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를 보면 성격-건강-정신적 상태까지 파악할 수 있다고?
국과수 필적 감정의 세계를 들여다보다
사람의 필적엔 성장과정을 거치면서 생겨난 고유한 습성이 반영된다. 글자의 모양새와 자획구성, 필순, 필압 등
필적 특징을 살피면 ‘당신’을 들여다볼 수 있을지 모른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한창이던 2007년 1월. 일부 언론에서 한미 FTA 고위급 협의 결과가 담긴 비밀문건 내용을 보도했다. 한국 협상단이 발칵 뒤집혔다. 미국과의 ‘포커게임’에서 패를 보여준 꼴이라 비상이 걸렸다. “보도를 꼼꼼하게 잘 챙겨봤다”는 미국 협상단 수석대표의 한마디는 아픈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여론이 들끓자 국회는 대외비 문서 유출사건 조사소위원회(조사소위)를 구성해 유출자 확인에 나섰다. 그런데 문제는 유출자를 밝혀낼 증거가 없다는 점이었다. 사건이 미궁에 빠질 무렵 작은 단서가 발견됐다. 언론에 흘러간 유출 문건 사본의 한 귀퉁이에 누군가가 흘려 쓴 메모가 있었다.
조사소위는 메모를 적은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 협상 전 문건을 살펴봤던 의원과 보좌진, 사무처 관계자 등의 필적을 확보했다. 확보한 필적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넘겨졌고 국과수는 바로 감정에 들어갔다.
○ 필적이 성격도 반영한다?
유출된FTA문건에 적힌 메모의 필적(위)과 확보한 정모 비서관의 필적(아래),
글자의 균형과 각도, 집필 상태 등이 상당히 유사하다.
처음 국과수가 넘겨받은 필적은 34개. 하지만 메모의 필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판정이 나왔다. 남은 것은 추가로 접수된 필적 단 하나뿐. 그런데 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마지막 필적이 메모의 그것과 상당 부분 일치했다. 다음은 국과수가 조사소위에 통보한 감정 결과 중 일부.
‘흘림체로 썼음에도 글씨에 균형과 조화성이 있다. 각도 및 곡획 등에서도 메모의 필적과 상당히 유사성이 있다. 특히 ‘유’ ‘보’ ‘법’ 등의 글자에서 공통된 특성이 발견된다.’
이 결과엔 ‘원본이 아닌 데다 복사나 팩스 전송 등으로 필적의 왜곡 현상이 발생해 동일한 필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단서가 달렸다. 하지만 필적의 주인을 용의선상에 올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 결과 용의자로 특정된 인물은 당시 최재천 열린우리당 의원의 비서관이었던 정모 씨. 국과수의 감정 결과는 이후 검찰 조사에서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됐고 정 씨는 2009년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9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사람은 글씨 쓰는 법을 어떻게 배울까. 어릴 때 처음 글씨를 접하면 그것을 따라 ‘그리지만’ 어느 순간 무의식적으로 글을 ‘쓰게’ 된다는 게 대부분 학자들의 견해다. 오랜 세월 반복해 글을 쓰면 개인만의 고유한 글쓰기 습성이 생긴다. 그런 습성은 마치 지문처럼 개개인의 고유한 특징이 된다. 미국 우편연구소가 쌍둥이 500명을 대상으로 필적을 조사한 적이 있다. 실험 결과 문서감정 전문가들은 ‘일란성 쌍둥이라 할지라도 완전히 동일한 글씨체는 나오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개인의 필적 개성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다양하다. 교육이나 훈련은 물론이고 환경적 정신적인 요인도 필적을 결정짓는다. 독일의 생리학자 빌헬름 프라이어는 저서에서 “필적은 대뇌가 지배하는 생리작용의 하나다. 따라서 손 입 발가락으로 글을 써도 그 특징이 일치한다. 필적은 사실상 뇌의 흔적(腦跡·뇌적)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필적은 개인의 고유한 습성이기에 그것을 통해 성격을 알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탈리아의 내과의사 카밀로 발디는 “사람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글씨를 쓰는데 그 필적을 통해 성격과 기질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심지어 ‘필적관상학’도 있다. 필적을 보고 성격은 물론이고 건강상의 문제, 도덕성, 정신적인 상태까지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198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는 필적관상학자의 감정 결과를 신입사원 채용 등에 활용하는 게 유행이 되기도 했다.
○ 고대 로마에도 필적 감정 있었다
필적 감정이란 이처럼 각 개인이 자기만의 고유한 필적 특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두 가지 이상의 필적을 두고 그것을 쓴 사람이 같은 사람인지를 판단한다.
