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없었다!
1997년 11월7일 청와대 대책회의에서 IMF건 최초 거론
11월8일 오전, 대통령에게 최초보고
11월10일 저녁, 대통령이 한은 총재에게 전화
11월14일, 경제팀, 대통령에게 『IMF로 갈 수밖에 없다』
11월16일, 캉드쉬 총재 비밀리 서울서 회담
11월19일, 경제팀 경질. 인수인계 과정에서 IMF 협상 실종
11월21일, 임창렬 부총리, IMF건 공식발표
외환보유고 폭락 최초 시점은 11월3일
18일간 외환 방어에 50억 달러 투입
재협상논쟁 때 가용 외환보유고 겨우 60억 달러
대통령 선거 투표 직전 국가부도 날 뻔
강경식 부총리, 대통령 긴급 명령권도 한때 고려
한국경제가 국가부도를 향해서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을 때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 경제팀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김영삼 대통령은 강경식 경제팀에 모든 것을 맡겨놓고 구경만 하는 입장을 유지하였다. 그는 경제팀에게 『내 임기 중에 IMF로 가서는 안된다』는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이 위기를 국가전체의 위기로 인식한 흔적이 없고 경제팀의 보고에 대해서는 어떤 본질적인 질문이나 이견도, 토론도 없었다. 그리고 진지한 고뇌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6·25동란 이후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재산상의 피해를 안겨다준 이 사태의 핵심은 대통령이 국정의 중심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국정의 주도권을 잡고서 이 중대사태를 국가적 문제로 만들어 정치권과 국민의 협조를 구할 만한 지식과 용기, 그리고 관심을 상실한 「정치적 불구」상태였다. 경제팀이 하자는 것을 막지도 돕지도 않음으로써 김영삼 대통령은 끝까지 국외자로 머물렀다. IMF협상이 막후에서 시작된 시점에서 경제팀을 교체함으로써 인수인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신경제팀은 그때 진행되고 있던 IMF협상 자체를 부인하는 발표를 했다. 이런 만화 같은 사건은 지리멸렬해버린 김영삼 리더십의 나상(裸像)이었다.
<1998년 3월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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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7알 금요일, 외환보유고 2백85.7억 달러, 종합주가지수 5백15.6>
1997년 11월7일 금요일 오후 4시반, 청와대 경제수석실, 김인호(金仁浩) 경제수석은 윤진식(尹鎭植) 청와대 조세금융 비서관과 함께 최연종(崔然宗) 한은(韓銀) 부총재 이하실무진, 재경원의 윤증현(尹增鉉) 금융정책실장 이하 관계자들을 비상소집 해,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긴급회의를 주재했다. 10월23일 홍콩 증시(證市)가 폭락한 이후, 외국인 투자자들이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바꾸어 빠져나가고 하루가 멀다 하고 동남아의 외환위기가 한국의 외환위기를 부를 수 있다는 외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10월28일 국제적인 증권사 모건 스탠리는 이런 긴급전문을 타전했다고 보도되었다. 「긴급 : 아시아 지역에서 투자된 자금을 회수하라. 현 단계에서 설사 손해를 보고 있더라도 즉시 팔아치우고 빠져 나오라」
정부는 10월29일 채권시장 개방 및 현금차관 도입확대 조치로 투자심리를 안정시키려는 대책을 발표했지만, 빠져나가는 외국인 투자자들을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다음날까지 이어진 후속 조치도 이어지는 해태(11월1일)와 뉴코아(11월4일) 등 대기업의 부도 속에서 별효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11월3일엔 외국인 투자한도가 확대됐으나 기대했던 것과는 완전히 거꾸로, 세계적인 미국의 신용평가회사 무디스와 S&P(스탠다드 앤 푸어스)사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오히려 하향 조정했다. 11월5일 뉴욕 월스트리트에 큰 영향을 끼치는 세계적인 경제전문 뉴스공급 통신사인 블룸버그(본사 뉴욕)와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이 거의 동시에 한국 외환보유고에 대해 의구심을 부채질하는 보도를 했다.