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 배움/과학 & 우주

쓸데없이 미적분 왜 배우냐고? 답해줄께 (연제 1~7)

淸山에 2012. 5. 9. 14:14

 


 [이만근 교수와 함께 수학의 고향을 찾아서]

 

 

 

[이만근 교수와 함께 수학의 고향을 찾아서]

쓸데없이 미적분 왜 배우냐고? 답해줄께

<7> 뉴턴과 라이프니츠
두 거물이 17세기 따로 발명한 미적분, 우주선 시대 열었다


물체 운동의 법칙과 만유인력 발견 등으로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과학자 중 한 명인 영국의 아이작 뉴턴(1642∼1727)과 이진법을 고안해 컴퓨터 탄생의 씨앗을 뿌린 독일의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 동시대를 산 두 거물이 비슷한 시기에 각자 발명한 미적분은 수학은 물론 과학사와 인류 역사에도 새로운 장을 열었다.

뉴턴의 모교 케임브리지대에서 1시간 반가량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가면 인구 약 3만4000명의 작은 도시 링컨셔카운티 그랜섬에 도착한다. 뉴턴은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한 이곳의 ‘킹스스쿨’에 다닐 때 자연현상 뒤에 숨은 원리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됐다. 뉴턴의 생가는 그랜섬에서도 11km가량 더 들어간 마을 울소프에 있다.

그의 집은 뉴턴 사망 후 팔려 300여 년간 집주인이 여럿 바뀌었지만 크게 변형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됐다. 1942년 영국왕립학회가 사들여 시민환경운동 단체 ‘내셔널 트러스트(NT)’에 기증해 ‘울소프 매너(manor·대저택이라는 뜻)’로 이름 붙여져 관리되고 있다. 개인 박물관과 함께 간단한 과학 실험실도 갖춰져 교육 장소로도 쓰인다. 1주일에 200명가량 학생과 관람객이 찾는다고 관리 직원 존 월터스 씨(60)는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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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을 생각하게 됐다고 알려져 있는 그 유명한 ‘뉴턴의 사과나무’가 있다. 뉴턴이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사과나무는 1820년 베어지고 다시 심어진 것이다. 관광객들이 제일 먼저 찾는 집 왼쪽 작은 사과나무 앞에는 ‘사과나무를 보고 뉴턴이 태어난 집에서 영감을 얻으세요!’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생가 안내서에 따르면 ‘뉴턴의 사과’는 친구 윌리엄 스튜클리 씨가 뉴턴에게 전해들은 것으로 뉴턴 본인이 직접 말한 적은 없어 뉴턴이 정말 사과나무에서 영감을 얻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뉴턴의 생가는 겉보기에는 평범한 양목장 중농의 집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물체의 운동과 만유인력, 미적분 그리고 주요 광학 원리 등 수학과 천문학, 과학사를 새로 쓰는 아이디어가 탄생하고 중요한 실험이 이뤄졌다. 케임브리지 트리니티칼리지에 다니던 뉴턴은 1665년 런던과 케임브리지 등을 덮친 흑사병으로 대학이 휴교에 들어가자 이곳 울소프로 돌아온다. 중요한 발견과 발명은 이때 이뤄졌다고 동행한 이만근 교수(동양대)는 설명했다. 뉴턴도 “당시가 나의 발명의 최대 절정기였다”고 밝혔다.

영국 링컨셔카운티 울소프에 있는 아이작 뉴턴의 생가 ‘울소프 매너’. 영국왕립학회가 민간에서 사들인 후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증해 문화유산으로 관리하고 있다.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에 대한 착상을 얻었다고 전해지는 사과나무도 왼쪽 정원에 한 그루 심어져 있다. 울소프=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뉴턴의 모교 케임브리지 트리니티칼리지에는 그를 기념하는 다양한 기념 및 조형물이 마련되어 있다. ‘트리니티 채플’의 대형 조각상에는 “그는 인간의 지식을 넘어섰다”는 라틴어 칭송구가 새겨져 있다. 대학 도서관에는 뉴턴의 대표작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의 초판, 나이 들어 사용했던 지팡이와 회중시계 그리고 검은색 머리카락 한 올도 전시해 놓았다.

한편 독일의 철학자 법학자이면서 수학자이기도 한 라이프니츠는 미적분과 함께 현대 대표 문명 기기인 컴퓨터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0과 1’의 이분법을 개발했다. 라이프니츠는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고 자라 라이프치히대에서 철학 및 법학 석·박사 학위를 받은 후 파리에서 외교관 등을 지냈다. 30세에 요한 프리드리히 공(公)의 궁중 고문관으로 초청받아 하노버에 온 그는 남은 40년 생애를 하노버에서 보내 하노버가 그의 ‘학문의 고향’이 됐다. 하노버 시는 하노버대 개교 175년을 맞은 2007년 대학 이름을 라이프니츠대로 바꾸는 등 라이프니츠의 재평가 작업에 적극 나섰다. 대학 심벌도 이진법을 표기한 라이프니츠의 친필 글씨를 따다 썼다. 대학 1층에는 그가 개발한 초기 사칙연산 계산기와 미적분 공식 기호, 철학과 법학의 성과 소개 등 특별 전시 공간을 마련했다. 시 중심 공원에는 ‘이분법’을 형상화한 조각도 설치했다. 조각상에는 ‘다양함 속의 통일’ 한마디가 새겨졌다. 시청의 회의실 이름은 ‘라이프니츠룸’이다.

라이프니츠대로 이름을 바꾸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클라우스 훌레크 부총장은 “라이프니츠에게 ‘0’은 무(無), ‘1’은 하느님 말씀이었으며 0과 1의 이진법에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뉴턴의 ‘유분법(fluxions·미분)’과 유분법의 역(逆·적분법) 그리고 라이프니츠의 미적분 개념은 같다. 다만 현재 전 세계에서 쓰이는 미적분 기호는 대부분 라이프니츠가 개발한 것이어서 미적분의 대중화는 전적으로 라이프니츠 덕분이다.

미적분은 사물의 운동과 변화를 관찰 측정 예측하는 도구를 인류에게 제공했다. 행성 운동, 비행 및 물체의 낙하, 기계 작동과 유체 흐름, 기체의 팽창, 나아가 전기력과 자기력의 활동, 전염병의 확산, 내일의 날씨 예측에서부터 주식시장 분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밑바탕은 미적분을 통해서만 풀이가 가능한 다양한 지수 함수와 로그함수가 바탕에 깔려 있다. 산업혁명과 20세기 후반의 인공위성이나 유인 우주선 발사 등도 미적분이라는 핵심 기법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수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미적분 이전의 모든 기하 및 대수학은 기본적으로 고정된 물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반면 미적분은 등속이나 등가속 등 최소한의 규칙성이나 일정한 패턴을 나타내는 것이면 고체 액체 기체를 가리지 않고 운동과 변화를 파악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미적분학 발명은 바퀴나 활자 인쇄의 발명만큼 극적이고 혁명적인 효과를 가져왔으며 그야말로 중력 등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책 ‘수학의 언어’)는 평가도 나왔다.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자연의 커다란 책은 그 책에 쓰여 있는 언어를 아는 사람만이 읽을 수 있다. 그 언어는 수학”이라고 했다. 케임브리지대에서 만난 이 대학 수학과 과장 피터 헤인즈 교수는 “미적분이야말로 자연을 읽는 언어”라고 말했다.

