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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겪은 老 작가의 항변

淸山에 2013. 4. 10. 09:01

 

 

 

 

 

제주 4·3 겪은 老 작가의 항변…

"4·3은 저항史가 아니라 수난史, 희생자들은 투사가 아니었다… 권력에 취한 학자들 진상 왜곡"
김기철 기자

 

 

 

[현길언 교수, 노무현 정부 진상조사 보고서에 반론 제기]

 


"남로당 책임 묻지 않고 군·경 학살만 부각해
정치 권력이 개입하게 되면 편향된 해석 부를 수 있어"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의 무장공세로 시작된 4·3사건은 군·경의 진압 과정에서 최대 3만명(노무현 정부 공식보고서)이 희생된 현대사의 비극이다. 노무현 정부는 2003년 10월 '제주 4·3 특별법'에 따라 이뤄진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대통령이 공식사과까지 했다.

 

현길언(73) 전 한양대 교수가 자신이 발행하는 시사계간지 '본질과 현상'에 뜻밖의 글을 실었다. 퇴직 경찰 단체인 대한민국 재향경우회 제주도 지부 등 12개 단체가 쓴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대한 반론'을 실은 것이다. 이 사건을 진압한 경찰의 글을 실었다는 게 관심을 끌었다. 노무현 정부의 입장과는 배치되는 일종의 '소수 의견'인 셈이다.

 

현 교수는 장편소설 '한라산'을 비롯, 4·3사건을 문학으로 형상화하는 데 앞장서온 소설가다. 그는 4·3사건 당시 아홉살 나이에 제주 남원읍 수망리에 살다가 20여일간 식구들과 피난살이를 했고, 할머니와 삼촌 등 일가친척이 화를 당한 당사자다. 여러 소설에서 그는 이 얘기를 다뤘다.

 

그는 "4·3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맞서 싸운 저항사(史)가 아니라 제주도민의 수난사(史)이다. 노무현 정부의 '4·3사건' 조사는 4·3사건을 건국 초기 단선(單選)정부 수립이라는 부끄러운 역사에 저항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4·3사건의 진상을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했다"고 했다.

 

―10년 전 노무현 정부의 4·3사건 조사는 뭐가 문제인가.

 

"4·3사건을 일으킨 남로당의 책임은 제대로 묻지 않고, 진압 과정에서의 민간인 학살만 부각했다. 당시 좌익에 의해 군경과 우익 가족들도 처참하게 학살됐는데, 그런 부분은 간략하게 다뤘다. 경우회의 반론은 이런 편향을 지적하고 있고,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노 정부의 '과거사 바로잡기'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편향이 빚어낸 것으로 바로잡았어야 하는데, 이명박 정부의 무관심 때문에 방기됐다."

 

현 교수는 "4·3사건 규명은 정부가 아니라 연구자 차원에서 학자적 양심을 담보로 이뤄져야 했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연구자가 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산하 위원회가 이런 역사적으로 민감한 사건 규명을 맡게 되면, "정치가들의 단견과 정치권력에 대한 지나친 신뢰, 정치권력의 보호를 받아 돈과 지위를 얻으려는 학자들의 취한 모습이 어우러져 왜곡된 결과를 낳는다"고도 했다.


 
 강요배의 1992년작‘한라산 자락 백성’. 4·3사건으로 집과 가족을 잃고 도피 중인 사람들의 참혹함이 자연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4·3사건이 일어난 배경을 세밀히 들여다봐야 한다고 했다.

 

"남로당은 당시 면 단위까지 조직책을 둘 만큼 세력을 확대했다. 군·경은 위기감을 느끼고 남로당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벼르고 있었다. 제주도는 해방 이후 좌익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사실상의 정부로 행세해왔다. 중앙의 정세와는 다른, 이런 주변부적 특성이 4·3사건을 몰고 온 배경이기도 하다."

 

―제주도와 일부에선 4·3사건을 '4·3 항쟁'으로 부르는 등 저항사로 기억한다.

 

"'희생자'보다는 '투사'로 보이는 게 더 정당성이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저항이 아니라 수난사로 봐야 화해나 상생이 가능하다. 4·3사건을 저항사로 보면, 저항의 대상인 대한민국 정부가 이 사건을 기념하고, 희생자를 추모하게 되는 논리적 모순이 생긴다. 당시 대부분의 제주 사람들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도망다니다 목숨을 잃은 희생자였다.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목숨을 잃은 이들을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위해 싸우다 쓰러진 전사(戰士)로 기념하는 건, 그들도 원치 않을 것이다."

 

―4·3사건 당시 제주 동광리 주민들의 희생을 다룬 '지슬'이 관객 9만명을 넘어설 만큼 화제다.

 

"'지슬'은 제주도민이 겪은 아픔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군인들은 피에 굶주린 악으로 그렸고, '착한 군인'도 도구로 끼워넣는 등 도식적이다. 4·3사건 배후에 미 군정과 군사고문단이 있다는 식의 이데올로기적 접근은 제주도민들의 희생을 왜곡할 뿐이다."

☞4·3사건은…

 

4·3사건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산하 무장대 350명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 반대투쟁을 내걸고 제주 12개 지서를 습격하면서 시작됐다. 노무현 정부 당시 조사에 따르면,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2만5000~3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다. 특히 1948년 11월부터 펼친 강경 진압 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