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朴正熙 照明

33년 전 오늘, 한 超人의 최후“각하, 진짜 괜찮습니까?”

淸山에 2012. 10. 26. 14:04

 

 

 

 

 

33년 전 오늘, 한 超人의 최후“각하, 진짜 괜찮습니까?”

 신재순, 심수봉 두 여자가 번갈아 물었다. 이제는 대답이 없었다. 대통령의 신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趙甲濟     

 

 


   野獸의 마음으로
  
  
   신재순이 朴 대통령의 등에서 솟고 있는 피를 손바닥으로 막으면서 “각하, 정말 괜찮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한 말 ' - ' "나는 괜찮아……”는 그가 이승에 남긴 마지막 肉聲이 됐다. 신재순은 이 말엔 ‘난 괜찮으니 너희들은 여기를 빨리 피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말을 들으면서 그 자리에서 느꼈던 것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일국의 대통령이시니까 역시 절박한 순간에도 우리를 더 생각해 주시는구나 하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27일 새벽 金鍾泌이 연락을 받고 청와대에 갔을 때 金桂元은 간밤에 있었던 이야기를 실토하면서 “각하께서는 그 상황에서도 여자 아이들 걱정을 하십디다”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마루로 피해 나온 金 실장은 대통령이 “난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을 다 듣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각하, 진짜 괜찮습니까?”
  
   신재순, 심수봉 두 여자가 번갈아 물었다. 이제는 대답이 없었다. 대통령의 신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정보부장 의전비서관 朴興柱 대령은 이기주, 유성옥과 함께 대통령 경호원들을 죽이기 위해서 주방 안으로 집중사격을 가한 뒤 안이 조용해지자 나棟 건물을 오른편으로 돌아서 현관 앞으로 뛰어갔다. 어두운 잔디밭에서 흰 와이셔츠 차림의 김재규가 황급하게 뭔가를 작동시키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구부린 자세로 양손을 비비는 것 같았다. 불발된 권총의 노리쇠를 앞뒤로 진퇴시키려 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다가간 박흥주 대령은 “박 비서관입니다”라고 하면서 김재규의 두 팔을 잡으려고 했다. 김재규는 박 대령의 손부터 보았는데 총이 없었다. 그는 팔꿈치로 朴 대령을 밀고는 다시 현관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현관에는 위에 달려 앞뒤로 흔들거리는 쪽문이 붙어 있었다. 박흥주가 그 쪽문 사이로 보니 안쪽 마루에서 양복 상의를 벗은 김계원 실장이 안방에서 나와 후다닥 뛰는 것이었다. 황급히 피하는 모습이었다.
  
   이때 金載圭는 車智澈이 권총을 차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간 마음이 급한 게 아니었다. 그는 고장난 권총을 고치지도 못하고 현관에서 마루로 다시 뛰어들어 가는데 플래시를 든 박선호 의전과장과 마주쳤다. 박 과장은 대기실에서 두 경호관을 사살하고 마루로 나와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김재규는 들고 있던 자신의 권총을 바닥에 던져 버리고는 박선호의 권총을 낚아채더니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 직전 차 실장이 화장실에서 빠져나와 “경호원, 경호원” 하면서 문 쪽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차지철이 흘리는 피가 오른쪽 벽 아래를 따라서 선을 그렸다. 차지철이 문으로 뛰어나가려는 찰나에 권총을 들고 들어오는 김재규와 딱 맞서게 됐다. 김재규가 박선호로부터 받아든 38구경 리볼버 5연발 권총에는 세 발이 남아 있었다. 원래 다섯 발이 장전되어 있었는데 박선호가 두 발을 쏘았던 것이다. 차지철은 안쪽 병풍 옆에 있던 장식용 문갑을 방패처럼 치켜들었다.
  
   “김 부장, 김 부장…….”
  