뉴턴은 생전에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멀리 앞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를 딛고 서 있기 때문”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뉴턴 이후의 과학과 인류 역사는 뉴턴이라는 큰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 한 단계 새로 도약하게 됐다.(책 ‘아무도 풀지 못한 문제’)

▼ 라이프니츠 ‘미적분’ 발표에 뉴턴 “내것 도둑질” 격노 ▼
“내가 창시자” 말년까지 공방… 후대 학계 “표절 아니다” 결론


독일 하노버 시의 한 공원에 라이프니츠가 발명한 이진법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은 독일 하노버 시 라이프니츠대 ‘라이프니츠 특별 전시실’에 소개되어 있는 곡선과 접선을 이용한 미분 방정식 도출 과정. 하노버=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아이작 뉴턴은 아버지가 내전에 참여했다 전사해 유복자이자 미숙아로 태어났다. 또 이름도 쓰지 못하는 농부의 아들이었으나 후에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과학자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영국왕립학회 회장까지 올랐으며 런던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라이프치히대 철학과 교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 서재에 파묻혀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0대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 등 신동이었다. 하지만 죽을 때는 하인 한 명만이 장례식에 참가할 정도로 쓸쓸한 생을 마쳤으며 실제 무덤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렇게 대조적인 삶을 산 두 과학자는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으며 영국왕립학회 회원으로 학문적 교류도 했다. 하지만 미적분을 누가 먼저 발견했는지를 놓고 수십 년간 치열한 표절 공방을 벌였다. 사건의 발단은 런던의 출판업자 존 콜린스가 뉴턴의 미출간 자료 일부를 라이프니츠에게 보내준 데서 빚어졌다. 뉴턴은 콜린스의 ‘배신행위’로 자신의 미적분 아이디어가 누출됐다고 주장했다. 뉴턴이 “라이프니츠가 내가 이미 발명한 미적분을 도둑질했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한 반면 라이프니츠는 “비슷한 시기에 독자적으로 개발했을 뿐”이라고 비교적 점잖게 응수했다. 영국과 대륙의 과학자들까지 가세해 서로 편을 갈라 두 사람을 응원하며 한동안 교류를 중단했을 정도다.

뉴턴은 라이프니츠가 말년에 질병과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불우한 시절을 보내며 방어할 만한 여력이 없을 때에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영국의 전기 작가 마이클 화이트 씨는 최근 저서 ‘마지막 연금술사, 아이작 뉴턴’에서 “뉴턴은 세계를 주재하는 신의 뜻을 해석하는 ‘그리스도와 같은 과학자’는 단 한 명밖에 없으며 그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믿었다”며 “이러한 생각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은 철저하게 공격했으며 때론 거짓과 위선도 서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만근 교수는 “후대 수학계는 콜린스가 넘겨준 미적분 자료를 보기 전에 라이프니츠도 미적분을 독자적으로 발명한 것으로 결정짓고 ‘무승부’ 판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울소프·하노버=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6> 페르마

고독했던 법관이 낸 숙제… 350년간 전세계 수학자 괴롭혀

‘3차 이상의 제곱수를 같은 차수의 제곱수의 합으로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Zn≠Xn+Yn).’(n=1, 2인 경우는 성립)

초등학교 산수 외에는 수학을 배운 적이 없는 프랑스 툴루즈 지방법원의 법관이었던 피에르 드 페르마(1601∼1665). 그가 17세기에 남긴 이 정리는 20세기 후반 앤드루 와일스 당시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에 의해 풀릴 때까지 약 350년 이상 전 세계의 수학자들을 울리고 웃기며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로 불렸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피타고라스가 남긴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함께 수학사에 가장 유명한 정리로 꼽힌다.

페르마가 활동할 당시 법관들은 일반인과 자유롭게 만나는 것이 금지됐다. ‘누구라도 언젠가 법정에 나와 재판을 받을지 모르므로 법관의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 낮에는 이교도에 대한 화형 등의 판결을 내리고 밤에는 사회로부터 고립된 페르마는 피로, 무료함 그리고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른 살쯤부터 수학에 빠져든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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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자신을 ‘아마추어’라고 생각해 단 한 편의 수학 논문도 발표하지 않았던 페르마는 스스로 발견한 내용도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다. ‘마지막 정리’도 페르마가 책의 한 여백에 “나는 이 정리를 위한 멋진 증명을 알고 있는데 여백이 좁아 기록할 수가 없다”고 적어 놓아 세상에 알려졌다. 그가 이 메모를 남긴 책은 기원후 3세기의 수학자 디오판토스가 쓴 ‘산술학’의 라틴어 번역판이었다. 친필 메모가 있던 책은 전하지 않지만 페르마의 아들 사무엘이 아버지가 사망하고 5년 후 유고집을 엮으면서 또 다른 라틴어판 ‘산술학’에 아버지의 메모를 추가한 증보판을 내면서 ‘마지막 정리’ 등의 메모가 전해지게 됐다.

최근 이만근 교수(동양대)와 함께 찾은 페르마의 고향 프랑스 툴루즈에서는 ‘스타 아마추어 수학자’를 기념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이뤄지고 있었다.

페르마가 근무했던 법원 자리에는 2008년 새로 지은 툴루즈 지방법원이 들어섰다. 나폴레옹 시절 기존 중고교 이름을 바꿔 만든 ‘페르마 중고등학교’는 현재 프랑스 최고 명문고 중 하나다. 이 학교 졸업 후 ‘그랑제콜’(고등교육기관) 준비반에 다니고 있는 옴브린 보예 씨(20·여)는 “훌륭한 수학자의 이름을 딴 학교 학생으로서의 자부심이 크다”고 말했다.

페르마의 생가는 툴루즈에서 서북쪽으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인 한적한 농촌 소도시 보몽드로마뉴에 있다. 이 도시는 중심가를 아예 ‘페르마 거리’라 이름 지었고 시청 건너편에는 대형 석상도 세웠다. 사각형으로 된 석상 기단부에는 동시대와 후대의 유명 수학자 피에르 라플라스와 블레즈 파스칼이 바친 “페르마는 진정한 발명가” “세상에서 제일 큰 인물” 등의 칭송이 새겨져 있다. 석상 앞쪽에는 페르마의 아들이 당시 최고 명문 고등교육기관인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다녔다는 등 ‘집안 자랑’이 적혀 있다.

생가는 시에서 도서관과 박물관, 관광안내소 등으로 사용 중이었다. 시는 툴루즈대 수학과와 공동으로 이곳을 3, 4년 안에 페르마 자료 전용 전시관으로 바꿀 계획이라고 박물관 직원 베르니카 퀴베 씨는 말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만 한 해 약 2만 명. 보몽드로마뉴 시는 매년 10월 ‘페르마 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그의 탄생 410주년 기념행사도 치렀다.

‘페르마의 정리’는 수많은 수학자들의 도전의식을 자극해 수학자들이 풀이에 매달렸으나 풀지 못했다. 아르키메데스, 아이작 뉴턴과 함께 역사상 3대 수학자로 꼽히는 독일의 가우스조차도 “그런 풀지 못할 정리는 나도 낼 수 있다”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가 20세기 말에 해답이 나와 그의 명성에 ‘옥의 티’를 남겼다.

피에르 드 페르마의 생가가 있는 프랑스 보몽드로마뉴 시에 세워진 석상. 1883년 동상이 세워졌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대포알을 만들기 위해 파괴했다. 전쟁 후 1955년이 지역의 한 수학 교사가 자기 고장에서 천재 수학자를 배출했다는 긍지를 갖자며 다시 석상을 세웠다고 시 정부 측은 설명했다. 보몽드로마뉴=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프랑스 학술원도 ‘마지막 정리’ 해답자에 대해 1816년 금메달과 상금 3000프랑을 내건 후 1857년에 쿠머라는 인물에게 시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엉뚱한 사람에게 상을 준 셈이다. 독일 괴팅겐 왕립과학 아카데미도 1908년 ‘마지막 정리’를 푼 사람에게 주기 위해 10만 마르크의 ‘볼프스켈 상’을 제정해 수년간 수천 건을 접수했으나 모두 불합격 처리했다. 이 상의 제정 경위도 흥미롭다. 상금을 내놓은 볼프스켈은 독일 사업가이자 아마추어 수학 애호가로 실연(失戀) 당한 슬픔에 자살을 결심하고 ‘자살 시한’을 정했다. 극도로 우울한 상황에서 그는 우연히 ‘마지막 정리’를 발견하고는 풀기에 매달리다 그만 자살 시한을 넘기고 말았다고 한다. 이 문제가 자신의 목숨을 살렸다고 판단한 그는 거금을 문제 해결자에게 제시했다. 이 상은 1997년 앤드루 와일스 교수에게 돌아갔다(책 ‘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

페르마가 수학사에 남긴 큰 기여 중의 하나는 ‘소수’(1과 자신 외에는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 수로 1, 3, 5, 7, 11, 13 등 무한히 많다)와 관련된 많은 자연수의 패턴들을 발견한 점이다. 소수 관련 난제(難題)도 많이 남겼다.

