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소설&드라마

김주영의 ‘객주’ 완결편 본지서 만난다

淸山에 2013. 7. 2. 17:03

 

 

 

 

 

 

김주영의 ‘객주’ 완결편 본지서 만난다
1979~1984년 5년간 연재, 후속편 새달 1일부터 실어
  

 “30여년 만에 ‘객주’ 완결편을 연재하게 돼 너무 기쁩니다. 그것도 객주를 처음 연재했던 서울신문에 다시 연재하게 돼 감회가 남다릅니다.”

 

 

 
▲ 원로 소설가 김주영(74)이 30여 년만에 대표작인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의 서울신문 연재를 앞두고 경북 청송군에서 조성하고 있는 ‘객주 문학마을’을 둘러보고 있다.
객주문학관 제공  
 

소설가 김주영(74)은 덩치 큰 어린아이 같은 맑은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김주영의 대표작이자 역사소설인 ‘객주 완결편’이 오는 4월 1일자부터 서울신문에 5개월 안팎 연재된다. 1979년 6월 1일자 서울신문 6면에 1회 연재를 시작해 1984년 2월 29일자 1465회로 연재를 끝낸 대하소설의 후속편이자, 말 그대로 객주 완결편이다. 1984년 단행본 9권으로 마무리된 김주영의 ‘객주’는 박경리의 ‘토지’, 황석영의 ‘장길산’과 함께 한국 문학계의 대표적인 대하소설이다. 그는 “앞의 9권을 읽지 않고 이 책만 읽어도 아주 재밌게 써놓았습니다”라고 자신했다.

그는 9권의 단행본으로 완간된 지 30년이 된 ‘객주’에 무슨 미련이 남아 다시 펜을 들었을까. 김주영은 “4년 전 경북 울진 흥부장에서 봉화의 춘양장으로 넘어가는 보부상 길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진짜 객주를 끝맺을 수 있겠구나 하고 무릎을 탁 쳤다”고 했다. ‘보부상 길’을 산림청이 정비하면서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이 길은 ‘한국의 차마고도’ 같은 울진 죽변항에서 내륙 봉화까지 소금을 실어나르는 길로 십이령 고개라고도 부른다. 지금은 푸른 바다만 출렁대지만, 과거 죽변항에는 거대한 염전이 있었다. 장돌뱅이들은 소금이나 농산물을 등에 지고 울진에서 봉화까지 가만히 서 있어도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가파른 150리(약 58㎞) 십이령 고개를 꼬박 3박4일 걸어서 넘었다.

김주영은 “당시 4년 9개월 만에 연재를 마칠 때 이야기가 다 끝난 게 아니라 내가 역사에 대한 지식이 달려 더는 쓸 수 없다고 판단해 ‘중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주인공 천봉삼을 죽였어야 하는데, 마지막 회에 산 채로 이야기를 끝맺었다”면서 “이번에 객주 10권에서 천봉삼을 주인공으로 진짜 그 끝을 맺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40세에 ‘객주’ 연재를 시작해 “40대를 다 바쳤다”던 김주영은 70세가 돼 ‘객주 완결편’이란 이름으로 ‘객주 10권’ 구상에 들어갔다. 2~3년에 걸쳐 제주도 집필실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집필실에서 1100여장에 이르는 원고를 썼다. 그는 원고를 완성해 놓고도 탈고한 원고를 세 번째로 공들여 다듬고 고쳐 쓰느라 서울신문 연재 시점을 두 차례나 미뤘다.

 
객주는 김주영에게 무엇일까. “우리가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은 왕이나 권세가 중심이에요. 나는 상놈들이 뭐하고 살았는지 궁금했고, 그들의 애환을 다루고, 서민의 역사를 기술하자고 한 것이죠.”

경북 청송군 진보면 진보 장날이면 초등학교를 땡땡이치고 등짐장수 뒤를 따라다녔던 소년 김주영은 74살에도 여전히 보부상의 길을 따라 걸으며 ‘객주’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다.