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알고 보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적을지 모른다」 「선물환 투자 많아 순 외환보유고는 바닥이다」는 식의 보도였다. 이때만 해도 10월 말 기준으로 계산할 때 돌아올 선물환은 연말까지 9억 달러에 불과한 상태였다. 『연말까지 한국의 외채 만기물이 8백억 달러』라는 월스트리트의 주장도 같은 수준이었다. 6일에는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이 한국이 IMF(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보도를 했다. 김인호 수석은 다급해지고 있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재경원과 한은이 각각 대책을 마련하여 7일 오후 4시에 수석실에 모이도록 지시한 것이다. 참석자는 비밀 유지를 위해 극소수로 제한했다. 김(金)수석이 회의를 주재하게 된 것은 강경식(姜慶植) 부총리가 1998년도 예산과 금융개혁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회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의를 시작하기 직전 엄낙용(嚴洛溶) 재경원 차관보(현 관세청장)가 다른 회의를 끝내고 나가면서 김인호 수석의 귀에 살짝 이렇게 말했다. 『일본을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부총리에게도 보고를 했습니다』 『응? 일본은 홰?』 『일본에 여러 가지 협조를 부탁하러 가봐야겠습니다』 『아 그래』갑자기 엄차관보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그런데 말이죠. IMF에 가면 정말 괴롭습니다』 김인호 수석은 내심을 들킨 것처럼 깜짝 놀랐다. 그의 머릿속에서도 「IMF」라는 글자가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예정보다 조금 늦은 오후 4시반. 청와대 수석실에서 회의가 시작됐다. 회의 분위기는 암울했다.
국가부도를 경고한 비밀보고서
이날 회의에서 논의된 자료가 하나있다. 기자가 입수한 「외화유동성 사정과 대응방안」이라는 이 한국은행 자료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중요부분의 발췌. <외화보유고 급감 : 10월30일부터 11월6일까지 환율 안정을 위해 총23.3억 달러(선물환 1.5억 달러 포함)를 외환시장에 공급했다. 따라서 97년 11월7일 기준으로 계상한 외환보유고는 10월말의 3백5.1억 달러에서 약 2백85억 달러 수준으로 급감했다. 이 때문에 금융기관 해외점포 예치금 및 기매도(旣賣渡) 선물환 결제 자금을 제외한 가용외화 보유액은 11월7일 현재 불과 1백48억 달러로 전년 말에 비해 1백46억 달러가 감소했다. 현재의 가용외환 보유액은 약 1.2개월간의 수입대금 충당 수준이다. 통상 적정 수준으로 인식되고 있는 3개월간 수입대금의 절반밖에 안 되는 실정이다(中略).
따라서 11월 말 외환보유고는 앞으로 외환시장 개입규모를 10억 달러 이내로 억제하더라도 약 2백75억 달러(可用 외환 보유고는 1백40억 달러)로 감소될 전망이다(中略). 특히 산업 및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과 신한 및 한일 등 우량 은행의 만기 도래 CP(기업어음) 재 발행이 곤란해짐으로써 이들 은행의 여타 은행에 대한 외화자금 지원 여력이 거의 소멸될 뿐 아니라 자체 자금 조달에도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 행(한국은행)이 금융기관에 대해 외화자금을 지원해주지 못할 경우 디폴트(Default : 채무불이행에 의한 국가부도) 상황 발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中略). 이 때문에 최소한 경제활동에 필수 불가결한 수입대금 정도의 외환 보유고가 필요하다(下略)>
「선물환(先物換)」은 통칭 「포워드(Forward)」라고 말한다. 외환의 거래는 먼저 이뤄졌지만 실제의 외환 결제는 나중에 하는 일종의 외상 거래이다. 이 보고서에 나타난 한국 외환보유고의 기준점으로 인용된 「3개월간 수입 대금」은 특히 중요한 개념이다. 업계의 한 소식통은 『이미 기아 사태가 나던 7,8월부터 우리 대기업들이 외국에서 수주한 물량에 대해 한국계 은행이 아닌 제3자 즉 외국은행의 보증을 서오라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고 했다. 한국은행의 이 보고서는, 상황이 계속 악화되면 11월 말 이후에는 수입 물자에 대해 달러가 없어 결제를 해주지 못하는 상황이 올 가능성이 있다는, 즉 국가부도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즉 국가부도 상황이 올 수 있다는 확고한 결론을 정부 차원에서 내린 최초의 경고였다.