‘자연수 a가 소수 p로 나누어 떨어지지 않으면 a(-1-1은 p로 나누어 떨어진다(한 예로 a=8, p=5일 경우 확인됨).’ ‘페르마의 작은 정리’라고 이름 붙은 이 정리는 나온 후 약 100년 후에야 스위스의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참임을 증명했다.

페르마는 또 당대의 최고 프로 수학자 파스칼과 함께 ‘확률론’의 기초를 닦았다. 파스칼은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수학을 가르친 수도사 피치올리가 낸 것으로 ‘도박을 하던 판이 중간에 깨졌을 때 어떻게 나눠 가져야 하나’라는 200년 이상 된 문제가 안 풀리자 페르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두 사람은 평생 서로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수학의 친구’가 됐다.

▼ ‘마지막 정리’ 컴퓨터로도 못 풀어… 설명에만 사흘 걸렸다 ▼
■ 1993년 와일스 교수가 증명


1993년 6월 23일 영국 케임브리지대 ‘아이작 뉴턴 연구소’ 1층 강당. 케임브리지 출생의 미국 프린스턴대 앤드루 와일스 교수(59·현 옥스퍼드대 교수·사진)가 사흘 연속 계속한 강연을 끝맺으면서 “이것으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증명되었다”고 선언했다. 청중 사이에서 흥분과 감탄이 터져 나왔다. 수학 역사상 최대 난제를 풀었다는 소식은 전 세계로 급타전됐다.

연구소는 이 대학 교수를 지낸 뉴턴(1642∼1727)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곳이지만 지금은 ‘페르마 정리 풀이’ 명소로 변해 있었다. ‘마지막 정리 풀이’ 기념 티셔츠와 머그잔 등 기념품도 판매하고 있다. ‘마지막 정리’ 풀이로 와일스 교수는 ‘살아있는 가장 유명한 수학자’가 됐다고 이만근 교수는 말했다.

와일스 교수의 풀이 과정도 한 편의 드라마처럼 극적이다. 와일스 교수는 열 살 때 동네 공공 도서관에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보기에 간단하지만 300년 이상 풀리지 않고 있다’는 내용을 수학책에서 보고 이 정리를 푸는 것을 평생의 목표로 삼았다. 교수가 된 후 한동안 잊고 있다가 “아직 누구도 못 풀었다”는 소식을 문득 다시 접하고는 본격적인 도전에 나선다. 그는 다른 사람과 의견을 교환하면 경쟁자가 나타나거나 자신의 풀이 과정 정보가 유출될 것을 우려해 다락방에 칩거해 풀이에 매달렸다. 7년 뒤 드디어 ‘모듈러 형식, 타원 곡선, 그리고 갈루아 리프레젠테이션’이라는 애매한(?) 제목의 강연을 마치면서 200여 쪽의 풀이집을 내놓을 때까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마지막 정리’ 증명 기념 티셔츠 영국 케임브리지대 ‘아이작 뉴턴 연구소’에서 판매하는 기념 티셔츠에 앤드루 와일스 교수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했음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우아한 증명에 비해 이 티셔츠는 너무 크기가 작다’ 는 마지막 문장이 눈길을 끈다. 케임브리지=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마지막 정리’는 첨단 컴퓨터로도 풀지 못했다. 지금도 풀이를 완전히 이해하는 수학자는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첫 발표 후 풀이에 몇 가지 결함이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자 그는 또다시 1년여 칩거에 들어갔으며 이후 해결책을 제시했다. 1995년 5월호 ‘수학 연보’에 발표함으로써 그의 정리는 국제적 공인을 얻었다.

‘마지막 정리’의 풀이는 와일스 교수 개인에 의해 마무리됐지만 정리 제기 이후 많은 수학자들의 성과와 정수론과 기하학 분야 등 20세기 첨단 수학 이론이 총동원된 것이라는 것이 수학계의 평가다. 따라서 이런 기법이 나오지 않은 300여 년 전 페르마가 자신의 메모에서 ‘정리를 증명했다’고 한 것처럼 실제로 증명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당시로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의문이 제기되지만 페르마가 많은 정리를 증명하면서 보여준 천재성과 성실성, 진실성에 비추어 현대 수학자들이 모르는 증명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없지 않다.

툴루즈·케임브리지=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5> 아르키메데스는 ‘미적분의 아버지’

 

타원 면적 구하는 법 완성

‘포물선이나 타원 면적 구하기는 소젖 짜기를 닮았다?’

아르키메데스의 수학적 업적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포물선이나 타원형에 관한 연구다. 특히 ‘무한 소진법(消盡法)’이라고 불리는 면적 구하기는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은 타원이나 곡선의 함수식만 구하면 적분법을 이용해 쉽게 면적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아르키메데스는 무한히 많은 도형을 그림으로써 면적을 구했다.

포물선의 경우 포물선과 직선으로 둘러싸인 부분에 삼각형과 사다리꼴의 수를 계속 늘려 가면 곡선으로 둘러싸인 면적에 근접하게 된다. 삼각형과 사다리꼴로 나타낼 수 있다면 쉽게 면적을 구할 수 있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사다리꼴의 수를 늘려가며 포물선 내의 면적을 구해 나가는 모습이 마치 소의 젖을 짜내는 것과 닮았다 해서 ‘착출법(搾出法)’이라는 이름도 붙었다.


이 같은 방법은 아르키메데스보다 앞서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수학자로 플라톤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에우독소스가 고안하고 아르키메데스가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이만근 교수는 설명했다.

에우독소스나 아르키메데스 시대에는 무수히 많은 도형을 그려 나간다는 생각은 했지만 ‘극한’이나 ‘무한’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오히려 ‘무한’은 ‘무질서’라고 생각해 기피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르키메데스가 ‘무수히 많은 도형을 그려 면적을 구한 것’은 18세기 아이작 뉴턴과 라이프니츠 시대에 개발된 적분 개념의 원형이 된다. 아르키메데스를 미적분의 선구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적분이란 무한히 쪼갠 조각을 쌓는 것이다.

 

 

 

 

<5> 아르키메데스

 

“기하학 다 풀기전엔 못간다” 외치자 로마병사가 그의 목을 쳤다


“기하학 문제를 다 풀기 전에는 못 떠난다!(이놈)”

기원전 212년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남쪽 끝에 있는 오르티자 섬. 로마군이 1년여의 공략 끝에 드디어 시라쿠사의 마지막 거점인 오르티자를 함락한 뒤 아르키메데스(기원전 287년∼기원전 212년)가 있는 곳으로 들이닥쳤다. 일흔다섯 나이도 잊고 문제 풀기에 몰두하던 아르키메데스는 목에 칼을 들이대며 끌고 가려는 병사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로마 병사는 그를 한 칼에 살해했다.

