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탈린이 毛澤東 잡으려 일으킨 전쟁이 韓國戰”
⊙ 1979년 <마오쩌둥·스탈린 간의 갈등과 한국전쟁>, 냉전 후 공개된 스탈린이 고트발트에게 보낸
비밀전문 내용과 일치
⊙ 소련의 유엔 안보리 불참 미스터리도 정확하게 추리
⊙ 애치슨 연설은 中蘇 이간용, 이에 대한 스탈린의 반격이 남침
⊙ 클린턴, “한국전이 冷戰 승리의 계기”
⊙ “북한이 이번 핵위기를 결산하며 ‘손해만 보았구나’로 결론이 나면 김정은·군부의 권위가 약해질 것”
⊙ 1979년 <마오쩌둥·스탈린 간의 갈등과 한국전쟁>, 냉전 후 공개된 스탈린이 고트발트에게 보낸
비밀전문 내용과 일치
⊙ 소련의 유엔 안보리 불참 미스터리도 정확하게 추리
⊙ 애치슨 연설은 中蘇 이간용, 이에 대한 스탈린의 반격이 남침
⊙ 클린턴, “한국전이 冷戰 승리의 계기”
⊙ “북한이 이번 핵위기를 결산하며 ‘손해만 보았구나’로 결론이 나면 김정은·군부의 권위가 약해질 것”
미국의 유명한 탐사보도 전문기자 데이비드 핼버스탐이 쓴 《가장 추운 겨울(The Coldest Winter)》은 한국전을 다룬 대작(大作)이다. 핼버스탐은 뉴욕타임스의 사이공 특파원 시절 월남전을 수행하는 미국과 월남정부의 자세를 비판적으로 보도하여 퓰리처상도 받고 유명해졌다. 그가 쓴 《최고의 엘리트들(The Best and Brightest)》은 케네디, 존슨 행정부의 엘리트 관료들이 어떻게 월남전을 오판(誤判)했는가를 추적한 걸작이다.
그는 2008년 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그 직전에 완성한 것이 《가장 추운 겨울》이다. 미국의 월남전 개입을 비판적으로 다뤘던 그는 한국전에 참여한 미군과 한국군의 역할을 호의적으로 그렸다. 그는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미군들이 좌절하고 실망하여 당당하게 자신의 과거를 밝히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고 썼다. 전쟁이 미군의 승리가 아니라 무승부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한국전 참전은 자랑스러운 과거가 아니라 ‘부끄러운 과거’로 치부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미국 언론은 한국전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불렀다. 잊어버리고 싶은 전쟁이란 뜻이다.
老年이 행복한 한국전 참전용사들
냉전(冷戰)에서 서방세계가 이긴 후 한국전의 역사적 평가가 긍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국전 참전용사들도 자신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원인은 한국의 발전이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미국 병사들은 대체로 한국을 좋아하지 않았다. 분뇨 냄새 나고, 춥고 더웠던 전선의 기억에다가 절망적인 나라 꼴이 한국을 뒤돌아보기 싫은 나라로 만들었다. 그 한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민주화까지 되더니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반면 북한은 전쟁 때보다 더 못살게 되었다. 미국의 참전용사들은 ‘우리가 피를 흘려 자유를 지켜 준 덕분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의 발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노년(老年)의 참전용사들은 한국으로 관광을 많이 온다. 낙동강 전선(戰線), 휴전선, 판문점을 둘러보곤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그들이 만난 한국인들은 미군에 감사했다. 미국에서 받아 보지 못한 환영을 한국에서 받았다. 이런 소문이 미국에 전해지자 더 많은 참전용사들이 한국을 찾고 있다. 쓰레기더미 같았던 부산과 서울이 세계적 대도시로 바뀌고 거지 같았던 한국인들이 미국인들보다 더 오래 사는 신사 숙녀로 바뀌었다. 미국의 참전용사들은 이런 한국의 성공에 자신들의 기여가 있었다고 자부하기 시작했다.
미군은 한국전에서 5만명의 전사자, 10만명의 부상자를 냈다. 그 희생으로도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다고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는데, 한국에 와 보고는 희생의 결과물이 번영하는 자유의 나라임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핼버스탐은 《가장 추운 겨울》에서 한국의 성공은, 유럽을 살린 마셜플랜을 능가하는 트루먼의 업적이었다고 칭송했다. 한국인의 성공 덕분에 미국의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얼굴을 들고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국의 반미(反美)운동 때문에 갖지 않을 수 없었던 미안한 생각이 다소 누그러졌다.
