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청송군 주왕산 길을 걷고 있는 ‘길 위의 작가’ 김주영. 단편소설 한 편을 쓰는 데도 답사를 서너 차례 다니는 그는 객주 완결편을 쓰면서 울진~봉화~청송을 한 달에도 서너 번씩 내려가 걷고 또 걷는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소설가 김주영(74)은 서울신문 1979년 6월 1일자로 시작한 ‘객주’ 연재를 4년 9개월 만인 1984년 2월 29일자 1465회로 막을 내렸다. 당대 최고 원고료의 두 배를 받던 작가는 원고료를 더 올려주겠다는 제안도 거절했다. 경상북도 청송 출신으로 억센 경상도 사투리와 억양이 살아 있는 김주영은 이 얘기를 하면서 마른세수를 하듯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30년 전 괴로움과 어려움이 생생히 살아났나 보다. 그는 지역의 잎담배 생산조합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32살의 늦은 나이에 등단했다. 전업 작가로 돌아선 것은 ‘객주’ 연재를 위해 서울로 이사한 것이 계기가 됐으니, ‘객주’는 김주영을 제대로 된 소설가로 만들어 준 출세작이었다. 장돌뱅이 이야기 연재를 시작하기 전 5년 동안 전국의 200여 개 시골 장터를 모두 돌아다녔다. 연재하는 약 5년 동안에는 집에 한 달에 열흘도 머물지 못하고 스스로 장돌뱅이가 돼 살았다. 여기서 잠깐, 객주(客主)란 무엇일까. 객주는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금융업, 특산물을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유통하는 유통업,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보관업 및 물류업을 하던 장소이자 그런 행위를 하는 상인을 말한다. 시작은 신라시대부터인데, 고려말 공양왕이 보부상을 시켜 소금을 운반한 기록이 있다. 조선에서는 도가, 접소, 도방이라고도 불렀고, 객주의 성격에 따라 물산객주, 해물객주, 젓갈객주 등으로 불렀다. 상도덕을 강하게 규율했는데 매점매석을 하거나, 강매를 하거나, 보따리 장사를 하는 여인네를 범하면 곤장을 치곤 했다. 보부상은 보자기 보(褓)자와 짊어진다는 부(負)자가 합쳐진 것으로, 신체가 건장하고, 지름길을 많이 알며, 기억력이 좋고 셈이 밝은 사람들이 종사했다. 정보 수집에도 능해 어떤 물건이 달리고 넘쳐나는지 파악해 물건을 공급했기 때문에 물가를 조절하는 일종의 중앙은행 같은 역할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그 강력한 조직력을 정치권력이 가만히 놔뒀을 리 만무다. 흥선대원군은 보부청을 만들어 보부상 조직을 장악하려고 했다. 동학농민운동 때는 정부 편에서 토벌에 가담했다. 1898년 독립협회를 와해시킨 황국협회는 보부상들이 중심이 된 단체였다. 김주영의 ‘객주’는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조선 후기 혼란한 개화기 상황에서 보부상의 생활풍속과 이들의 경제활동, 정치적 이해관계를 주인공 천봉삼을 중심으로 그려 내고 있다. ▲ 1979년 6월 1일자 ‘객주’ 서울신문 연재에 앞서 그해 5월 28일자에 소설가 윤흥길(왼쪽)이 김주영을 인터뷰하고 있다(위). 1984년 2월 28일자 서울신문에 김주영 작가가 ‘객주’를 4년 9개월 1465회로 막을 내리는 소회를 피력하고 있다. 서울신문 DB “원래 구상 대로라면 천봉삼을 죽였어야 했는데, 마지막 회에 산 채로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나중에라도 옳게 끝맺음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를 살려 놓은 것입니다. 그 천봉삼을 죽였으면 내가 더 못 썼을 텐데, 30년 만에 다시 연재를 하게 돼서 그것도 서울신문에 하게 돼서 너무 기쁩니다.” 이렇게 말을 마쳐 놓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김주영은 껄껄거렸다. ‘객주 10권’을 서울신문에 4월 1일자부터 연재하기로 결정하고, 지난 2월 말 경북 울진~청송~봉화를 2박3일간 동행 취재하는 자리에서였다. ‘객주 완결판’은 서울신문 인터넷 홈페이지와 교보문고 웹진에도 동시에 연재된다. 그는 그 지역을 한 달에도 서너 번 왕래하고 있었다. 고향 청송에서 ‘객주문학관’을 짓고, ‘객주 문학마을’을 조성하며, 보부상길을 개발하고, 진보시장을 활성화하는 등 수년째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 덕분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객주 10권의 주인공은 여전히 천봉삼이다. 조선 말기에 천민, 말단이라는 상업에 종사하는 천봉삼은 정의감도 강하고 의협심이 있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로, 정 많고 의리 있는 김주영의 분신 같은 남자다. 당시 보부상의 이야기를 역사소설로 쓰게 된 배경에 대해 김주영은 연재를 마감하기 전날인 1984년 2월 28일 기고에서 이렇게 밝혔다. “한 인생에 있어 가치 있는 연령대라 할 수있는 40대 초반의 근 5년간을 이 소설에 매달릴 수 있었으면서 피곤한 줄 몰랐던 것은 어린 시절 나를 매혹시켰던 저잣거리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지워 버릴 수 없었던 것과 함께 작가적 호기심과 충동이 끊임없이 나를 충동했기 때문…(중략)… 내가 살았던 집의 울타리 밖이 장터였고 울타리 안쪽이 우리 집 마당이었다. 그 울타리는 어느새 극성스런 장돌림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우리 집 마당에서 유기전, 드팀전, 어물전을 벌이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땀 냄새가 뚝뚝 배어나는 그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을 보아 왔었다. 