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초등학교를 열 살에 들어갔고 겨우 3학년을 다니고 그만 두었다
어머니는 연필을 들어야 할 언니 손에 호미를 들려 밭으로 내 보냈고,
아버지는 책가방을 멜 언니의 어깨에 양철 물통을 지어 옹달샘으로 보냈다
그러다 언니는 겨우 열네 살 나이에 봉제공장으로 보내졌다
보조를 한 첫 봉급으로 남동생에게는 장난감 총을, 내게는 스케치북을 사서 보내왔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빨간 내복을 보내왔다
산에는 온통 산딸기가 붉게 익어가던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언니가 잔업근무를 하며 재봉틀에 고향을, 달빛을 돌리며 눈물을 짓든 말든,
언니가 철야근무를 하며 빵 하나로 허기를 달래든 말든 어머니는 부쳐오는 봉급이 적다며 투덜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회사에서 수기공모전을 열었는데 수백 명 중에서 언니가 대상을 받았다는 편지가 왔다
상금은 따로 없고 대신 라디오를 상으로 받았노라며 스스로를 대견해하는 들뜬 편지였다
글을 모르던 까막눈의 어머니께 내가 편지를 대신 읽어주었다
"라디오는 무슨 라디오여, 느그 아부지 라디오 듣고 있는 것도 신물이 나는구먼,
돈이나 줄 것이지 만고에 쓸데없는 라디오는 무슨 라디오여"
어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쌩하니 부엌으로 들어가 아궁이를 부지깽이로 쑤셔댔다
언니의 환한 웃음이 눈물로 바뀌어 장작 속으로 타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나중에 글을 쓰고 싶어, 작가는 못 되겠지만 내가 살아온 것들을 글로 쓰고 싶어'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해서 아등바등 살며서도 언니는 언니의 소박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매일같이 라디오를 들으며 무엇가를 긁적엿다
'라디오 방송에서 소개되는 사연들을 들으면 정말 눈물이 날 때도 많고,
때로는 웃을 때도 많아. 그리고 나보다 더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절로 힘이 나기도 하지'
언젠가부터 언니는 <여성시대>에 글을 보내 볼 거라고 했다
한글도 다 모르고 문장력이 딸려 어느 누가 뽑아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꼭 한번은
자신의 이야기 한 토막이 세상 사람들 귀에 하나의 희망의 불씨로 보여지기를 소망했다
반드시 그런 날이 올 거라고 나는 응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못생긴 우리 언니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세 살배기 아들을 등에 업고 식당으로 일을 나갔습니다
식당에 달린 한 평도 안 되는 방구석에 잠이 든 아들을 눕혀 놓고 설거지를 했습니다
아들이 깨어 울음소리가 나면 주인아주머니는 시끄러워 죽껬다며 있는 대로 짜증을 부렸습니다
그래도 저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천지에 내 아들 봐 줄 사람 하나 없고
아들을 위해서라도 이를 악물고 살아야 했으니까요
남편이 집을 나간 지 두 달이 넘어 갑니다
남들은 그만 이혼해버리라고 쉽게 말하지만 그래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내 남편이고
아이의 아빠인데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참고 살다보면 언젠가는 분명히 좋은날도 오겠지요
이 고생이 행복이 되어 제게 찾아올 날도 오겠지요'
'남편은 목수입니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다던 사람이라는데, 그래서 목수가 되었다는데,
선을 봐서 결혼을 하고 얼마 후부터 남편은 전혀 일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만화만 보며 놀았습니다
그나마도 술이나 먹어가며 속을 썩이지는 않으니까 얼마나 다행이냐 싶어
하루에도 수십 번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린 아들을 끌어안고 참으며 살아왔는데
남편은 3일 전에 방세 주려고 숨겨두었던 돈을 가지고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이 어린 자식을 데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하염없이 눈물만 흐릅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렇듯 곱고 착하게 자라나고 있는 자식과 어찌하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저를 두고 모질게도 스스로 생을 마감해버렸습니다
제 아비의 그런 마지막을 목격한 아들은 소리도 내지 않고 울었습니다
원망과 미움이 뒤셖인 아들의 눈물에서는 겨울바람보다 더 시린 얼음바람이 부는 듯 보였습니다
죽어도 가시지 않을 이 고통을 우리 모자는 어떻게 감당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언니가 남겨 놓은 노트에는 수없이 썼다가 지우고 다시 또 쓰고서도 막상 보내지 못한
<여성시대>로 보내고 싶었던 편지들로 빼곡했다
이미 오래 전에 고장이 났지만 먼지 하나 없이 닦아 텔레비전위에 올려놓은,
열일곱 살 때 회사 수기공모전에서 받았다는 언니의 라디오를 만져 보았다
라디오에는
'대상 장 명희'라고 아직 까만 글자가 선명했다
마치 언니의 몸인 듯 체온이 따스하게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이 라디오를 받고 언니는 얼마나 좋아했을까
학교를 제대로 다닌 적이 없었으니 아마도 언니가 언니 평생에 받은 상이라고는 이 라디오가 유일했겠지.
하여 언니에게는 그 무엇보다 자랑스럽고 소중한 보물이 었겠지
나는 그 오래전에 돌아가시며 남겨 놓고 간 아버지의 라디오와 일기공책을 챙겼듯이,
언니의 라디오 두개와 노트를 챙겼다
아버지의 라디오와 일기공책은 이미 읽어버렸지만 언니의 라디오와 노트는
무슨일이 있어도 잃어버리지 않겠노라고 나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하여 언니 대신에 꼭 한번은 <여성시대>로 착하디 착했던 언니 이름을 보내야지 마음먹었다
지금 우리 언니는 봄날 환한 목련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겠지.
이렇게라도 언니를 대신하여 언니의 이름을 <여성시대>로 보내는 나를 보며 기쁘게 웃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