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파헤친 歷史

백두산 둘러싼 동북공정의 진실

淸山에 2012. 7. 19. 16:40

 

 

  

 

백두산 둘러싼 동북공정의 진실

 

 

 

 

SBS스페셜 '역사전쟁- 백두가 장백인가: 백두산정계비의 진실'(SBS 밤 11.10)
우리는 '민족의 영산'이라 숭상하고, 중국은 '청조(淸朝)의 발상지'라 주장하는 백두산. 우리는 '백두'로, 그들은 '장백'이라 부른다.
SBS가 광복절 특집으로 민족의 영산 백두산의 기원과 역사를 대해 집중 조명한다.

2007년 중국은 '남북한의 중국 장백산 도모 행위에 대한 연구 보고' 라는 문서를 통해 "원래 중국 영토였던 장백산을, 남북한이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자신들의 역사라 우기면서 중국을 매도하고 있다"며 동북공정 계획을 드러냈다.
 
여기에는 길림성 경내에 '백두산'으로 등록된 상호 명을 취소시키라는 지침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동북공정이 단지 몇 년 사이 중국이 쏟아내는 허무맹랑한 수준의 궤변을 넘어서고 있는 지금,
지리와 지명의 역사적 고찰이 부족한 까닭에 발생한 오류들을 짚어본다.
 
제작진은 중국과 일본의 변조되고 왜곡된 문서와 사료들을 꼼꼼히 살펴 여러 의문들을 해결할 단서를 추적했다.
 
 
 

 

 

 

 

 

광복절 특집 “역사전쟁- 백두가 장백인가”


 방송: 2011년 8월 14일(일) 밤 11시 10분
 SBS-TV에서는 오는 14일에
 광복절특집 SBS스페셜 《역사전쟁- 백두가 장백인가: 백두산정계비의 진실》을 방송한다.


 논란의 주인공은 산이다.
우리는 ‘민족의 영산’이라 숭상하고, 저들은 ‘청조(淸朝)의 발상지’라 주장하는 하나의 산. 우리가 “백두”라 부르는 이 산을 저들은 “장백”이라 한다.

 

산의 남쪽에는 ‘비(碑)’가 있었다.
 원래 이름은 강원비(江原碑)로, 압록강과 토문강(土門江)의 원류를 표시하여 이 강을 조-청 간의 국경으로 삼을 목적을 지녔다. 그러나 1712년, 이 강원비를 세운 청나라 오라(길림)총관 목극등은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착각하였고, 그래서 두만강 원류에 비석을 세운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조선 측 접반사 박권이 이러한 오류를 지적하였지만 목극등은 무시하였고, 마침내 간도 지역을 둘러싼 비극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0여년이 지난 1931년 7월 29일. 바로 전날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비석이 밤새 소리 없이 사라졌다. 학계에서는 일제의 소행일 거라는 추측이 일반적인 가운데, 현재는 이 비석의 효력을 두고 한-중-일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한 상태다. 이른 바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 조선인들은 이 산이 우리 땅이기도 하고, 저들 땅이기도 하다고 인식하였다.

이 산에 대한 등정 기록을 먼저 남긴 것은 청나라였다.


 1677년, “조종의 발상지에 가서 존숭의 예를 행하라”는 강희제의 명으로 청나라 대신(大臣) 무목눌이 이 산을 답사한 뒤 최초의 백두산 등정 기록을 남겼다. 보이는 곳이 다 흰빛이고 산 정상에는 못이 있어 둘레가 약 30~40리이며, 산 높이는 약 100여리,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있다고 하였다. 과연 백두산일 법 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청나라 일행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등정하였고, 산의 남쪽 기슭에 대해 유독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백두산 남쪽은 조선 땅으로, 대규모 사신 일행이 우리의 허가 없이 며칠을 머물며 통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 헌데 조선 측의 어떠한 문서에도 이에 해당하는 기록이 남겨진 바 없으며, 이에 대해 아는 바도 없었다. 사실이라면 외교상의 중대한 과실로, 저들은 무단으로 남의 영토를 침범한 셈이다.

여기서 제작진은, 전혀 다른 의문을 품게 되었다.


저들이 오른 곳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두산이 맞는가. 행여, 지세가 아주 유사한, 다른 산은 아닌가.
의문이 짙어질 즈음, 성경통지(盛京通志)에 수록된 지도 한 장이 발견되었다.
 ‘장백’산을 그렸다는 이 지도에는 재미있는 강줄기들이 등장한다.


산의 정체가 불분명하다면, 산을 타고 흐르는 강줄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뜻밖에, 여기에 등장하는 강들은 다른 곳에도 있었다. 아니, 여기저기에 있었다. 혼동강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혼동강이 한때는 압록수였고, 한때는 지금의 이통하(伊通河)였고, 또 한때는 용강산맥(龍崗山脈) 발원의 강줄기였다. 토문강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산과 강의 지명이 이리저리 옮겨 다닌 것은 비단 중국 역사 속에서만 일어난 일도 아니며, 옆 나라에 동일한 이름을 가진 산이나 강이 여러 개 있는 것도 우리가 야단할 바 아니다. 그런데 하필 이렇게 논쟁의 소지가 다분한 지명들이 산재해 있는 곳이 우리와 중국의 국경 지대라는 점에 문제가 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인가.


 아니라면,
 의도가 있는 것인가.


 2007년, 중국은 ‘남북한의 중국 장백산 도모행위에 대한 연구보고’ 라는 문서를 통해 “원래 중국 영토였던 장백산을, 남북한이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자신들의 역사라 우기면서 중국을 매도하고 있다” 고 강조하며 한층 과격해진 동북 공정 계획을 드러내었다. 이 계획에는 길림성 경내에 ‘백두산’으로 등록된 상호 명을 취소시키라는 지침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동북 공정이라는 단어는 이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지만
 만약 이것이 단지 근 몇 년 사이에 중국이 쏟아내는 허무맹랑한 수준의 궤변을 넘어서
 지리-지명의 역사적 고찰이 부족한 까닭에 덧붙여진 역사적 오류가 그 근원이었다면?


하여, 제작진은 이 프로그램 내에서
중국과 일제 측의 변조되고 왜곡된 문서와 사료들을 꼼꼼히 되짚어가며
 원 사료를 통해 앞서 제기하였던 섬뜩한 의문들을 해결할 단서를 추적할 것이다.
 더불어 ‘유조변’으로 통칭되는 간도 일대의 그 중립 지역적 성격과 소유권 문제를 다룰 것이다.

 1885년 을유 감계담판 당시, 혼자서 네 명의 청나라 대표를 상대하던
조선 대표 이중하 선생은 이렇게 외쳤다. “백두와 장백은 2산인가 1산인가!”
 그 날, 담판의 소란스러움 속에 묻혀버렸던 못 다한 말을
 65주년 광복절을 앞둔 오늘, 제작진이 이어가려 한다.

 

 

http://wizard2.sbs.co.kr/w3/template/tp1_review_detail.jsp?vVodId=V0000311936&vProgId=1000126&vMenuId=1002036&vVodCnt1=00258&vVodCnt2=00

 

 

 

 

 

白頭山 天池 (panoramic view)*




산 - 허윤석 시. 조두남 곡

테너 신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