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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즉위 60주년 - 여왕이 있기에… 英, 115년 만의 경사 ‘흥청’

淸山에 2012. 6. 2. 03:54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즉위 60주년

 

영국 이달 2~5일 ‘다이아몬드 주빌리’ 축제
총리 12명과 매주 독대해왔지만 정치 불간섭 … 국가 통합 상징

 

 

 

 


1953년 6월 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된 대관식에서 엘리자베스 2세가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을 쓰고 있다(맨 위). 아래 두 장은 1967년과 86년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오른쪽 사진은 지난달 9일 연설을 하기 위해 의회에 참석한 엘리자베스 2세. [중앙포토, AP=연합뉴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가 영국에서 2일부터 나흘간 펼쳐진다. 평일인 4일과 5일은 휴일로 정해졌다. 이 기간 영국 전역은 영국 국기인 유니언잭으로 뒤덮인다. 영국 국민의 왕실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여왕이 국민으로부터 변함없이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이유, 엘리자베스 2세 시대 60년의 역사, 향후 왕위 승계의 전망 등을 살펴봤다.


 “그것은 큰 도박이었다.” BBC 방송의 국내 담당 에디터 마크 이스턴은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서 1953년 6월 2일에 열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성대한 대관식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당시의 어려웠던 경제 사정, 군주제에 대한 비판적 여론 등을 감안할 때 스물여섯 살의 새 국왕을 위해 8000명의 손님을 초대하고 TV로 생중계까지 한 것은 영국 정치권이 벌인 모험이었다는 뜻이다.

 

 

 영국의 유명 사회학자 마이클 영과 에드 실즈는 한 논문에서 ‘국가적 통합을 위한 일종의 집단 행동이었다’고 이 성대한 대관식을 정의했다. 이들에 따르면 대관식은 국력이 나날이 쇠퇴하고 식민지에서의 이민자가 쏟아져 오는 불안한 상황에서 치러진 ‘국민 자존감 회복과 국가 정체성 확립’의 초대형 이벤트였다.

 

 

 어찌됐든 이날부터 영국의 왕실은 존재감 자체를 좀처럼 느낄 수 없는 다른 유럽 국가의 왕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가장 영향력 있는 왕가로 60년의 세월을 보냈다.

 

 

 

 

2005년 4월 9일 찰스 왕세자와 콘월 공작부인 커밀라 파커 볼스의 결혼식 후 찍은 영국 로열 패밀리 사진. 앞줄 왼쪽부터 여왕의 남편 에든버러 공작, 엘리자베스 2세, 커밀라의 아버지 브루스 셴드, 뒷줄 왼쪽부터 해리 왕자, 윌리엄 왕자, 찰스 왕세자와 커밀라, 그리고 커밀라의 두 자녀 톰과 로라 파커 볼스.


 여기에는 영국 정계와 국민의 ‘도박적 선택’뿐만 아니라 여왕의 ‘현명한 처신’도 기여했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2년 전 출간한 회고록 『여정』에서 여왕을 “매우 영리한(canny)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어수룩하고 물정 모르는 노인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여왕은 국내 정치에 대한 의견 표명을 하지 않는다. 해외 방문에서의 연설도 의례적 외교 수사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언론과의 인터뷰도 하지 않는다. 준비되지 않은 돌출 발언을 하는 경우는 없다. 지난해 영국 왕으로는 100년 만에 옛 식민국 아일랜드를 방문해 “우리 모두가 지난 역사 속에서 과도한 고통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슬프고 유감스럽다”고 언급한 것이 가장 정치적 발언으로 기록될 정도다.

 

 


 왕의 내정 불간섭은 1688년의 명예혁명 뒤에 확립된 영국의 전통이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여왕은 암묵적으로 지속돼온 왕의 정치적 영향력을 더욱 줄였다. 여왕은 집권 세력이 의회에서 불신임됐을 때 새 총리를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을 1965년에 포기했다. 두 차례 총리를 지명했다가 논란에 휩싸인 게 계기였다. 여왕은 총리 임명권자이지만 의회의 결정을 형식적으로 추인할 뿐이다. 의회에서 시정 연설을 할 때는 총리실에서 작성한 원고를 그대로 읽는다.

