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출처: 2005년 대한지적공사 '통일한국의 영토문제에 관한 연구' 자료 |
中國 공산당이 韓民族의 북방역사(北方歷史)를 自國史에 편입하려는 이유는 대한민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 이후 제기될 간도(間島) 문제에 대한 사전 정지작업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간도는 20세기 초까지 朝鮮의 영토로 간주됐던 지역이다. 간도는 두만강과 그 지류 연안의 평야 및 구릉으로 형성된 중국 길림성(吉林省) 지역에 해당된다. 1909년까지 간도지방 주민조사로 나타난 朝鮮人은 8만2900여 명이고, 淸國人은 2만 7,300여명이었다.
간도는 東간도와 西간도로 나뉘며 東간도는 1909년 淸日간의 ‘간도협약’에 의해 불법적으로 淸에 이양되었으며, 西간도는 1712년 백두산 정계비에 의해 淸나라에 상실됐다.
大韓帝國은 1897년 이후 2차례의 상세한 현지답사를 통해 간도뿐만 아니라 연해주까지 우리 영토임을 확인했다. 이와 함께 1902년 이범윤(李範允)을 북변간도관리사(北邊間島管理使)로 임명해 간도 주민에 대한 직접적인 관할권을 행사하도록 조치했다.
간도 문제의 직접적인 발단이 된 것은 앞서 언급한 ‘간도협약’이다.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滿洲에 있어서의 利權문제가 淸羅라와 엇갈리게 되자 협상을 통해 1909년(융희3) 9월4일 조선의 영토인 간도를 淸나라에 넘겨주는 ‘간도에 관한 청일 협약(간도협약)’을 체결했다.
‘간도협약’은 우리의 領土를 불법적으로 잃게 된 제3국간의 협약이다. 우리는 간도협약 체결당시 국력이 미약했다. 이후 역사적으로 韓日병합과 南北분단문제 등으로 이 지역에 대한 領土主權의 행사가 불가능했다. 이러한 상태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간도와 연해주 지방은 우리의 영토이면서도 사실상 러시아와 중국의 지배하에 있는 상태다.
中國은 ‘간도협약’으로 간도 영유권 문제가 종료된 것으로 기정사실화해왔다. 中國은 자신들의 논리를 보강하기 위해 지금까지도 역사적 당위성을 주장하는 사업을 지속해 오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이 1992년 韓中수교과정에서 간도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무관심했던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간도를 포함한 北方領土 문제는 통일-북방정책과 함께 추진되어야 할 민족적 과제다. 영토는 불변(不變)의 상수(常數)가 아니다. 國境은 끊임없이 변하며 領土는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한 그 나라의 領土인 것이다.<조갑제닷컴/2012년 11월6일>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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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출처: 구글지도 |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조선의 초기 북방(北方) 경계
태조(太祖) 1권 總序 69번째기사
태조가 단주에 침입한 호발도를 격퇴하고 변방을 평안히 할 계책을 올리다
신우(辛禑) 9년(1383) 계해 8월, 호발도(胡拔都)가 또 와서 단주(端州)를 침구(侵寇)하니, 부만호(副萬戶) 김동불화(金同不花)가 외적(外敵)과 내응(內應)하여 재화(財貨)를 다 가지고 고의로 뒤에 있다가 짐짓 적에게 잡히었다. 상만호(上萬戶) 육여(陸麗)와 청주 상만호(靑州上萬戶) 황희석(黃希碩) 등이 여러 번 싸웠으나 모두 패전하였다. 이때 이두란(李豆蘭)이 모상(母喪)으로 인하여 청주(靑州)에 있었는데, 태조가 사람을 시켜 불러 이르기를, “국가의 일이 급하니 그대가 상복(喪服)을 입고 집에 있을 수가 없다. 상복을 벗고 나를 따라오라.”
하니, 두란이 이에 상복을 벗고 절하고 울면서 하늘에 고(告)하고 활과 화살을 차고 태조를 따라갔다. 호발도(胡拔都)와 길주평(吉州平)에서 만났는데, 두란이 선봉(先鋒)이 되어 먼저 그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왔다. 태조가 조금 후에 이르렀는데, 호발도는 두꺼운 갑옷을 세 겹이나 입고 붉은 털옷[褐衣]을 껴입었으며, 흑색 암말[牝馬]을 타고 진(陣)을 가로막아 기다리면서 속으로 태조를 깔보아, 그 군사는 남겨 두고 칼을 빼어 앞장서서 달려나오니, 태조도 또한 단기(單騎)로 칼을 빼어 달려나가서 칼을 휘둘러 서로 쳤으나, 두 칼이 모두 번득이면서 지나쳐 능히 맞히지 못하였다. 호발도가 미처 말을 타기 전에, 태조가 급히 말을 돌려 활을 당겨 그의 등을 쏘았으나, 갑옷이 두꺼워 화살이 깊이 들어가지 않는지라, 곧 또 그의 말을 쏘아 꿰뚫으니,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호발도가 땅에 떨어졌다. 태조가 또 그를 쏘려고 하니, 그 휘하의 군사들이 많이 몰려와서 그를 구원하고, 우리 군사들도 또한 이르렀다. 태조가 군사를 놓아 크게 적군을 쳐부수니, 호발도는 겨우 몸을 피해 도망해 갔다. 태조가 이로 인하여 변방을 편안하게 할 계책을 올렸는데, 그 계책은 이러하였다.
“북계(北界) 는 여진(女眞)과 달단(韃靼, 주: 타타르)과 요동(遼東)·심양(瀋陽, 주: 상단 지도 참고)의 경계와 서로 연해 있으므로 실로 국가의 요해지(要害地)가 되니, 비록 아무 일이 없을 시기일지라도 반드시 마땅히 군량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될 것입니다.
지금 그 거주하는 백성들이 매양 저들과 무역[互市]하여 날로 서로 가까워져서 혼인까지 맺게 되었으나, 그 족속(族屬)이 저쪽에 있으므로 유인해 가기도 하고, 또는 향도(嚮導)가 되어 들어와 침구(侵寇)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唇亡齒寒]게 되므로, 동북면 한 방면의 근심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또 전쟁의 이기고 이기지 못한 것은 지리(地利)의 득실에 달려 있는데, 저들 군사의 점거한 바가 우리의 서북쪽에 가까운데도 이를 버리고 도모하지 아니하니, 이에 중한 이익을 가지고 멀리 우리의 오읍초(吾邑草)·갑주(甲州)·해양(海陽)의 백성들에게 주어서 그들을 유인해 가기도 하고, 지금 단주(端州)·독로올(禿魯兀)의 땅에 뛰어들어와서 사람과 짐승을 노략질해 가니, 이로써 본다면 우리 요해지의 지리·형세는 저들도 진실로 이를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