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화폭의 예술

기행(奇行) 화가 최북

淸山에 2012. 5. 18. 11:13

 

 

 

 

 

 

기행(奇行) 화가 최북

 

 

기행(奇行) 화가 최북, 기예(技藝) 작품 57점전주

김기철 기자 kichul@chosun.com

 

 


전주박물관, 탄생 300돌 특별전… 유작 대부분 한자리에
그림 그려달라 강요받자 제 눈 찌른 '조선의 고흐'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화 등 시대 앞섰던 작품 볼 수 있어

어떤 귀인이 최북에게 그림을 부탁했다가 얻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 세도가가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트집을 잡았다는 설도 있다. 최북은 화를 내며 "남이 나를 버리기 전에, 내 눈이 먼저 나를 저버린다"며 한쪽 눈을 스스로 찔렀다. 평생 오기로 살았다는 이 전설적인 화가는 '조선의 고흐'라는 이야기로 이리저리 떠돈다.

 

국립 전주박물관에서 열리는 '호생관 최북(崔北)'전은 기행(奇行)과 일탈 대신, 작품으로 화가 최북(1712~1786년경)을 만날 수 있는 첫 전시다. 탄생 300주년을 맞아 열리는 이 특별전엔 최북이 그렸다고 알려진(傳稱作) 3점을 포함, 57점의 산수화·화조영모화가 나왔다. 최북이 남긴 유작은 100여점(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에서 최대 180여점(이원복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까지 오르내리는데, 3분의 1 이상 한자리에서 볼 수 있게 됐다.

 

'붓 한 자루로 먹고사는 사람'이란 뜻의 '호생관'(毫生館)을 호로 쓴 최북은 조선 문화의 르네상스 시대인 18세기를 빛낸 전업화가다. '최산수' '최메추라기'로 불릴 만큼, 산수화와 메추라기 그림의 달인이었다. 대표작 '표훈사' 앞에 서면, 앞시대 선배인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떠오르고, 초봄부터 한겨울까지 풍경을 8장에 담은 '사시8경도첩' 가운데 눈이 쌓인 '설경산수'(雪景山水)는 운치가 그만이다.

 

최북은 조선통신사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중국 구경도 한 글로벌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중인 출신인 그는 양반만 행세할 수 있는 조선의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었다. 금강산 구경을 갔다가 경치에 반해 구룡연 폭포에 뛰어들어 빠져 죽을 뻔했다는 일화는 뜻을 펼 수 없는 사회에 대한 항의로도 읽힌다. 문제는 그런 일화를 남긴 최북이 남긴 그림은 의외로 점잖고 차분해 그만의 독특한 개성을 찾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손가락에 먹을 묻혀 그린 게(26.0㎝×36.7㎝). 최북은 먹의 농담과 손가락의 강약을 조절해 생동감 있는 작품을 그려냈다.

선문대박물관 소장

 

특별전을 기획한 권혜은 전주박물관 학예사는 출품작 중 가장 최북다운 작품으로 '계류도'(溪流圖)를 꼽는다. '세상의 다투는 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흐르는 물을 시켜 온 산을 막았네'(却恐是非聲到耳/故敎流水盡籠山) 최치원의 싯구를 표제 삼아, 최북은 합천 가야산 해인사 홍류동 계곡의 정취를 소박하게 그렸다. 세상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최북의 꿈을 담은 작품이다.

 

최북은 18세기의 '얼리 어답터'(새 문명을 빨리 받아들이는 사람)였다. 서양의 정물화처럼 붉은 무와 가지, 배추를 즐겨 그렸는데 이는 청나라 화단의 유행을 소화한 것이었다. 손가락으로 먹을 찍어 그리는 '지두화'(指頭畵)도 앞장서서 실험했다.

 

이번 전시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제가화첩'(諸家畵帖), 당대 서화가 원교 이광사(李匡師)와 함께 만든 화첩, '탁영서첩'(濯纓書帖) 등 최북의 작품세계를 처음 선보이는 전시물도 많다.