청송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경북 청송군 주왕산 길을 걷고 있는 ‘길 위의 작가’ 김주영. 단편소설 한 편을 쓰는 데도 답사를 서너 차례 다니는 그는 객주 완결편을 쓰면서 울진~봉화~청송을 한 달에도 서너 번씩 내려가 걷고 또 걷는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소설가 김주영(74)은 서울신문 1979년 6월 1일자로 시작한 ‘객주’ 연재를 4년 9개월 만인 1984년 2월 29일자 1465회로 막을 내렸다. 당대 최고 원고료의 두 배를 받던 작가는 원고료를 더 올려주겠다는 제안도 거절했다. 경상북도 청송 출신으로 억센 경상도 사투리와 억양이 살아 있는 김주영은 이 얘기를 하면서 마른세수를 하듯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30년 전 괴로움과 어려움이 생생히 살아났나 보다.

그는 지역의 잎담배 생산조합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32살의 늦은 나이에 등단했다. 전업 작가로 돌아선 것은 ‘객주’ 연재를 위해 서울로 이사한 것이 계기가 됐으니, ‘객주’는 김주영을 제대로 된 소설가로 만들어 준 출세작이었다. 장돌뱅이 이야기 연재를 시작하기 전 5년 동안 전국의 200여 개 시골 장터를 모두 돌아다녔다. 연재하는 약 5년 동안에는 집에 한 달에 열흘도 머물지 못하고 스스로 장돌뱅이가 돼 살았다.

여기서 잠깐, 객주(客主)란 무엇일까. 객주는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금융업, 특산물을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유통하는 유통업,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보관업 및 물류업을 하던 장소이자 그런 행위를 하는 상인을 말한다. 시작은 신라시대부터인데, 고려말 공양왕이 보부상을 시켜 소금을 운반한 기록이 있다. 조선에서는 도가, 접소, 도방이라고도 불렀고, 객주의 성격에 따라 물산객주, 해물객주, 젓갈객주 등으로 불렀다. 상도덕을 강하게 규율했는데 매점매석을 하거나, 강매를 하거나, 보따리 장사를 하는 여인네를 범하면 곤장을 치곤 했다. 보부상은 보자기 보(褓)자와 짊어진다는 부(負)자가 합쳐진 것으로, 신체가 건장하고, 지름길을 많이 알며, 기억력이 좋고 셈이 밝은 사람들이 종사했다. 정보 수집에도 능해 어떤 물건이 달리고 넘쳐나는지 파악해 물건을 공급했기 때문에 물가를 조절하는 일종의 중앙은행 같은 역할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그 강력한 조직력을 정치권력이 가만히 놔뒀을 리 만무다. 흥선대원군은 보부청을 만들어 보부상 조직을 장악하려고 했다. 동학농민운동 때는 정부 편에서 토벌에 가담했다. 1898년 독립협회를 와해시킨 황국협회는 보부상들이 중심이 된 단체였다. 김주영의 ‘객주’는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조선 후기 혼란한 개화기 상황에서 보부상의 생활풍속과 이들의 경제활동, 정치적 이해관계를 주인공 천봉삼을 중심으로 그려 내고 있다.

 

 
▲ 1979년 6월 1일자 ‘객주’ 서울신문 연재에 앞서 그해 5월 28일자에 소설가 윤흥길(왼쪽)이 김주영을 인터뷰하고 있다(위). 1984년 2월 28일자 서울신문에 김주영 작가가 ‘객주’를 4년 9개월 1465회로 막을 내리는 소회를 피력하고 있다.
서울신문 DB 

 

“원래 구상 대로라면 천봉삼을 죽였어야 했는데, 마지막 회에 산 채로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나중에라도 옳게 끝맺음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를 살려 놓은 것입니다. 그 천봉삼을 죽였으면 내가 더 못 썼을 텐데, 30년 만에 다시 연재를 하게 돼서 그것도 서울신문에 하게 돼서 너무 기쁩니다.”