18세기에 활동했던 아이작 뉴턴,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와 함께 ‘역사상 3대 수학자’로 꼽히는 아르키메데스의 학구열과 집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다. 그가 죽기 전 모래사장에 도형을 그려 놓고 문제 풀기에 골몰했다는 설도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모래알로 우주를 채우면 10의 56제곱 개면 된다는 생각을 할 만큼 ‘큰 수’나 모래에 관심이 많아 ‘모래를 세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 때문에 오르티자의 유일한 모래사장에는 요즘도 그의 마지막 모습을 회상하려는 수학자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뉴스이미지화보[화보] 1700년 전 로마시대 ‘비키니...leftright


시라쿠사는 기원전 212년 로마의 속주로 전락하기 전까지 약 500년간 그리스의 해외 식민지 중 가장 번성했던 곳의 하나였다. 시라쿠사에서 나고 자라 사망한 아르키메데스는 다양한 무기를 발명해 로마로부터 시라쿠사를 지키려 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6개의 대형 오목렌즈를 둥그렇게 붙인 요면경(凹面鏡)은 햇빛을 한 점에 모아 바다로 접근하는 로마 해군 선박에 불을 일으켜 태웠다. 현재 시라쿠사의 명문 과학고인 ‘리코 과학 코르비노’의 실내 현관에는 요면경을 끼고 먼바다에 있는 로마군의 배가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는 아르키메데스의 조각상이 서 있다. 조각상 기단에는 ‘거울 발명, 로마의 배를 태우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수학교사 스키아보 엠마누엘레 씨(48)는 “그는 로마로부터 시라쿠사를 구한 위대한 인물로 최고의 수학자이자 과학자였다”며 “학생들에게 귀감으로 가르친다”고 말했다.

그가 성능을 개선한 투석기는 유효 거리가 200m 이상으로 당시 로마군 투석기보다 2배 이상 멀리 나가는 가공할 만한 전투장비였다. “나에게 지렛대와 지렛점을 주면 지구를 움직여 보이겠다”는 말을 남긴 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 원리를 응용한 다양한 투석기를 제작했다.

아르키메데스의 ‘다연발’ 활은 탄력을 얻기 위해 구부리는 나무판이 여러 겹인 데다 사거리가 다양한 여러 개의 화살을 동시에 쏠 수 있다. 적이 볼 수 없는 참호나 성 안에서 쏘면 많은 병사가 있는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켜 로마군의 혼을 빼놓았다고 한다. ‘한 사람의 두뇌가 로마 4개 군단과 맞먹는다’(‘로마인 이야기’)는 칭송을 들었다.

이만근 교수(동양대)와 함께 최근 찾아간 시라쿠사는 ‘아르키메데스의 도시’라고 할 만큼 곳곳에서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로마軍에 맞서 시라쿠사 지키려 한 영웅 사재를 털어 이탈리아 시라쿠사에 ‘아르키메데스 과학박물관’을 세운 안토니오 리토리오 씨가 미국 하버드대 팀과 함께 고증해 재현한 아르키메데스의 ‘다연발 활’ 모조품 앞에서 사용법을 설명하고 있다(위쪽 사진). 다연발 활은 길이가 다른 화살을 수직으로 배치해 다양한 거리로 날아간다. 이 박물관에는 아르키메데스가 햇빛을 모아 로마 해군 선박을 불태웠다는 요면경의 모형도 설치돼 있다. 시라쿠사=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시라쿠사 출신으로 대학교수를 지냈던 안토니오 리토리오 씨(64)는 사재를 털어 세운 ‘아르키메데스 과학박물관’을 4년 전부터 운영하고 있다. 박물관은 아르키메데스가 개발한 각종 무기나 발명품의 복제품을 야외에 전시해 놓은 ‘무기 전시 공원’처럼 보였다. 이곳에는 미국 하버드대 팀과 함께 제작한 ‘다연발 활’도 있다. 리토리오 씨는 “위대한 과학자의 고향인데 번듯한 박물관 하나 없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껴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이젠 한 해 1만 명가량이 찾는 명소가 됐다.

오르티자 섬 중앙에는 ‘아르키메데스 플라자’ 분수 광장이 있고, 광장 인근에는 다비드 자미티 씨(32)가 4대째 이어받아 운영하는 ‘레스토랑 아르키메데스’가 있다. 여기선 7.5유로(약 1만1250원)짜리 ‘아르키메데스 스파게티’도 판매한다. 그의 이름을 딴 호텔도 있다.

기업인들과 사회단체가 최근 광장 옆에 ‘아르키메데스 박물관’을 세웠다. 입구에 있는 ‘아르키메데스와 친구들’이라는 제목의 대형 그림이 관람객을 맞는다. 아르키메데스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갈릴레오 갈릴레이, 아이작 뉴턴 등 역사상 유명한 수학자 20명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아르키메데스가 수학사에 남긴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는 ‘원주율 3.14(π=3.14)’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원의 둘레 길이는 원에 내접하는 정다각형보다는 크고 외접하는 정다각형보다는 작다는 원리에 착안했다.

그는 내·외접하는 정 96각형을 각각 그려 원의 둘레 길이를 계산했다. ‘원의 둘레 길이=2×π(원주율)×r(반지름)’이다. 따라서 지름(2r)을 1이라고 하면 원의 둘레 길이가 바로 π에 해당한다. 아르키메데스는 이를 활용해 원주율은 223/71(내접 다각형 길이) < π < 22/7(외접 다각형 길이) 사이의 수라고 계산했다. 다만 223/71, 22/7라는 수가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을 남겨놓지 않았다. 이를 소수로 변환해 보면 3.14084507 < π < 3.14285714이다. 현재 사용하는 원주율 3.14159265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물체를 유체에 넣으면 물체와 같은 부피의 유체만큼 가벼워진다’는 사실과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라고도 알려진 부력도 그가 발견했다. 이는 당시의 기행(奇行)과 함께 널리 알려져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시라쿠사의 왕 하에론으로부터 연금술사에게 받은 왕관이 순금인지를 알아내라는 의뢰를 받는다. 목욕을 하면서도 이를 궁리하던 그는 몸이 물을 밀어내는 것을 지켜보면서 부력의 원리를 알아낸 후 “유레카 유레카(알았다 알았다)”라고 외치며 벌거벗은 몸으로 목욕탕에서 뛰쳐나갔다고 한다. 서로 다른 물질은 같은 무게라고 해도 부피가 다르다는 점을 깨달은 것. 그는 왕관과 같은 크기의 순금 왕관을 물에 넣어 밀어내는 물의 양이 다르다는 것을 비교해 본 후 연금술사의 왕관이 가짜임을 알아낸다.

아르키메데스는 생전에 자신의 비석에는 ‘원통에 구(球)를 넣은 모양’을 조각해 달라고 유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원기둥과 원기둥에 내접하는 구의 체적의 비(3:2)를 처음 알아낸 기쁨을 묘비에까지 새기고 싶어 했던 것이다. 시라쿠사를 점령한 로마의 장군 마르셀루스는 아르키메데스를 존경했던 인물로 그가 허망하게 살해된 것을 아쉬워하며 소원을 들어줬다고 한다.

지금은 그의 무덤과 묘비를 찾을 수 없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정치가 법률가 웅변가인 마르쿠스 키케로는 시라쿠사를 방문했을 때 “가시덤불에 덮여 있는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을 발견했다. 그의 유언은 전설이 아닌 사실이다”라고 적었다. 그의 영향으로 가우스, 뉴턴 등 상당수의 후대 과학자들도 자신의 묘비에 업적을 새겼다.

시라쿠사=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4> 유클리드 ‘가장 편안한 황금비율은 1:1.618’도 증명

 

비너스 조각-와이드TV등에 적용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 ‘평행하는 두 직선은 만나지 않는다.’

유클리드가 기원전 3세기경에 집필한 ‘기하학 원론’에 있는 명제들 중 일부다. 초중학교 시절 누구나 배우는 기하학의 기초적인 내용들이다. 하지만 당시엔 이런 명제는 기초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것들이었다.

