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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노획품, 일본 금부채는 어디로?

淸山에 2013. 4. 8. 03:14

 

 

 

 

 

[문화]

이순신의 노획품, 일본 금부채는 어디로?

2013 04/09

주간경향 1020호

 

 

이순신이 노획한 히데요시 황금부채의 처리는 <선조실록>에 나온다.

 

 


황금부채를 든 도요토미 히데요시 초상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왜군으로부터 노획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금부채가 일본인에 의해 1909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간 것으로 밝혀졌다. 1592년 당포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메이 코레노리(龜井玆矩)에게 신표로 준 금부채를 노획해 조정으로 보냈다. 선조실록 1603년 4월 21일 기사에 이런 사실이 실린 후 금부채는 우리나라 역사 기록에서 사라져 행방이 묘연했다.

 

소설가 김태훈씨가 2005년에 쓴 소설 <이순신의 비본>은 금부채의 행방을 찾는 내용으로 당시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금부채의 실체적인 존재에 대해서는 밝히지 못했다.

 

필자가 이 금부채의 행방을 찾아본 결과 1909년 9월 23일 황성신문에서 이 금부채가 3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밝혀졌다. 황성신문에 ‘금선발견(金扇發見)’이란 제목의 몇 줄 안 되는 기사가 실렸다.

 

세키노 다다시의 황금부채와 보물 불법반출
“구(舊) 탁지부 안에 있던 비밀창고는 옛날부터 이를 열면 나라에 흉변이 생긴다고 전해져 이를 범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일본인 관야박사(關野博士)가 이를 열었다. 그 안에 저장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녔던 원형의 황금부채(圓形黃金軍扇)와 기타 수백 가지의 진귀한 보물 등인데, 황금부채 중의 한 개를 일본 황실로 가져갔다고 한다.”(한문투 기사 번역)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1909년 9월 23일 황성신문 3면.

 1909년 9월 23일 황성신문 2면. 1909년 10월 13일 신한민보

 

같은 날 3면 기사에는 “원형 황금부채 2개가 있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채가 우리나라 창고에 있는 이유는 추측할 수 있는 일”이라고 부연 설명했다. 비슷한 시기에 신한민보(1909년 10월 13일)와 신한국보(10월 26일)에도 같은 기사가 나온다.

황성신문 3면의 기사는 이순신이 당포해전에서 노획한 그 황금부채라고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 황금부채가 히데요시의 부채란 근거는 황현(黃玹)의 <매천야록>에 나온다. 히데요시의 낙관(落款)이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히데요시의 황금부채가 본래 3개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우리나라 ‘판도자 상자’였던 탁지부 비밀창고에 2개가 보관되어 있었고, 최소한 둘 중 하나에는 히데요시의 서명 혹은 낙관이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노획한 그 황금부채다.

 


삼국지도가 그려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황금부채 앞면과 뒷면 (KBS 방송화면).

 

황금부채의 발견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다른 문제는 관야박사(關野博士), 즉 세키노 다다시가 황금부채를 일본에 보냈다는 기록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1905년의 강압적인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통감부가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다. 또한 황금부채가 발견된 이듬해인 1910년에는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는 경술국치가 예정된 시점이었다. 1909년 당시 탁지부도 당연히 일본인이 장악해 관리하고 있었다. 세키노 다다시는 1902년부터 수차례 방한해 고건축 조사를 했던 인물이다. ‘판도라 상자’를 열기 직전인 1909년 8월 말, 탁지부건축소 고건축물 조사 촉탁으로 임명되어 9월 19일 서울에 도착했다. 9월 21일부터 서울 일대의 건축물을 둘러보고 일본인 고미술 수집가들을 만나 그들의 우리나라 문화재 수집 상황을 조사했다. 그러던 중 23일 갑자기 개봉 금지된 탁지부 비밀창고를 열고는 히데요시의 황금부채를 발견해 일본 황실로 보냈다. 그가 비밀창고에서 찾아낸 황금부채 외의 수백 가지 보물 중에서 무엇을, 얼마나 일본 황실에 보냈는지는 현재까지도 알 수 없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 히데요시의 황금부채

 


세키노 다다시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필자는 당시 언론 기사에 따라 세키노가 황금부채 한 개만 가져갔다면, 다른 한 개는 100년이 지났지만 혹시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공립신보의 “궁내부에서 제실 소속 박물관을 설치할 계획으로 우리나라 고래의 서적과 미술품을 많이 구입할 것(1908년 3월 4일자)”이란 기사와, 그 결과로 1909년 11월 1일 개관한 대한제국의 제실(帝室)박물관, 그 이후 이어져온 국립중앙박물관의 역사를 근거로 다른 한 개의 황금부채에 대한 현존 여부를 국립중앙박물관에 질의했다. 지난 3월 15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소장품으로 확인되지 않고, 세키노 다다시의 반출과정에 관한 기록이나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는 결국 황성신문의 기사처럼 세키노가 탁지부 비밀창고에 소장된 이순신이 노획한 히데요시의 황금부채를 포함한 다른 많은 보물들을 불법 혹은 편법으로 일본 황실로 반출했다는 증거다. 또한 일본의 황실에 보냈기에 현재는 확인할 방법도 없다. 세키노 다다시가 가져간 히데요시의 부채는 물론 다른 많은 일본인들이 불법 혹은 편법으로 가져간 우리 문화재를 다시 정확히 재조사하고, 되찾아야 할 때다. 또한 일본 황실도 묵묵부답의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공개하고, 되돌려주어야 한다.