 

 


 여왕은 일주일에 한 차례 총리와 독대한다. 배석자도 없으며 내용을 기록하거나 녹음할 수 없다. 『우리의 여왕』이라는 책을 쓴 데일리 메일의 왕실 담당 기자 로버트 하드먼에 따르면 여왕은 주로 총리의 얘기를 듣다가 간간이 “노고가 많다” “잘 해결될 것이라 믿는다” 정도의 간단한 코멘트만 한다. 여왕은 각료 회의 내용을 전달받는다. 회의록은 빨간 가죽 가방에 담겨 버킹엄궁으로 보내진다. 국방이나 안보에 관련된 국가적 비밀도 고스란히 담긴다. 윈스턴 처칠에서 데이비드 캐머런까지 지난 60년 동안 여왕은 12명의 총리를 매주 독대해 왔다. 영국에서 영국에 대해 가장 많이, 가장 잘 아는 이가 바로 여왕이다.

 

 

 하지만 여왕의 생각은 늘 베일에 가려져 있다. 정치적 성향이 확인된 적이 없다. 왕실에 대한 글을 쓰는 이들이 여왕이 마거릿 대처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혁이나 토니 블레어의 이라크 침공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얘기하고 있으나 이 역시 검증되지 않은 주장일 뿐이다.

 

 

 여왕은 정치적 권한 행사에 초연한 대신 노르망디 공국의 군주 ‘정복왕’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지배하며 세운 ‘천년 왕국’을 지키는 데 힘썼다. BBC 정치 담당 에디터를 맡았던 영국의 유명 언론인 앤드루 마는 “여왕은 군주제와 왕실을 보존하라는 신의 소명을 받았다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여왕은 국내 정치에 초연한 대신 국가의 통합과 왕실의 보존, 전통적 가치의 전수에 헌신하고 있다. 종갓집 큰어른과 같은 ‘지킴이’의 역할이다. 여왕이 연설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는 화합·단합·공감·우정과 같은 사회적 유대와 국가 간의 호혜를 강조하는 명사들이다.

 

 

 영국 국내적으로는 민족·인종적 차이와 사회적 계층에 따른 균열을 치유하는 데 공을 들여 왔다. 여왕은 600개 넘는 사회 단체를 후원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영국을 포함한 54개 영연방 국가의 결속 유지를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60년 동안 260여 차례 다른 나라를 방문했고, 그 대부분은 영연방 국가였다. 한 해 평균 5만 명의 국내외 인사를 버킹엄궁이나 윈저성으로 초청해 왔다. 여왕은 “내가 하는 일 중 가장 정성을 많이 들이는 부분은 작위·훈장 수여”라고 말한 적이 있다. 국가와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여왕은 시대의 변덕이나 일시적 정치 기류에 흔들리지 않는 국가의 구심점 역할을 해 왔다. 2010년 유엔에서 연설했을 때 반기문 사무총장은 “우리 시대의 닻(배를 고정시키는 무거운 추)”이라고 여왕을 소개했다. 이 같은 여왕의 행보에 따라 왕의 이미지도 변화했다. 런던대 킹스칼리지의 버논 보그다노(정치제도 전공) 교수는 “엘리자베스 2세 재위 기간 신비에 싸인 신적 존재의 군주에서 시민들에게 봉사하는 군주로 왕의 의미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영국인의 69%가 군주제의 존속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는 22%였다. 왕이 없는 공화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체가 종종 집회를 열기도 하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여왕은 연간 700억원가량의 국민 세금을 활동비로 쓰고 있다.