   차지철은 애원하고 있었다. 그는 문갑을 앞세우고 김재규를 향해 덤벼들었다. 김재규는 차 실장의 가슴을 향해서 한 발을 발사했다. 탄도검사 결과에 따르면 피격 당시 차지철은 문갑을 들고 자세를 낮추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오른쪽 가슴 상부에서 들어간 총탄은 허파 부위를 지나 왼쪽 등 아래로 진행하다가 몸속에서 멈추었다. 육군과학수사연구소 법의과장 정상우 소령의 사체검안서에 따르면 이 제2탄이 치명상으로서 血胸(혈흉)에 의한 호흡부전과 심장부전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한 20여 분 뒤에 일어난 김태원에 의한 두 발의 총격은 확인사살이 아니라 이미 죽었거나 죽을 사람에 대한 사격이란 뜻이 된다. 차 실장은 잡고 있던 문갑과 함께 뒤로 넘어졌다. 와장창하는 소리와 함께 문갑 속에 있던 물건들이 쏟아졌다. 이때 심수봉이 박정희 곁을 떠나 방 안을 뛰쳐나갔다.
  
   김재규는 다음 순간에 벌어진 상황을 1979년 11월 8일에 작성한 제2차 자필진술조서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차 실장을 거꾸러뜨리고 앞을 보니 대통령은 여자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있어 식탁을 왼쪽으로 돌아서 대통령이 있는 데로 가자 거기에 앉아 있던 여자가 본인의 얼굴을 쳐다보며 공포에 떠는 눈초리로 보고 있어 총을 대통령 머리에서 약 50센티미터까지 가까이 대고 1발을 발사하여 대통령을 즉사시키고 나온 것이 기억이 되며…….”
  
   제2탄은 박정희의 오른쪽 귀 위로 들어가 뇌수를 관통하고 콧잔등까지 나와서 살 속에서 멈추었다. 이것이 치명상이 되었지만 즉사는 아니고 아직 생명은 붙어 있었다. 끝까지 대통령 곁을 지킨 신재순은 김재규가 방에 들어올 때 발 밑으로 푹 파인 아래쪽으로 숨었다가 차지철을 쏘는 총성을 듣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박정희를 안고 있다가 다가오는 김재규와 눈이 마주쳤다. 신재순은 지금도 “그것은 인간의 눈이 아니라 미친 동물의 눈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녀는 김재규가 박정희의 머리에 총을 갖다 대었을 때는 ‘이제는 나도 죽는구나’ 하고 후다닥 일어났다. 실내 화장실을 향해서 뛰는 그녀의 등 뒤에서 총성. 귀가 멍멍하고 잠깐 정신이 나갔다가 깨어 보니 주위가 조용했다. 방 안은 화약 냄새로 자욱했다. 신 양은 실내 화장실 안에서 문을 잠그고도 손잡이를 꼭 잡고 있었다. 김재규가 박정희의 머리를 향해 쏜 총탄은 이 5연발 리볼버의 네 번째 총탄이었다.
  
   김계원은 김재규가 차 실장과 대통령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나올 때까지 마루에 서 있었다. 이 마루와 만찬장은 붙어 있고 마루에서는 열려 있던 문을 통해서 방 안에서 김재규가 차 실장과 대통령을 쏘는 것을 볼 수 있는 위치였다. 김재규와 그 부하들이 총질을 해 대는 가운데서 무장하지 않은 김계원이 취한 피신행동을 어느 정도 비판할 수 있을지는 쟁점으로 남는다. 김계원은 “낭하에 나가서 불을 켜려고 했다. 대기실, 주방, 만찬장 사이의 중간지점에 있는 화장실 입구에 머리를 대고 멍하니 서 있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김재규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것은 못 보았고 전깃불이 다시 켜지고 방안에서 “총성과 싸우는 소리가 나고 쾅하고 넘어지는 소리가 나고, 내가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나오는 김재규와 마주쳤다”는 것이다. 마루에서 두 사람이 스치면서 나눈 대화에 대해서 김재규는 합수부 조사에서 이렇게 진술했다(1979년 11월 8일 2차 자필진술조서).
  
   본인: 나는 한다면 합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보안 유지를 철저히 하십시오.
  
   김계원: 뭐라고 하지.
  
   본인: 각하께서 과로로 졸도했다고 하든지 적당히 하십시오.
  
   김계원: 알았어.
  
   김계원은 법정에서 “그때 김재규가 총을 들고 살기가 등등하여 그 장소를 모면하기 위하여 ‘알았어’라고 한 것뿐이다”라고 증언했다.
  