필적 감정의 역사는 필적 위조의 역사와 궤를 함께한다. 필적 위조는 멀게는 고대 로마제국 시대부터 행해졌다. 당시 공문서나 유언장 등의 필적을 위조해 재산을 가로채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위조는 계속됐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에게 쓴 편지, 셰익스피어가 작성한 저당계약서, 20세기 미국의 억만장자 하워드 휴스 및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의 편지까지 위조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필적 감정을 할 땐 감정자료와 대조자료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감정자료는 진위가 의문시되는 필적, 대조자료는 감정자료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필적이다. 감정자료를 실제 필적의 주인이 적어놓은 글자들과 비교해 진본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다.
대조자료는 평소 필적과 시필(試筆) 두 가지로 나눈다. 평소 필적은 일기장 노트 편지 등에 쓰인, 말 그대로 평상시의 필적이다. 시필은 평소 필적을 확보하기 힘들 경우 관련자에게 글씨를 직접 쓰게 한 뒤 얻은 필적을 말한다.
필적 감정의 과정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문서의 △외관검사(문서의 종류, 용지 재질, 필기구, 잉크 등 분석)는 물론이고 △전체검사(문장의 종류, 행의 상태, 부자연스러운 필적, 위필 가능성 등 분석) △문자검사(필순, 특이한 문자, 자획의 연속 쓰기 및 생략, 종필 방향, 필압의 변화 등 분석) 등 다양한 분석 과정을 거쳐 종합해야 한다. 게다가 외적인 요인도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 날씨 등 환경적인 요인은 물론이고 필자가 알코올이나 약물 등을 섭취했는지, 사고로 인한 신체장애나 질병 등은 없는지까지 살펴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여러 감정 요소 가운데 다른 것들보다 특히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O₂’는 5명의 필적감정 전문가(양후열 국과수 문서영상과장, 윤기형 대검찰청 문서감정실장, 고주홍 중앙인영필적감정원장, 익명을 요구한 두 명의 전문가)에게 조언을 요청했다. 다음은 그들의 의견을 종합해 뽑은 필적 감정의 핵심 요소 네 가지다.
① 오자(誤字·잘못 쓴 글자)
필적감정가들은 감정 시 오자를 발견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한다. 동일한 오자가 반복해서 발견되면 필적이 일치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오자는 그만큼 눈에 띄고 또 중요한 특징이다. 한편 위조자가 작정하고 오자를 썼을 경우엔 전문가라 할지라도 그만큼 감정이 어려워질 가능성도 있다.
▶▶2009년 3월 탤런트 장자연 씨가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로부터 2년 뒤 한 방송사가 “장자연이 직접 쓴 230쪽 분량의 편지를 입수했다”고 보도하면서 세상이 떠들썩해졌다. 하지만 방송 보도 10일째 되던 날,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국과수의 필적 감정 결과 장 씨가 남겼다는 편지가 ‘가짜’로 판명돼서다.
국과수는 장 씨가 아닌,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인 전모 씨가 그 편지를 썼다고 판단했다. 이때 국과수가 가장 주목한 필적 특징이 오자. 편지 내용과 전 씨의 원래 필적을 비교한 결과 공통적으로 ‘거짖(거짓)’ ‘왜로움(외로움)’ ‘문론(물론)’ 등의 오자가 다수 발견됐다.
② 필순(筆順·글씨를 쓸 때 획의 순서)
필순은 ‘한글 쓰기의 꽃’으로 불린다. 같은 글자를 쓰더라도 다양한 필순이 있을 수 있고 그 특성이 개인마다 매우 달라서다. 한글에선 주로 ‘ㄹ’과 ‘ㅂ’을 쓰는 순서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숫자에 있어선 ‘5’ ‘8’ ‘9’를 쓰는 방법이 독특한 특징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ㅕ’와 ‘ㅛ’는 개성 있는 필순을 자주 관찰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ㅕ’를 쓸 때 하단 가로획을 먼저 긋고 상단 가로획과 세로획을 함께 긋는다든지 ‘ㅛ’를 쓸 때 오른쪽 세로획을 먼저 긋고 왼쪽 세로획과 가로획을 함께 긋는 경우를 특이한 필순으로 본다(그림 1).