 

이순신 장군이 노획한 황금부채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를 공격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이순신은 5월 4일부터 8일까지 제1차 출전을 해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5월 29일 시작한 2차 출전의 첫 날에는 거북선을 앞세워 사천항에 정박한 일본 전선 13척을 격침시켰다. 그날 이순신도 어깨 관통상을 당했다. 총상 부위에서 고름이 줄줄 흘러내리는 가운데 이순신은 일본군을 찾아 계속 전투를 했다. 당포(6월 2일), 당항포(6월 5일), 율포(6월 7일)에서 모두 67척의 일본 전선을 격파·괴멸시켰다. 히데요시의 야망이 물거품이 될 것을 예고하는 전투들이었다.

 

6월 2일의 당포해전 승리를 보고한 기록에는 특별한 부채 이야기가 나온다.

“그 부채의 한쪽 면 중앙에는 ‘6월 8일 수길(六月八日秀吉)’, 오른쪽에는 ‘우시축전수(羽柴筑前守)’라는 5자, 왼편에는 ‘구정유구수전(龜井琉求守殿)’ 6자가 써 있었습니다. 칠갑(漆匣)에 넣어두었는데, 이는 반드시 평수길(平秀吉)이 축전수(筑前守)에게 부신(符信)으로 준 물건일 것입니다. … 우후 이몽구가 찾아낸 칠갑에 들어 있던 왜장의 부신인 황금부채와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이 찾아낸 왜장의 <분군건기(分軍件記)> 6축도 함께 봉해 올려 보냅니다.”(唐浦破倭兵狀, 1592년 6월 14일)

 

황금부채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평수길(平秀吉)이 축전수(筑前守)에게 신표로 준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부채에 기록된 우시축전수(羽柴筑前守)와 평수길(平秀吉)은 모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말한다. 구정유구수전(龜井琉求守殿)’은 ‘가메이 코레노리(龜井玆矩) 류큐(琉求) 영주에게’란 의미다. 하시바(羽柴)는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가신으로 있을 때 사용하던 성(姓)이고, 치쿠젠노카미(筑前守)는 그 당시 직위이다. 도요토미(豊臣)는 후에 바꾼 성이다. 그런 상황을 이순신이 정확히 몰랐기에 “히데요시(平秀吉)가 치쿠센노카미(筑前守)에게 보낸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이 부채에는 히데요시가 일본 최고의 권력자가 되는 과정이 들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1582년,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가 일으킨 반란으로 자살했다. 그때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가 가메이 코레노리와 함께 사태를 수습했다. 그 과정에서 히데요시는 코레노리에게 주기로 한 영지를 줄 수 없게 되자 다른 땅으로 갚으려고 했다. 그러나 코레노리는 당시 일본이 점령하지 못한 류큐왕국(琉球王國, 현재의 오키나와)을 떼어달라고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가메이 코레노리의 포부에 감탄하고, 자신이 지니고 있던 황금부채(金扇)에 코레노리를 류큐 영주로 임명한다고 써서 주었다. 그 황금부채는 히데요시의 임명장이며 증표였다. 코레노리는 그 황금부채를 지니고 다니다가 10년 후인 1592년 당포에서 이순신의 수군에 쫓겨 도망치면서 놓고 갔던 것이다. 류큐 영주를 꿈꾼 코레노리에게는 평생의 치욕이었고, 히데요시에게는 이순신에 의해 대륙 정복의 꿈이 완전히 무너질 것을 예견하는 상징물이었다.

이순신이 노획한 히데요시 황금부채의 처리는 <선조실록>에 나온다. 이순신이 “노획한 병기와 왜적의 배에 실려 있던 황금병풍(金屛)과 황금부채(金扇) 등의 물건을 행조에 보고했다(1603년 4월 21일)”는 것이다. 그 후 우리나라의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고, 잊혀졌다가 1909년에 황성신문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현재 일본에는 일본 황실이 보관하고 있을 이순신이 노획한 황금부채 외에 히데요시의 다른 황금부채 한 개가 전하고 있다. 이른바 ‘삼국지도부채’다. 임진왜란 직전에 침략을 준비하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한쪽면에는 침략의 목적이 그대로 보여지듯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지도가 그려져 있다. 이순신이 기록한 부채와는 완전히 다른 부채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역사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