   超人
  
   총구 앞에서, 그리고 가슴을 관통당하고서, 또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 다가오는 제2탄을 기다리면서 박정희가 보여 준 행동은 세계 암살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超人的인 모습이었다. 김재규의 벽력같은 고함과 차지철을 쏜 첫 총성, 그리고 한 4초간의 여유. 이때 박정희는 “뭣들 하는 거야!”란 한마디만 외친 뒤 그냥 눈을 감고 정좌한 채 가만히 있다가 김재규의 총탄을 가슴으로 받았다. 그리고 “난 괜찮아`……”란 말을 두 번 남겼다. 우선 이런 행동의 목격자인 두 여인의 합수부 진술을 검토하고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신재순의 기억을 되살려 이것이 사실인가를 알아보았다. 확인 결과 이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이성을 잃었기 때문에 이런 무모하리만큼 태연한 행동이 가능했던가. 그날 밤 시바스 리갈 한 병 반을 주로 김계원, 박정희 두 사람이 1시간 40분 사이에 마셨으니 酒氣가 올라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酒量이 엄청난 박정희는 총격 직전까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고 그의 언동은 정상이었다.
  
   거의 같은 양의 술을 마신 김계원은 총성이 나자 마루로 피신했고 그날 밤 정상적으로 행동했다. 따라서 술기운으로 해서 그런 ‘무모한’ 행동이 가능했으리라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박정희의 不可思議(불가사의)한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기자는 총상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포천의 실탄사격장에 가서 권총사격도 해 보았다. 6·25 때 허리에 총상을 당했던 孫章來(손장래·전 안기부 2차장) 장군은 “벌겋게 달군 쇠갈고리로 푹 쑤셨다가 빼내는 것 같았다”고 했다. 머리를 스치는 가벼운 파편상을 입고도 기절한 경험을 가진 李秉衡(전 2군 사령관) 장군은 “발뒤꿈치에 총상을 당했을 때도 쇠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또 “박대통령의 최후는 체험으로써 단련된 고귀한 정신력의 소유자였음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가슴을 관통당하는 총상을 입은 박정희가 어떻게 그 고통을 누르고 “난 괜찮아`……”라고 할 수 있었을까는 여전히 불가사의로 남는다. 박정희는 시저가 암살단에 끼인 브루투스에게 말했던 원망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1995년 암살당한 이스라엘의 라빈 수상이 박정희와 비슷한 말을 남기고 운명한 사람이다. 그는 등과 배에 총을 맞고 병원으로 실려 가면서 “아프긴 한데 별것 아니야”라고 말한 뒤 혼수상태에 빠져 사망했다. 기자는 이 라빈 수상이 암살되기 하루 전에 마지막 인터뷰를 했었다. 라빈의 인상은 박정희와 흡사했다. 단아하고 소탈한 모습. 어렵게 태어난 국가의 짐을 고독하게 지고 걸어가다가 동족의 총탄에 맞아 죽어 간 모습까지도 두 사람은 비슷했다. 라빈 수상은 참모총장 시절이던 1966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박 대통령을 만났었다. 그때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박정희의 지도력을 높게 평가했다.
  
   박정희는 설마 나를 쏘겠는가 하는 자신감 때문에 피신 동작을 하지 않았으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눈앞에서 총격이 이루어지고 피를 쏟으며 경호실장이 달아나고 하는 아수라장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계산보다 본능적인, 조건반사적인 행동에 지배당한다. 박정희의 태연자약한 행동은 그의 본능으로 내면화된 死生觀과 지도자道의 자연스런 발로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남 앞에서는 부끄럼 타고 누가 面前에서 칭찬을 하면 쑥스러워하고 육영수와 선을 보러 갈 때는 가슴이 떨려서 소주를 마시고 간 사람이었지만 죽음과 대면할 때는 항상 의연했다. 그는 여순반란사건 이후에 軍內 남로당 조직 수사에 연루되어 체포되고 전기고문을 당한 뒤에 수사책임자 白善燁 정보국장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박정희의 生殺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백선엽과 수사실무자 金安日은 지옥의 문턱에 서서 구원을 요청하던 박정희의 모습이 비굴하지가 않았고 의연했다고 전한다. 백선엽 장군은 “도와드리지요” 하는 말이 무심코 나오더라고 회고했다. 인격이 그를 살린 것이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한강 다리 위에서 혁명군 선발대를 저지하는 헌병들의 사격이 쏟아질 때도 박정희는 태연했다.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文世光의 총탄이 날아올 때, 육영수가 피격되어 실려 가고 나서 연설을 계속할 때 그는 비정하리만큼 냉정했다.
  
