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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7년 한 해 唐서 공부하는 신라 유학생만 216명

淸山에 2013. 4. 7. 04:19

 

 

 

 

 

837년 한 해 唐서 공부하는 신라 유학생만 216명
[중앙선데이]
실크로드 대장정 ② 진리를 찾아 서쪽으로

 

 

주화산 육신보전을 방문하는 중국인들은 신라 구법승인 교각이 지장보살의 화신이라고 믿으며 향을 담아 올린다.

 

정철훈 사진작가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엔리케 왕자가 죽고 28년이 지난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희망봉을 발견했다. 나는 이걸 좀 다르게 표현하고 싶다. 희망봉을 발견할 때까지 엔리케 왕자는 항해자들을 보낸 것이라고. 탐험에 실패하고 희망봉의 그늘 속으로 사라진 수많은 항해자가 없었다면 유럽과 인도를 잇는 이 항로는 더 늦게 발견되거나, 혹은 유럽의 다른 나라가 발견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마카오의 특산물도 달라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발견 덕분에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탑 앞에 서서 대서양 쪽을 바라보노라면, 15세기 후반 사람 하나 없고 온통 뜨거운 수증기만 치솟아 어떤 배도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풍문이 들리던 남쪽 바다를 향해 떠나는 탐험가들의 심정이 어떨지 상상이 간다. 한국에도 이와 비슷한 기념비가 있다. 바로 평택항 근처에 있는 혜초(慧超)기념비다. 그 기념비에 서서 서해 쪽을 바라보면 발견의 탑에서와 마찬가지의 감회가 느껴진다. 왜냐하면 혜초가 남긴 『왕오천축국전』에는 다음과 같은 오언시도 들어있기 때문이다.

 

我國天岸北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他邦地角西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日南無有? 일남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誰爲向林飛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

 

혜초는 서해를 건너 서쪽으로 떠난 뒤 영영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신라인 중 그 심정이 직접 전해오는 유일한 사람이다. 서해를 건너 서역의 사막과 그 너머 인도까지 순례한 다른 구법승들의 심정은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쓴 “얼마나 많은 이가 저 달을 따라 외로운 배로 떠나갔던가? 그러나 구름 따라 돌아온 이는 볼 수 없구나”나 당나라 고승 의정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쓴 “싹이 터 핀 꽃이 열이라 많다. 하지만 맺은 열매 하나도 없는 듯하네” 같은 문장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다.

 

20세 최치원, 당나라 율수현위에 제수


끓는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던 포르투갈 항해사들의 열정 덕분에 마카오에서 에그타르트를 먹을 수 있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와 유교는 신라 구법승과 유학생들 덕분에 일찌감치 한국 전통의 문화로 자리잡게 됐다. 희강년 2년(837) 3월 당의 국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신라 유학생의 수가 216명이라거나, 당 문화가 만개한 8, 9세기 이름이 확인된 구법승의 숫자가 80여 명에 이른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시피 새로운 지식을 찾아 서해를 건너가는 신라인들의 숫자는 상당했다.

 

이 열정의 본질을 최치원은 ‘서학(西學)’이라고 일컬었다. 그에 따르면, 서학이란 신라 사람이 서쪽 당나라에 건너가 불교와 유교의 예와 악, 그리고 문장을 배우는 일을 뜻했다. 유학생들이 어떤 식으로 서학을 전파했는지는 3월 27일 실크로드탐험대가 찾아간 양저우(陽州)의 최치원 기념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떠나온 한국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화신(花信)이 들려오지 않던 그날, 최치원 기념관의 연못가에는 활짝 핀 벚꽃이 탐험대원들을 맞이하고 있어 강남 땅이 지척임을 체감할 수 있었다.

 

문성왕 19년(857)에 태어난 최치원은 경문왕 8년(868)인 12세 때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돼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장안(長安), 그러니까 지금의 시안(西安)에서 6년 동안 공부한 끝에 18세의 나이로 빈공진사(賓貢進士)가 됐다. 급제 후 2년 동안 관직을 하사받지 못하고 지내던 최치원은 약관의 나이에 율수현위를 제수받았다. 이후 그는 양저우의 당성(唐城)을 막부로 쓰고 있던 회남절도사 고병의 밑에서 종사관으로 근무했다. 그 당성이 바로 최치원 기념관이 자리잡은 곳이다. 고병의 막부에서 일하면서 ‘격황소서(檄黃巢書)’ 등으로 최치원이 이름을 떨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29세인 헌강왕 11년(885)에 귀국한 최치원은 당에서 관리로 일한 경험을 살려 신라와 당의 국제 교섭과 관련한 주요 외교문서를 작성했다. ‘양위표(讓位表)’ ‘신라하정표(新羅賀正表)’ 등의 그 외교문서는 문장부터가 빼어난 데다 발해의 기원 등 그 글이 없었다면 후대에 전해오지 않았을 역사적 사실을 많이 담고 있다. 벌들이 붕붕거리는 봄꽃 나무 아래를 걸어가며 나는 최치원이 남긴 글들에 대해 생각했다. 오래전부터 나는 문학이란 말하지 못하는 뭔가를 대신해서 말함으로써 그를 존재하게 만드는 입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최치원은 나의 가장 오랜 선배일 수밖에 없었다.

