전쟁의 참상을 적나라한 현실로 보여준다.

‘로버트 카파 사진전’은 마치 한 편의 명작영화처럼 꾸며져 있다. 영화의 프롤로그처럼 전쟁의 광기에 빠져들기 직전 유럽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인다. 하지만 덴마크에서 열정적으로 연설하는 레온 트로츠키와 담배를 문 프랑스 파업 노동자의 불안한 모습은 곧 불어닥칠 참혹한 전쟁의 서막처럼 서늘하게 다가온다.

전선(스페인 내전)을 향해 수송열차가 출발하기 전, 작별인사를 나누는 공화국 군인. 스페인 바로셀로나, 1936년 8월.


카파의 카메라에 담긴 전쟁의 첫 모습은 수송열차를 타고 전선으로 향하는 공화국 군인들의 씩씩한 모습이다. 이 어린 병사들은 나중 ‘스페인 내전’으로 알려지게 되는 참혹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들의 삶이 어떤 종말을 맞게 될지도 모른 채 불끈 쥔 주먹으로 젊음을 과시한다. 그래서인지 한 공화국 병사가 연인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광경은 로맨틱하기보다는 구슬프게 느껴진다.

안도감과 불안이 교차하는 피난민 표정
전쟁이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는 단순한 진실은 ‘어느 (공화파)병사의 죽음’을 통해 명확히 입증된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들었던 총을 놓치는 마지막 생의 순간, 이 나이 어린 병사는 무슨 생각을 떠올렸을까? 사진은 단순한 비극의 차원을 넘어선 삶의 숭고함과 인간애로 다가온다. 과연 이 사진을 보고도 여전히 ‘전쟁의 필요성’을 맹신할 사람이 있을까?

포화가 지나가고 나면 양심과 문명이 동시에 무너져내린다. 죽은 자는 삶을 잃었고, 산 자는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 들것 위에 놓인 시신을 바라보는 병사의 시선은 무덤덤하다 못해 무관심해 보인다. 삶에 대한 존중과 인간애를 잃은 모습은 죽음보다 더 절망적이다.

선량한 백성들은 악한 자들의 폭격을 피해 도망친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기는 인간이나 짐승이나 매한가지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피난민들의 표정에는 살았다는 안도와 앞날에 대한 불안이 혼재한다. 밀짚 위에 더러운 담요를 덮은 채 누워 담배를 피우는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카파의 뷰파인더는 잠시 머물렀던 중국과 멕시코를 지나 제2차 세계대전의 현장으로 향한다. 연합국 승리의 발판이 된 노르망디 상륙작전, 오마하 해변에 상륙하려는 한 미군의 얼굴에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은 살아남고픈 갈망뿐이다. 신념 따위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포커스가 흐릿한 이 사진은 오히려 전투 현장의 긴박감을 적나라하게 전달한다. 정말 중요한 사실은 카파가 적탄을 등 뒤로 한 채 목숨을 건 작업에 자신을 내던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진 내용보다 사진 밖 치열한 상황이 더 고결하게 느껴지는 이 위대한 작품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진다.

카파는 이 전투에서 무려 106점의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바보 같은 ‘라이프’(Life)지 암실 직원의 실수로 10점 정도만 살아남았다.

오마하 전투 사진만큼이나 소중한 자료는 독일군의 아이를 낳은 한 프랑스 여인이 삭발당한 채 해방된 군중의 야유를 받는 사진이다. 성난 군중은 마치 나치에 보복이라도 하듯 여인을 조롱한다. 하지만 그녀는 수치심을 느낄 여유가 없다. 아기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성 본능은 전쟁터와 같은 참혹한 상황에서 더욱 더 강하게 살아나는 게 틀림없다.

독일군의 아기를 낳은 한 프랑스 여인이 삭발을 당한 채 쫓겨나고 있다. 프랑스 사르트르, 1944년 8월.


포화가 잠시 멈춘 틈을 타 뜨개질을 하는, 앰뷸런스 운전병들의 모습에서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참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과연 살아남아서 누군가에게 자신들이 만든 털옷을 입혀주었을까? 막사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보이는 병사의 모습에서도 소박한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독일 저격수에게 희생된 미군 병사의 모습은 전쟁의 슬픔을 가장 강렬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무엇이 그리 급해 제대로 눕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단 말인가? 채 응고되지 않은 검은 피는 못다 핀 그의 삶을 안타까워하기라도 하듯 끝없는 울림으로 다가온다.

못다 핀 삶, 응고되지 않은 검은 피
이번 전시회의 또 다른 볼거리는 카파가 찍은 화가 파블로 피카소와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의 한가로운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사진들이다. 카파를 향한 열병에 시달렸던 할리우드 대표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과 개리 쿠퍼, 험프리 보거트 등의 사진들도 이전에 접할 수 없었던 그들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로버트 카파 사진전’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현장에서 막을 내린다. 지나치는 병사들 사이로 보이는 어린아이 시체는 너무나 끔찍하다. 카파의 40년 짧은 삶도 이 어린아이와 마찬가지로 베트남에서 마감한다. 만 40세가 되던 1954년 5월 카파는 인도차이나 전쟁 상황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베트남으로 향했다. 더 이상 전쟁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였다. 두 명의 라이프지 기자와 함께 프랑스군을 취재하던 그는 군인들의 이동 모습을 가까이서 찍기 위해 지프에서 내린 후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이때 탄생한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지뢰밭의 군인들’이다.

카파가 사진을 찍기 시작한 지 채 5분도 되지 않았을 때 귀를 찢을 듯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 지뢰를 밟은 이는 카파였다. 왼쪽 다리가 날아갔고, 가슴에선 피가 쏟아졌다. 마치 불사신처럼 달랑 사진기 하나를 든 채 전쟁터를 누비던 그를 향해 운명의 여신은 “여기까지! 그동안 수고했어”라고 외쳤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된 그는 첫사랑이었던 동료 전쟁사진가 게르다 타로(Gerda Taro)의 품에 안겼다. 타로는 카파와 함께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던 중 1937년 7월 26일 탱크에 부딪혀 사망했다.

 



카파의 짧은 인생은 한마디로 순교자의 삶이었다. 나치를 피해 헝가리에서 망명한 카파는 애초부터 지독한 전쟁 혐오주의자였다. 목숨을 건 그는 전쟁의 악랄함을 고발하기 위해 항상 죽음과도 같은 참상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서려 애썼다.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충분히 다가서지 않아서다”(If your pictures aren’t good enough, you’re not close enough)란 그의 주장은 이런 태도에서 비롯됐다.

모든 순교자가 죽음의 위험에 자신을 내동댕이치는 것처럼 카파는 애초부터 두려움과 담을 쌓고 살았다. 그는 평소 “눈을 뷰파인더에 밀착하면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된다”고 말하곤 했다. 남딘에서 타이빈으로 향하는 이름 모를 지뢰밭에서 이 위대한 순교자는 ‘반전의 신’을 위해 순교의 피를 뿌렸다. 이번 ‘로버트 카파 사진전’은 이 위대한 순교자의 삶을 경험하는 소중한 순례가 될 것이다.

이무영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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