   10월 26일 밤 나타난 박정희의 행동은 이런 과거 행태의 연장선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이지 그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死線을 넘나들면서 죽음과 친해지고 그 죽음을 끊임없이 사색하여 드디어 죽음과 친구가 되어 버린 박정희. 그가 제1탄을 가슴에 맞고서 제2탄을 기다릴 때까지의 시간은 1분 내외였을 것이다. 이 시간에 그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허파 관통상을 당하면 허파의 혈관이 터져 다량의 출혈이 생기고 호흡이 곤란하게 된다.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면서 숨이 찬다. 이 상태에서도 한 10분간은 의식을 유지할 수가 있다. 박정희의 사망진단서를 끊었던 국군서울지구병원 金秉洙 원장은 “김재규가 제2탄을 발사하려고 권총을 갖다 대었을 때 박정희는 의식은 하고 있었지만 거부할 힘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의식하면서 그 1분을 기다렸다는 얘기다.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들의 거의 일치된 증언은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는 자신의 생애, 그 중요한 장면들이 走馬燈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는 것이다. 이 1분 사이 박정희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은 무엇이었을까.
  
   어머니의 얼굴. 며느리를 둘이나 본 44세의 나이에 박정희를 임신한 것이 부끄러워 이 생명을 지우려고 간장을 두 사발이나 마시고 기절했던 어머니는 효과가 없자 언덕에서 뛰어내리고 디딜방아를 배에 올려놓고 뒤로 넘어지기도 했으나 뱃속의 생명은 죽어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태어나지 못할 뻔했던 생명’이 태어났고 그에 의하여 우리나라의 운명이 바뀌었다.
  
   李現蘭(이현란)의 얼굴. 첫 부인과 별거한 뒤에 장교시절에 만나 동거했던 이현란은 박정희가 肅軍(숙군)수사에 걸려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생환하여 군복을 벗었을 때 문관신분으로 겨우 군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던 이 조그만 장교를 버렸다. 집을 나간 이 여인을 찾아 헤매던 때 박정희의 어머니는 아들 때문에 병을 얻어 죽었다. 직장, 연인, 어머니를 동시에 잃었던 이 시기의 박정희를 구해 준 것은 金日成이었다. 그의 남침이 박정희를 군대에 복귀시켰고, 그 박정희에 의해서 김일성의 북한은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역사의 오묘한 복수인가.
  
   육영수의 얼굴. 맞선을 보는 날 육영수는 박정희의 뒷모습을 먼저 보았다고 한다.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해 보였어요. 사람은 얼굴로는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으로는 속이지 못하는 법이에요.”
  
   궁정동에서 박정희가 보여 준 최후의 모습이 바로 그의 뒷모습일 것이다. 박정희의 뇌리에 마지막으로 남은 영상은 아마도 소복 입고 손짓하는 육영수였을 것이다. 가난과 亡國과 전란의 시대를 살면서 마음속 깊이 뭉쳐 두었던 恨의 덩어리를 뇌관으로 삼아 잠자던 민족의 에너지를 폭발시켰던 사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서는 “내가 죽거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면서 일체의 변명을 생략한 채 가슴을 뚫리고도 ‘체념한 듯 담담하게(신재순 증언)’ 최후를 맞은 이가 혁명가 박정희였다.
  

  

 

 

 

 

