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로 가서, 그리스인들이 신을 예배하는 곳으로 안내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이 지상인지 천국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상에는 그러한 장려함이, 그러한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그 광경을 도대체 어떻게 형용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단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은 그곳에 신이 존재하며 그들의 예배가 다른 나라들의 의식보다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잊을 수 없습니다.
비잔티움 제국 건축의 최고 걸작이자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오스만 제국 시절 이슬람교의 모스크로 바뀌었다가 터키 공화국 수립 이후 박물관이 되었다. 1985년 이스탄불 역사지구의 일부로서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명칭인 'Αγία Σοφία'는 '성스러운 지혜'를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하기아 소피아, 아야 소피아, 성 소피아 사원, 성 소피아 성당, 성 소피아 대성당 등으로 불린다.
하기아 소피아는 로마 제국의 기술력이 만들어낸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일 뿐더러, 당시 세워진 그 어떠한 건축물보다도 광대한 실내 공간을 가진 건물이었다. 이 성당은 16세기에 스페인세비야의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의 성당이기도 했다. 돔의 직경만 하더라도 31.87m로, 로마의 건축물인 판테온 다음 가는 크기였으며 수백년 뒤의 르네상스 시대에 세워진 피렌체의 두오모 이전까지 세계 최대의 석조 돔이기도 했다. 물론 이 건축물이 르네상스 건축물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330년 5월 11일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후 30년이 지난 360년 2월 15일 대제의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가 첫 번째 하기아 소피아를 건설했다. 당시에는 '위대한 교회(Μεγάλη Ἐκκλησία, 메갈리 에클리시아)'[6]라고 불렸으며 건축은 목조 지붕의 바실리카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창건한지 40년도 지나지 않은 404년 6월 20일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아내 에브도시아 황후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Ο Άγιος Ιωάννης ο Χρυσόστομος)를 박해하여 추방할 때 수도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소실된 대성당은 11년 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 치세 때인 415년 10월 10일에 재건되었으나 120여년 뒤인 532년 1월 13일경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휩쓴 니카의 반란 때 일어난 대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 첫 번째 하기아 소피아와는 달리 두 번째 하기아 소피아의 흔적은 현존하는 하기아 소피아의 일부 원기둥 등에 약간 남아 있다.
대성당이 전소된지 열흘 후인 532년 2월 23일,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하기아 소피아의 세 번째 재건을 결정하면서 이전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바라며 물리학자인 밀레투스의 이시도로스와 수학자인 트랄레스의 안시미오스에게 설계를 맡겼다. 그리스인인 두 사람은 전문적인 건축가가 아니었지만 1만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되어 532년부터 537년까지 채 6년도 걸리지 않은 공사기간을 통해 당시까지 사상 유례가 없는 광대한 규모의 대성당을 완성하는데 성공했다. 대성당의 건설을 위해 제국 전역에서 각종 자재들이 공수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던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원기둥들을 징발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마침내 537년 12월 27일,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참석한 가운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메나스가 집전한 하기아 소피아의 헌당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대성당의 웅장함에 감동자뻑한 황제는 하기아 소피아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능가했다고 생각해 "솔로몬이여, 내 그대를 이겼노라!"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있다. 완공 이후 하기아 소피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주교좌가 위치한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자리매김했으며, 비잔티움 제국 역대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비롯한 중요 정치적·종교적 의례가 거행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또한 오랜 세월에 걸쳐 수집된 다양한 성유물들이 봉안된 성소 중 하나이기도 했지만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십자군에게 털렸다(…).
헌당식 이후 20년이 지나기도 전인 553년 8월과 557년 12월 14일 두 차례에 걸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강타한 지진으로 하기아 소피아의 상징인 중앙돔에 금이 갔고, 결국 558년 5월 7일에 발생한 지진을 견디지 못해 중앙돔이 무너졌다. 붕괴 직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밀레투스의 이시도로스의 조카인 이시도로스에게 즉각적인 복구를 명령했으며, 이에 따라 이시도로스는 중앙돔을 원래의 위치보다 6.25m 가량 높여서 건축했다.
그로부터 약 3백년이 흐른 859년에 발생한 화재와 869년 1월 8일에 발생한 지진으로 대성당의 버트레스(half dome)가 파괴되었다가 바실리오스 1세 황제에 의해 수리되었다. 120년 뒤인 989년 10월 25일의 대지진으로 서쪽 돔의 아치가 붕괴되자 바실리오스 2세 불가록토노스 황제는 아르메니아인 건축가 티리다티스에게 수리를 명령해 6년간의 공사 끝에 994년 5월 13일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약 350년이 지난 1344년 10월에 발생한 지진으로 중앙돔에 다시 금이 가더니 2년 후인 1346년 5월 19일에 대성당 곳곳이 또 무너졌다. 이때의 피해는 8년 동안 공사에 들어가서 1354년에 끝났다.