 

이렇게 말을 마쳐 놓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김주영은 껄껄거렸다. ‘객주 10권’을 서울신문에 4월 1일자부터 연재하기로 결정하고, 지난 2월 말 경북 울진~청송~봉화를 2박3일간 동행 취재하는 자리에서였다. ‘객주 완결판’은 서울신문 인터넷 홈페이지와 교보문고 웹진에도 동시에 연재된다. 그는 그 지역을 한 달에도 서너 번 왕래하고 있었다. 고향 청송에서 ‘객주문학관’을 짓고, ‘객주 문학마을’을 조성하며, 보부상길을 개발하고, 진보시장을 활성화하는 등 수년째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 덕분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객주 10권의 주인공은 여전히 천봉삼이다. 조선 말기에 천민, 말단이라는 상업에 종사하는 천봉삼은 정의감도 강하고 의협심이 있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로, 정 많고 의리 있는 김주영의 분신 같은 남자다.

 

당시 보부상의 이야기를 역사소설로 쓰게 된 배경에 대해 김주영은 연재를 마감하기 전날인 1984년 2월 28일 기고에서 이렇게 밝혔다. “한 인생에 있어 가치 있는 연령대라 할 수있는 40대 초반의 근 5년간을 이 소설에 매달릴 수 있었으면서 피곤한 줄 몰랐던 것은 어린 시절 나를 매혹시켰던 저잣거리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지워 버릴 수 없었던 것과 함께 작가적 호기심과 충동이 끊임없이 나를 충동했기 때문…(중략)… 내가 살았던 집의 울타리 밖이 장터였고 울타리 안쪽이 우리 집 마당이었다. 그 울타리는 어느새 극성스런 장돌림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우리 집 마당에서 유기전, 드팀전, 어물전을 벌이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땀 냄새가 뚝뚝 배어나는 그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을 보아 왔었다. 때로는 엄지머리 한 노인네가 숫돌지게를 우리 집 앞마당에 내려놓고 들메끈을 고치면서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보면 그 북새판을 이루던 장꾼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고 저잣거리엔 허접쓰레기만 굴러가고….”

 

청송군 진보면에서 태어나 진보초등학교를 다니던 그는 장날이면 자주 학교에 가지 않았다. 장날에 낯선 사람들이 와서 듣도 보도 못 하던 물건들을 파니 신기했던 것이다. 학교와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초등학교 6년 내내 교과서 한 권 없이 학교에 다녔고, 공책은 어머니가 창호지를 잘라 바느질해 만들어 준 한 권뿐이었던 가난 탓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장터의 모습은 소설가가 된 뒤에도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처음엔 400장짜리 중편소설을 써 보자 생각을 했지요. 이전에 장터 옆에 사는 작부 이야기를 쓴 ‘외촌장 기행’이라는 단편소설도 썼지요. 내가 이것을 좀 길게 중편을 쓰고 싶었는데, 잡히는 것이 없더군요. 아쉬워하던 차에 장돌뱅이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아서 찾아보니 보부상이라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고종 때 보부청(1866년)이 생겼고, 대한제국 때는 상무사(1899년)가 됐습니다. 술 먹던 자리에서 농담 삼아 김주연(전 한국문학번역원장) 당시 서울신문 논설위원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득달같이 연재를 하자고 해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번에 연재하는 10권은 상무사로 넘어간 뒤의 이야기입니다.”

 

원고를 한 장도 안 쓴 상태에서 1979년 초여름 ‘객주’ 연재가 시작됐다. 그는 판소리 사설이나 지방에서 나온 향토지, 세시풍속도, 고서적 등을 참고해 필요한 자료를 추려냈다.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대학교 사학과 석박사 논문을 100편 이상 읽었다. 요즘처럼 분야별로 세분화된 책이 수십, 수백 권씩 출간되는 때가 아니었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왕조를 중심으로 기록을 남겨 서민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고통은 남북 분단으로 북한의 장돌뱅이를 표현할 수 없게 되면서 절정을 이뤘다. 조선의 장돌뱅이가 개성이나 원산, 의주를 오갔을 텐데 모르는 척 빼놓고 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길 위의 작가’, ‘발로 쓰는 작가’가 아닌가.