유클리드는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 수학자 탈레스가 수학의 한 분야로 기하학을 시작한 이후 피타고라스, 플라톤, 에우독소스 등이 증명한 내용들을 집대성했다.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보다 크거나 작다는 등 면(面)을 추상화해 다양성을 추구한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은 19세기에나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13권으로 된 ‘원론’은 증명이 필요 없을 만큼 자명한 5개의 공준(公準)과 5개의 공리(公理)를 토대로 한 명제 465개를 증명했다. ‘두 점을 잇는 직선은 하나’ ‘평행하는 두 직선은 만나지 않는다’ 등이 공준에 포함된다.

‘원론’ 1권에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기하학적으로 증명해 보이는 등 1∼6권은 평면 기하학을 다룬다. 7∼9권은 자연수 체계 등 수(數) 이론, 10권은 무리수, 11∼13권은 입체 기하학을 소개했다,

요즘에는 간단하게 수식(대수학 공식)을 이용해 풀 수 있는 것들도 도형을 이용해 설명한 것도 원론의 주요한 특징이다.

특히 6권에서는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가 ‘신이 만든 자연의 예술품’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황금비율도 나온다. 황금비율은 인간의 눈을 가장 편안하게 하는 두 길이 간의 비율로 1 대 1.618이다. 황금비율이라는 용어 자체는 14세기 르네상스시대에 등장하지만 유클리드는 피라미드 등에 이 같은 비율이 적용됐다며 기하학적 계산을 통해 이 비율을 소개했다. 밀로의 비너스 조각상도 배꼽을 기준으로 상반신 대 하반신 길이가 1 대 1.618로 만들어진 황금비율의 전형이다. 직사각형에선 가로 대 세로의 비율로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전면에 적용됐다.

황금비율의 현대적 정의는 ‘긴 부분과 짧은 부분의 길이의 비가 전체와 긴 부분의 길이의 비와 같다’는 것이다. 이를 수식으로 표현하면 ‘1.618 대 1=2.618 대 1.618’에 해당한다. 최신 전자제품인 와이드 TV에는 16 대 9, 15 대 9, 16 대 10 등의 비율이 사용되는데 이는 황금비율의 근삿값에 해당한다.

알렉산드리아=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4> 유클리드

 

“기하학 어디에 쓰나” 제자 푸념에 “본전 찾으려 학문하나” 질타


2000년 이상 세계 수학계를 주름잡았던 ‘기하학 원론’을 쓴 유클리드. 사진 출처 보우터히쉔묄러

‘지금도 전 세계 초중고교 수학에서 그대로 배우는 영원한 기하학의 성전(聖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던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기원전 330?∼기원전 275?)의 저서 ‘기하학 원론’에는 이런 찬사가 붙는다. 그가 사망한 후 19세기까지 2000년이 넘도록 전 세계 기하학은 모두 ‘유클리드 기하학’을 의미했다.

하지만 불후의 학문적 업적에 비해 개인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생몰(生沒)연도도 불확실하다. 더욱이 그의 학문적 고향 알렉산드리아에서 그의 존재감이 없어 대학자로서의 명성이 무상함을 느낀다.


지중해 연안 알렉산드리아. 기원전 332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한 후 그의 장수가 자신의 이름을 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연 곳이다. 로마와 비잔틴 제국을 거쳐 641년 이슬람이 들어와 나일 강 상류이자 남쪽 카이로로 천도하기까지 970년간 지중해 문명의 중심이었고 지금은 이집트 제2의 도시다.

하지만 이만근 교수(동양대)와 함께 최근 찾아본 이곳에선 과거의 영광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정치적 혼란과 경제난 속에서도 값싼 기름값 덕분에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 어설픈 교통체계, 실종된 양보의식, 경찰력 부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내 도로는 마비상태였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본산이지만 유클리드의 동상이나 조각, 그의 이름을 딴 거리나 대학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우사마 무함마드 알렉산드리아대 부대학원장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도 유클리드가 이곳 출신임을 모르고 있을 정도”라고 개탄했다.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도 꼽혔던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등대’에는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리가 적용됐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의 체취가 남아 있던 유일한 구조물이던 파로스 등대마저 1349년 대지진으로 무너져 사라졌다. 지금은 아랍의 술탄 퀘이베이가 세운 ‘퀘이베이 요새’로 변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유클리드의 진지한 학문 태도를 보여주는 일화들이 전해온다. 어려운 기하학 문제로 골치 아파하던 한 제자가 “도대체 배워서 어디에 씁니까?”라고 묻자, “동전이나 몇 푼 던져줘라. 꼭 본전 찾으려고 배우는 놈인 모양이다”라고 꾸짖었다. 이집트에 새로운 왕조를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도 기하학을 가르쳤는데 왕이 기하학이 어렵다며 “좀 더 쉽게 배우는 길이 없냐”고 묻자, 유클리드는 “기하학 공부에 왕도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다.

그의 업적은 그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평가되고 있을 뿐이었다.

무함마드 엘 알렘 알렉산드리아대 수학과 과장(55)은 “유클리드를 떠올리는 조형물은 없지만 그의 정신으로 연결되어 있다”며 “대학이나 도서관, 그리고 시내 거리에서 ‘유클리드도 이곳을 걸으며 기하 문제를 생각했겠지’라고 회상한다”고 말했다. 이 대학 수학과 4학년 무함마드 카미스 씨(24)도 “유클리드는 아이작 뉴턴처럼 인류 역사를 바꾼 위인이라고 생각한다”고 자랑스러워했다.

마무드 거브르 전 알렉산드리아대 자연과학대학장은 “이집트는 2300년간 이민족이 지배했고, 독립한 지 5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독립 후에도 군부 독재 시절이 이어졌다”며 “이런 상황에서 위대한 고대 수학자에게 눈을 돌릴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유클리드 기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찾은 시민들이 넓고 웅장한 내부 열람실에서 자료를 보고 있다. 이 도서관은 유클리드가 활동했던 옛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계승한다고 하지만 그와 관련된 서적 몇 권 외에는 유클리드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다. 알렉산드리아=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유클리드의 흔적을 찾기 위해 2002년 10월 세워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찾았다. 이 도서관은 유클리드가 과거에 활동했던 옛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홈페이지에서 밝히고 있다. 지중해변 샤트비가에 위치한 도서관은 국제 공모를 통해 채택한 디자인으로 지어졌다. 떠오르는 태양을 형상화한 웅장한 유리궁전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는 이집트 정부와 유네스코가 국제적인 후원금 등 약 2억2000만 달러(약 2500억 원)를 들여 건설한 국제사회의 재산이기도 하다.

지하 5개 층을 포함해 총 11개 층으로 된 도서관에는 맹인용 점자책 등 150만 권가량의 도서가 소장돼 있다. 하지만 유클리드는 이런 초대형 도서관에서조차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원론’에 대한 영어와 아랍어 해설서 등 책 10여 권이 꽂혀 있는 별도의 서가가 유클리드와 관련된 전부라고 사서인 가다 사미 씨(25·여)가 말했다.

도서관 외벽에는 세계 각국 언어의 글자판이 마련돼 있다. 과거 세계를 주름잡던 알렉산더 대왕의 위업을 되살리려는 듯했다. 어떤 이유로 선택됐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지만 글자판 가운데 한글 ‘름’ 자도 눈에 띄었다.

유클리드가 활동했던 ‘옛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세계 최초의 도서관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왕궁에 세운 종합학술 연구기관 ‘무세이온’ 산하 기관이었던 당시 도서관은 파피루스 두루마리 장서가 70만 권에 이르러 당대 최고 규모를 자랑했다. 유클리드는 ‘옛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기하학 원론’을 썼다. 원작이나 필사본은 이집트가 2000년 이상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사라졌지만 ‘원론’의 내용은 다른 많은 저작에 인용돼 지금까지 전해진다.