 

 

 영국 국민들의 여왕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에는 여왕과 왕실로 인해 경제적 이득을 보고 있다는 생각도 깔려 있다. ‘브랜드 파이낸스’라는 기관에 따르면 영국 왕실의 브랜드 가치는 440억 파운드(약 80조원)다. 관광산업에 기여하고 국가 이미지와 자국산 상품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는 것 등을 평가한 금액이다. 성대한 대관식으로 왕실의 존재를 부각한 60년 전 영국의 정치적 도박, 지금까지는 꽤 큰 수익을 올린 성공한 ‘베팅’으로 기록되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본명은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 1066년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공작(윌리엄 1세)이 잉글랜드를 점령한 이래 마흔 번째의 영국 왕이며, 윈저 왕가의 네 번째 왕이다. 16개 영연방 군주국의 군주이자 54개 영연방 국가의 수장이다. 영국군의 통수권자이며 영국 성공회의 수호자이기도 하다. 집무 공간은 버킹엄궁이고, 공식 주거지는 윈저성. 고조부인 앨버트공(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이 독일의 작센코부르크 가문 출신이기 때문에 독일계 혈통을 보유하고 있다. 재산은 약 3억 파운드(약 5500억원)로 추산되지만 부동산·예술품·보석의 대부분이 왕실 재단의 소유로 돼 있어 처분 가능한 개인 재산은 수백억원 규모다.

 

 

◆주빌리(jubilee)=일정한 기간마다 죄를 사하거나 부채를 탕감해주는 기독교적 전통에서 유래된 용어로 현재는 특정 기념 주기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25년은 실버 주빌리, 50년은 골든 주빌리, 60년은 다이아몬드 주빌리, 70년은 플래티넘 주빌리라 불린다.

 

 

 

 

 

 

 

  

 

 

여왕이 있기에… 英, 115년 만의 경사 ‘흥청’

 

 

 

영국이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즉위 60주년(다이아몬드 주빌리)을 맞아 온통 축제 분위기다. 거리마다 국기가 내걸리고 여왕 얼굴이 담긴 기념품이 넘쳐난다. 임시공휴일로 지정된 2∼5일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축하하는 축제에는 과거의 영화를 가슴 깊이 간직한 영국인의 자부심이 담겨 있다.

 

 

 

◆영국의 상징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2월6일 부친인 조지 6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이듬해 6월 2일 대관식을 치렀다. 다이아몬드 주빌리는 1897년 빅토리아 여왕 재위 이후 115년 만이다. 영국에서 여왕 의 존재감은 뚜렷하다.

 

여왕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세계가 영국이라는 나라를 ‘여왕의 나라’로 여기게 할 정도다. 영국 국민은 엘리자베스 2세를 ‘영국의 국민 할머니’로 부르며 사랑과 존경을 아끼지 않는다.

 

여왕에 관한 책을 쓴 앨런 왓슨은 “영국은 60년 동안 제국이 사라졌고 세계 최고 국가라는 위상도 잃었지만 사람들은 여왕의 존재 하나만으로 모진 쇄락의 역사를 위로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왕실작가인 로버트 잡슨은 “다이아몬드 주빌리로 사람들은 60년 동안 여왕이 이룩한 업적은 물론 영국이라는 국가 정체성, 국가에 대한 자부심도 축하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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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간의 축제

 

축제 첫날인 2일 엘리자베스 2세는 경마대회인 엡섬더비를 참관한다. 엡섬더비는 영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대회다. 올해 86세인 여왕은 여전히 승마를 즐길 정도로 말을 사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엡섬더비에 경주마를 출전시키기도 했다.

 

다음날 열리는 템스강 수상퍼레이드는 하이라이트다. 여왕과 남편 필립공이 탄 왕실바지선과 이를 호위하는 1000여척이 강을 따라 약 11㎞를 이동하며 장관을 연출한다. 수상 퍼레이드를 볼 수 있는 강 주변에는 100만명 이상이 몰릴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에는 수상 퍼레이드가 잘 보이는 지점 등에 대한 정보가 쏟아지고 관련 스마트폰용 앱도 등장해 시민의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4일 영국 왕실은 버킹엄궁으로 각계 인사 1만2000여명을 초대해 가든파티를 연다. 영국을 대표하는 요리사 헤스턴 블루멘털이 요리를 맡았다. 버킹엄궁에서는 폴 맥카트니, 중국 피아니스트 랑랑이 출연하는 음악회도 열린다. 해가 진 뒤 여왕의 점화를 시작으로 영국과 영연방 국가에서 봉화 4000여개가 불을 밝히며 축제 무드는 절정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날엔 세인트폴 대성당서 즉위 60주년 기념 미사가 열린다. 여왕 내외 등 왕실 가족은 국회의사당에서 오찬을 한 뒤 버킹엄궁까지 마차를 타고 이동해 버킹엄궁 발코니에서 시민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행사는 마무리된다.