 

눈보라 치는 밤, 돌아오는 사람을 그린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이나 '여름날의 낚시'처럼 최북의 호쾌한 기상을 보여주는 작품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소장자의 허락을 받지 못하거나, 소재를 찾지 못해서이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공산무인'(空山無人)도 도록에는 실렸으나 개인소장가 허락을 얻지 못해 개막 직전에 빠졌다.

 

최북은 각별한 사이였던 벗 이현환(李玄煥)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상엔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이 드무네. 참으로 그대 말처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림을 그린 나를 떠올릴 수 있으리. 뒷날 날 알아줄 사람을 기다리고 싶네.'

  

 

전시는 6월 17일까지. (063)220-1024

 

 

  

 

 

 

 

 

 

호생관 최북 필 산수도(毫生館崔北筆山水圖)

朝鮮18世紀 / 崔北 1712~1786 / 紙本淡彩 /縱 28cm × 橫 25.5 cm /金炳三所藏

 

 

호생관 최북 필 표훈사(毫生館崔北筆表訓寺)

朝鮮18世紀 / 崔北 1712~1760 / 紙本淡彩 /縱 38.5cm × 橫 57.3 cm /個人所藏

 

 

호생관 최북 필 강변한거(毫生館崔北筆江邊閑居)

朝鮮18世紀 / 崔北 1712~1760 / 紙本淡彩 /縱 34cm × 橫 71 cm /個人所藏

 

 

 

 

 

"화가 최북과 그의 기행들"

 


 

毫生館 崔北의 表訓寺圖

 

崔北은 奇行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작가적인 긍지도 대단했던 사람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 중에서도 최북이 九龍瀑에서 술이 만취되어 "天下名人 최북이 天下名山에서 죽는다"고 물로 뛰어들어 이를 구해 내느라고 주위 사람들이 고생했다는 이야기는 奇人 최북다운 이야기의 한 도막이다.

 

이 表訓寺圖는 九龍瀑에서 투신 소동을 벌였던 그 무렵의 작품이었는지 또 다른 금강 유람에서 얻은 畵興이었는지 분간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橫幅으로 이루어진 표훈사 주위의 勝景이 마치 광각렌즈로 찍은 사진처럼 시계가 사뭇 시원스럽게 전개되어 있다.

 

화면의 중심에 소리치고 흐르는 여울물과 그 위에 놓인 虹橋에 이 그림의 초점이 있다고 할 수 있고 따라서 橫側에서 바라본 표훈사가 가람은 근경을 이루는 산기슭에 일부가 가려져 있다. 일종의 평원산수법에 가까운 그림으로 內山과 外山이 거의 같은 레벨로 그려져 있는 것도 금강산의 깊이와 넓이를 실감케 해 주는 묘사로서 동시에 다른 작가들의 그림보다는 이색적인 布置法이라고

 할 만하다.

 

又峯 趙熙龍의 <壺山外史> 崔北傳에 나오는 기록대로 하면 최북은 중국 元末 4대가의 필두인 黃大痴를 매우 숭배했다고 하므로 최북은 황대치의 남화풍에서 강하게 영향받았다고 보아야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의 회화이념이 그러했을 뿐 사실은 자유분방한 자기류의 寫山水法이 한층 강하게 세워져서 황대치풍의 남화산수풍은 그 여운을 느끼게 해 줄 정도에 불과하다.

 

崔北 茂州人이었다 하나 그의 가계나 출신은 물론 알려진 것이 없고 생년과 卒年도 분명하지 못하다. 다만 그의 향년이 49세였다는 것이 <壺山外史>속에 전해져 있을 뿐이다. 최북의 初名은 '埴'이었다 하며 字는 聖器, 有用,七七. 등으로 쓰였고 호는 만년에 가장 많이 쓴 毫生館을 비롯해서 三奇齋, 居其齋 등이 있었다.