 

신라 왕자인 지장, 24세에 당나라로


한 명의 최치원은 이름이 전해오지 않는 수많은 유학생의 존재 위에 서 있다. 같은 시기 당나라 문인들의 시 속에서 그들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떠올릴 수 있다. 고비웅의 시 ‘송박처사귀신라(送朴處士歸新羅)’에는 “어려서 고국을 떠나 이제 돌아감에 늙은이가 다 되었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시에 등장하는 박 처사는 빈공과에 급제하지 못하고 귀국하는 유학생 중 하나였다. 역사에는 이름 없는 존재로 남았으나, 이들은 골품제에 얽매인 신라를 다양한 방식으로 개혁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신라는 최치원이라는 대문인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해서 유학생들을 바다 너머로 보냈던 것이라고.

 

구법승의 경우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웨이하이(威海)·양저우·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주화산(九華山)을 거치면서 실크로드탐험대가 그 유적을 만날 수 있었던 구법승은 원측·지장·혜초·원광 등이었다. 이들 중 쑤저우의 후추산(虎丘山)의 너른 바위에서 설법을 펼쳤다는 원광을 제외하면 모두 귀국하지 않은 재당 구법승들이다. 그들은 귀국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보다는 중국 측 사료에 더 자세히 남아 있다. 외국인 승려로서 그들의 이름이 1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은 것은 그들의 법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리라. 안후이(安徽)성 츠저우(池州)시 주화산 화성사에 머물던 지장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중국 쪽의 설명에 따르면, 신라의 왕자인 지장은 24세에 당으로 건너가 출가해 교각(喬覺)이라는 법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화성사에 자리를 잡고 75년간 구도활동을 하다가 99세에 열반에 들었는데, 제자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시신을 석함에 넣고 3년 후에도 썩지 않으면 등신불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말 그대로 열반 후에도 그의 육신이 썩지 않자, 신도와 승려들은 그를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인정하고 육신에 금을 입혀 등신불로 봉헌했으며 주화산은 지장보살 도량이 되었다.

 

교각의 등신불이 모셔진 주화산 육신보전(肉身寶殿)을 찾아가려면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주화산을 한없이 올라가야만 했다. 꼬불꼬불한 오르막길을 따라 어찌나 높이 올라가던지 마치 도사들이 사는 구름 위의 암자로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거기서도 다시 돌계단을 밟고 한참을 올라가면 육신보전에 닿을 수 있었다. 육신보전 앞 두 개의 거대한 향로와 네 개의 촛불대에서는 그의 법력에 기대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켜둔 불꽃이 끊이지 않았다.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주화산 불교 문화 전체가 교각의 법력에 기대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생애 99년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용주교 아래 가파른 99개의 계단을 밟고 내려오면서 나는 후대까지 전해지는 한 사람의 교각 스님 뒤로는 수많은 무명의 승려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구법승 중 이름이나마 전해져 우리가 그 삶을 짐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람은 현각(玄恪)이다. 그는 정관 10년(636)께 당나라 승려들과 함께 란저우(蘭州)를 출발해 타클라마칸사막과 파미르고원을 넘어 저란타국을 거쳐 대각사에 이르렀다. 현각은 거기서 마침내 불사리를 친견해 소원을 풀었으나 병에 걸려 40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수마트라까지 간 두 명의 신라 승려


이 외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신라 승려 두 사람이 장안을 출발해 중국 남해를 통해 배를 타고 파로사국(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서북부 브루어 섬)에 갔다가 모두 병에 걸려 죽었다거나 신라승이 장안 청룡사에서 밀교를 공부하다가 정원 5년(789)에 중천축국에 가서 범경을 구해 당으로 돌아오다가 토번에서 죽었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역사의 풍경 너머로 스쳐갔다. 일연이 “그러나 구름 따라 돌아온 이는 볼 수 없구나”라고 말할 때의 그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혜초의 본 모습은 이 ‘구름 따라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배경으로 삼아야만 더 또렷하게 보일 것이다.

 

몇 해 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희망봉을 찾았을 때 나는 희망봉의 본래 이름이 폭풍봉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희망봉이란 사실 절망의 봉우리였던 셈이다. 하지만 원래 희망이란 그런 게 아닌가. 아무리 많은 실패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모든 게 다 끝난 뒤에도 끝끝내 남는 그 마음. 실크로드가 희망의 길이 되는 까닭은 그 길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길이기 때문이다. 가장 힘든 길이 가장 희망찬 길이라는 이 역설은 오늘날에도 계속 된다.

 

 

김연수 요즘 뜨는 작가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꾿빠이, 이상』 『세계의 끝 여자친구』 등의 소설을 출간했고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글 싣는 순서
1 황해, 기회와 희망의 바다
2 진리를 찾아 서쪽으로
3 장안, 새로운 여정의 시작

 

산둥성 스다오항=김연수 작가 writerry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