이 ‘기하학 원론’에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자세히 소개돼 있다. 이처럼 원론의 내용 상당수는 유클리드가 직접 발견하거나 증명한 것만을 모은 것은 아니다. 유클리드는 당대의 그리스 기하학을 집대성하고 공준(公準) 공리(公理)로부터 체계적으로 명제들을 증명해 가는 방법론을 총정리했다. 이는 후대 각 분야의 학문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명언을 남긴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이자 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는 ‘기하학적 순서로 증명된 윤리학’이라는 저서에서 ‘유클리드식 수학적 방법론’을 동원해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수학은 물론이고 신학을 포함한 서구 지성계 대부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알렉산드리아=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3> 아랍국가 이집트 車번호판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


 


‘아랍엔 왜 아라비아 숫자가 없을까?’

카이로 룩소르 알렉산드리아 등 이집트 어느 도시의 자동차 번호판에서도 ‘아라비아 숫자’를 찾을 수가 없다. 아랍의 맹주인 이집트에 왜 아라비아 숫자가 없을까.

아라비아 숫자는 아랍에서 만든 게 아니다. 인도에서 생겨난 후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에 전해지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유럽 수학자들 사이에서 아라비아 숫자가 급속히 퍼지게 된 것은 1202년 출간된 이탈리아 수학자 피보나치의 저서 ‘리베르 아바치(Liber Abaci)’ 이후로 알려져 있다. 아라비아 숫자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전까지는 주로 로마자를 썼다.
뉴스이미지화보[화보] 리비아에 남은 고대 로마의 ...leftright
뉴스이미지[동영상] 숨겨왔던 왕들의 무덤PLAY


아라비아 숫자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숫자의 위치에 따라 자릿수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456’에서 4는 ‘400’을 의미하는 식이다. 이처럼 위치에 따라 자릿수를 나타내려면 비어 있는 자릿수를 채워줄 ‘0’이 필수적이다. 불교의 영향을 받은 인도는 공(空)의 개념에 익숙해 0도 쉽게 생각해 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0’은 인도 외의 메소포타미아나 마야 문명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이를 기호가 아닌 하나의 숫자로 취급해 자릿수로 활용한 것이 인도 수학자들의 공적으로 꼽힌다.

인류가 숫자를 언제부터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숫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발견됐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간단하고 단순한 모양의 기호인 ‘쐐기 문자’를 썼다.

이집트는 기원전 약 2600년부터 서기 4세기경까지 약 3000년 동안 지배 계층의 문자로 고유의 상형문자인 히에로글리프를 사용했다. 이집트는 고대에는 자신들만의 상형문자 같은 숫자를 썼다. 이집트에서 현재 쓰이는 숫자는 아라비아 숫자와 기원은 비슷하지만 일종의 ‘방언’처럼 전혀 다른 모습을 띠게 되었다고 이만근 교수는 설명했다.

고대 이집트에서 작은 숫자들은 단순히 막대를 늘어놓은 모양으로 표시했다. 1000은 당시 나일 강가에 많았던 연꽃 모양을 따다 썼다. 큰 숫자에 해당하는 10만은 수많은 올챙이 알에 영향을 받은 듯 올챙이 한 마리를 활용했다. 특히 아주 큰 숫자인 100만은 사람이 두 손을 번쩍 들어 놀라워하는 모습을 형상화해 흥미롭다.


카이로·룩소르=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3> 고대 이집트의 ‘수와 기하학’

 

파라오 무덤에 새겨진 경고 “숫자 모르는 자, 영생 못얻어”


이집트 카이로 인근 쿠푸 왕 피라미드 옆의 ‘케옵스 배 박물관’에 전시 중인 길이 약 60m의 ‘태양의 배’. 파라오가 사후에 영생의 땅으로 타고 간다는 믿음에서 피라미드 남쪽 구덩이에 묻어 놓은 것을 발굴해 복원했다. 작은 사진은 왕의 무덤에서 함께 발굴된 ‘사자의 서’의 한 장면으로 여기에도 ‘태양의 배’가 등장한다. 카이로=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죽은 후에 영생으로 가는 길에 접어든다/그 길을 따라가면 강에 이르는데 강의 건너편이 영생의 곳이다/강을 건너려면 아켄이라는 사공이 젓는 나룻배에 올라야 한다/‘자신의 손가락 숫자를 모르는 사람’은 이 배에 탈 수가 없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왕(파라오)이 죽으면 이 같은 내용을 파피루스 두루마리인 ‘사자(死者)의 서(書)’에 기록해 함께 묻거나 무덤 벽에 새겼다. 인류 최초의 문자 중 하나인 상형문자 히에로글리프로 썼다. 당시 파라오와 같은 신성한 인물만이 숫자를 알았으며, 숫자가 ‘아켄의 배’를 탈 수 있는 자격을 의미할 정도로 중시됐음을 보여준다.

카이로 인근 기자의 쿠푸, 카프라, 멘카우레 왕 등 3대 피라미드 옆의 일반 관광객들이 거의 찾지 않는 ‘케옵스(쿠푸 왕의 그리스식 이름) 배 박물관’에는 파라오가 사후에 타고 간다는 ‘아켄의 배’, 즉 ‘태양의 배’가 전시되어 있다. 쿠푸 왕 피라미드 남쪽의 거대한 구덩이에서 기원전 2500여 년경 묻어놓은 길이 약 60m의 목조 선박이 해체된 상태로 5척이나 발견됐고 그중 1척을 복원해 전시한 것이다. 멀리 레바논에서 가져온 소나무로 건조한 선체와 삿대는 물론이고 꼬아놓은 밧줄 한 가닥까지 그대로라고 박물관 관계자는 설명했다.


카이로에서 비행기로 1시간 거리인 나일 강 상류의 도시 룩소르에서도 고대 이집트에서 기하학이 권력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발전했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투탕카멘 등 파라오의 집단 지하무덤 터인 ‘왕들의 계곡’이 있는 이곳에서는 1858년 ‘현존 최초의 수학책’이 발견됐다. 스코틀랜드 변호사 알렉산더 헨리 린드 씨는 한 전통시장에서 두루마리 형태의 파피루스를 발견했다. 기원전 1650년경 서기(書記)였던 아메스가 기록한 이 책은 현재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린드 파피루스’ 또는 ‘아메스 파피루스’로 불린다. 린드 파피루스의 흔적을 찾아 최근 이만근 교수(동양대)와 방문한 룩소르의 전통시장에는 파피루스에 그린 온갖 그림과 짝퉁 골동품, 그리고 조잡한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로 넘쳐났다.

가로 550cm, 세로 약 30cm의 아메스 파피루스에는 사칙연산과 분수, 원과 삼각형의 넓이, 피라미드의 부피 구하기 등 85가지 문제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아메스는 서문에서 “모든 사물과 비밀에 대한 지식을 제시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지배층의 위세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저자가 서기인 데다 여기에 적힌 계산 내용은 단순한 수학책을 뛰어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경지 면적이나 곡식 창고의 용량 등을 측정해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서기는 어떤 계층이었을까. ‘재산을 파악해 세금을 매기고 징수하는 것이 서기의 일이었다. 궁정 사람들도 서기에게 청탁하러 온다. 왜 공부하나. 바로 서기가 되기 위해서다. 서기는 어떤 직업보다 위대하다. 서기 외에 주인이 되는 직업은 없다.’(‘이집트의 역사’ 중에서 발췌. 당시 교사나 아버지가 제자와 아들에게 서기가 되라고 권하는 말)

린드 파피루스는 이처럼 부와 명예, 권력을 한손에 쥔 서기가 기록한 것이다. 아메스가 신관으로도 알려진 것처럼 고대에는 숫자란 마법과 같은 것으로, 숫자를 세고 수학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자 권력의 표상이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를 대표하는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 거대한 기둥과 높은 오벨리스크, 정교한 조각 등이 방문객을 압도한다. 이 신전의 대로에는 오랜 세월로 목이 떨어져 나갔지만 세금 징수인으로 보이는 석상이 숫자판을 앞에 놓고 지키고 앉아 있다. 세금을 계산하거나 노예 등을 세는 장면일 수 있다고 이집트 안내인 맘두 씨(42)는 설명했다.