이 보고서는 또한 외환업무 관련 공직자들이 그 시점에서 파국적 상황의 도래를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그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11월7일의 회의」가 이루어진 것임을 말해준다. 이 회의가 있었다는 사실은 시장에 주는 악영향을 막기 위해 비밀에 부쳐졌다
IMF를 첫 거론
<표 삽입>
이 보고서는 계속된다. <해외 차입 여건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어 이제 더 이상 신규 채권발행이 어렵다…. 은행들의 크레디트 라인(Credit Line : 일종의 대출한도) 축소로 일부 종금사(綜金社)가 당일 결제 자금을 한은의 지원에 의존하거나 외환시장에서 외화매입(1일 약 1억 달러)에 의해 충당하기 시작함으로써 외환시장 교란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재의 외환 사정이 우리의 자력만으로써는 해결하기 어려운 위기사항이라고 보아야 하며 국제금융기관(IMF)과의 협의에 약 3개월이 걸리는 점을 감안할 때 (IMF와의) 협의를 시작해야 하며 외환집중제를 다시 실시하는 등 응급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지표상으로 본다면 환율이 오르기 시작한 것은 1997년 10월27일쯤이지만 외환보유고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11월3일 월요일」부터 였다.
11월3, 4일 연 이틀간 롤 오버(Roll-Over) 비율(상환만기가 된 외채의 만기를 연장하는 비율)이 뚝 떨어졌다. 한은 자료를 보면 10월말까지만 해도 만기연장 비율은 86.5%였다. 이것이 11월3일부터 연장이 거의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11월3일은 한국의 「블랙 먼데이(Black Monday)」였다. 이 같은 상황은 비밀에 부쳐졌다. 11월4일자 주요신문들의 1면 머리기사는 「DJP체제 공식 출범」이었고, 김현철(金賢哲)씨 석방이 그 다음이었다. 경제면도 부동산-벤처기업 등 다소 한가한 뉴스로 채워졌다. 올라가는 환율을 시장에 맡겨야 하느냐 아니면 보유외환의 방출로 안정시켜야 하는가를 두고 이견이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한계가 뻔한 외환 보유고를 갖고 할 수 있는 일도 뻔한 것이었다.