 

 

이진경 기자 ljin@segye.com 

 

 

 

 

 

 

다이애나 사망으로 왕실 권위 추락

 그녀 두 아들이 인기 되찾아
[중앙일보]

 

 

영화와 시련의 60년

 

 


윌리엄 왕자(맨 위)와 해리 왕자가 어머니인 다이애나비와 즐거운 한 때를 보내던 모습.

[중앙포토]


1926년 4월 21일 영국 런던 중심부의 저택에서 한 여아가 제왕절개로 태어났다. 아무도 이 아이가 장차 왕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지 못했다. 국왕 조지 5세의 장손녀라는 신분 때문에 곧바로 공주가 됐지만 아버지 앨버트 왕자는 둘째 아들이었다. 설사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다 해도 남동생이 태어나면 그가 왕세자가 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가 열 살 때인 1936년에 아버지가 왕(조지 6세)이 됐다. 큰아버지인 국왕 에드워드 8세가 재임 기간을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동생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이다. 에드워드 8세는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인 월리스 심슨과의 결혼을 위해 왕위를 버렸다.

 

 1952년 2월 6일 엘리자베스 공주는 호주와 뉴질랜드를 방문하기 위해 잠시 머물렀던 케냐에서 부친의 서거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귀국했다. 당시 나이 스물 다섯. 엘리자베스 2세의 시대는 그렇게 갑작스레 막이 올랐다. 이후 60년, 여왕은 영화와 시련이 교차하는 세월을 보냈다.

 

 여왕이 즉위했을 때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시작된 식량 배급이 실시되고 있었다. 승전국이었지만 전쟁으로 인해 경제는 후퇴했고 국제사회의 주도권은 이미 ‘형제의 나라’ 미국에 넘어간 상태였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은 오래된 과거의 얘기였다.

 

 여왕은 즉위 다음 해에 반년 동안 호주·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를 순방했다. 영국의 영향력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영국은 1956년 수에즈 운하의 관할권을 되찾기 위해 프랑스와 공동으로 이집트를 공격했다가 국제사회의 비난에 못 이겨 빈손으로 후퇴했다. 영국의 쇠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60·70년대는 아프리카 대륙과 카리브해의 식민지 국가들이 영국의 통치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75년엔 호주에서 영국이 파견한 총독이 호주 총리를 경질하는 사태가 일어나 반영 감정이 극도에 달하기도 했다. 이 기간 20여 개의 영국 식민지가 독립했다.

 70년대 중반 파운드화 평가 절하와 외환 부족으로 영국은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벌려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형편이 어려워진 국민들은 호의호식하는 왕실과 왕족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정치적 자유주의(liberalism)의 확산은 군주제를 위협했다.

 

 미디어의 발달로 일반인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왕족과 귀족들의 생활이 국민들에게 그대로 전달됐고, 왕실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81년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의 결혼은 왕실의 위엄과 인기를 어느 정도 되찾는 계기가 됐다. 백작 가문 출신이지만 비교적 소탈한 성품을 보인 다이애나비는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다이애나비는 두 아들을 귀족학교가 아닌 일반 사립학교에 보냈고, 분쟁 지역의 지뢰 제거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왕실의 갖가지 추한 모습은 92년에 극적으로 펼쳐졌다.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의 불화가 세상에 드러났고, 그의 여동생 앤 공주가 이혼을 했다. 앤드루 왕자와 부인 새러 퍼거슨은 별거를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해 11월에는 윈저성에 큰불이 났다. 여왕은 연말의 한 연설에서 “끔찍한 해”라고 표현했다.

 

 여왕의 수난은 계속됐다. 온갖 추문 끝에 찰스 왕세자 부부는 96년에 이혼했고, 다음 해 다이애나비가 파리에서 비운의 사고로 36세로 생을 마감했다. 여왕은 스코틀랜드의 별장에 머물며 침묵했다. 세간의 비난은 찰스 왕세자와 여왕에게 쏟아졌다.