클린턴, “한국전이 冷戰 승리의 계기”
박근혜(오른쪽 둘째) 대통령은 지난 5월 6일(현지 시각) 워싱턴 웨스트포토맥 공원에서 한국전 참전 기념비를 방문, 헌화했다. |
“포성(砲聲)이 멈추었을 때 상당수 사람들은 한국에 간 우리 군대가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한 일이 무엇인가라고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38도선에서 시작되어 38도선에서 끝났으니까요. 나는 오늘 감히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역사라는 긴 렌즈를 통하여 뒤돌아보면, 미국이 한국에서 버티어 낸 덕분에 냉전에서 우리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물러나지 않았으므로 소련은 미국이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기꺼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가르침을 얻게 된 것입니다.
미국과 한국, 그리고 터키 및 호주 등 우방국들이 그러한 사명감과 확신을 보여주지 못하였더라면, 트루먼 대통령이 걱정하였던 대로 우리는 제3차 세계대전을 불렀을 것입니다. 50년 전 한국의 능선(稜線)을 지켜 낸 용감한 병사들 덕분에 10년 전 멋지고 행복한 젊은이들이 베를린 장벽 위에 올라가 (공산권의 붕괴를) 자축(自祝)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은 결코 역사를 과대 해석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이 한국에서 굳건히 버티어 내었기에 아까 한국 대사가 말씀하셨던 대로 한국은 지금 세계 제12위의 경제대국으로서 자유롭고 번영하는 나라, 세계사의 가장 유명한 성공 스토리의 하나가 된 것입니다. 한반도에는 여전히 긴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북한이 스스로 불러들인 고립 속에서 주민들은 혹독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50년 전에 하였던 일들을 하지 않았더라면, 미국과 동맹국들이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함께 굳게 서지 않았더라면 한국 또한 북한과 많이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난 5월 7일 워싱턴에서 박근혜·오바마 두 대통령은 ‘한미(韓美)동맹 60주년 기념 공동선언’을 채택하였다. 이 성명은 <한국전쟁 속에서 태동하고 19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기초한 한미동맹은, 안보협력을 넘어서 정치·경제·문화·인적교류 분야에서의 폭넓은 협력을 바탕으로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진화해 왔다>면서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 우정 그리고 공동의 번영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라는 공동의 가치에 기초하고 있다>고 했다.
오바마는 공동 기자회견을 “먼저 박근혜 대통령이 첫 번째 해외 방문지로 미국을 택해 영광이다”는 인사말로 시작하였다. 그는 “(한국은) 전쟁의 잿더미에서 벗어나 세계 최대 경제국이 됐고,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다른 나라를 돕는 나라가 됐다. 박 대통령에게도 말했지만 내 딸들은 내게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을 가르쳐주기도 했다”고 덕담(德談)하였다.
한국전에 대한 연구도 요즘은 새로운 방향성을 보인다. 한국전을 미소(美蘇) 대결의 결과로 보더니 소련 독재자 스탈린을 주역(主役)으로 해석, ‘스탈린의 전쟁’이란 말도 등장하였다. 최근엔 중소(中蘇), 즉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의 갈등이 불씨가 되었다는 해석이 강해졌다.
적중한 推論
이세기 前 고려대 교수. |
지난 5월 초 이 장관이 전화를 걸어 와 만났다. 그는 나의 손을 잡고 “조 대표 덕분에 내가 기분이 좋다”고 했다.
나는 그 2주 전 TV조선 인터뷰에 나가서 한국전 휴전 60주년을 맞아 쓴 《트루먼과 스탈린의 한반도 게임 비사》를 설명한 적이 있었다. “스탈린이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이 싸우도록 만들기 위하여 김일성을 시켜 남침 전쟁을 벌였다”는 요지인데, 그 증거로 스탈린이 체코 대통령에게 구두로 설명하도록 소련 대사에게 보낸 비밀 전문(電文)을 소개하였다. 1950년 8월 27일자 이 전문에서 스탈린은 “우리가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군 파견안(案)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미국에 프리 핸드를 주어 한국에 참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놀라운 고백을 하였다. 그는 또 중국군도 참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미국과 중국이 한국에서 싸우게 되어 발이 묶이게 됨으로 국제공산주의 세력에 유리한 조건이 조성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세기 전 장관은 “인터뷰를 보고 조 대표가 쓴 책을 구해서 읽으면서 내가 30여 년 전에 썼던 논문의 추론(推論)이 적중하였음을 확인하게 되었으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이 전 장관은 학원사태로 고려대를 물러난 뒤인 1977년 도쿄대학교 대학원에 유학을 가서 중소갈등과 한국전쟁의 관련성을 캐고 들어간 적이 있었다.