730년, 레오 3세 황제(Λέων Γ΄, 생몰년 : 685~741.6.18, 재위기간 : 717.3.25~741.6.18)가 모세의 십계명 중 우상숭배 금지를 내세워 성상을 파괴할 것을 내용으로 한 칙령을 공포하면서 제국 전역이 헬게이트로 빠져들었다. 성상파괴론자와 성상옹호론자가 너 죽고 나 살자를 외치며 갑론을박 하는 사이, 비잔티움 제국의 대표적인 성당인 하기아 소피아를 장식하던 수많은 조각상과 모자이크 예술품들이 훼손되어 철거되었다. 성상 파괴의 광풍은 아테네의 이리니 여제(Ειρήνη η Αθηναία, 생몰년 : 752경~803.8.9, 재위기간 : 797~802.10.31)가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면서 일단락되었고, 하기아 소피아에는 다시금 성상과 성화상들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1204년 4월 9일, 공격하라는 이슬람은 안공격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해 점령한 십자군은 도시를 마구잡이로 약탈하고 파괴하는 반달리즘을 자행해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당대의 재부가 모여 부유하기로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때의 약탈로 전성기의 화려함이 괴멸되었다. 도시 곳곳에 있던 수많은 보물들이 십자군들에게 털렸으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모후 성 헬레나 이래로 비잔티움 제국이 열성적으로 수집해 하기아 소피아를 비롯한 여러 성당에서 소중하게 모시던 각종 성유물 또한 십자군들의 손에 의해 강탈되어 서유럽으로 빼돌려졌다. 이 덕분에 비잔티움 제국 동방정교회 신도들은 "십자가 든 악마에 견주면 초승달 이교도가 그래도 사람이다."이라면서 두고두고 이를 갈았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십자군들은 하기아 소피아를 가톨릭 성당으로 바꾸고 베네치아 총독 엔리코 단돌로를 매장하는 폭거를 저지르기에 이른다. 참고로 이 무덤은 지금도 하기아 소피아 내부에 있다(…).[7] 1261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탈환된 후에야 황폐해진 하기아 소피아도 정교회 성당으로 환원되었으며, 1317년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황제가 대성당 북쪽과 동쪽에 새로운 버트레스를 증축했다.
로마 제국에서는 언젠가 제국이 멸망할 것이라는 숙명론적 예언이 오랫동안 전해졌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목표로 1453년에 병력을 동원하자 사람들은 "로마 제국은 창건자의 이름과 같은 황제 때 멸망한다"는 예언을 떠올리고는 로마 제국 최초의 기독교도 황제이자 비잔티움 제국의 실질적인 창건자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마지막 황제가 될 거라며 불길하게 여겼다. 또한 달이 차 있을 때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도 있었지만, 5월 24일에 보름달이 떠서 이제 달이 기우는 일만 남은데다가 하필이면 바로 그날 밤에 월식이 일어나 시민들을 공황상태에 빠지게 했다. 5월 25일에는 폭우가 쏟아졌고, 비가 그친 5월 26일에는 짙은 안개가 도시 전체를 뒤덮었는데,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호하던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가 도시에서 떠나는 걸 숨기기 위해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고 수군거렸다.
오스만 제국의 총공세가 시작된 5월 28일, 시민들은 하기아 소피아로 향해 "이교도가 성벽을 넘어 대성당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대천사 미카엘이 강림해 빛나는 검으로 그들을 지옥불에 던져 넣으리라"는 오래된 예언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 거 없다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오스만 병사들이 하기아 소피아로 몰려들자 대성당의 거대한 청동문이 닫혔지만 얼마 못가서 병사들이 청동문을 때려 부수고 내부로 난입했다. 반항하던 몇몇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고 예배를 드리던 나머지 사람들은 포로로 잡혔으며 미사를 집전하던 사제들은 강대에서 끌려나가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찬송가를 불렀다.