정부는 달러 당(當) 9백60원대에서 한 번, 1천원을 육박하는 시점에서 한 번, 한은 보유고를 풀고 재경원이 환투기를 경고하는 행정 지도방식으로 환율의 안정을 시도했으나, 초점은 이미 환율문제가 아니라 무섭게 빠져나가는 외환의 확보라는 문제로 옮아가고 있었다. 7일 회의에서는 여러 이야기가 나왔다. 금융개혁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노력하고 외환 통제를 강화하기로 하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국가부도를 막기 위해 다른 나라와의 협의를 거쳐 국책은행의 자금원을 확보하는 이른바 백업 퍼실리티(Backup Facility) 방안, 정부자산을 담보로 하여 해외시장에서 채권을 발행하는 ABS(Asset Backed Securities)도 구체적으로 논의됐다. 회의의 결론은 이 모든 대책을 다하고도 안될 때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것도 검토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11월7일 회의 참석자의 증언
『윤증현(尹增鉉) 재경원 금융정책실장과 최연종 한은 부총재의 자료에 IMF에 가는 문제가 함께 들어 있었다. IMF에 가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 것은 아니고 다른 것 다 해보고 나서 안되면 가자는 것이었다. 있을 수 있는 대책이 다 나열되었는데 상황이 워낙 나쁘게 돌아가니까 이 IMF건도 검토되어야 한다는 식이었다. IMF로 가는 문제가 이렇게 경제팀의 고위층에 보고되고 논의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한국계 금융기관에 대한 외채의 상환만기 연장이 시작된 것인데 그런 사태가 오면 버틸 수 있는 나라는 달러의 전주(錢主)인 미국이면 모를까 이 세계 어디에도 없다』 강경식(姜慶植) 부총리도 『롤오버가 되지 않아 외환보유고의 일부가 가용재원이 안 되는 것으로 묶였다는 사실을 11월7일을 전후하여 깨닫게 되었으며 그것이 바로 IMF로 가지 않을 수가 없겠구나 하고 마음을 기울이게 된 동기 중의 하나였다』고 최근 그의 측근에게 말했다.
이날의 심각한 회의와는 아랑곳없이 8일자 조간신문들의 주요 면은 김영삼 대통령의 신한국당 탈당과 신한국-민주당의 합당 선언 등 정치 기사로 거의 채워졌다. IMF 신청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보도를 한 외신들과 블룸버스 통신에 대해서 한국정부의 항의문이 전달됐다는 기사가 작게 실렸다.
11월8일 : 강경식(姜慶植)의 반응
<11월8일(토), 외환보유고 2백85.9억 달러. 종합주가지수 4백95.7> 김인호 대통령 경제수석은 7일 회의에서 논의된 사안이 중대한 만큼, 시간이 얼마 없다고 느꼈다. 바로 다음날 아침, 국회대책 때문에 7일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강(姜)부총리와 모처에서 조찬을 했다. 회의내용과 협의 결과를 설명하고 대응방안을 협의했다. 강경식 부총리는 의외로 순순히 『IMF로 가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강(姜)부총리는 『대통령 선거 전후의 정치적 변혁기에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많은 개혁과제들을 추진해 나가기 위해서는 IMF로 가는 것이 바람직스러운 면도 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대통령과 정치권이 대통령 선거에 휘말려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는 차라리 IMF의 힘을 빌러 국내의 개혁과제를 밀고 나가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강(姜)부총리가 갖고 있던 지론은 「금융은 신용이고 신용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한국 정부가 스스로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해결할 의지와 역량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고서는 정부가 외채상환을 보증하겠다는 말조차 먹혀들지 않고 있지 않은가. 정부로서는 금융개혁법 통과를 위해서 최대한 노력을 계속하고 국제금융계가 요구하는 강력한 안정대책을 내놓음으로써 신뢰를 회복, 단기외채의 만기연장률을 높이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대책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야당의원들이나 일부 언론이 그저 재경원에 유리한 내용의 금융개혁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위협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당시 강경식 부총리의 심정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개혁은 경제가 어려울 때 가능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미국 영국 일본은 물론 요즈음 개혁성공 사례로 흔히 이야기되는 뉴질랜드까지도 결국은 벼랑에 몰려서야 개혁의 필요성을, 반대자들에게 설득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IMF로 가는 것이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강부총리와 김수석은 『IMF로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동의하면서도 재경원 금융실로 하여금 IMF 이외에 가능한 모든 대안(代案)을 검토시킨 후 다음날(9일) 저녁에 다시 모여 의논하기로 했다. 재경원 측은 색다른 발상을 하고 있었다. ABS, 즉 정부가 보증하는 채권을 해외시장에서 약 1백억 달러 발행하면 굳이 IMF 구제금융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계산이었다. 강부총리도 이 발상에 상당히 미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