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한국전쟁 史

총탄에 뚫린 수통, 허리 꺾인 병사… 피로 지켜낸 '철원 고지'

淸山에 2012. 6. 22. 06:17

 

 

 

 

 

[6·25전쟁 62년] 총탄에 뚫린 수통, 허리 꺾인 병사… 피로 지켜낸 '철원 고지'
철원=홍서표 기자
이메일hsp@chosun.com

 

 


 

1951년 국군·중공군 네차례 뺏기고 빼앗아… 유해 발굴로 재구성한 '735고지 혈투'
유해 옆엔 채 쏘지못한 탄창이… - 반합 뚜껑엔 0166446 군번
곳곳에 포탄, 백병전 쓰인 대검… 그날의 피비린내 짐작케 해
철원군 지켜낸 '고지戰 용사들' - 중공군 인해전술에 결사항전
한 중대에 생존자 6명도… 戰史엔 "시체가 언덕 이뤘다"


유해를 봐서는 몸이 어떻게 부서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신었던 군화만이 이것이 국군의 유해임을 짐작하게 했다. 유해 옆에선 이 군인이 미처 M1 소총에 장착하지 못한 8개들이 탄창 1클립과 5개의 탄피가 함께 발견됐다. 사람들은 그 밑에 꽃 한 송이를 놨다.

 

21일 오전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 735고지. 6·25 전쟁 당시 방어를 위해 파 놓은 8부 능선의 개인 참호에서 아군 유해 1구가 발견됐다. 61년 만에 그의 유해 주변에서 발견된 반합 뚜껑에는 '0166446'이라는 군번이 새겨져 있었다.

 


 (위 사진)735고지에서 발견된 수통은 적탄에 참혹하게 뚫려 있었다. 유해발굴단은“수통 소지자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735고지 전투의 치열함을 짐작하게 한다. (아래 사진)21일 오전 강원도 철원군 735고지에서 발굴된 아군 유해는 포탄에 당한 듯 처참하게 허리가 꺾여 있었다. 유해 옆에서는 군화와 미처 쓰지 못한 탄창 1클립이 발견됐다. /국방부 유해발굴단 제공·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중공군이 발포한 105㎜ 포탄에 직격당한 것 같습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주경배 발굴과장이 유해 상태를 설명했다. 유해는 다리가 머리 쪽으로 향한 채 허리가 꺾여 있었다. 손과 발, 갈비뼈는 모두 사라졌다. 팔·다리, 두개골 정도만 보전됐다. 전투화 속에선 발가락뼈 몇 조각이 나왔다.

 

이곳은 전쟁 발발 1년이 지나고 국군 2사단과 중공군이 서로 뺏고 빼앗기는 네 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피로 물들인 고지다. 이 고지의 실제 높이는 해발 735m였지만 수많은 포격으로 높이가 1m 낮아져서 실제 높이는 734m라고 한다.

 

지난 1951년 6월 26일 새벽. 국군 2사단 17연대는 735고지 탈환을 위한 총공세를 가했다. 3일간 공격으로 아군은 6월 28일 735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바로 다음 날인 29일 대대적인 중공군의 야간 기습에 당해 탈환한 고지를 적에게 내줘야 했다. 이것이 735고지 1차 전투다. 군 관계자들은 무명군인이 이때 숨진 것으로 추정했다. 발굴과장은 "급하게 후퇴하느라 포탄에 숨진 전우의 시신을 수습하지도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의 증거는 곳곳에서 나왔다. 한 국군의 수통은 총탄에 뚫려 있었다. 중공군의 총탄은 수통을 찬 아군 병사의 허리까지 단번에 꿰뚫었을 것이다. 현장에선 아군 수류탄과 함께 중공군이 사용했던 방망이 형태의 수류탄도 다수 나왔다.

 

이 고지는 아군에게는 북진을 위해 탈환해야 하는 목표였고 적군에겐 아군의 전진을 저지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였다.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요충지였다.

 

고지를 빼앗긴 국군은 그해 8월 탈환을 결정했다. 8월 2일 여명을 기해 2사단 유격대대가 735고지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고지에서 쏟아지는 수류탄과 총탄 세례를 정면으로 받아 실패했다. 이에 2사단은 8월 8일 오전 3시 1개 중대를 몰래 침투시키는 등 정면과 측면을 동시에 공격하는 작전으로 결국 고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2차 전투였다. 현장에선 철제 계급장, 라이터, 소중하게 간직했던 만년필, 치약과 칫솔, 숟가락과 포크가 쏟아져 나왔다. 총공세를 펼치던 아군이 적의 총탄에 쓰러지면서 남긴 유품들이다.

 

3차 전투는 고지 탈환 한 달도 안 돼 벌어졌다. 1대대로부터 고지를 인수받은 2대대 7중대 병력 100여명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결사 항전으로 맞섰다. 그러나 끝없이 밀려오는 적은 고지 9부 능선까지 올라왔고 마침내 피비린내 나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이날 현장에선 '9271514'라는 숫자가 적힌 아군의 대검이 발견됐다. 발굴과장은 "병사가 죽음을 예감하고 대검에 자신을 알리는 단서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 의미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7중대장 김영국 대위는 적군 속으로 뛰어들어 5명을 총검으로 쓰러뜨렸지만 적탄에 전사했다. 몰살 위기에 몰린 아군은 다음 날 오전 1개 중대병력이 지원되면서 간신히 고지를 지켰다. 지원병 도착 당시 7중대에 남은 인원은 6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전사(戰史)는 당시의 혈전을 '수많은 적이 아군의 화망(火網)에 걸려 시체의 언덕을 이뤘고, 고지는 폭연(爆煙)으로 가득 찼다'고 기록하고 있다.

2사단은 그해 9월 21일 항공기의 지원 속에 735고지 왼쪽 전방 633고지를 공격해 점령했으며 계속 북진해 1㎞를 더 진출했다. 지금의 최전방이 만들어진 735고지 4차 전투였다.

 

네 차례의 전투에서 국군은 중공군 1000여명을 사살하고 80여명을 생포했다. 아군도 수백 명이 숨지는 피해를 입었지만 정확한 사망자 집계는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 2010년부터 시작된 735고지 유해 발굴에서는 202구가 수습됐다. 이 중 3구는 중공군, 1구는 미군으로 신원이 확인됐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주경배 발굴과장은 "735고지를 빼앗겼다면 지금의 철원군은 북한 땅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방부가 찾아야 하는 6·25 전쟁 관련 유해는 13만구로 추산되며, 지금까지 6600구 정도가 발견됐다. 신원이 확인돼 유족의 품으로 돌아간 유해는 79구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