여기서 전설이 하나 생기는데, 최후의 순간 몇몇 사제들이 성스러운 그릇들을 움켜쥐고 대성당의 벽 너머로 사라졌으며, 하기아 소피아가 모스크에서 성당으로 바뀌는 날 다시 나타나 미사를 마칠 것이라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1453년 5월 29일메흐메트 2세(محمد ثانى, 생몰년 :1432.3.30~1481.5.3, 재위기간 : 1444~1446, 1451.2.3~1481.5.3)가 이끌던 오스만 제국에게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던 날, 이 성당도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이 성당만은 남겨두라고 엄명을 내리고 말에서 내려 성당 안을 보며 감탄했다는 이야기[8]가 전해진다. 다른 이야기로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나서 그날 저녁으로 이 성당에서 저녁예배를 드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병사들에게 약속한 사흘 동안의 약탈 기간이 끝나고 나서 그는 공석이 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자리에 옌나디오스 2세 스콜라리오스를 임명하고 정교회와의 공존을 허락했다[9]. 단, 하기아 소피아는 아야 소피야라는 이름을 그대로 보존한 채 이슬람 성원으로 개조하고 내부의 모자이크에 회칠을 하여 성화들을 가리며 건물 자체는 그대로 남게 되었으며, 성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바예지드 2세(بايزيد ثانى, 생몰년 : 1447.12.3~1512.5.26, 재위기간 : 1481.5.19~1512.4.25)와 셀림 2세(سليم اوّل, 생몰년 : 1465.10.10~1520.9.22, 재위기간 : 1512.4.25~1520.9.21) 때 건물 주변에 네 개의 미나레트(첨탑)을 증축했다.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고 터키 공화국을 수립한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1881.5.19~1938.11.10)는 국교를 없애고 세속주의 정책을 취하면서 아야 소피아 이슬람 성원을 개방한다. 이슬람 신도만이 출입할 수 있었던 이곳을 비이슬람인도 보게 만들었고, 미국 및 유럽 고고학자들이 오스만 제국의 정복 당시 덧칠했던 회칠을 제거하여 성화가 드러나게 하는 것도 허락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회칠 위에 그려진 코란의 내용과 이슬람의 온갖 문양이 훼손된다는 반발에 1931년 회칠 제거를 금지시킨다.[10] 그리고 1935년에 새롭게 박물관으로 문을 열게 했다. 이와 함께 하기아 소피아 내부에서의 모든 종교 행위를 금지시켰다.
비잔티움 건축의 전성기의 정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웅장하며 또한 대단히 빠르게 완공한 건물이다. 물리학자인 이시도로스와 수학자인 안시미오스가 설계를 한 것도 특징적인 부분인데, 당시의 건축물은 일반적으로 장인 집단의 축적된 경험적 지식을 기반으로 설계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부분이다. 물리와 수학 이론을 동원하여 건축물의 구조를 설계하려고 했던 것은 오늘날의 건축 공학으로 이어지는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전례없이 큰 건축물을 원했고, 전례가 없다는 것은 기존 장인들의 경험적인 지식을 뛰어넘는 것이었기에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물리적인 계산이 불가능했던 당시로써는 한계가 명확하여 하기아 소피아의 구조는 불완전했고, 완공되기 전부터 거대한 돔과 단기간의 완공을 위한 부실 공사 때문에 붕괴될 위기가 많았다.
하기아 소피아의 핵심은 거대한 돔으로, 높이 56m에 직경 31m가 넘는 거대한 돔을 지지하기 위해 돔을 받쳐주던 30.5m 폭의 대형 아치 4개를 볼트의 일종인 펜덴티브(삼각궁륭)를 사용해 대원개를 형성한 결과, 펜덴티브가 각 아치 사이의 틈을 메꾸어 돔의 무게로 인해 옆으로 벌어지려는 아치의 수평추력을 완화시켰다. 또한 반구형의 돔을 만들어 하부 구조물의 폭을 높이지 않고 회중석을 길게 만들었다. 그리고 돔 또한 가볍고 내구성이 좋은 건축자재들을 활용해 만들기로 결정되었으나 문제는 돔의 크기 장난이 아니었기에 결국 공사 와중에 붕괴 위기가 오자 회중석의 좌·우로 4개의 대형 버팀목을 만들어 좌·우에 있는 한쌍의 버팀목을 연결시켜 위·아래로 아치형의 회랑을 개축해 돔의 엄청난 하중을 흡수하는 역할을 하게 했다. 이런 방책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미봉책으로 세운 회랑의 상층부쪽에 균열과 함몰이 발생했는데, 원인은 각 버팀목마다 4군데의 아치형 회랑을 뚫었기에 버팀목이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균열이나 함몰이 진행되는 각 아치마다 보강했지만 이미 늦은 조치였고, 상단부의 뒤틀림이 상당히 심했다. 결국 기둥을 더 높이고, 가로 지지대를 추가한 후 가장 위에 있는 아치를 메워 강도를 높였다.
그래도 돔의 무게 때문에 기둥들이 바깥쪽으로 기울게 되자 완공 이후인 9세기에 건물 외부에 서유럽의 고딕 성당에서나 볼 수 있는 플라잉 버트레스와 비슷한 버팀목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건물 내부의 함몰에 돔의 기초 또한 정사각형이 아니게 되자 짧은 타원형의 열주식 드럼인 스트롱길롱을 놓은 뒤 그 위에 타원형 돔을 얹어 성당은 완성되었지만 20년도 안가 지진으로 붕괴되면서 불안정한 구조로 판명되었다. 두번째 돔은 스트롱길롱을 없앴으며, 대신 상단과 하단부분을 개축했고 돔의 높이 또한 6.25m 가량 높였다.
설계상의 문제가 계속해서 터져나오는 동안 그나마 한가지 다행이었던 점은 재료였다. 성당을 개축할 때 쓰인 건축 자재들 중에는 로마 시대부터 쓰인 경량 콘크리트가 있었는데 이것은 '포졸라나'로, 지중해 서부의 채석장에서 발견되는 화산재와 물 생석회를 섞어 만든 것이었다. 포졸라나 시멘트는 염분이 없는 강모래와 석회를 혼합한 것으로, 놀랍게도 이 시멘트가 규산칼슘을 생성해 지진이 일어나 벽면이 갈라졌다해도 다시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균열을 메꾸었다. 참고로 벽돌의 경우 로도스 섬의 점토로 만들어진 것인데 물에 던져도 뜰 정도로 가볍다고 한다.