③ 자획구성(字劃構成·글자를 이루는 자획의 크기와 각도, 간격)
미국의 유명 필적감정가인 앨버트 오스본은 “인간은 필기를 할 때 지속적인 필적 특징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자획구성에 주목했다. 유아기 때부터 고착돼 쉽게 고쳐지지 않고 또 외적인 상황에도 비교적 영향을 덜 받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 문서감정가들은 보통 감정 시 일단 자획의 크기와 각도, 간격부터 쭉 훑어보는 경우가 많다.
▶▶2000년 한 방송에서 산골에서 문명을 끊고 살던 10대 소녀와 아버지 이야기를 소개했다. 대중은 그 사연에 감동했고 소녀는 이후 광고모델로 기용될 만큼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이듬해 소녀가 집을 비운 사이 금품을 노린 강도가 집에 침입했다. 강도는 혼자 있던 아버지를 살해하고 수표를 훔쳤다. 얼마 뒤 수표가 은행으로 돌아왔다. 경찰은 수표에 이서된 ‘양××’란 이름을 확인하고 용의자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의 필적을 확보해 감정한 결과 수표에 이서된 이름과 동일 필적이란 결과가 나왔다. 이때 그의 필적에서 드러난 가장 큰 특징은 수직으로 길게 뻗은 세로획(그림 2). 이후 범행 일체를 털어놓은 범인 양 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소녀는 사건의 충격으로 불교에 귀의해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④접필(接筆·점획이나 자모음의 닿음)
접필 상태는 특히 위조하기 힘든 개인의 고유한 특성이다. 일본 과학경찰연구소는 “필적은 주변 환경이나 물리적인 요소 등에 따라 천태만상으로 변하지만 접필 부분만큼은 잘 변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1998년 경기 성남시에서 문건이 하나 발견됐다. 그 문건엔 북한이 당시 남한의 민중당 내 지하당 지도부에 내린 지령이 담겨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문건에 있는 필적의 주인공은 북한 조선노동당 소속 대남 공작원 출신 김동식으로 밝혀졌다. 다시 말해 진짜 북한의 지령이었다는 말이다. 김동식은 1995년 충남 부여에서 총격전 끝에 붙잡힌 뒤 전향한 사람. 지령 문건의 필적과 김동식의 자술서 필적은 접필 상태가 상당히 유사했다(그림 3).
○ 감정사의 전문성이 신뢰도를 좌우
필적 감정의 과정은 간단하지 않다. 현미경, 분광기 등 각종 기구를 이용해 수십∼수백 가지에 이르는 특성을 분석해야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사진은 양후열 국과수 문서영상과 장이 연구실에서 필적을 감정하는 모습.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동일 필적 판정을 내리게 되는 기준은 뭘까. 보통 국내에선 전체 필적의 특징을 계산해 그 가운데 동일한 필적 특징 비율이 70% 이상 나오면 동일 필적이란 결론을 내린다. 미국 등 북미권에선 감정자료와 대조자료에 공통적으로 있는 자획 상호 간 길이 비율에 큰 비중을 두고 판단한다.
그렇다 해도 기준이 사실 모호하긴 하다. 실제 한 필적전문가는 “과학수사 가운데 객관적 검증이 가장 어려운 분야가 필적 감정”이라며 “감정의 상당 부분이 감정사의 경험과 주관적 판단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했다.
결국 필적 감정은 감정사의 전문성에 따라 신뢰도가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말. 그런데 국내에는 필적 감정 전문인력이 그다지 많지 않다. 문서 감정에 대한 전문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교육기관도 없고 제대로 된 자격인증제도 역시 아직 없다.
형사사건의 경우 국과수와 대검찰청 두 곳에 감정 의뢰가 집중돼 인력이 항상 부족한 상황이다. 민사사건은 각 지방법원에 등재된 감정전문가가 처리하지만 역시 인력이 부족하긴 마찬가지. 그나마 법원에 등재하는 필적감정사의 자격요건도 모호하고 검증 역시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O₂’가 올해 한 광역시 지방고등법원에 등재된 필적감정사의 명단을 살펴본 결과
18개 감정원에 같은 수의 감정사가 소속돼 있었다. 하지만 가족 친지 친구 등이 개별 감정원의 이름으로 등재한 경우가 많았다. 실제 감정원의 수는 등재된 수치의 절반가량에 불과했다. 이렇게 중복 등재된 것을 빼면 전국 법원에 등록된 전문감정사는 20여 명에 그친다. 일각에선 일부 감정사의 전문성에 의구심도 제기한다. 법원의 원칙대로 5년 이상 국가기관연구소 문서감정실에서 근무하거나 이와 동등한 자격을 갖춘 사람에 한해서만 등재를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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