 

“나는 단편소설을 써도 그 지역을 두서너 번씩 답사합니다. 그래서 ‘발로 쓰는 작가’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역사 지식도 부족하고, 지리적인 관심도 없다 보니 대신 작품 분위기와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 꼭 현장 답사를 합니다. 그런데 북한은 현장 답사를 할 수 없어서 아쉬움에 휴전선 남쪽 지방을 다 훑고 다녔지요.”

 

북한 지역에 대한 서술은 어떻게 했을까. 엉뚱한 곳에서 해결책이 나왔다.

“1980년대 초인데 어느 날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어요. 청와대 정무1비서관 허문도(83)씨였어요. 청와대로 잠깐 들어오라는 거예요.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나 싶어 이상하고 기분이 아주 안 좋더라고요. 사석에서 전두환 욕을 더러 했지만 말이에요. 허문도씨 방에 가보니 책상에 객주 4~5권이 있더라고요. ‘작가가 긴 장편을 쓰려면 고생하는 것 아니냐’라고 격려를 해요. 그날 오후에 MBC 사장한테 전화가 왔어요. 전달해 줄 것이 있으니 정동 MBC에 나오라고요. 사장이 직접 짐을 메고 나왔는데 지도였어요. 일본에서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한반도의 상세한 지도였어요.

 

조선후기 장돌뱅이 애환 오롯이… 40대가 꼭 읽어줬으면

마을의 논·밭은 물론 우물과 냇가의 다리까지 다 그려져 있는 지도예요. 허문도씨가 주일한국대사관에 지시해서 상세한 전국 지도, 남북이 다 있는 전국 지도를 물색해 보내라고 해서 그걸 나한테 전달한 거예요. 그 지도는 대한민국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한 권뿐입니다.”

원산, 평양, 의주, 개성 등은 못 가보고 써야 하는 마당에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그 지도 덕분에 객주를 9권까지 쓸 수 있었단다. 남북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2005년 김주영은 ‘객주’에 서술된 개성 등을 방문했는데 조금도 고쳐 쓸 곳이 없어서 안도했다고 했다. 물론 헌책방에서 월남한 실향민들의 글들을 수집해 참고한 그의 남다른 노력 덕분이기도 했다.

 

 

 

 

 

 

 


 ▲ 소설가 김주영이 경북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 있는 보부상 위령비 표지석의 비문을 설명하고 있다. 15세기 보부상들이 강원도와 경상도를 오가며 물물교환한 흔적이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 4월 1일부터 서울신문에 ‘객주 완결편’ 연재를 앞두고 소설가 김주영(오른쪽)과 ‘낭만 화가’ 최석운이 두 손을 맞잡고 의기투합을 하고 있다. 19세기 말 개항기에 장돌뱅이를 소재로 서민의 삶을 복원하는 소설 ‘객주’와 대한민국 일상사에 익살과 풍자를 입히던 ‘최석운 표 그림’은 안성맞춤이라고 두 사람은 입을 모은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그림이 상당히 서민적이고, 풍자적이에요. 사회의 기존 질서를 비웃고, 특히 그 비웃음을 눈동자들로 표현해요. 아주 파격이죠. 풍자적인 내 소설에 최 화백의 그림이 맞는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어요.”

 

“새로 연재하는 객주 첫 장면을 읽어보니 묘사가 뛰어나고 회화성이 강합니다. 그걸 잘 표현하면서 현대적으로 그리려 합니다. 조선 후기의 이야기지만, 독자들은 현대를 사는 젊은이니까요.”

 

소설가 김주영(74)은 4월 1일부터 서울신문에 연재되는 소설 ‘객주 완결편’의 삽화를 맡은 ‘낭만 화가’ 최석운(53)과 이렇게 서로 덕담을 나눴다. 김주영은 삽화 화백으로 최석운을 추천했고, 최석운은 그 추천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최 화백은 “김 선생님은 아버지 같다. 엄하고 거칠지만 비슷하게 나이를 먹고 싶다”고 했다.

 

절반이 조금 못 되는 원고지 500장을 미리 읽고 삽화 작업에 들어간 최석운은 “언어의 구사가 대단하다. 미술대학을 나와 사소한 인간들의 일상을 희화화하는 그림을 30년 그려왔는데, 김주영 선생님의 작품이 가진 힘과 잘 조화를 이루도록 하겠다”고 했다.