박정희 傳記(全13권) 머리글


박정희를 쓰면서 나는 두 단어를 생각했다. 素朴(소박)과 自主(자주). 소박은 그의 인간됨이고 자주는 그의 정치사상이다. 박정희는 소박했기 때문에 自主魂(자주혼)을 지켜 갈 수 있었다. 1963년 박정희는 《국가와 혁명과 나》의 마지막 쪽에서 유언 같은 다짐을 했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 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한국의 창건, 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 본인은 한마디로 말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1979년 11월 3일 國葬(국장). 崔圭夏 대통령 권한대행이 故박정희의 靈前(영전)에 건국훈장을 바칠 때 국립교향악단은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연주했다. 독일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이 장엄한 교향시는 니체가 쓴 同名(동명)의 책 서문을 표현한 것이다. 니체는 이 서문에서 ‘인간이란 실로 더러운 강물일 뿐이다’고 썼다. 그는 ‘그러한 인간이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이 강물을 삼켜 버리려면 모름지기 바다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 박정희는 지옥의 문턱을 넘나든 질풍노도의 세월로도, 장기집권으로도 오염되지 않았던 혼을 자신이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 가슴을 관통한 총탄으로 등판에서는 피가 샘솟듯 하고 있을 때도 그는 옆자리에서 시중들던 여인에게 “난 괜찮으니 너희들은 피해”란 말을 하려고 했다. 병원에서 그의 屍身을 만진 의사는 “시계는 허름한 세이코이고 넥타이 핀은 도금이 벗겨지고 혁대는 해져 있어 꿈에도 대통령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소박한 정신의 소유자는 잡념과 위선의 포로가 되지 않으니 사물을 있는 그대로, 실용적으로, 정직하게 본다. 그는 주자학, 민주주의, 시장경제 같은 외래의 先進思潮(선진사조)도 국가의 이익과 민중의 복지를 기준으로 하여 비판적으로 소화하려고 했다. 박정희 주체성의 핵심은 사실에 근거하여 현실을 직시하고 是非(시비)를 국가 이익에 기준하여 가리려는 자세였다. 이것이 바로 實事求是(실사구시)의 정치철학이다. 필자가 박정희를 우리 민족사의 실용-자주 노선을 잇는 인물로 파악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金庾信(김유신)의 對唐(대당) 결전의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광해군의 國益 위주의 외교정책, 실학자들의 實事求是, 李承晩(이승만)의 反共(반공) 건국노선을 잇는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 철학은 그의 소박한 인간됨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박정희는 파란만장의 시대를 헤쳐 가면서 榮辱(영욕)과 淸濁(청탁)을 함께 들이마셨던 사람이다. 더러운 강물 같은 한 시대를 삼켜 바다와 같은 다른 시대를 빚어낸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정신을 맑게 유지했던 超人(초인)이었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호쾌한 영웅도 아니고 나폴레옹과 같은 電光石火(전광석화)의 천재도 아니었다. 부끄럼 타는 영웅이고 눈물이 많은 超人, 그리고 한 소박한 서민이었다. 그는 한국인의 애환을 느낄 줄 알고 그들의 숨결을 읽을 줄 안 土種(토종) 한국인이었다. 민족의 恨(한)을 자신의 에너지로 승화시켜 근대화로써 그 한을 푼 혁명가였다.

自主人(자주인) 박정희는 실용-자주의 정치 철학을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그릇에 담으려고 했다. ‘한국적 민주주의’란, 나이가 50세도 안 되는 어린 한국의 민주주의를 한국의 역사 발전 단계에 맞추려는 시도였다. 국민의 기본권 가운데 정치적인 자유를 제한하는 대신 물질적 자유의 확보를 위해서 國力을 집중적으로 투입한다는 限時的(한시적) 전략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인권 탄압자가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획기적으로 人權신장에 기여한 사람이다. 인권개념 가운데 적어도 50%는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일 것이고, 박정희는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다음 단계인 정신적 人權신장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당대의 대다수 지식인들이 하느님처럼 모시려고 했던 서구식 민주주의를 감히 한국식으로 변형시키려고 했던 점에 박정희의 위대성과 이단성이 있다. 주자학을 받아들여 朱子敎(주자교)로 교조화했던 한국 지식인의 사대성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民主敎(민주교)로 만들었고 이를 주체적으로 수정하려는 박정희를 이단으로 몰아붙였다. 물론 미국은 美製(미제) 이념을 위해서 충성을 다짐하는 기특한 지식인들에게 강력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냉철하게 박정희에 대해선 외경심 어린 평가를, 민주화 세력에 대해선 경멸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음을, 그의 死後 글라이스틴 대사의 보고 電文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박정희는 1급 사상가였다. 그는 말을 쉽고 적게 하고 행동을 크게 하는 사상가였다. 그는 한국의 자칭 지식인들이 갖지 못한 것들을 두루 갖춘 이였다. 자주적 정신, 실용적 사고방식, 시스템 운영의 鬼才, 정확한 언어감각 등. 1392년 조선조 개국 이후 약 600년간 이 땅의 지식인들은 사대주의를 추종하면서 자주국방 의지를 잃었고, 그러다 보니 전쟁의 의미를 직시하고 군대의 중요성을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을 거세당하고 말았다. 제대로 된 나라의 지도층은 文武兼全(문무겸전)일 수밖에 없는데 우리의 지도층은 문약한 반쪽 지식인들이었다. 그런 2, 3류 지식인들이 취할 길은 위선적 명분론과 무조건적인 평화론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선각자가 나타나면 이단이라 몰았고 적어도 그런 모함의 기술에서는 1류였다.