이 전 장관을 만나고 와서 작년에 나온 그의 회고록 중 관련 대목을 찾아서 읽다가 놀란 것은 나였다. 아직 중국과 소련의 한국전 관련 비밀자료가 공개되기 전인데도 그는 전쟁 발발의 원인을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갈등으로 규정하였다. 2000년 들어서 냉전사(冷戰史)를 연구하는 미국 학자들이 내놓기 시작한 ‘새로운 관점’을 이 전 장관은 한 세대 전에 이미 예언한 셈이다. 역사적 추론이 적중할 때 느끼는 희열을 맛보고 있다는 그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도쿄大에서 中蘇분쟁 연구
1975년 이세기 고려대 교수는 김상협(金相浹) 총장 비서실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한번은 500여 명의 시위 학생들이 경찰의 추적에 쫓겨 학교 중앙도서관에서 농성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찰당국은 도서관의 수도를 끊어버렸다. 도서관 수위가 그를 찾아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했다. 그는 학생들이 데모를 한다고 해서 먹을 물조차 못 마시게 하면 어떻게 하냐고 반문하면서, 즉각 물을 틀어 주라고 했다. 이로써 문제 교수로 지목되었다.
정부는 고려대학교에 한정해 ‘긴급조치 7호’(1975년 4월8일)를 발령, 학교를 폐쇄하였다. 김상협 총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이세기 교수도 그만두었다. 1977년 당시 아시아문제연구소 소장으로 있던 김준엽(金俊燁) 교수의 주선으로 아시아재단의 지원을 받아 도쿄대로 유학을 떠났다.
종일 대학 도서관에 파묻혀 한국전쟁과 중국에 관한 자료를 모았다. 당시 한국에는 공산권에 관한 자료들이 없거나, 설사 있다 해도 열람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도쿄대 도서관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자료들, 특히 미국과 중국, 소련 자료의 원본 또는 번역문들이 많았다. 늘 문제의식을 가져 왔던 주제인 마오쩌둥과 스탈린 간의 암투, 중소분쟁, 그리고 한국전쟁의 발발 배경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1979년 3월, 학교로 복직, 박사학위 논문 <마오쩌둥·스탈린 간의 갈등과 한국전쟁>을 완성할 수 있었다.
만주를 둘러싼 中蘇 갈등
1950년 2월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지켜보는 가운데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 겸 외교부장이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
1949년 10월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 중국이 수립됨으로써 얄타체제가 흔들리게 되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의 중국을 상실하고, 소련은 1945년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부와 체결한 ‘중소우호동맹조약’에 따라 점령하고 있던 만주를 토해 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세기 교수는, 만주 문제를 둘러싼 스탈린과 마오쩌둥 간의 갈등이 결국 한국전쟁으로 비화(飛火)되었다고 보았다. 이 장관은 스탈린이 중국의 공산화 통일을 원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스탈린은 통일된 중국보다는 장제스와 마오쩌둥으로 양분된, 즉 약화된 중국을 선호하였다는 것이다.
<스탈린으로서는 양대(兩大) 진영의 대결 논리에 따라 마오쩌둥의 신중국을 자국(自國=소련)을 중심으로 한 1국(종주권) 체제에 묶어 두는 것이 급선무였다. 경쟁국인 미국으로서는 어떻게든 중국 공산당 정부가 소련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을 놓고 미소가 경쟁을 벌이는 형국에서 마오쩌둥은 1949년 12월 16일, 스탈린의 70세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이세기 교수는, <마오쩌둥은 약 70일 동안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스탈린과 길고 긴 협상, 전투 아닌 전투를 벌였는데 이는 역사의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었다>고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당시 마오쩌둥은 두 가지 과제를 갖고 소련을 방문하였다. 최대 현안은 중국이 스탈린 휘하의 일국(一國)체제에 종속되지 않고, 소련과 형제적·수평적인 관계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1945년 얄타 비밀협정에 따라 종전(終戰) 후 소련이 차지하고 있던 동북3성 지역, 즉 만주를 되찾는 일이었다. 양자 간의 협상은 순탄치 않았다.
