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 소년병’의 눈물 21일 오후 대구 남구 낙동강승전기념관에서 열린 ‘제15회 6·25참전 순국 소년지원병 2573위 위령제’에 나온 백발의 참가자가 박태승 소년병 중앙회장의 추도사를 들으며 눈물을 닦고 있다.
/남강호 기자 kangho@chosun.com
이 와중에 몇몇 군인이 백사장으로 올라 가져온 로프를 나무에 묶었고 이때부터 배에 남은 소년병들은 줄을 타고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 김경환씨는 "팔힘이 약한 한 소년병이 줄을 놓쳐 바다에 떨어지는 모습을 봤다. 수십명이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숨졌다"고 전했다.
백사장에 오른 나머지 유격대원들은 곧장 구덩이를 파 몸을 숨겼고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당시 소년병들에게 주어진 것은 소총과 실탄 200발, 수류탄 2발, 우의, 배낭 등이 전부였다. 소년병들은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인민군 1만명과 치열하게 싸웠다. 또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며 적 진지를 파괴하고, 도로와 교량을 폭파했다.
상륙 다음날 맥아더 사령부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고 19일 새벽 유격대원들은 함정을 타고 부산으로 철수했다.
이씨는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심정으로 나선 소년병들 덕에 당시 인민군에게 포위돼 있던 우리 군 3사단 22연대가 구출됐다"고 했다.
상륙작전을 성공리에 마친 유격대는 이후 북진에 나섰지만 강원도 화천에서 맞닥뜨린 인민군 1개 사단에 패해 대부분이 전사했다. 김씨는 "당시 불에 탄 시체가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내장을 쏟아낸 시체도 즐비했다. 우리는 전사자들을 버려두고 후퇴했다"고 했다. 그는 60년 전의 일이 지금도 생생한 듯 울먹였다.
21일 오후 대구 남구 낙동강승전기념관에서 열린 ‘제15회 6·25참전 순국 소년지원병 2573위 위령제’에 참석한 소년병 정수민, 김경환, 이천수(왼쪽부터)씨가 전승기념관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남강호 기자
이후 이들은 유격대가 해산하면서 각자 다른 부대로 흩어져 전투를 계속했다. 2사단에 편성된 정씨는 중부전선에서 중공군과 싸우다 포탄 파편에 맞아 왼쪽 허벅지와 겨드랑이 등을 다쳤고, 오른발에 총알 관통상을 당했다. 야전병원으로 후송된 그는 1951년 11월 하사로 제대했다.
김씨는 1953년 10월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에 참가해 화랑무공훈장을 받았고 이듬해 6월 북파특수부대인 8731부대에서 일등중사로 전역했다. 그의 나이 불과 스무 살이었다. 이씨도 스물한 살의 나이인 1954년 3월 일등중사로 전역했다.
21일 오전 11시 30분 대구 남구 낙동강승전기념관에선 제15회 6·25 참전 순국소년병 위령제가 열렸다. 이날 행사엔 김씨와 정씨, 이씨 등을 포함해 150여명의 소년병이 참석했다. 국방부는 사상 처음으로 이번 위령제에 장관 명의의 추모사를 보냈다. 추모사가 낭독되자 백발이 돼버린 소년병 몇몇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눈물을 흘렸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이도 있었다.
이천수씨는 "기초훈련을 받을 당시 한 장교는 '너희들이 죽어야 나라를 구할 수 있다.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우리를 전쟁터로 몰아넣었다"며 "우리는 목숨 바쳐 나라를 구했다. 훗날 우리를 기억할 수 있는 작은 추모시설이라도 만들어진다면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