때로는 엄지머리 한 노인네가 숫돌지게를 우리 집 앞마당에 내려놓고 들메끈을 고치면서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보면 그 북새판을 이루던 장꾼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고 저잣거리엔 허접쓰레기만 굴러가고….” 청송군 진보면에서 태어나 진보초등학교를 다니던 그는 장날이면 자주 학교에 가지 않았다. 장날에 낯선 사람들이 와서 듣도 보도 못 하던 물건들을 파니 신기했던 것이다. 학교와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초등학교 6년 내내 교과서 한 권 없이 학교에 다녔고, 공책은 어머니가 창호지를 잘라 바느질해 만들어 준 한 권뿐이었던 가난 탓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장터의 모습은 소설가가 된 뒤에도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처음엔 400장짜리 중편소설을 써 보자 생각을 했지요. 이전에 장터 옆에 사는 작부 이야기를 쓴 ‘외촌장 기행’이라는 단편소설도 썼지요. 내가 이것을 좀 길게 중편을 쓰고 싶었는데, 잡히는 것이 없더군요. 아쉬워하던 차에 장돌뱅이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아서 찾아보니 보부상이라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고종 때 보부청(1866년)이 생겼고, 대한제국 때는 상무사(1899년)가 됐습니다. 술 먹던 자리에서 농담 삼아 김주연(전 한국문학번역원장) 당시 서울신문 논설위원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득달같이 연재를 하자고 해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번에 연재하는 10권은 상무사로 넘어간 뒤의 이야기입니다.” 원고를 한 장도 안 쓴 상태에서 1979년 초여름 ‘객주’ 연재가 시작됐다. 그는 판소리 사설이나 지방에서 나온 향토지, 세시풍속도, 고서적 등을 참고해 필요한 자료를 추려냈다.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대학교 사학과 석박사 논문을 100편 이상 읽었다. 요즘처럼 분야별로 세분화된 책이 수십, 수백 권씩 출간되는 때가 아니었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왕조를 중심으로 기록을 남겨 서민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고통은 남북 분단으로 북한의 장돌뱅이를 표현할 수 없게 되면서 절정을 이뤘다. 조선의 장돌뱅이가 개성이나 원산, 의주를 오갔을 텐데 모르는 척 빼놓고 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길 위의 작가’, ‘발로 쓰는 작가’가 아닌가. “나는 단편소설을 써도 그 지역을 두서너 번씩 답사합니다. 그래서 ‘발로 쓰는 작가’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역사 지식도 부족하고, 지리적인 관심도 없다 보니 대신 작품 분위기와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 꼭 현장 답사를 합니다. 그런데 북한은 현장 답사를 할 수 없어서 아쉬움에 휴전선 남쪽 지방을 다 훑고 다녔지요.” 북한 지역에 대한 서술은 어떻게 했을까. 엉뚱한 곳에서 해결책이 나왔다. “1980년대 초인데 어느 날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어요. 청와대 정무1비서관 허문도(83)씨였어요. 청와대로 잠깐 들어오라는 거예요.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나 싶어 이상하고 기분이 아주 안 좋더라고요. 사석에서 전두환 욕을 더러 했지만 말이에요. 허문도씨 방에 가보니 책상에 객주 4~5권이 있더라고요. ‘작가가 긴 장편을 쓰려면 고생하는 것 아니냐’라고 격려를 해요. 그날 오후에 MBC 사장한테 전화가 왔어요. 전달해 줄 것이 있으니 정동 MBC에 나오라고요. 사장이 직접 짐을 메고 나왔는데 지도였어요. 일본에서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한반도의 상세한 지도였어요. 조선후기 장돌뱅이 애환 오롯이… 40대가 꼭 읽어줬으면 마을의 논·밭은 물론 우물과 냇가의 다리까지 다 그려져 있는 지도예요. 허문도씨가 주일한국대사관에 지시해서 상세한 전국 지도, 남북이 다 있는 전국 지도를 물색해 보내라고 해서 그걸 나한테 전달한 거예요. 그 지도는 대한민국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한 권뿐입니다.” 원산, 평양, 의주, 개성 등은 못 가보고 써야 하는 마당에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그 지도 덕분에 객주를 9권까지 쓸 수 있었단다. 남북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2005년 김주영은 ‘객주’에 서술된 개성 등을 방문했는데 조금도 고쳐 쓸 곳이 없어서 안도했다고 했다. 물론 헌책방에서 월남한 실향민들의 글들을 수집해 참고한 그의 남다른 노력 덕분이기도 했다.
▲ 소설가 김주영이 경북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 있는 보부상 위령비 표지석의 비문을 설명하고 있다. 15세기 보부상들이 강원도와 경상도를 오가며 물물교환한 흔적이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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