이게 한국전쟁 발발과 전쟁의 과정을 좌우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게 이 전 장관의 해석이다. 중국 측의 끈질긴 ‘만주 반환’ 요구에 심기가 불편해진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모스크바 교외의 별장에 머물게 해, 사실상 연금(軟禁)상태에 두고 겁박(劫迫)하면서 협상을 진행했다.
次敵으로 主敵을 친다
<역사적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중국의 동북 지역인 만주는 동아시아 변동의 시발점 혹은 진원지(震源地)와도 같았다. 얄타협정(1945년 2월)을 통해 미국은 소련의 대일전(對日戰) 참전 대가(代價)로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만주를 소련에 주기로 약속한다. 얄타협정은 ‘1904년 일본의 공격으로 제정(帝政) 러시아가 침해당한 예전의 권리를 회복한다. 이를 위해 소련과 중국 국민당 정부가 동맹조약을 체결한다’는 내용을 명시한다.>
미군의 일본 본토 공격 시(1945년 11월 예정) 예상되는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체결한 이 같은 협정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사망 후 미국의 국익(國益)에 반하는 것이란 의견이 대두한다.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의 참전을 막기 위하여 전쟁을 서둘러 끝내려고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原爆)을 투하하였지만 8월 9일 소련의 참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소련은 종전(終戰) 직전인 8월 14일에는 얄타협정에 따라 장제스 국민당 정부와 중소 동맹조약을 체결해 만주를 확보했다.
중국을 통일한 후 대등한 관계에 입각한 중소조약을 새로 맺어 만주를 되찾으려 하는 마오와 스탈린의 협상은 신경전의 연속이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중소를 갈라놓기 위하여 외교적 공세를 펴고 나온 것이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였다.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마오 사이의 협상이 한창일 때인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내셔널프레스 클럽 연설에서 대중(對中) 화해 메시지를 던진다. 이세기 전 장관은 애치슨 연설의 노림수를 정확하게 짚었다.
<이는 중국과 소련을 이간시키기 위한 책략이었다. 이 선언에서 미국은 중공혁명의 성공을 ‘아시아 민족주의의 승리’라고 고무하면서, 중국의 신장(新疆) 지역과 만주에 대한 소련의 야심을 폭로한다. 미국은 아시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 없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자국의 도서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했다. 애치슨 선언은 진행 중인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협상에 긴장과 갈등·마찰을 조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차적(次敵·중국)을 감싸 안아 주적(主敵·소련)에 대항하도록 하는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의도한 대로 되지 않았다.>
애치슨 국무장관의 연설은 한국을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에서 제외, 김일성에게 ‘남침해도 미군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신호를 준 것으로 유명한데, 이세기 전 장관은 이 연설의 주된 목표가 중국과 소련을 이간질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미국은 그 전에 이미 대만을 군사적으로 보호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여 중국의 대만 점령계획도 양해하였다. 이 또한 대중(對中) 접근용이었다.
미국의 방향전환
애치슨 미 국무장관. |
<당시 스탈린은 만주를 고수할 명분이 없었다. 마오쩌둥을 계속 홀시할 경우 중국이 미국 쪽으로 갈 수 있다는 것도 우려했다. 스탈린은 어쩔 수 없이 만주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중요한 것은 길고 긴 협상 과정에서 그는 자력(自力)으로 혁명을 성공시킨 마오쩌둥의 중국이 자국의 종주권 체제에 위협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었다.>
대만을 포기하면서까지 중국에 우호적 제스처를 써서 미중(美中) 국교 수립 교섭을 시작, 중국과 소련을 갈라놓으려 했던 트루먼 행정부는 중소 양국(兩國)이 동맹조약을 맺자 중국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대결정책으로 선회한다. 애치슨은 정책실장 폴 니츠를 시켜 국가안보회의(NSC) 전략문서 68을 만들어 6·25 직전에 트루먼 대통령의 결재를 받는다. 이 문서는 국제 공산주의를 ‘서구(西歐) 문명의 적(敵)’으로 규정, 자유진영의 장점인 인권과 평등의 가치를 침투시켜 붕괴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에 따라 대만도 포기대상에서 보호대상으로 바뀌었다. 이 문서는 미국의 군사력을 증강시켜 소련을 상대로 군비경쟁을 벌임으로써 경제력을 붕괴시켜야 한다는 함의(含意)도 담았다. 문제는 대결정책 추진의 계기를 잡는 일이었다. 이 계기를 제공한 것이 스탈린과 김일성이었다.