 

객주의 시작은 19세기 후반. 조선 조정은 임오군란 이듬해인 1883년 양반들에게도 상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김주영의 표현으로 “양반과 상놈이 물레방아 돌아가는 시절이 됐다”고 했다. 성종 시절에 처음으로 생겨난 5일장 등 저잣거리는 조선후기부터 문란해지기 시작해 도적, 사기꾼, 무뢰배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또 원납전으로 벼슬을 사고팔 수 있었다. 더 비싼 값을 부르는 사람에게 벼슬을 팔기가 다반사였으니, 현감이 부임한지 3일 만에 새 현감이 부임하기도 했다. 이런 신분 붕괴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서민들은 배고픔뿐만 아니라 권력의 부정부패로 애환을 겪는다. 양반들은 비교적 이런 혼란과는 상관없이 살았다.

 

김주영은 “서민들이 무엇을 먹고, 어떤 단어를 사용했으며, 무슨 약을 썼고, 어떤 집에서 살았고, 춘궁기에는 무엇을 먹었는지, 구황식은 과연 무엇인지 소상하게 지켜볼 수 있을 것”이라며 “사라지는 상놈의 말을 복원했고, 당대의 역사관·사회관 등을 총체적으로 들여다보면서 조선후기를 사회과학적 방법론으로 관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최석운도 “18세기 실학의 영향과 풍속화에 이어 19세기에 양반 질서가 무너지면서 미술도 급격한 변화가 있었어요. 추상적인 문인화들이 미술을 장악하던 시절이 가고, 상인이나 천민이 등장하는 풍속화들이 기산 김준근을 통해 나타났어요. 한국미술의 최고의 시절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른바 ‘민중미술’이에요. 그런데 조선이 일제 식민지가 되면서 100년 뒤인 1980년대에서야 다시 민중미술이 나왔어요”라며 덧붙였다.

 

이런 배경에서 경북 울진 포구에서 검은돌마을을 거쳐 현동 저자와 내성으로 가는 십이령 고개를 오가는 소금장수들인 보부상이 등장한다. 행수 정한조가 이끄는 팀이다. 콧등에 동상이 앉을 정도로 추운 겨울에 나귀에 짐을 잔뜩 싣고 어깨에는 짐을 지고 쭉 서서 한길로 고개를 넘는 모습은 마치 뜨거운 햇볕을 짊어지고 사막을 횡단하는 카라반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겨우 앞사람 궁둥이만 치어다보고 걷던 이들 앞에 저고리 차림의 동상과 피멍이 가득한 인사불성의 낯선 사나이가 뚝 떨어진다. 이 사내는 누구일까.

 

김주영은 “객주 1~9권의 주인공이 천봉삼이듯, 마지막의 주인공도 천봉삼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천봉삼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걸 염두에 둬야 한다. 이 소설에 추리기법을 썼기 때문에 독자 여러분은 주의해서 읽지 않으면,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호탕하게 웃는다. 사실 절반을 읽다보면 의리가 있고 정의로운 사나이이자 아직 미혼인 행수 정한조가 주인공 같다. 천봉삼은 한참 뒤쪽에서야 출현한다.


 
이 밖에 등장인물로 울진염전의 송석호, 궁핍한 양반 출신인 건어물 상단의 조기출, 도가를 운영하는 윤기호, 포수출신의 부상 곽개천, 화적떼의 일원으로 보이는 불량한 스님, 새침데기 구월이와 그의 어멈인 월천댁 등등. 김주영은 “인근 마을사람들이 도적을 평정한 보부상에게 철로 만든 공덕비를 세워주는데, 정한조의 이름이 거기에 올라가 있다”고 설명했다.

객주의 현재적 의미에 대해 김주영은 이렇게 말했다.

“무능한 왕, 부패한 관료 속에서 굶주리는 백성의 모습은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현재하고도 닿아있다. 무능한 정치 지도자, 부패한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모습을 투영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