하기아 소피아의 내부는 수백년 동안 다채로운 마감재를 사용해 성모와 예수, 성인, 황제, 황후 및 각종 도안으로 구성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었다. 하기아 소피아가 성당에서 모스크로 바뀌면서 비잔티움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던 모자이크 성화들은 회칠로 덮였지만 20세기부터 시작된 복원작업으로 몇몇 모자이크가 다시 세상에 드러났다.
황제 전용 입구 모자이크 하기아 소피아를 출입하는 입구 중에서 오직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문의 위쪽 박공벽(tympanum)을 장식하는 9세기 말~10세기 초의 작품으로, 옥좌에 앉은 '전능하신 지배자 그리스도(Ο Χριστός Παντοκράτωρ)'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사람은 레온 6세 현제(Λέων ΣΤ΄ ὁ Σοφός, 생몰년 : 866.9.19~912.5.11, 재위기간 : 886.8.29~912.5.11) 또는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옌니토스 황제(Κωνσταντῖνος Ζ΄ Πορφυρογέννητος, 생몰년 : 905.9.2~959.11.9, 재위기간 : 913.6.6~959.11.9)로 추정된다. 그리스도가 든 책에 적힌 문구는 요한 복음서 20장 19절 "평화가 너희와 함께"와 8장 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다"이다. 좌우의 원형 공간에는 각각 성모 마리아와 대천사 가브리엘을 나타냈다.
남서쪽 입구 모자이크 우측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좌측에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하기아 소피아를 성모자에게 바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옥좌에 앉은 성모는 무릎에 앉힌 아기 예수를 감싸고 있는데, 아기 예수는 왼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성모자의 좌우에 있는 ΜΡ와 ΘΥ는 Μήτηρ(어머니)와 Θεού(하느님의)의 모노그램으로 '하느님의 어머니', 곧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
후진(apse) 모자이크 후진의 반 돔 위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쎄오토코스(Θεοτόκος, 하느님의 어머니) 모자이크라고도 하며, 6세기에 제작되었다가 8세기의 성상 파괴 때 훼손되었던 것을 9세기 경에 복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옥좌에 앉은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서 받침대 위에 발을 올려놓았는데 대좌와 옥좌 모두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알렉산드로스 3세 황제 모자이크 2층 천장 어두운 구석에 위치한 이 모자이크는 알렉산드로스 3세 황제(Αλέξανδρος Γ', 생몰년 : 866.9.19~913.6.6, 재위기간 : 912.5.11~913.6.6)가 왼손에 보주를, 오른손에는 두루마리를 든 모습을 표현했다.
조이 여제의 모자이크 조이 여제(Ζωή, 생몰년 : 978경~1050.6, 재위기간 : 1028.11.12~1050.6)와 그 남편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호스(Κωνσταντίνος Θ΄ Μονομάχος, 생몰년 : 1000경~1055.1.11, 재위기간 : 1042.6.11~1055.1.11)가 파란색 옷을 입고 왼손에 성경을 든 '전능하신 지배자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는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11세기에 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좌우에 있는 IC와 XC는 Ιησούς Χριστός(예수 그리스도)의 모노그램이다.[11]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호스 황제가 들고 있는 돈자루는 교회에 대한 황실의 기부를 상징한다. 여담이지만 조이 여제는 결혼을 3번 했는데 남편이 바뀔 때마다 이 모자이크의 남편 얼굴과 문구도 바뀌었다고 한다.
콤니노스 모자이크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 황제(Ίωάννης Β΄ Κομνηνός, 생몰년 : 1087.9.13~1143.4.8, 재위기간 : 1118.8.15~1143.4.8)와 이리니 황후(Ειρήνη, 1088~1134.8.13), 그리고 황태자 알렉시오스 콤니노스(Ἀλέξιος Κομνηνός, 1106.2~1142, 측면에 그려져 있어서 정면에서는 안보인다)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짙은 청색 옷차림의 성모로부터 축복을 받는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1122년에 제작되었다. 조이 여제의 모자이크에서와 마찬가지로,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 황제의 손에 들린 돈자루 역시 교회에 대한 황실의 기부를 의미한다.