“한국전은 애치슨 선언에 대한 소련의 반격”
스탈린도 마오쩌둥의 중국을 어떻게 붙들어 두는가를 놓고 절치부심했다. 이세기 교수는, <새로운 경쟁자로 떠오른 마오쩌둥이 제2의 티토가 되기 전에 제어하고 압박해 자신의 예속하에 두고, 적대국인 미국을 시험하고 흔들어 힘을 뺄 수 있는 대전략이 절실했다>고 보았다. 이때 걸려든 것이 김일성이었다.
1950년 3월 30일 김일성은, 스탈린을 찾아가 미국의 애치슨 선언 등 변화된 정세를 거론하면서 남침계획을 승인해 줄 것을 간청했다. ‘만주를 상실한 허탈감 등으로 상심해 있던’ 스탈린은 이전과 달리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흔쾌히 허가하면서도 반드시 마오쩌둥의 동의를 구하라고 지시한다. 스탈린은 거듭 김일성에게 경고한다. 소련은 어떤 경우에도 미국과 제3차 세계대전을 초래할 수 있는 직접적인 개입이나 참전은 없을 것이라고. 여기서 이세기 교수는 스탈린의 대전략을 이렇게 해석하였다.
<스탈린은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않으면 한반도의 공산화를 통해 국경을 따라 완충지대를 확장, 중국을 포위·견제하고, 만약 개입하더라도 미중 간의 전쟁을 통해 신중국을 미국의 화약고 속에 빠져들게 해 자국의 예속하에 두며, 특히 미국의 힘을 중국의 늪 속에 빠뜨려 유럽에서 힘의 우위를 도모하려 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은 유엔 안보리의 결정에 따라 미국의 즉각적인 개입을 불러왔다. 그 과정에서 소련은 유엔 안보리 회의에 불참, 미국의 한국전 참전을 용이하게 했다. 소련의 안보리 불참 의도는 미국 등 서방의 참전을 유도해 미중 사이에 분명한 적대(敵對)관계를 형성하게 함으로써 중국을 자국의 손아귀에 두려고 한 것 같다.
미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38선 이북으로의 북진(北進)은 중국의 개입을 초래해 마침내 한국전쟁은 미중 간의 국제전이 되고 말았다.
애치슨 선언을 통해 중소 간의 이간과 불화를 획책한 미국은 그로부터 5개월 후 스탈린의 치밀한 책략에 따라 한반도에서 중국과 전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한국전쟁은 미국의 애치슨 선언에 대한 스탈린의 대반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이 유엔에 가입하지 못하게 기교를 부린 소련
스탈린의 압박을 거부할 수 없었던 마오쩌둥은 결국 한국전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은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 |
이 전문에서 드러난 스탈린의 한국전 계획은, 먼저 <미국이 ‘프리 핸드’를 갖고 어리석은 짓(편집자주 한국 파병)을 마음대로 저지르도록 함으로써 중국을 끌어들인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방대한 병력을 보유한 중국과 싸워 이길 수 없다. 그래서 미국은 가까운 장래엔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시간을 줄 것이며, 더구나 미국과 중국의 투쟁이 극동의 전지역을 혁명화할 것이며, 이런 모든 것들이 세계의 세력 균형에 있어서 우리를 유리하게 만들 것이다>로 요약된다. 30여 년 전 이세기 교수가 추리한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스탈린 전문의 발견으로 한국전 최대의 미스터리인 ‘소련의 유엔 안보리 거부권 행사 포기’는 실수가 아니고 스탈린의 지시에 의한 것이란 사실이 확인되었다.
1950년 1월 13일 소련은 중국을 유엔에 가입시키자는 제안을 했는데 유엔 안보리에서 부결되었다. 당시 안보리 의장은 대만 대표였다. 그는 1월 한 달만 의장직을 수행하고 2월엔 다른 나라 대표가 맡게 되어 있었다. 소련이 1월을 피하고 그 후에 중국 가입안을 제출하였더라면 통과되었을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였다. 안보리 11개국 중 7개국의 찬성만 받으면 가입할 수 있었는데, 이미 영국 등 5개국이 중국을 합법정부로 인정하였고, 프랑스와 이집트도 곧 따라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소련은 대만 대표가 의장을 맡은 1월을 택하여 굳이 가입안을 제출, 부결을 자초(自招)한 것이다. 소련의 유엔 대사 말리크는 중국 가입안의 부결을 트집 잡아 그 뒤 안보리 참석을 거부하였다.