 

“왕실을 없애자”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사람도 많았다. 당시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의 회고록 『여정』에 따르면 여왕은 “이대로 가면 왕실에 대한 반감이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그의 권고에 따라 마지못해 애도 성명을 냈다. 다이애나비의 요절은 왕실에 큰 상처를 남겼다. 이후 왕실의 인기는 다이애나가 남긴 두 아들, 윌리엄·해리 왕자에 의해 차츰 회복됐다.

 

두 왕자는 위험 지역에서의 인명 구조 활동과 전쟁터에서의 군 복무로 왕실의 도덕적 권위를 세웠다. 윌리엄 왕자는 지난해 평민 출신의 케이트 미들턴과 결혼하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윌리엄 왕자 부부는 시대의 변화에 걸맞은, ‘정상적’ 왕실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국민들의 기대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

 

 

 

 

 

64세 찰스 왕세자 1순위

 왕세손 윌리엄 계승론도 적지 않아
[중앙일보]

 


85세의 여왕 후계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올해 여든다섯이다. 고조모 빅토리아 여왕이 당시로서는 장수에 속한 여든둘의 수명을 누렸고,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모후는 102세에 타계했다. 여왕은 9년 전 양쪽 무릎의 연골 조직 일부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고 2006년에는 허리 통증 때문에 한동안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아직까지 큰 병을 앓은 적은 없다. 91세인 부군 필립공이 더 자주 병원 신세를 지는 편이다.

 

 세월이 흘러 장남 찰스 왕세자도 어느덧 환갑을 훌쩍 넘긴 64세가 됐다. ‘함께 늙어가는’ 나이다. 어머니의 재위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가 왕의 지위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물론 그가 왕위를 순조롭게 승계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는 왕위 계승법에 따라 첫째 후계자로 지정돼 있다. 특별한 사정이 생겨 여왕이 세자 지위를 박탈하거나 본인 스스로 사양하지 않는 한 왕위를 이어받는다. 하지만 그의 앞에는 ‘국민의 달갑지 않은 시선’이라는 장애물이 놓여있다.

 

 찰스 왕세자에 대한 따가운 여론은 주로 다이애나비와의 이혼, 다이애나비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연관돼 있다. 찰스 왕세자는 결혼 생활 중에도 옛 친구이자 유부녀인 커밀라 파커 볼스와 밀애를 즐겼다. 많은 영국인은 찰스 왕세자의 불륜이 파경의 근본 원인이라고 여긴다.

 

 1997년 다이애나비가 프랑스 파리에서 애인인 이집트 부호의 아들 도디 알파예드와 함께 교통사고로 요절했을 때 여론조사에서 영국인의 60%가 찰스 왕세자의 왕위 계승에 반대했다.

 

 8년 뒤 찰스 왕세자는 파커 볼스와 재혼했다. 다이애나비에게 쏟아온 영국인들의 각별한 애정만큼 반대가 많았다. 찰스 왕세자에 대한 원성은 다시 한번 끓어올랐다. 여왕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파커 볼스에게는 왕세자비 대신에 콘월 공작부인이라는 호칭이 주어졌다.

 

 지난해 4월 왕세손인 윌리엄 왕자가 캐서린 미들턴과 결혼해 가장이 되자 찰스 왕세자 대신 장성한 윌리엄 왕자에게 곧바로 왕위가 계승돼야 한다는 주장이 더욱 힘을 얻었다. 윌리엄 왕자의 성실한 생활 태도와 캐서린의 대중적 인기가 여기에 한몫했다. 이달 중순 실시된 여론 조사 결과 51%대 40%로 찰스 왕세자가 왕위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하지만 그에 대한 반대는 여전히 많다. 영국 언론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국민들이 왕세자를 서서히 용서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여왕은 지금까지 왕위 승계 문제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영국 정부는 왕실의 동의를 얻어 아들·딸 구별 없이 첫째 자녀에게 왕위가 계승되도록 법을 고치는 중이다. 지금까지는 아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졌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경우 오빠나 남동생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 됐다. 법 개정이 끝나고 윌리엄 왕자가 장녀를 얻을 경우 그가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