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6월 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된 대관식에서 엘리자베스 2세가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을 쓰고 있다(맨 위). 아래 두 장은 1967년과 86년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오른쪽 사진은 지난달 9일 연설을 하기 위해 의회에 참석한 엘리자베스 2세. [중앙포토, AP=연합뉴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가 영국에서 2일부터 나흘간 펼쳐진다. 평일인 4일과 5일은 휴일로 정해졌다. 이 기간 영국 전역은 영국 국기인 유니언잭으로 뒤덮인다. 영국 국민의 왕실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여왕이 국민으로부터 변함없이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이유, 엘리자베스 2세 시대 60년의 역사, 향후 왕위 승계의 전망 등을 살펴봤다.
“그것은 큰 도박이었다.” BBC 방송의 국내 담당 에디터 마크 이스턴은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서 1953년 6월 2일에 열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성대한 대관식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당시의 어려웠던 경제 사정, 군주제에 대한 비판적 여론 등을 감안할 때 스물여섯 살의 새 국왕을 위해 8000명의 손님을 초대하고 TV로 생중계까지 한 것은 영국 정치권이 벌인 모험이었다는 뜻이다.
영국의 유명 사회학자 마이클 영과 에드 실즈는 한 논문에서 ‘국가적 통합을 위한 일종의 집단 행동이었다’고 이 성대한 대관식을 정의했다. 이들에 따르면 대관식은 국력이 나날이 쇠퇴하고 식민지에서의 이민자가 쏟아져 오는 불안한 상황에서 치러진 ‘국민 자존감 회복과 국가 정체성 확립’의 초대형 이벤트였다.
어찌됐든 이날부터 영국의 왕실은 존재감 자체를 좀처럼 느낄 수 없는 다른 유럽 국가의 왕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가장 영향력 있는 왕가로 60년의 세월을 보냈다.
2005년 4월 9일 찰스 왕세자와 콘월 공작부인 커밀라 파커 볼스의 결혼식 후 찍은 영국 로열 패밀리 사진. 앞줄 왼쪽부터 여왕의 남편 에든버러 공작, 엘리자베스 2세, 커밀라의 아버지 브루스 셴드, 뒷줄 왼쪽부터 해리 왕자, 윌리엄 왕자, 찰스 왕세자와 커밀라, 그리고 커밀라의 두 자녀 톰과 로라 파커 볼스.
여기에는 영국 정계와 국민의 ‘도박적 선택’뿐만 아니라 여왕의 ‘현명한 처신’도 기여했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2년 전 출간한 회고록 『여정』에서 여왕을 “매우 영리한(canny)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어수룩하고 물정 모르는 노인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여왕은 국내 정치에 대한 의견 표명을 하지 않는다. 해외 방문에서의 연설도 의례적 외교 수사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언론과의 인터뷰도 하지 않는다. 준비되지 않은 돌출 발언을 하는 경우는 없다. 지난해 영국 왕으로는 100년 만에 옛 식민국 아일랜드를 방문해 “우리 모두가 지난 역사 속에서 과도한 고통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슬프고 유감스럽다”고 언급한 것이 가장 정치적 발언으로 기록될 정도다.
왕의 내정 불간섭은 1688년의 명예혁명 뒤에 확립된 영국의 전통이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여왕은 암묵적으로 지속돼온 왕의 정치적 영향력을 더욱 줄였다. 여왕은 집권 세력이 의회에서 불신임됐을 때 새 총리를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을 1965년에 포기했다. 두 차례 총리를 지명했다가 논란에 휩싸인 게 계기였다. 여왕은 총리 임명권자이지만 의회의 결정을 형식적으로 추인할 뿐이다. 의회에서 시정 연설을 할 때는 총리실에서 작성한 원고를 그대로 읽는다.
여왕은 일주일에 한 차례 총리와 독대한다. 배석자도 없으며 내용을 기록하거나 녹음할 수 없다. 『우리의 여왕』이라는 책을 쓴 데일리 메일의 왕실 담당 기자 로버트 하드먼에 따르면 여왕은 주로 총리의 얘기를 듣다가 간간이 “노고가 많다” “잘 해결될 것이라 믿는다” 정도의 간단한 코멘트만 한다. 여왕은 각료 회의 내용을 전달받는다. 회의록은 빨간 가죽 가방에 담겨 버킹엄궁으로 보내진다. 국방이나 안보에 관련된 국가적 비밀도 고스란히 담긴다. 윈스턴 처칠에서 데이비드 캐머런까지 지난 60년 동안 여왕은 12명의 총리를 매주 독대해 왔다. 영국에서 영국에 대해 가장 많이, 가장 잘 아는 이가 바로 여왕이다.
