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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 도독 추대된 형에게 “조용히 장사나 하시라”

淸山에 2012. 7. 2. 17:10

 

 

 

 

 

쑨원, 도독 추대된 형에게 “조용히 장사나 하시라”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76>

 

 

 

1922년 6월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의 대원수부(大元帥府)에서 경호원들과 함께한 쑨원과 쑹칭링

(宋慶齡·송경령) 부부. [사진 김명호] 


1940년 3월 중국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 제143차 회의는 쑨원(孫文·손문)에게 국부(國父) 칭호를 부여하기로 의결했다.
중국 공산당도 쑨원에 대한 예의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관방 명의로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중국의 국부로 규정한 적은 없지만 모든 공식 문서에 ‘민주혁명의 선구자(先行者)’라는 말을 쑨원의 이름 앞에 꼭 붙인다.

 

쑨원이 국·공 양당에서 추앙받는 이유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친인척 관리도 그중 하나다. 쑨원은 형과 누나가 한 명씩 있었다. 형 쑨메이(孫眉·손미)는 열일곱 살 때 하와이에 건너가 개간과 목축업으로 부를 축적한 거부였다. 화교 사이에 영향력도 굉장했다. 중국인들이 마오이다오(茂宜島)라고 부르는 하와이 제2의 섬 마우이에서 왕(王)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쑨메이는 동생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1894년 쑨원이 호놀룰루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창립했을 때 제일 먼저 입회원서를 제출했고, 거사 자금을 조달하느라 수십 년간 경영하던 사업이 거덜나도 원망하는 법이 없었다.

 

신해혁명 후 민국정부가 수립되고 쑨원이 임시대총통에 선출되자 광둥(廣東)의 명망가들이 쑨메이를 성(省) 도독(都督)에 추대했다. 쑨원은 혼비백산했다. 당일로 광둥의 사회단체와 언론기관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는 전문을 보냈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형님은 질박하고 정직한 사람이다. 정치가 뭔지 모르고 소질도 없다. 도독은 막중한 자리다. 재능이 부족하고 남이 뭐라면 무조건 고개만 끄덕이는 사람이 갈 자리가 아니다.”

 

홍콩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쑨메이에게도 전보를 보냈다. “광둥 사람들이 형을 도독으로 추대하려 한다. 형이 정치 무대에 나서면 만인의 주목을 받게 된다. 우쭐대다 실수하기 십상이다.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패가망신하지 않으려면 조용히 장사나 하며 먹고살 길을 찾도록 해라.” 쑨메이는 동생의 권고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1915년 마카오에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칩거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쑨원의 형으로서 손색없었다.

 

쑨원은 누나 쑨먀오촨(孫妙茜.손묘천)과 우애가 돈독했다. 망명 시절 주변 사람들에게 지난날을 회상할 때마다 누나 얘기를 빠트리는 법이 없었다. “나보다 세 살 많은 누님이 고향에 한 분 있다.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누나 따라 산에 가서 나무하고 풀 벨 때가 그립다. 나를 끔찍이도 아끼며 보살펴줬다. 감사한 마음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먀오촨에게 싱충(杏冲.행충)이라는 외아들이 있었다. 쑨원이 임시대총통에 선출되자 “빨리 찾아가서 멋진 일자리 구해보라”고 권하는 사람이 많았다. 싱충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외삼촌이 있는 난징(南京)은 여기서 너무 멀다. 내가 가면 농사지을 사람이 없다. 다시는 그런 얘기 꺼내지 마라. 우리 엄마가 알면 큰일난다.”

 

1923년 쑨원이 광저우(廣州)에서 대원수(大元帥)에 취임했을 때 먀오촨이 고향 산나물 들고 찾아온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남매는 이 얘기 저 얘기로 한밤을 꼬박 새웠다. 쑨원이 조카의 근황을 묻자 먀오촨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생활이 말이 아니다. 하는 일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니 보기에 안쓰럽다. 적당한 일자리가 있을지 네가 한번 알아봐라.”

 

생전 부탁 한번 해본 적 없는 누나의 완곡한 청을 쑨원은 “농사일도 제대로 못하는 놈이 뭐 하난들 제대로 하겠느냐”며 거절했다.

쑨원은 법적으로 문제 될 게 없는 일이라도 형제나 조카들을 위해 천박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자신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대신 혁명 과정에서 희생된 열사들의 가족이나 후손에 관한 일이라면 뭐든지 해주려고 안절부절못했다. 붓글씨를 팔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 일쑤였다. 담보가 없어 쩔쩔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