데이시스('Δέησις, Deësis) 모자이크 '데이시스'란 간청, 애원을 뜻하는 단어로, 심판자 그리스도가 죄인의 벌을 가볍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을 거느린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1261년에 제작되었다. 하기아 소피아 내부의 다른 모자이크보다 훼손 상태가 심각해 성모는 얼굴과 왼쪽 어깨 부분만 남아 있고 그리스도와 세례자 요한은 그보다는 양호한 편이라 상반신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
북쪽 박공벽(tympanon) 모자이크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역임한 성 요안니스 흐리소스토모스와 성 이냐시오가 십자가로 장식된 하얀색 성의를 입은 모습과, 이들을 포함한 여러 성인들을 형상화했다. 이 모자이크는 사람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회칠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다.아니 그러면 비잔티움인들은 어떻게 모자이크를 만든 거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접수한 오스만 제국의 사람들은 하기아 소피아를 존중하는 뜻에서 파괴하지 않고 모스크로 고쳐 사용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들도 이와 비슷한 위대한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16세기에 술레이만 대제는 건축가 시난에게 좀 작지만, 하기아 소피아와 유사한 구조의 술레이마니예 모스크를 세우게 하였고, 이후 술탄 셀림 2세는 역시 시난에게 하기아 소피아와 거의 비슷한 크기의 모스크를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맞은편에 세우게 하였다. 그것이 1574년 완성된 셀리미예 모스크다. 하기아 소피아보다 돔 실내 면적은 아주 약간 작지만 구조적, 외형적으로는 보다 발전되었다. 또한 1617년에 술탄 아흐메트은 건축가 메흐메트 아아(Mehmet Ağa)에게 하기아 소피아의 가까운 곳에 보다 넓은 면적을 가진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트 자미)를 세워 마주보게 하여 자신들의 업적을 과시했다.[12]
인근에는 이리니 성당이 톱카프 궁전 바로 앞에 있지만, 오스만시대 이후로 창고로 쓰고있어서 공개하지 않으며(...) 이스탄불 서쪽의 에디르네카프(Edirnekapı) 너머 에윱구(Eyüp Belediyesi)에 카리예 박물관(Kariye Müzesi)이라는 이름의 비잔틴성당이 하나 더 있는데, 비잔틴양식의 성당건축과 모자이크를 보기 위해서는 그쪽도 함께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카리예 박물관또한 오스만 시기에 회칠로 덮여 모스크로 사용된 적이 있지만, 오히려 회칠로 덮힌 덕에 훨씬 더 나은 상태로 이콘들이 보존될 수 있었다. 이곳은 틀라브존의 아야소피아 성당과 마찬가지로 13-14세기, 즉 팔레올로고스 양식의 이콘들 가운데서도 걸작품들을 볼 수 있으며, 회칠 전부가 벗겨진 상태라 성당으로서의 옛 모습도 확인해볼 수 있다.
[3]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4]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5]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6] 이 당시의 그리스어는 이미 고전 그리스어와는 1000여년의 갭이 있으며 확연히 다르다. 이후에 나오는 그리스어 어휘들도 모두 중세식으로 수정함.
[7] 2층 오른편에 가보면 Henricus Dandolus라고 라틴어로 쓰여진 돌판을 볼 수 있는데 거기가 무덤(...)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그 위치가 알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죽은 사람 무덤이라 그런지 터키인들도 건드리긴 영 껄끄러웠는듯.
[8] 또다른 이야기론 병사들이 성당을 약탈하자 기분나쁘듯 쳐다보긴 했지만 약속했던(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 병사들에게 댓가로 사흘동안의 약탈 행위를 허락한다) 게 있어서 놔두었다. 다만 몇몇 병사들이 불을 지르고 하자 분노하면서 그들을 채찍질하며 '약탈은 허락해도 불태우는 짓은 허락 안했다'며 주의를 줬다고 한다.
[9] 정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대대로 비잔티움 황제가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메흐메트 2세가 총대주교 취임식에 필요한 은제 십자가도 손수 마련해 옌나디오스 2세 스콜라리오스를 임명한 것은 종교적 관용을 베푸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비잔티움 황제와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의 적법한 계승자임을 나타낸 것이기도 했다.
[10] 사실 아야 소피아 안에 꾸며져있던 이슬람식 장식과 타일들도 이미 500년 가까이 묵은 문화재이기 때문에 양쪽 모두를 보존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11] 중세시대 그리스어 철자로는 C가 시그마의 소문자(σ,ς)형태였으며, 이는 키릴문자에도 전해져 С,с가 's'음가를 갖는다.
[12]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하기아 소피아는 이들보다 천년이나 전에 지어졌다는 점... 하기아 소피아를 뛰어넘는데 천년씩이나 걸렸냐?
비잔틴 제국 시대에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공인하고 이 곳에 거하기로 정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새로운 도시의 큰 사원'으로 325년 창건했던 성 소피아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에 따라 532년-537년에 다시 크게 개축되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성소피아 사원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이후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면서 이 곳은 회교사원, 즉 모스크로 그 용도가 바뀌면서 성당을 둘러싸는 미나레트가 세워지고, 성당 안은 회칠로 덮여 이슬람교의 코란의 금문자와 문양들로 채워졌다.
회칠속으로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는 모두 사라졌다.
이후 복원작업이 진행되면서 두꺼운 회칠이 벗겨지면서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비잔틴시대의 화려한 흔적들이 드러났지만, 현재 그 복원작업도 중단된 상태이다.