이세기 교수는 이는 소련의 음모라고 주장한다. 고의로 중국의 유엔 가입을 막아 서방과 가까워지는 길을 차단하였다는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6월 27일의 유엔군 파병 결의안 표결에도 소련이 불참, 미국이 ‘프리 핸드’를 갖고 한국전에 참전, 중국군과 싸우도록 유도하였다는 것이다.
러시아, 20세기 4대 전쟁에 책임 있어
스탈린은 사회와 세계를 계급투쟁적 관점에서 이해한 사람이다. 사회를 계급으로 분열시키듯 나라와 나라를 이간질시켜 놓고 국익을 도모하려 했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외교》라는 저서(著書)에서 러시아는 제1차, 2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세르비아를 동맹국으로 너무 비호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소(獨蘇) 불가침 조약으로 히틀러에게 폴란드 침공의 ‘프리 핸드’를 줌으로써 전쟁을 유발하였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공산주의의 두 적인 파시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를 싸움 붙여 놓고 그 사이에서 이득을 취하려 하였다. 히틀러의 독일이 폴란드, 프랑스, 영국을 상대로 싸우는 사이에 소련은 폴란드의 반쪽을 먹는다. 이 스탈린의 이간질은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함으로써 일단 무산(霧散)되었다.
스탈린은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이 만주에서 시베리아로 쳐들어와서 양면(兩面)작전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막으려 했다. 소련 공작기관은 일본으로 하여금 소련이 아니라 미국과 싸우도록 유도하려는 공작을 벌인다. 이미 소련 간첩으로 포섭해 둔 미국 재무부 차관보 해리 덱스터 화이트에게 부탁하여 일본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요구하게 한다. 화이트는 미국의 대일 교섭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1941년 11월 26일 미국은 일본에 중국과 인도차이나로부터의 철군 요구 등 10개항의 통첩을 보냈고, 이를 받은 일본은 개전(開戰)을 결심, 연합함대에 진주만 공격을 명령, 미일전쟁이 시작된다. 소련은 김일성을 하수인으로 삼아 6·25 남침 전쟁도 일으켰다. 그렇다면 20세기의 4대 전쟁에 모두 책임이 있는 나라가 러시아이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19세기 말부터 러시아 경계론을 폈다. 역사의 흐름과 세계 정세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이해하였다는 평(무초 미국 대사)을 듣는 분이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의 궤도 위에 올려놓고 달리게 하였다. 이 기관차는 잔잔한 사고는 많이 냈지만 다행히 탈선하지 않고 질주하여 삶의 질 세계 12위의 나라를 만들었다.
이세기 교수가 30여 년 전에 내린 추론은, 낙동강 전선 공방전이 한창일 때 스탈린이 털어놓은 전쟁의도를 거의 정확하게 반영한다.
中蘇의 대차대조표
이세기 교수의 30여 년 전 추론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책이 또 한 권 더 나왔다. 조지워싱턴 대학의 역사학 교수 리처드 C. 소튼 교수가 쓴 《왕따(Odd Man Out)》란 책이다.
이세기 교수와 소튼 교수의 결론은, 김일성의 남침이, 미군과 중국군을 한반도에 끌어들이기 위하여 스탈린이 던진 미끼였다는 이야기이다. 김일성은 외세를 빌려 동족(同族)을 치려다가 외세, 즉 스탈린에게 이용되어 수백만 명을 희생시키고도 목적(한반도 공산화)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세기 교수는 마오쩌둥이 전쟁 중에 스탈린에 종속되어 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스탈린의 참전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던 마오쩌둥은 미국과의 전쟁이 가져올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소련은 중국이 줄기차게 요구한 공군지원을 거부, 중국군은 공중지원 없이 주로 야밤에 전쟁을 치러야 했다. 전쟁 기간 중 중국 인민지원군의 사상자는 총 39만여 명에 달했다.