 

(조어산수 - 최북)

 

(매-최북)

 

(영모도 - 최북)

 

 

 

 

(주일구우귀 晝日驅牛歸) - 대 낮에 소를 몰고 돌아 오다 / 최북)

 


호생관 최북최북은 조선 영조 정조시대의 화가


떠돌이 화쟁이와 그 그림에 미쳐 따라 다니던 기생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고 북극성을 보고 낳았다고 그 이름을 최북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최씨인 것만 알고 무슨 최씨인지도 모르시고 최북을 낳은 후 일체의 기생생활을 청산했다고 한다.

 

최북은 어머니의 성화로 서당에 나갔으나 그의 태생과 메추리알을 닮은 생김새 때문에 싸움이 잦았고 결국 서당에 발을 끊었다.

 


스스로 호를 '호생관'이라 칭하였는데 '호생관'이란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원래 이름은 최식(崔埴)이었으나 스스로 이름을 최북(崔北)이라고 개명을 하고 북(北)자를 둘로 쪼개어 칠칠(七七)이라고 하엿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기이한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최북은 1712년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최북은 키가 작았고 눈이 하나 멀어서 항상 한쪽 눈에 안경을 끼고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지는데 최북이 눈이 멀게 된 사연은

 

 

어느 날 김판관댁에서 그에게 그림을 청하러 하인을 보냈다. 최북은 “그림 팔 것 없다고 하시오.” 하며 단번에 거절했다.

 

그 다음날 김판관이 직접 와 그림을 청했으나 “본래 그림이란 탐욕스런 사람이 가지면 탐욕만 더 생기는 법이오. 나라를 몇 번 망친 사람들이 댁과 같은 탐욕스런 관리들 인대, 댁과 같은 사람들에게 그림이나 파는 화쟁이로 오해하지 마시오.”하며 거침없이 거절을 했다.

 

화가 난 김판관이 그를 위협했고, 최북은 “남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닌 내 눈이 저 버린다.”하며 제 손으로 한쪽 눈을 찔러 버린다. 그러면서도 “내가 비록 김판관 때문에 한 쪽 눈을 멀었지만 한쪽으로도 세상을 바르게 보고 살게요.”하며...허허허허 하면 웃었다.

 


애꾸화가 최북이 산수화 한 점을 주문 받아 그려 주었다. 그림을 받아든 고객이 의아해서 물었다.

“아니, 산수화를 그려 달랬는데, 어찌 산은 어디 있고 물은 없소?” 그러자 최북이 낄낄 거리면서 던진 말이 걸작이다. “야 이눔아, 그림밖이 다 물이다.”

 

이는 산수화는 산수를 그리되, 심상화된 산수를 그린다. 그래서 산수화는 지도가 아니다. 설혹 설경을 그렸다 해도 산수화의 실경은 그린이의 대체된 심성이다.

“산수화와 산수는 같지 않고, 산수화와 산수는 다르지만 다르지 않다.”

 


하루는 서평자와 내기 바둑을 두었는데 서평이 한수 무르자고 하니 “바둑은 본래 오락인데 무르기만 한다면 종세토록 두어도 일국을 마치고 어렵다”며 결코 무르지 않았다. 나중에는 오락이 오락으로 끝나야지 오락에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바둑에서 손을 뗐다고 한다.

 

 

 

그림값이 적으면 그림을 찢어 없애고, 혹 그림이 잘못되었는데 돈을 많이 주면 낄낄 웃으며 그 사람을 밀며 문밖으로 내 보내고, 손가락질 하며 “저 사람은 값을 모른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권력자나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아주 고액이 아니면 아예 그림을 팔지도 않았다 하지만 절친한 친구에겐 아무것도 받지 않고 주었다.