성소피아성당의 중앙에 서면,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가 공존하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되는 역사적인 장소임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본당의 넓이 75m X 70m ,570 평방 미터에 달하고 천장높이는 55.6m, 돔의 지름은 33m에 달하여 세계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높이의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구조이다.)
생상스-서주와 론도 카프리시오소 Op.28
이스탄불 聖소피아 寺院의 경이로움
유스티니나누스 大帝가 건설한 뒤 1500년간 성당, 모스크, 박물관으로 운명이 바뀐 서양문명의 가장 중요한 건물.
趙甲濟
일곱 언덕의 도시 서기 312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는 전투를 앞두고 하늘에 뜬 십자가를 보았다. 이 전투에서 이긴 그는 기독교를 허용하여 國敎로 가는 길을 열었다. 그 자신은 서기 337년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 서기 324년 그는 공동황제 리치니우스를 물리치고 단독황제가 된 직후 수도를 로마에서 지금의 이스탄불로 옮겼다. 도시 이름을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렀다. 이스탄불(1453년 이 도시를 점령한 오스만 터키가 새로 붙인 이름)에 가보면 바닷가의 언덕을 여러 개 볼 수 있다. 로마의 일곱 개 언덕과 대응한다. 이 지형적 유사성이 이곳을 새 수도로 선택한 한 요인이라고 한다. 학자들은 이스탄불의 출발점을 서기 전 667년으로 꼽는다. 이 해 그리스의 식민개척자 비자스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아테네에서 이곳으로 건너와 식민도시를 만들었다. 이 도시는 창립자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온이라고 불렸다. 아시아와 유럽,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교통의 십자로에 자리잡은 관계로 이 도시는 여러 세력과 인종과 종교가 투쟁하고 갈등하며 정복하는 현장이 되었다. 리디안, 페르샤, 아테네, 마케도니아의 통치를 잇따라 받던 이 도시는 서기 전 64년에 지금의 터키 지역과 함께 로마로 편입되었다. 이 도시는 이때는 비잔티움이라고 불렸다. 서기 195년 로마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는 이 도시가 경쟁자를 지지했다고 하여 파괴, 약탈했고 3세기엔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族의 공격을 받았다. 세계의 수도 서기 330년에 로마의 수도가 된 이 도시는 콘스탄티노플로 불리게 되었다. 그 뒤 지금까지 1670여년간 이 도시는 비잔틴 제국(東로마제국), 오스만 터키 제국(이때부터 이스탄불로 改名), 터키 공화국을 거치면서 수도로 계속 기능하고 있다. 동서양을 포괄하는 세계사의 관점에서 '세계의 수도'를 하나만 꼽는다면 단연 이스탄불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로마는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자 東西로 분열되었다. 지금의 로마를 수도로 한 西로마는 서기 476년 게르만族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유럽은 중세의 암흑기로 빠져들어간다. 중세 암흑기란 게르만族의 침입, 기독교의 확산, 그리고 그리스-로마 문명의 파괴로 상징된다. 西유럽의 야만화인 것이다. 이 시기 그리스-로마의 유럽문명의 正統을 이어간 것이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東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그리스-로마-기독교 문명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중동과 동양으로 열려 있는 도시라는 利點(이점)으로 富의 중심이 되었다. 약천년간 콘스탄티노플(또는 이스탄불)은 富, 문명, 인구의 규모와 다양성에서 세계최대 도시였다. 이스탄불이란 도시의 年輪이 경험한 그리스-로마-기독교-비잔틴-이슬람 문명은 이 도시에 큰 흔적을 남겼다. 이 다양하고 대립적이기도 한 문명들이 살아서 공존하기 때문에 이스탄불은 풍성하고 이국적이고 생동하는 느낌이다. 여행객들은,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는 이 도시에서 만나 충돌하고 융합하고 있는 그 현장을 목격한다는 짜릿한 쾌감 같은 것을 느낀다. 유럽 최고의 건물 이스탄불의 이런 역사를 온몸을 받아 기록하고 버텨온 건물이 바로 聖소피아 사원이다. 교회로 지어졌다가 모스크로 바뀌었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는 이 건물은 서기 537년에 준공된 뒤 약천년간 유럽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다. 100X150m의 평면적인데 돔의 높이는 약56m이고 돔의 지름은 약33m이다. 15세기까지 약900년간 세계최대의 교회 돔이었다. 