박정희는 日帝의 군사 교육과 한국전쟁의 체험을 통해서 전쟁과 군대의 본질을 체험한 바탕에서 600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 사회에 尙武정신과 자주정신과 실용정치의 불씨를 되살렸던 것이다. 全斗煥 대통령이 퇴임한 1988년에 군사정권 시대는 끝났고 그 뒤에 우리 사회는 다시 尙武·자주·실용정신의 불씨를 꺼버리고 조선조의 파당성·문약성·명분론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 복고풍이 견제되지 않으면 우리는 자유통일과 일류국가의 꿈을 접어야 할 것이다. 한국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네 대통령의 영도 하에서 국민들의 평균 수준보다는 훨씬 앞서서 一流 국가의 문턱까지 갔으나 3代에 걸친 소위 文民 대통령의 등장으로 성장의 動力과 국가의 기강이 약화되어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1997년 IMF 관리 체제를 가져온 外換위기는 1988년부터 시작된 민주화 과정의 비싼 代價였다. 1988년에 순채권국 상태, 무역 흑자 세계 제4위, 경제 성장률 세계 제1위의 튼튼한 대한민국을 물려준 歷代 군사정권에 대해서 오늘날 국가 위기의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세종대왕에게 한글 전용의 폐해 책임을 묻는 것만큼이나 사리에 맞지 않다.
1987년 이후 한국의 민주화는 지역 이익, 개인 이익, 당파 이익을 민주, 자유, 평등, 인권이란 명분으로 위장하여 이것들을 끝없이 추구함으로써 國益과 효율성, 그리고 국가엘리트층을 해체하고 파괴해 간 과정이기도 했다. 박정희의 근대화는 國益 우선의 부국강병책이었다. 한국의 민주화는 사회의 좌경화·저질화를 허용함으로써 박정희의 꿈이었던 강건·실질·소박한 국가건설은 어려워졌다. 한국의 민주화는 조선조적 守舊性을 되살리고 사이비 좌익에 농락됨으로써 국가위기를 불렀다. 싱가포르의 李光耀는 한국의 민주화 속도가 너무 빨라 法治의 기반을 다지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한국적 민주주의’를 한국식 민주주의, 더 나아가서 한국형 민주주의로 국산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서구 민주주의를 우리 것으로 토착화시켜 우리의 역사적·문화적 생리에 맞는 한국형 제도로 발전시켜 가는 것은 이제 미래 세대의 임무가 되었다. 서구에서 유래한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우리 것으로 소화하여 한국형 민주주의와 한국식 시장경제로 재창조할 수 있는가, 아니면 民主의 껍데기만 받아들여 우상 숭배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선동가의 놀음판을 만들 것인가, 이것이 박정희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조선일보와 月刊朝鮮에서 9년간 이어졌던 이 傳記 연재는 月刊朝鮮 전 기자 李東昱 씨의 주야 불문의 충실한 취재 지원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울러 많은 자료를 보내 주시고 提報를 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린다. 이 책은 박정희와 함께 위대한 시대를 만든 분들의 공동작품이다. 필자에게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박정희가 소년기에 나폴레옹 傳記를 읽고서 군인의 길을 갈 결심을 했던 것처럼 누군가가 이 박정희 傳記를 읽고서 지도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21세기형 박정희가 되어 이 나라를 ‘소박하고 근면한, 자주독립·통일된 선진국’으로 밀어 올리는 날을 기대해 보는 것이다.

2006년 12월
趙甲濟


출처 : *趙甲濟의 '朴正熙 傳記'(全13권)의 마지막 권

 

 

 

카라얀 / 베를린필의 1974년도 녹음

리하르드 스트라우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