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예 JSA 전사
JSA 경비대대 대원들이 17일 낮 무더위 속에서 ‘대한민국 대표 JSA 경비대대’라는 문구와 태극기가 그려진 영내 시설물을 배경으로 완전군장 구보를 하고 있다.온몸이 땀에 절고, 숨은 턱까지 차오른다. 완전군장으로 400m를 전력 질주한 오광찬 병장(22)은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한 뒤 낮은 포복으로 사로(射路)까지 기어갔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방울이 계속 스며들어 눈이 따갑고, K-2 소총을 받쳐 든 팔은 후들거린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 내 10여 개의 표적을 명중시켜야 한다. 숨을 고른 뒤 방아쇠를 당기자 정적을 깨는 날카로운 총성과 함께 표적지들이 연달아 쓰러졌다.
17일 오후 2시 JSA 경비대대 사격장에서 진행된 ‘악조건하 사격훈련’. 실제 전투와 같은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 속에서 ‘일발필중(一發必中)’의 능력을 갖추기 위한 훈련이다. 계급과 직책에 상관없이 모든 JSA 대원은 이 훈련을 통과해야 한다.
판문점 JSA 내 초소와 회담장 등에서 벌어질 수 있는 적과의 교전에 대비한 근접건물전투사격(CQB)연습도 JSA 대원만의 특수훈련이다. 이 밖에 개인과 팀, 중대 단위로 실전을 방불케 하는 고난도 ‘전투사격훈련’을 JSA 대원들은 끊임없이 반복한다.
JSA 대원들의 전체 훈련 가운데 사격훈련의 비중은 50%가 넘는다. 일반 보병부대의 연간 사격훈련량의 4배 이상이다. 오 병장은 “과거 JSA에서 발생했던 적의 도발은 몇 초, 몇 분 내에 상황이 종료됐다”며 “나와 동료의 생존을 위해 적의 기습에 즉각 대응하려면 최고의 사격 기량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JSA 경비대원은 장교와 병사 모두 선발된 최정예 전투요원이다. 육군의 상위 1% 수준의 강인한 체력과 전투력은 물론이고 건전한 국가관을 갖춰야 한다. JSA 대원들은 어떤 위기상황도 ‘5분 내 종료’를 목표로 삼고 있다. 유사시 1분 내 JSA에 투입되는 JSA 외곽초소의 기동타격대원들은 잘 때도 전투복과 전투화를 벗을 수 없다.
JSA 내 북측 경비병력은 대부분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출신의 최고 엘리트 장교들이다. 부대 관계자는 “그들의 정체를 잘 알기에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며 “‘적이 두려워하는 전사’가 되기 위해 고강도 훈련을 하고 만반의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사격훈련을 마친 JSA 대원들은 격투술과 태권도 훈련까지 끝내고 병영 생활관으로 복귀했다. 생활관 입구에 걸린 ‘JSA 용사의 기상’이라고 쓰인 경비대대의 신조가 눈에 띄었다.
‘우리는 조국의 심장을 지키는 대표전사다. 우리의 눈빛은 적의 눈동자를 도려내고, 우리의 목소리는 적의 고막을 찢어내며, 우리의 두 주먹은 적의 심장을 멎게 한다….
JSA의 밤
윤봉희 중령(43·육사 50기)은 집무실에 비치된 액자 속 사진을 한참 동안 주시했다.
‘나의 적’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사진 속 인물은 북한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의 경무부장. 2년 가까이 JSA 경비대대장을 맡고 있는 윤 중령의 ‘맞수’다. 그는 야간순찰을 나서기 전 하루도 빠짐없이 ‘적장’을 보며 전의를 가다듬는다. 그의 집무실 내 10여 개의 폐쇄회로(CC)TV 모니터엔 북측 동향이 실시간으로 나타났다. 그는 “하루에도 수없이 적이 어떤 도발을 해올지, 어떻게 대응할지를 고심하면서 대비에 만전을 기한다”고 말했다.