이 건물은 지금 기준으로도 규모가 엄청난데 이것이 신라 진흥왕 때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니 더 놀랍다. 이곳을 구경한 한국의 한 건축가는 ˜나는 이 건물이 건축학적으로 유럽의 최고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건물은 그리스語로 '하기아 소피아'(Haghia Sophia)라고 불린다. 그 뜻은 '聖스러운 지혜의 교회'이다. 지진이 많은 지역인 관계로 해서 이 교회의 돔은 여러번 붕괴되고 복원되기를 되풀이하였지만 대체로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건물과 관계가 깊은 3大 인물이 있다. 소피아 사원을 만든 東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직후 이 성당을 부수지 않고 이슬람의 예배당인 모스크로 바꾼 오스만 터키의 메흐메트 2세, 그리고 터키를 공화국으로 개조하고 政敎분리의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이 건물을 박물관으로 바꾼 케말 파샤(아타 투르크)가 그들이다. ˜솔로몬의 영화를 능가했다˜ 聖소피아 사원을 만든 유스티니아누스 大帝는 원래 지금의 유고슬라비아 출신이었다. 그의 삼촌이 비잔틴 제국의 궁정수비대장이었다가 황제가 된 유스틴 1세였다. 서기 527년에 病中의 삼촌에 이어 황제가 된 유스티니아누스 大帝는 532년 戰車 경기장에서 일어난 군중폭동을 유혈 진압한다. 남편이 흔들리자 황후 테오도라가 강경책을 건의하였다. 大帝는 군대를 투입하여 약3만 명을 학살했다. 이 폭동으로 지금의 聖소피아 사원 자리에 있던 교회가 불탔다. 大帝는 즉시 재건을 명령하여 불과 6년만에 이 불가사의한 건물을 완공한 것이다. 工期를 단축시키기 위해서 건축가들은 다른 건물의 기둥과 주춧돌 같은 것을 갖고 와서 사용했다. 에페소에 있는 알테미스 신전의 기둥들이 뽑혀와서 소피아 교회의 기둥으로 쓰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준공식 때 이 교회로 들어와 까마득한 돔 천장을 올려다 보면서 ˜솔로몬이여, 드디어 내가 당신을 능가했나이다˜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한때는 망한 西로마지역의 대부분을 수복했다. 이탈리아, 발칸, 아나톨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스페인 등. 그의 후대에 가서 이 지역을 지켜내지 못하게 됨으로써 로마를 재건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소피아 사원은 그 뒤 1000년간 기독교 문명권의 중심으로 군림했다. 지금은 소피아 사원보다 로마의 聖베드로 성당이 더 크지만 베드로 성당은 소피아 사원보다 천년 뒤에 세워졌다. 부수지 않고 모스크로 바꾼 오스만 터키 1453년 오스만 터키의 20대 젊은 황제 메흐메트 2세는 군함들을 언덕위로 끌어올려 반대편 灣으로 진입시키는 기발한 전술을 구사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했다. 그해 5월29일 저녁 그는 이 도시로 입성했다. 이슬람 문명권의 챔피언이 기독교 문명권의 심장부를 장악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메흐메트 2세는 터키군에 저항하지 않는 사람들은 보호하교 교회도 보존하게 했다. 저항한 구역에 대해서는 관례에 따라 3일간의 약탈을 허용했고, 교회를 불태웠다. 메흐메트 2세는 이날 부하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聖소피아 성당으로 들어갔다. 한 터키 병사가 성당의 대리석 步道를 깨고 있었다. 화가 난 메흐메트 2세는 칼을 뽑아 그 병사를 친 뒤에 선언했다. ˜보물과 포로들은 너희들 것이지만 이 도시의 건물들은 내 것이다˜ 그는 이 교회를 부수지 못하게 한 뒤 이슬람 모스크의 기도탑(미나렛)을 네 개 세우게 하여 모스크로 기능을 바꾸고 계속 사용하게 했다. 金泳三 전 대통령이 日帝가 지었다고 하여 중앙청 건물(전 조선총독부 건물)을 광복 50년 뒤에 부순 것과 사뭇 다른 조치였다. 聖소피아는 서기 548년부터 1453년까지 905년간은 기독교 교회로, 그 뒤 1935년까지 482년간은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政敎분리를 핵심으로 하는 근대화를 추진하던 터키공화국의 國父 케말 파샤는 1935년 이 모스크를 박물관으로 바꿔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슬람 교도들은 聖소피아 교회에 많은 손을 대지 않았다. 다만, 이 교회 벽에 그려져 있던 모자이크 벽화들 위에 회칠을 하여 덮어버렸다. 비잔틴 제국 시절이던 서기 726-87년 사이 기독교 안에서 우상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져 內戰으로 번졌다. 구약성경의 가르침대로 그림, 조각상 등 모든 우상을 교회에서 없애야 한다는 우상파괴주의자들이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이들은 내전에서 패배했다. 이 내전 때 聖소피아 사원의 벽에 그려져 있던 많은 聖畵들이 파괴되었다가 다시 그려졌다. 소피아 사원이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이슬람 교도의 치하에 들어가자 이 聖畵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종교와 정치를 분리한 터키 공화국의 성립 이후 이 벽화들은 복원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슬람 교도들이 벽화를 뜯어내지 않고 덧칠만 했기 때문이었다. 