하지만 여왕의 생각은 늘 베일에 가려져 있다. 정치적 성향이 확인된 적이 없다. 왕실에 대한 글을 쓰는 이들이 여왕이 마거릿 대처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혁이나 토니 블레어의 이라크 침공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얘기하고 있으나 이 역시 검증되지 않은 주장일 뿐이다.
여왕은 정치적 권한 행사에 초연한 대신 노르망디 공국의 군주 ‘정복왕’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지배하며 세운 ‘천년 왕국’을 지키는 데 힘썼다. BBC 정치 담당 에디터를 맡았던 영국의 유명 언론인 앤드루 마는 “여왕은 군주제와 왕실을 보존하라는 신의 소명을 받았다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여왕은 국내 정치에 초연한 대신 국가의 통합과 왕실의 보존, 전통적 가치의 전수에 헌신하고 있다. 종갓집 큰어른과 같은 ‘지킴이’의 역할이다. 여왕이 연설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는 화합·단합·공감·우정과 같은 사회적 유대와 국가 간의 호혜를 강조하는 명사들이다.
영국 국내적으로는 민족·인종적 차이와 사회적 계층에 따른 균열을 치유하는 데 공을 들여 왔다. 여왕은 600개 넘는 사회 단체를 후원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영국을 포함한 54개 영연방 국가의 결속 유지를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60년 동안 260여 차례 다른 나라를 방문했고, 그 대부분은 영연방 국가였다. 한 해 평균 5만 명의 국내외 인사를 버킹엄궁이나 윈저성으로 초청해 왔다. 여왕은 “내가 하는 일 중 가장 정성을 많이 들이는 부분은 작위·훈장 수여”라고 말한 적이 있다. 국가와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여왕은 시대의 변덕이나 일시적 정치 기류에 흔들리지 않는 국가의 구심점 역할을 해 왔다. 2010년 유엔에서 연설했을 때 반기문 사무총장은 “우리 시대의 닻(배를 고정시키는 무거운 추)”이라고 여왕을 소개했다. 이 같은 여왕의 행보에 따라 왕의 이미지도 변화했다. 런던대 킹스칼리지의 버논 보그다노(정치제도 전공) 교수는 “엘리자베스 2세 재위 기간 신비에 싸인 신적 존재의 군주에서 시민들에게 봉사하는 군주로 왕의 의미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영국인의 69%가 군주제의 존속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는 22%였다. 왕이 없는 공화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체가 종종 집회를 열기도 하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여왕은 연간 700억원가량의 국민 세금을 활동비로 쓰고 있다.
영국 국민들의 여왕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에는 여왕과 왕실로 인해 경제적 이득을 보고 있다는 생각도 깔려 있다. ‘브랜드 파이낸스’라는 기관에 따르면 영국 왕실의 브랜드 가치는 440억 파운드(약 80조원)다. 관광산업에 기여하고 국가 이미지와 자국산 상품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는 것 등을 평가한 금액이다. 성대한 대관식으로 왕실의 존재를 부각한 60년 전 영국의 정치적 도박, 지금까지는 꽤 큰 수익을 올린 성공한 ‘베팅’으로 기록되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본명은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 1066년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공작(윌리엄 1세)이 잉글랜드를 점령한 이래 마흔 번째의 영국 왕이며, 윈저 왕가의 네 번째 왕이다. 16개 영연방 군주국의 군주이자 54개 영연방 국가의 수장이다. 영국군의 통수권자이며 영국 성공회의 수호자이기도 하다. 집무 공간은 버킹엄궁이고, 공식 주거지는 윈저성. 고조부인 앨버트공(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이 독일의 작센코부르크 가문 출신이기 때문에 독일계 혈통을 보유하고 있다. 재산은 약 3억 파운드(약 5500억원)로 추산되지만 부동산·예술품·보석의 대부분이 왕실 재단의 소유로 돼 있어 처분 가능한 개인 재산은 수백억원 규모다.
◆주빌리(jubilee)=일정한 기간마다 죄를 사하거나 부채를 탕감해주는 기독교적 전통에서 유래된 용어로 현재는 특정 기념 주기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25년은 실버 주빌리, 50년은 골든 주빌리, 60년은 다이아몬드 주빌리, 70년은 플래티넘 주빌리라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