▼ 30m앞 北초소에 불빛 깜박… “우릴 지켜보는 겁니다” ▼
18일 오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자유의 집을 찾은 남측 방문객들과 건너편 판문각 앞에 나타난 북측 방문객들이 눈앞의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쳐다보고 있다. 양측의 거리는 80m 안팎에 불과했지만 남과 북 사이를 가른 채 버티고 선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벽은 분단과 정전 60년의 아픔을 생생히 대변하고 있었다(위 사진). JSA 경비대대 대원들이 비무장지대(DMZ) 내 대성동 마을 인근 밭에서 일을 하는 주민을 경호하고 있다(왼쪽 사진). 판문점=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17일 오후 8시경. JSA 주둔지를 비롯해 DMZ 곳곳에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 남방한계선을 지나 판문점으로 향하는 국도 1호선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주변 지형물과 부대시설의 노출을 우려해 일부러 가로등을 달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도 1호선은 분단 전까지 전남 목포에서 판문점을 거쳐 평북 신의주까지 연결됐다. 지금은 판문점이 종착점이다.
외부인의 판문점 견학 일정은 매일 오후 5시경 끝난다. 이후론 민간인의 출입이 일절 금지된다. 대성동 마을 주민들도 야간엔 JSA 대원의 경호를 받으며 이동한다. 자정 이후엔 모든 통행이 금지된다. JSA 대원들은 밤이면 초긴장 상태에 돌입한다. 짙은 어둠 속 판문점은 방문객들로 북적이던 낮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남측 자유의 집과 북측 판문각, 남북한 경계초소들이 가로등 불빛 속에서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수십 개의 감시카메라와 CCTV가 ‘윙윙’ 하는 낮은 소음을 내며 일대를 샅샅이 훑었다.
윤 중령과 함께 군사분계선 바로 앞 아군 초소에 도착했다. 맞은편 북측 초소까진 불과 30여 m 거리. 윤 중령은 “적 초소 바로 앞이니 조심하라”고 취재팀에게 거듭 주의를 당부했다.
초소 내 대원들은 야시장비로 어둠이 내려앉은 북측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눈앞의 보이지 않는 적을 감시하려면 청각과 후각 등 모든 감각을 동원해야 한다. 가끔씩 깊은 밤 정적을 깨는 고함이나 괴성이 북측에서 들려올 때면 온 신경이 곤두선다.
윤 중령이 초소를 순찰하는 동안 맞은편 북측의 모든 초소의 지붕에서 빨간 불빛이 계속 깜박거렸다. “북한군의 고성능 적외선카메라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의미”라고 윤 중령이 설명했다. 순찰을 끝낸 윤 중령의 발걸음이 자유의 집 인근에서 멈췄다. 1984년 11월 23일 옛 소련 외교관 망명사건 때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다 장명기 상병이 전사한 지점이다. 도로 맞은편은 아군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 북한군 3명이 쓰러진 지점이라고 윤 중령이 설명했다. 윤 중령은 “JSA 곳곳엔 1976년 ‘8·18 도끼만행사건’ 등 정전 무력화를 노린 북한의 숱한 도발 흔적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JSA 대원들은 항상 그 흔적들을 보면서 찰나의 순간도 방심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되새긴다고 그는 강조했다. JSA 경비대대의 주둔지인 ‘캠프 보니파스(Camp Bonifas)’라는 명칭도 도끼만행사건 때 북한군에 살해당한 아서 보니파스 미군 대위의 이름에서 따왔다.
보이지 않는 군사분계선
“북한군이 출몰할 수 있는 위험지역이니 군사분계선에 절대 접근하면 안 됩니다.”
18일 오전 7시 남한 최북단인 DMZ 내 대성동 마을의 한 경작지. 농사일에 나선 주민 경호작전을 맡은 송광윤 대위(32·육사 61기)가 취재팀에게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송 대위는 굳은 표정으로 건너편 논밭 사이로 낮게 솟은 뚝방 쪽을 가리켰다.
군사분계선이 지나는 곳이라고 그가 경고한 지점엔 철책선도 경계병도 없었다. 불과 60∼70여 m 앞이 군사분계선인데 보이지 않다니…. 송 대위는 “‘보이지 않는 군사분계선’에 접할 때마다 분단과 정전의 현실이 더 절박하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인근 덤불 속에 세워진 낡은 표지가 군사분계선을 식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 표지는 정전협정에 따라 군사분계선 155마일(약 250km)에 걸쳐 200m 간격으로 총 1292개가 설치됐다. 임진강 변에 세워진 표지 ‘제0001호’부터 동해안의 ‘제1292호’까지 연결한 가상의 선이 바로 군사분계선이다.
