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화폭의 예술

스물세 살, 살림도 내조도 겪을 만큼 겪었소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19]

淸山에 2012. 7. 23. 12:40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19]

스물세 살, 살림도 내조도 겪을 만큼 겪었소
손철주 미술평론가 
 

 

 


 '여인 초상'… 전(傳) 채용신 그림, 비단에 채색,

124×64㎝, 1912년, 육군박물관 소장.

 

그림 오른쪽 귀퉁이에 적힌 작은 글씨로 보면, 스물세 살 먹은 여인의 초상이다. 신분도 곁에 씌어 있다. '숙부인(淑夫人) 장흥(長興) 마씨(馬氏)의 모습'이란다. 하지만 이 정도 귀띔으로는 그녀가 어느 벼슬자리에 있던 누구의 아내였는지, 알아내기 어렵다. 그린 이도 딱히 밝혀지지 않았다. 필치로 따져보건대 한말(韓末) 무관 출신인 극세필(極細筆) 화가 채용신의 작품과 매우 닮았다. 전문가들은 그의 작품으로 일컫기도 한다.

 

먼저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의 생김새를 보자. 반듯하게 가르마를 타서 곱게 빗질한 머리칼이 흐트러짐이 없다. 목덜미께 쪽찐 머리로 비녀를 얌전히 질렀다. 연두색 어룽진 저고리는 길고, 가슴에 여민 고름은 넓다. 넉넉하게 자줏빛 회장(回裝)을 두른 소매 사이로 속저고리가 살짝 보인다. 치마허리는 품 넓은 저고리에 가려졌고 가운데 치마끈은 무릎 아래로 늘어뜨렸다. 짙은 쪽빛 치마가 앉음새에 따라 주름지고 부풀었는데 서 있어도 신발을 가릴 만큼 길다. 연붉은색 자리에 불수감(佛手柑)처럼 끝이 갈라진 열매 무늬가 든 것도 이채롭다.

 

여인은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 똑바로 앞을 본다. 치켜뜨지 않았는데도 눈매가 심상찮다. 다소곳하다기보다 언뜻 내주장(內主張)이 비친다. 몸가짐은 조신한데, 곧은 콧날과 다문 입술에서 풍기는 심지가 단단히 여물었다. 그녀 나이 스물세 살이라 했다. 옛적 그 나이 아내들은 벌써 남편 치다꺼리에 이골이 나고 살림살이에 능란했다. 무릎 위에 놓인 종잇조각은 뭘까. 한자가 적혔는데, 풀이하면 이렇다. '개국(開國) 499년 뒤인 경인년(1890) 음력 11월 28일 저녁 8시 무렵 태어나다.' 여인은 호패(號牌)가 없다. 대신 그녀는 생년일시만 적은 '주민등록증'을 제 손으로 만들어 꼭 쥐었다. 여인의 존재감이 불현듯 당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