1951년 5월부터 2년 동안 지루한 줄다리기와 공방을 계속한 휴전협상에서도 소련의 태도는 확고했다. 당초 스탈린은 중국의 휴전제의를 미국에 대한 굴복으로 비화시키며 반대했다. 휴전협상 과정에서는 중국과 북한이 회담에서 강경한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고 부추기면서 협상의 지연을 추구했다. 중국과 북한의 협상 조기 종결 희망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전쟁과 협상을 계속하게 해 미국과 중국의 적대감을 강화시키고, 가능한 한 미중 양국의 힘을 소진시키려 한 것이다.>
유엔군이 관리하는 반공포로의 처리문제를 놓고 대립, 2년을 끌던 휴전협상은 스탈린이 죽자 급진전, 넉 달 만에 휴전에 이르게 된다. 한국전이 스탈린이 기획하고 관리한 전쟁이었다는 증거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은 소련에 보다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우선 소련은 신생 중국을 미국과 싸우도록 해 한국전쟁은 물론 전후(戰後) 20여 년 동안 미중 양국이 서로 적대관계가 되도록 했다. 중국은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로 낙인찍힘으로써 미국 등 서방과의 접촉이 차단되고, 더욱더 친소적(親蘇的)인 방향으로 기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전쟁은 중국과 미국의 관계 개선을 저지하려는 스탈린의 주요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이었다.
한편, 중국이 달갑지 않은 한국전 참전을 결정하고 나서 추구했던 목표는 크게 두 가지였다. 1차적인 목표는 물론 미국의 침략으로부터 자국의 전략요충인 북한 지역과 만주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2차적인 목표는 이른바 ‘만주 작전’을 통해 소련의 지원하에 만주의 독립 왕국화를 추구했던 친소파 가오강(高崗·고강) 일파를 분쇄, 만주를 소련의 지배로부터 되찾는 것이었다. 중국도 또한 그들이 의도한 두 가지 큰 목적을 달성했다.>
스탈린은 미중을 떼어 놓고 중국을 한동안 소련에 종속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나 트루먼도 가만있지 않았다. 남침 직후 트루먼 행정부는 대소(對蘇) 봉쇄구도를 완성한다. 공산권에 대한 심리전을 시작하고, 대만 보호를 결단하였으며, 일본과 독일의 재무장을 허용하고, 나토(NATO)를 군사동맹기구로 강화하며, 미국의 국방비를 3년간 네 배로 증액하였다. 그 뒤 30년간 지속된 미소 군비경쟁에서 나가떨어진 것은 소련이었다. 경제력이 망가져버린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등장,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을 때는 이미 늦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연설대로 소련붕괴는 한국전에서 시작되었다.
자기 무덤을 판 김일성
김일성(왼쪽)은 1953년 7월 27일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가운데), 노동당 서기 박정애(오른쪽)가 지켜보는 가운데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
첫째,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등장이다. 남로당에 연루되어 군에서 추방되었던 박정희는 남침이 없었더라면 ‘불만 많은 민간인’으로 생애를 끝냈을 것이다. 남침 직후 군에 복귀한 그는 그 11년 뒤 한강을 넘어와 정권을 잡고 김일성과 체제경쟁을 벌여 북한을 코너로 몬다.
둘째, 한미동맹이다. 한국전 발발 때는 한미동맹이 없었지만 휴전과정에서 이승만의 벼랑 끝 외교로 동맹조약이 맺어져 그 뒤 한국의 번영과 자유를 보장하였다.
셋째, 한국군의 성장과 대기업의 등장이다.
결국 김일성의 남침은 한국의 번영과 북한의 몰락을 가져온, 스스로 판 무덤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외세의 노리개가 되어 동족을 친 어리석은 반역의 결산은 그의 손자가 하게 될 것이다.
요사이 북한 방송엔 김정은이 늙은 군 장성들에게 둘러싸여 거들먹거리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를 본 한 기업인은 이렇게 평했다.
“늙은 군인들이 애송이 독재자를 부추겨 놓고 자신들은 죽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추한 모습이다.”
“북한군 훈련, 놀라울 정도로 강화”
북한 사정에 밝은 국군 지휘부의 한 고위 인사는 “그 기업인의 말이 핵심을 찌르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북한 권력층 안에 노선투쟁 비슷한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듯합니다. 김정은이 실권을 잡은 뒤 군이 관리하던 외화벌이 사업권을 내각으로 가져간 것이 기폭제가 되었어요. 돈줄을 잃게 된 군대가 반발하였고 군부 실세(實勢)였던 이영호가 장성택(김정은의 고모부)에 의하여 숙청되었습니다. 장성택은 작년에 중국을 방문,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성과가 없자 군 지휘부는 장성택식 실용노선을 반대하면서 김정은을 자기들 편으로 끌고 간 듯합니다. 이들은 긴장을 조성해야 외부로부터 도움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작년부터 북한군의 훈련이 놀라울 정도로 강화되었습니다. 실탄 사격량이 3~4배로 늘고, 비행훈련도 엄청 많아졌습니다. 기름, 탄약 재고량이 바닥날 터인데도 저런 무리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위기를 만들면 주변 국가들이 달래려 나올 것이고 그때 많은 원조를 받는다는 계산을 한 것 같습니다. 투자에 대한 회수이지요.