약탈자 단돌로의 무덤 소피아 사원을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의 보고로 만들어주고 있는 것들이 벽화들인데 주로 9-15세기 작품이다. 서기 1028-50년 在位했던 女帝 조의 초상화는 사연이 있다. 이 여성황제의 첫 남편은 일찍 죽었다. 女帝는 곧 재혼하자 벽화에 있던 전 남편의 그림중 머리를 떼어내고 현 남편의 얼굴을 얹었다. 이 두 번째 남편도 일찍 죽었다. 女帝는 두 번째 남편의 얼굴을 떼어내고 세 번째 남편의 얼굴을 그려넣게 했다. 세 번째 남편은 女帝보다도 오래 살아 얼굴을 보전했다. 소피아 박물관의 2층 남쪽 바닥엔 'HENRICUS DANDOLO'라고 쓰여진 곳이 있다. 이 사람이 콘스탄티노플의 약탈자인 베니스의 도제(Doge: 선출직 국가원수) 단돌로이고 한때 그의 무덤이 있었다는 표시이다. 서기 1204년 프랑스의 騎士團과 베니스軍을 주력으로 하는 제4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을 목표로 해놓고 진격중 방향을 돌려 같은 기독교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점령한 뒤 약탈, 방화를 자행했다. 베니스 공화국은 해군을 동원하여 십자군을 예루살렘 戰場까지 수송해주고 돈을 벌기로 하고 참여했으나 비잔틴 제국의 내부 권력투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이슬람 군대와 싸우겠다고 일어선 십자군이 남의 나라 內政에 간섭하여 기독교 문명의 자랑인 이 도시를 박살낸 것이다. 이때 문서 미술품 등 수많은 인류문명의 유산들이 파괴, 소실되었다. 지금 베니스 聖마르코 광장에 가면 성당 지붕 아래 네 마리의 청동말이 보인다. 진품은 미술관에 보존되어 있고 전시된 것은 모조품이다. 이 희대의 보물은 원래 聖소피아 사원 앞에 있던 戰車경기장에 있었던 그리스 시대(서기 전 5세기)의 조각품이었다. 1204년 베니스 군대가 이를 약탈해 간 것이다. 약탈의 지휘자 단돌로는 베니스 역사에선 전성기를 연 지도자로 평가받지만 비잔틴 제국 사람들에겐 원수였다. 단돌로는 1205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죽어 소피아 사원에 묻혔다. 베니스와 프랑스 군대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뒤 라틴 제국으로 불리는 허수아비 정권을 세웠다. 수도를 빼앗긴 비잔틴 제국은 1261년 제노바 군대의 도움을 받아 이 도시를 탈환하고 단돌로의 무덤을 파헤쳐 그의 뼈를 개떼에게 던졌으나 개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블루 모스크와 조화 소피아 사원의 돔은 로도스 섬의 가벼운 진흙으로 빚은 벽돌로 만든 것이다. 이 돔은 그 뒤 지진으로 자주 무너져 내렸지만 높이 56m에 지름이 33m나 되는 이 돔이 약1500년이 지난 지금도 원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서양의 건축술을 대표하는 건물인 것이다. 소피아 사원을 나와서 맞은 편을 보면 블루 모스크가 있다. 내부가 청색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붙은 말이다. 이스탄불의 수많은 모스크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평해진다. 이는 황제 아하메트 1세가 서기 1609-16년 사이 소피아 성당을 압도하기 위한 이슬람 예배당으로 지은 것이지만 역사적으로나 건축학적으로 소피아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 소피아 사원에서 블루 모스크를 향해 걷는 길은 같은 뿌리에서 파생했으나 相剋(상극)의 역사를 그리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두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소중한 통로이기도 하다. 오스만 터키의 위대성은 이슬람의 宗主國이면서도 기독교와 유태교를 허용했고 그리스-로마문화와 단절하지 않고 동양유목민족(투르크族)의 바탕 위에 동서양을 융합했다는 점이다. 터키를 여행하면 참으로 큰 나라라는 인상을 받는다. 땅도 넓고 인구도 많고 문화도 깊지만 무엇보다 가슴이 큰 大人들이 사는 大國이란 생각이 든다. 소피아 사원이 바로 그런 상징이다. *여행정보(1): 이스탄불을 가장 넓게 조망하도록 해주는 곳은 골든혼灣 건너편 언덕 위에 있는 갈라타 탑 9층의 식당이다. 높이 62m인 이 탑은 1348년 이곳에 진출해 있던 제노바 사람들이 지은 요새의 일부였다. 9층 발코니에서 이스탄불의 파노라마를 내려다보면 왜 이곳이 '세계의 수도'로서 손색이 없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전화는 (0212) 245-1160. *여행정보(2): 소피아 박물관에 너무 취하다가는 놓쳐버리기 쉬운 명소가 있다. 이 박물관 바로 앞에 있는 지하 저수지 바질리카 시스턴(Basilica Cistern)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서기 532년에 만든 것으로서 약8만t의 물을 저장했다. 지금도 물이 얕게 차 있다. 336개의 기둥이 들어서 있는 이 저수지는 꼭 水中궁전처럼 아름답다. 전화는 (0212)522-1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