이집트에서 수학이 ‘권력자의 언어’였음은 수학의 시초인 ‘기하학(geo+metry)’이 그리스어로 토지(geo)를 측량(metry)하는 것이란 뜻에서도 알 수 있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집트 기행문에서 “이집트에서는 대홍수로 땅이 유실되면 측량 후 유실된 땅만큼 세금을 빼줬다. 여러 가지 꼴(도형)의 토지 넓이를 재는 기술이 발달했다”고 적었다. 나일 강이 범람했다 다시 물이 빠진 농토 경작지 면적을 재는 것은 지배층으로서는 조세 행정의 가장 기초적인 자료였다.

이처럼 이집트의 기하학은 실용성에서 주로 강점을 보였고, 체계적인 이론은 그리스 수학자들의 몫이었다. 그리스에서 기하학은 ‘유한 지식 계층’의 학문이란 성격이 강했다. 노동은 노예에게 맡기고 넉넉한 시간을 가진 수학자들은 자와 컴퍼스만을 가지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증명’을 위해 정교한 지식체계를 세웠다. 이런 풍토에서 나온 것이 유클리드가 집대성한 기하학이다.

그렇다고 이집트 기하학의 수준을 낮다고 보면 오산이다. 린드 파피루스에는 원의 면적을 구하는 방법이 있다. ‘지름의 9분의 1을 잘라내고 나머지(지름의 9분의 8)로 정사각형을 만들면 그 넓이가 원의 넓이와 같다.’ 이 계산에 따르면 후에 원주율로 이름 붙여진 파이(π)의 값이 3.1604938(81분의 64)로 나온다. 현재의 3.1415926과 근사치다.

피라미드에서도 높은 기하학 수준을 읽을 수 있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지금은 겉이 허물어져 돌계단으로 드러나 있지만 원래는 겉도 매끈하게 채워져 있었다. 바로 옆 쿠푸 왕의 둘째 아들 카프라 왕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는 허물어지지 않은 매끈한 부분이 남아 있다.

이 같은 매끈한 피라미드의 옆면 기울기는 51도. 완전히 건조된 모래를 쌓을 경우 무너지지 않고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기울기다. 현재 이집트에 남아 있는 피라미드와 무너져 내린 피라미드의 흔적은 모두 108개. 이 가운데 중간에 무너져 ‘실패한 피라미드’는 기울기가 47도에서 53도까지 편차가 난 것이라고 15년째 안내를 맡고 있는 에즈딘 씨(47)가 설명했다.

카이로·룩소르=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2>플라톤, 수학문제로 흉흉한 민심 잠재웠다?

 


“병이 낫고 싶은가? 그러면 이 기하 문제를 맞혀보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사진)은 역병으로 시달리는 주민들에게 난데없는 수학문제를 냈다. “아폴로 신전 제단의 부피를 두 배로 만들 수 있는 한 변의 길이를 구하라” 는 기하 문제였다. 무당도 아닌 철학자가 왜 역병 치료와 수학문제를 연결시켰을까. 과연 당시 그리스인들이 풀 수 있는 수준의 문제였을까.

플라톤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행은 대(大)철학자일뿐만 아니라 ‘수학의 원조’로 불릴만큼 위대한 수학자였던 그의 지혜와 사고(思考)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어려운 수학문제를 통해 흉흉한 민심을 다스린 지혜에서는 정치가적인 지혜도 배운다.

 

 

 

 

 

 

<2>플라톤

 

델로스섬 주민, 哲人이 낸 문제 푸느라 전염병 공포도 잊었다

《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들어오지 마라.”

그리스의 대철학자 플라톤(기원전 427∼기원전 347)은 기원전 387년 ‘아카데미아’를 세우면서 정문에 이렇게 새겼다. 흔히 철학자로 알려진 플라톤이 사실은 인류 수학사의 획을 그은 ‘수학의 원조’였음을 보여주는 면모다. 플라톤이 개설한 아카데미아는 그리스를 지배한 동로마 제국이 서기 529년 칙령으로 ‘철학 강의와 토론’을 금지해 해체될 때까지 900년 이상 고대 그리스 지성의 요람이었다. 하지만 지난주 기자가 찾아간 아카데미아의 옛터는 황량하게 방치돼 있었다. 》

그리스 아테네 중심에 설립된 아카데미아의 건물 앞에 플라톤의 조각상이 근엄한 표정으로 시민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왼쪽 뒤의 입상은 아테네 시 이름의 유래가 된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 오른쪽 아카데미아 건물 중앙에 그리스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아테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아테네 시 중심에서 서쪽으로 약 2km 거리에 위치한 저소득층 거주지역인 콜로노스의 한구석에 있는 옛터에는 따가운 햇살을 가려줄 나무도 없고, 잔디가 없이 흙이 드러난 곳도 많았다. 다만 ‘아카데미아 플라토노스’라는 공원 이름, 이곳을 지나는 왕복 2차로 이름이 ‘플라토노스’라는 점에서 이곳이 아카데미아의 옛터임을 알 수 있었다. 문화공보부의 작은 안내판은 가시나무와 덤불에 가려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유적 발굴 작업으로 이곳저곳이 파헤쳐진 채 아무런 표시나 보호 담장도 없다. 주민 요르기아 씨(55·여)는 “정치인들이 돈을 다른 데 쓰느라 정신이 팔려 있다”며 “간혹 외국 연구자나 언론이 이곳을 찾아올 때는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리스 정부는 옛터는 발굴을 위해 놔두고 그 대신 1926년 시내 중심에 ‘아카데미’를 개설해 과학 예술 등의 종합 학술 연구기관으로서 과거 아카데미아를 부활시켰다. 아카데미아 건물 왼쪽 옆 기둥 위에는 아테네 도시 이름이 유래된 지혜의 여신 아테나, 오른쪽에는 태양신 아폴로의 조각상이 우뚝 솟아 있다. 정문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좌우에 앉아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피타고라스 기하학의 영향을 받기도 한 플라톤은 아카데미아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기원전 322) 등 역사에 남을 철학자이자 수학자들을 배출했다. 3단 논법을 편 아리스토텔레스, 최초로 도형의 면적과 체적을 구하려고 했던 에우독소스, 기하학을 집대성한 이집트의 유클리드 등이 아카데미아 출신이다.

아테네대 수학과 스텔리오스 네그리폰티스 명예교수(73)는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아카데미아의 필수 과목은 기하 산술 천문 음악이었다. 당시에는 수학과 철학의 구분이 없었으며 기하학은 당시 철학의 기초였다”고 말했다. 현대 수학의 주류를 이끌고 있는 미국수학회(AMS)의 로고도 아카데미아의 건물 정면을 도안으로 쓰고 있다.

10여 년째 석사과정에서 ‘플라톤과 수학’을 강의하고 있는 네그리폰티스 교수는 “요즘 철학자들은 수학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며 그는 “플라톤 시대 같으면 기초가 없는 상태로 철학을 한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아카데미아는 14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다시 명성을 되찾아 유럽을 거쳐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대학과 연구기관의 이름으로 쓰였다. 아카데미아라는 이름은 이곳이 아카데모스라는 영웅의 관할 지역인 데서 유래했다고 ‘아카데미’의 연구원 유지니아 사란티 씨는 설명했다.