문제는 중국까지도 김정은의 행태에 짜증을 낸다는 사실입니다. 주변국들이 김정은을 달래기 위하여 식량 원조를 할 생각이 없다는 점이 판명되면 이번엔 장성택 쪽의 반격이 시작될 겁니다. ‘강경 노선으로 얻은 게 무엇인가, 손해만 보았지 않은가’라고 말하면서 군 강경파를 몰아세울 때 권력층 안에서 티격태격하다가 돌발 사건이 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김정은과 군부가 일으킨 이번의 핵위기를 결산하게 될 때 ‘손해만 보았구나’로 결론이 나면 김정은과 군부의 권위가 약해질 것입니다.”
중국이 변하고 있다
그는 김정일이 뇌졸중(腦卒中)으로 쓰러진 2008년 여름 이후 북한정권의 행태는 합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질서가 없다고 했다. 이는 김정은의 무능(無能)을 보여준다.
문제는 군대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김정은이 언젠가는 질주를 멈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등에서 내릴 때 사고가 날 가능성이 있다. 노선(路線)투쟁이 권력투쟁으로 악화되면 10·26 사건 같은 것도 가능하다. 모순과 갈등의 정도가 심해지면 대폭발의 임계점(臨界點)에 가까이 가게 된다. 이 인사는 “북한정권이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것은 예외이다. 역사에서 예외는 영원할 수가 없다. 드디어 망조가 든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고도 했다.
북한정권 지배층 인사들의 자녀(子女)들이 어디서 일하고 있는가를 조사하였더니 거의가 외화벌이 사업을 하거나 해외에 나가 있고 당(黨)이나 군대 근무자는 몇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지배층 안에서도 북한정권의 미래를 비관하고 있다는 암시이다.
이런 북한에 대한 중국의 태도도 바뀌고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지도부도 한국 주도의 통일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분위기라고 한다.
한국의 분단은 미소 대결과 중소 갈등의 유산이다. 소련의 붕괴 이후엔 미중 갈등, 특히 중국의 대북(對北)지원이 한반도 통일을 막고 있다. 옛날의 중국은 남침한 김일성을 지켜 주려다가 미국과 원수가 되어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고, 지금은 그 손자를 지켜 주려다가 국제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다. 북한이란 짐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자각(自覺)이 확산될 것이다. 북한 때문에 두 번 당할 순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한국판 ‘一國兩制’ 검토해야
한국은 자유통일의 주역(主役)을 맡을 수밖에 없는데, 북핵(北核)문제 해결 및 통일작업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통일된 한반도에서 한미동맹은 유지하되 휴전선 이북으로 미군을 배치하지 않는다든지, 북한지역을 동북아의 자유무역지대로 개방하겠다고 천명하는 등 창조적 설득 방안을 연구할 때이다.
중국식 일국양제(一國兩制)도 한시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즉 한반도 전체에 대한 대한민국의 주권(主權)을 확실히 한 다음에 북한지역엔 한시적으로 남한과 다른 제도를 허용, 주민들의 남하(南下)를 제한하고, 이 지역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여 남북한 수준이 비슷해질 때 1국1제의 완전한 통일에 도달하는 것이다.
신라가 당(唐)과 동맹하여 삼국을 통일한 이후 중국의 한족(漢族) 정권과 한반도의 역대 왕조는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한족 정권은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 없었고, 한반도의 역대 왕조는 중국에 사대(事大)하였다. 중국의 한족 정권이 이 전통을 깨고 무력(武力)침공한 것은 1950년 중공군 개입이 처음이었다.
통일된 한반도는 자유롭고, 번영하고, 강력해야 동북아 평화의 안전판이 될 수 있다. 한민족(韓民族)은 침략전쟁을 한 적이 없다. 이 역사적 사실이 통일과정에서 주변국을 설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 가장 돈이 많은 나라, 가장 국토가 넓은 나라에 둘러싸인 한반도가 통일되고 강력해야 아시아와 태평양의 평화가 항구적으로 유지된다. 그런 날이 와야 스탈린과 마오쩌둥과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은 한국과 미국 등 자유진영의 승리로 완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