 


또 하루는 최북이 채제공이 지은 시를 보고 “도승지님의 시는 다 좋은데 체면의 티가 있어요. 시나 그림이나 진실 자체야 되는데 진실을 숨기고 있어요. 그걸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인데, 사실은 진실을 밝히지 않은 것이 부끄러운 것이요.”하며 거침없이 뱉었다.

 


최북은 춘향전을 보면서 춘향이는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희생하며 절개를 지켰지만 이몽령은 전혀 자기희생도 없고 권력이나 업고 사랑한다는 게 변학도와 다를 게 뭐가 있냐고 만약 이몽령이 암행어사가 되지 못했다면 춘향이는 죽는 것이고... 진정한 사랑 얘기를 하려면 차라리 이몽령이 신분을 버리고 춘향이와 도망가는 것이 진정한 사랑, 자기희생을 하는 사랑, 그런 얘기, 그런 역사를 만들어야지....

 


흥부는 능력도 없으면서 자식들을 줄줄이 두고 그렇다고 살 궁리도 하지 않고 그런데 그런 사람이 무슨 벼락부자가 되고 복을 받느냐고... 국민의 의식을 그런 방향으로 끌어가면 안 된다고... 문학이든 그림이든 예술가는 국민의 정서를 바른 길로 이끌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북은 김홍도에게 “조선사람은 조선 그름을 그려야 해 그림에는 힘이 있고, 울음이 있고 아픔이 있어야지 무엇보다 조선정신을 있어야해.”하며 멋진 충언을 해 주었다. 그래서 김홍도가 한국적인 서민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을까...^^ 최북의 죽음에 슬피 울던 어린 신윤복도..그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최북의 일화를 통해 그의 강직한 성품과 화쟁이로써 훌륭한 인품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애꾸눈을 한 미천한 신분으로 거의 거지행색을 하고 다녔고 스스로 북(北)을 북이라 하지 않고 칠칠(七七)이라 지을 만큼 초라한 행색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조선시대의 화가 중에 화가이고 진정한 화가가 아니었나 싶다.

 


최북은 결코 그의 재주로 그림으로 권력이나 돈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가식이 없되 가식이 있고 진실이 숨쉬되 허구가 있고, 아픔이 있되 희망을 주고, 겨울이되 봄인 느낌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다고... 단지 그래서 그림을 그린다고...최북은 말하고 있다.

 


출신 성분이 낮았던 최북은 직업 화가였다. 그림 한점 그려서 팔아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술을 좋아했고 돈이 생기면 술과 기행으로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말년의 생활은 곤궁했고 비참했다.

 

 

최북의 그림은 초기 남종화풍의 화풍에서 후기 조선의 고유색 진경산수화로 바뀐다. 천하에 놀기 좋아하고 구속 받지 않으려는 자유분방한 기질 때문에 국내의 금강산, 가야산, 단양 등은 물론 일본·중국까지도 다니면서, 중국 산수의 형세를 그린 그림만을 숭상하는 당시의 경향을 비판하고 조선의 산천을 찾아 직접 화폭에 담는 진경산수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산수화는 물론 화훼, 영모, 괴석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였으며, 취미가 다양하여 책읽기와 시 짓기를 좋아한 시·서·화 삼절의 화가였다.

 

최북의 작고연도는 정확치 않다. 1712년 출생하여 49세인 1760년 설과 75세인 1786년 설이 있는데 1786년을 주장하는 학설이 많은 것을 생각 할 때 올해는 탄생 293년 서거 219년이 되는 해이다.

 

200여년 전 사회의 변혁기에 그림이란 학문을 통해 진경산수眞景山水로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고자 했고, 가난하지만 자연과 함께 살아간 최북의 그림은 〈표훈사도表訓寺圖〉, 〈공산무인도公山無人圖〉등이 있고 약 80여점의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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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유홍준[화인열전] 손철주[그림, 아는만큼보인다. 인생이 그림같다.]

- 조지현[남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닌 내 눈이 저버린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