이를 기점으로 남북이 2km 씩 뒤로 물러서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해 DMZ가 설정됐다.
가는 빗줄기가 굵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폭우로 바뀌었다. 하지만 백성훈 상병(26) 등 JSA 대원들은 K-2 소총을 고쳐 쥐고 꼿꼿이 선 채 수풀이 무성한 북쪽을 주시했다. 여기서 불과 2km 남짓한 곳에 북한군 최전방 경계초소(GP)가 있다고 백 상병은 말했다. 당장이라도 북한군이 군사분계선 근처로 내려와 주민을 위협할 수 있다는 의미다. 백 상병은 “언제든 적과 마주칠 수 있다는 각오로 작전을 수행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1997년 10월 이 근처에서 대성동 주민 2명이 군사분계선 인근에서 도토리를 줍다가 북한군에 납치된 뒤 나흘 만에 풀려났다.
주민 경호작전엔 3∼5명의 JSA 대원과 방탄 차량이 출동한다. 북한군의 출몰 우려가 높은 ‘고위험지역’엔 더 많은 병력과 장비가 투입된다. 농번기엔 이른 새벽부터 하루 10시간 이상 선 채로 경호작전을 펼칠 때도 많다. 단 1초라도 적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식사도 서서 해결한다.
JSA 대원들의 경호 속에 밭일에 나선 김동례 씨(76·여)는 대성동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김 씨는 “군사분계선 바로 앞에서 농사일을 할 때마다 북한군이 나타날까 겁이 나지만 JSA 장병들이 지켜줘 맘이 놓인다”고 말했다. 대성동 마을에 거주하는 40여 가구 200여 명의 주민은 대부분 김 씨처럼 ‘토박이’다. 마을 주민들은 납세와 병역 의무가 면제되지만 분단 이후 남북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전쟁의 공포에 시달려 왔다.
올 3월 북한의 도발 위협 때문에 많은 주민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신경이 곤두섰다고 김 씨는 전했다. 대성동 마을에서 1.8km 떨어진 곳에 북한 측 선전마을인 기정동 마을이 있다. 기정동 마을엔 세계에서 가장 높은 160m의 국기(인공기) 게양대가 있다. 이 게양대는 이날 짙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에필로그
18일 오전 10시 다시 찾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엔 전날보다 더 많은 방문객이 줄지어 있었다. 눈앞의 적을 감시하는 JSA 대원들의 긴장된 표정과 이들을 배경으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방문객들의 환한 얼굴이 묘한 대조를 이뤘다.
판문점 남측 자유의 집 1층에 마련된 기념품 가게는 초콜릿이나 볼펜 등 기념품을 사는 방문객들로 북적거렸다. 방문객들의 한가롭고 여유로운 모습에서 전쟁의 공포나 위기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가 지난밤 숨소리조차 내기 힘들 만큼 긴박했던 남북 대치 현장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전쟁과 평화가 공존하는 장소라는 말을 실감하면서 서울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판문점은 서울에서 북서쪽으로 62km, 평양에선 남쪽으로 215km 떨어져 있다. 개성에선 불과 10km 거리다. 판문점의 현 행정구역은 ‘경기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다. 판문점(板門店)의 원래 이름은 ‘널문리’다. 널문을 널 판(板), 문 문(門)으로 표기한 것이다. 6·25전쟁 전엔 서울에서 개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초가집 몇 채뿐인 한적한 농촌이었다. 하지만 휴전회담으로 세계적 이목이 쏠렸고, 정전협정이 조인되면서 민족 비극의 상징이자 남북 만남의 역사적 현장이라는 ‘두 얼굴’을 갖게 됐다.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차창 밖으로 바라본 비무장지대는 여느 평화로운 시골 풍경처럼 정겹게 다가왔다. ‘60년 정전과 분단의 상징인 이곳이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상징으로 거듭나는 때가 언제 올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라디오에선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남북 당국 간 실무회담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저만치 논밭을 거닐던 재두루미 한 쌍이 보이지 않는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