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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2>

淸山에 2013. 7. 2. 17:36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2>

 

 

한 가닥으로 길게 늘어선 상단 일행이 치받이길 산코숭이를 돌아 막 내리받이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쪽지게에 어머나 싶을 정도로 많은 무명짐을 싣고도 발걸음이 성큼성큼 거칠 것이 없던 한 동무가 발행한 이후 처음으로 앞에서 나귀를 몰고 있는 동무에게 손사래를 치며 말문을 열었다.

 
 

“여보게, 만기?”

분주하게 쏟아지는 나귀들의 워낭 소리 때문일까. 만기로 불렸던 황구의 동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초리만 휘두른다.

 

“여보게, 만기?”

허우대가 껑충한 다른 일행들에 비하면 아담한 체구를 가진 만기는 걸음은 멈추지 않고, 허리만 꾸벅하며 힐끗 뒤돌아보는데, 얼른 보아도 용모가 계집처럼 여리다.

 

“나귀들을 세우게.”

일행의 뒤를 따르던 행수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쪽지게를 벗어 세운 뒤 성큼성큼 행렬의 앞으로 나섰다. 목소리는 매우 우렁찼으나 허우대는 일행의 여러 부상들 중에서 뛰어나게 우람하지는 않았다. 일행 모두가 지게를 벗고 벼랑길로 나서며 묵직하게 짓눌렸던 어깨를 추스르고 있었다. 상단의 숫자가 열이 넘든 혹은 대여섯에 불과하든 잠시 쉴 적에는 쪽지게를 벗지 않고 바위나 나뭇등걸에 의지하여 선 채로 숨을 돌린 뒤 다시 길을 재촉한다.

 

그것이 행상들의 몸에 밴 풍속이었다. 그런데 이번만은 모두 한결같이 지게를 벗고 물미장으로 버텨 고정시킨 뒤 숨을 돌리기로 한 모양이었다. 말은 없었으나 이심전심으로 이번의 쉴 참은 오래가리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여섯 사람을 건너 앞으로 나선 행수는 먼저 절음나서 절뚝거리고 있는 나귀의 앞 무릎에 감아둔 감발을 풀었다. 그리고 상처를 꼼꼼하게 살폈다.

 

빛내골 숫막거리를 나설 적에 사람도 먹지 않았던 막걸리를 두 사발이나 먹이고 얼추 응급조처를 하였다. 그러나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상처는 더욱 부풀어올랐고 길을 재촉할수록 마냥 더디기만 하였다. 그곳 마방에 두고 올 수도 있었으나, 조급한 마음에 끌고 온 것이 되려 화근이었다. 그러나 떠나온 빛내골보다 다가올 샛재가 더 가까워진 지금에 이르러선 후회해보았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빛내골을 떠나 행상꾼들의 밥자리인 저진터재 계곡을 지나고 자치골과 또다른 밥자리인 느삼밭을 지나고 장차 구억터와 샛재골을 앞두고 있으니, 한식경 못다 가서 월천댁이 기다리는 샛재 비석거리에 당도할 것이었다.

 

일행 열넷 중에서 행수는 접소(임소)의 도감인 정한조였고, 나머지는 그 수하 부상들과 담꾼들이었다. 행수인 정한조는 일행 중에서 나이도 많아 보였고, 허우대도 크지 않았으나, 딱 벌어진 상반신에 행동거지가 매우 민첩해 보였다. 목소리에 위엄이 실려 있어 얼른 보아도 녹록해 보이는 위인이 아닌 듯했다. 절음난 나귀를 살피던 그는 혀를 끌끌 차고는 풀었던 감발을 다시 단단하게 조여매면서 견마꾼이었던 만기에게 말했다.

 

“나귀에 실린 부담을 내리게.”

그때까지도 동이 트지 않은 꼭두새벽이었다. 산기슭에는 역시 겨우내 쌓인 눈이 녹지 않은 그대로였고, 옷깃을 파고드는 한기도 살을 에이긴 한겨울이나 다름없었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소나무 가지에 앉아 있던 눈보라가 으스스 떨며 벼랑길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고래등같이 덩치 큰 무명짐이나 시겟짐을 지고 고갯길을 재촉한 터라, 일행들의 땀에 절은 누비 등거리에선 더운 김이 솟아오르고, 목덜미에는 땀이 시꺼먼 땟국과 함께 줄줄 흘러내렸다. 마침 등거리를 벗어 땀을 훔치던 만기가 절음난 나귀에 실려 있던 부담을 내리기 위해 북두끈을 풀고 있었다. 부상한 나귀가 길바닥에 눕기 전에 조치를 해주기 위해서였다.

 

부담을 내리긴 하였으나 만기는 엉거주춤 선 채로 행수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일행 중에 더이상의 등짐을 감당해줄 수 있는 사람이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짐 벗은 나귀는 걷기에 훨씬 수월해지겠으나, 담꾼들은 접은 두 다리를 펴지 못할 정도로 고통을 감내해야 할 판국이었다. 견마를 잡고 있던 만기조차 허리를 펴지 못할 정도의 과부하였다. 행수 정한조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한숨 돌리게들……”


 
분부가 떨어지기 바쁘게 일행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일제히 허리춤에 찔러두었던 곰방대를 뽑아들었다. 코를 풀어 나뭇등걸에 쓱 닦고 나서 곰방대에 시초를 꾹꾹 눌러 다져 넣고 부싯돌을 쳐서 마른 쑥에 불을 당겼다.

 

일행 중 누구에게선가 창자까지 토해낼 듯 지독하게 내쏟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사이 행수는 나귀에 실렸던 부담을 무릎치기도 하지 않고 두 팔의 근력만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이 눈치 저 눈치 살필 것도 없이 뒤에 있던 자신의 무명짐 위에 올려 싣고 단단히 잡도리하였다. 아니래도 한 길이나 되던 무명짐 위에 부담을 얹고 보니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게 누가 더 높은가 겨루기라도 하자는 것처럼 보였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나머지 동무들은 도감 정한조의 행동을 못 본 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