플라톤은 수학자이자 ‘국가’ ‘향연’ 등의 저서를 통해 철인(哲人)에 의한 ‘이상 국가’ 건설에 골몰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정치 참여 수학자’로서 그의 업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가 델로스 섬 전염병 퇴치다. 플라톤은 델로스 섬에 전염병이 돌아 큰 혼란이 빚어질 때 어려운 수학 문제를 내 민심을 안정시켰다고 한다. 플라톤은 델포이 신탁에서 받은 것이라며 “델포이에 있는 아폴로 신전 정육면체 제단의 부피를 두 배로 만들기 위해 한 변의 길이를 얼마로 해야 하는지 맞히면 병이 치료될 수 있다”는 숙제를 섬 주민들에게 냈다. 주민들은 문제를 푸느라 전염병에 대한 공포를 잊어 민심은 가라앉았다.

당시 그리스 기하학은 자와 컴퍼스만으로 문제를 푸는 전통이 있었다. 플라톤이 낸 문제는 자와 컴퍼스만으로는 푸는 게 불가능한 것으로 200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증명된 그리스의 3대 기하 문제 중 하나였다. 나머지는 임의로 주어진 각을 3등분하기와 원과 같은 면적의 정사각형 그리기다.

이만근 교수(동양대)는 “플라톤은 전염병을 치료하기보다는 민심 악화가 더 큰 문제라고 보고 주의를 돌리기 위해 문제를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그의 ‘정치가적인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일화”라고 말했다.

아테네에서 서북쪽으로 약 180km 거리에 있는 파르나소스 산맥 중턱에 위치한 델포이에는 요즘도 플라톤이 지목했을 정육면체를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아폴로 신전은 기원전 5, 6세기에 지어졌다가 산이 무너져 매몰된 후 다시 발견됐으나 정육면체는 아직 찾지 못했다. 다만 깨알 같은 글씨로 신전의 벽에 새겨진 방대한 신탁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듣고 관람객들이 놀란다고 신전 안내인은 말했다. 소크라테스의 말로 널리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도 원래는 이곳 신탁의 한 구절이었다고 한다. 이곳 신전의 한 기둥 끝에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우주의 배꼽(중심)’이라고 부른 신비의 돌 ‘옴팔로스’가 있었다. 현재는 신전 옆 ‘델포이 고대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그리스에서는 피타고라스 플라톤 등이 활동한 기원전 5, 6세기에 철학과 수학 수준이 정점을 이뤘다. 이는 그리스가 당시 해외 식민지를 개척할 만큼 국력이 팽창하던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기하학이 발전해 온 덕분이었다. 현재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은 기원전 9∼7세기가 그리스에서 ‘기하학의 시대’라며 전용관을 두고 정교한 무늬의 도자기 등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부관장인 알렉산드라 크리스토풀루 박사는 “발견된 도자기 등 많은 유물 중에 점과 선만을 이용한 높은 기하학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 많아 기하학의 시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말했다.

플라톤 시대를 전후해 제작돼 그리스에서 발굴되거나 로마에 뺏긴 조각상 중 특히 미완성 작품에는 무릎과 가슴 등에 미세한 구멍이 보인다. 크리스토풀루 부관장은 “이는 조각상의 머리 가슴 다리 등의 크기를 조절하면서 수학적 비례를 맞추기 위해 뚫어 놓은 것으로 당시에는 조각가가 되려면 수학적 기초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당시 조각가는 수학자였다”고 말했다.

아테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흙은 정육면체, 공기는 정팔면체, 우주는 정다면체” ▼
■ 플라톤의 ‘정다면체 우주 원소론’


체계적인 학문으로서의 수학은 기하학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플라톤은 기하학적 사고를 통해 우주를 설명하려 한 초기 철학자이자 수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플라톤의 입체’라고도 불리는 5가지 정다면체다.

그리스인은 오래전부터 정다면체는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 5가지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는 2000년 이상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집트의 유클리드가 정리한 ‘기하학 원론’의 465개 정리 중 마지막이 ‘정다면체는 다섯 개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주는 물 불 공기 흙 4개 ‘원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원소는 정다면체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원소가 정다면체로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우주는 완벽한 물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플라톤의 독특한 믿음에 따른 것이다. 이 믿음에 따라 플라톤은 날카로운 불의 원소는 정사면체, 가장 안정적인 흙은 정육면체, 유동적이고 쉽게 구를 수 있는 물은 정이십면체, 공기의 원소는 정팔면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주가 정다면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고는 ‘행성은 태양 주위로 타원형을 그리며 공전한다’ 등 3가지 행성운행 법칙을 발견한 천재 천체물리학자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에 의해서도 계승됐다. 그는 우주는 정이십면체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플라톤의 ‘정다면체 우주 원소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우주가 ‘원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원소는 각각의 정다면체를 갖는다는 플라톤과 케플러의 이론은 사실상 수학적으로는 극도로 추상적인 이론이라는 것이 후대 수학계의 평가다. 하지만 자연과 세계 속에서 질서와 규칙을 추구하는 기본 철학이 수학의 뿌리가 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이만근 교수는 풀이했다.

아테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1> 피타고라스

 

“동물로 환생할 수 있다” 믿은 수학의 아버지, 평생 채식 고집

그리스 에게 해 사모스 섬 피타고라스의 고향인 피타고리온 항구에 세워져 있는 직각삼 각형 조각상. 왼손에 삼각자를 든 피타고라스가 하늘을 보며 ‘숫자’의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위 사진). 사모스 섬의 기념품 가게에는 ‘피타고라스 조각상’을 넣은 다양한 제품이 진열대를 가득 메우고 있다. 사모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수(數)는 우주의 중심이다.’ 30일 그리스 사모스 섬의 항구도시인 피타고리온. 직각삼각형의 한 변에 한 남자가 서 있는 모습의 조각상이 눈부시게 빛나는 에게 해를 바라보고 있다. 조각상 속의 남자는 고대 그리스 전통의상인 ‘히토니오’를 입은 채 삼각자를 들고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바로 그가 ‘직각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은 다른 두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피타고라스의 원리’로 널리 알려진 ‘수학의 아버지’ 피타고라스(기원전 580∼기원전 496년)다. 》

조각상 속 피타고라스의 눈빛은 ‘수의 원리’를 통해 우주의 비밀을 찾으려 평생을 바친 고대 수학자의 열정과 갈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피타고라스의 원리’가 태어난 곳을 찾아가는 여정은 멀고도 멀었다. 그리스 수도 아테네에서 하루 한 차례 왕복 운항하는 쌍발기를 타고 1시간가량 동쪽 터키 방향으로 가니 사모스 섬에 닿았다. 면적 약 472km²의 사모스 섬은 터키와 가장 가까운 그리스 섬으로 섬과 터키 사이에 가장 좁은 사모스 해협은 폭이 1.6km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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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스는 제우스의 부인 헤라가 태어난 곳으로 헤라 신전이 있다. 지금은 휴양지로 변했지만 기원전 6세기에는 지중해에서 가장 발달한 지역으로 해상교통의 중심지였다. 사모스 섬 고고학 박물관에서는 그리스 아테네나 펠레폰네소스에 못지않은 문명을 이뤘던 모습을 볼 수 있다.

섬의 동남쪽에 피타고라스의 고향인 피타고리온이 있다. 항구에 있는 조각상에는 그의 철학을 대변하는 문구들이 새겨져 있다. ‘우주는 무한하다’ ‘자연은 논리에 따라 작용한다’ ‘우주는 조화롭게 움직인다’ ‘자연은 전 우주를 통해 어디나 같다’ ‘수는 우주의 중심이다’….

미국 캐나다 그리스의 대학들이 돈을 모아 10년 전 세운 이 조각상의 기단 서쪽 벽에는 한 그리스 시인이 피타고라스에게 바치는 헌시 ‘피타고라스에게 구름이 열리고, 우주가 조화롭다는 것을 보이게 하소서’가 새겨져 있다.

피타고라스에게 수학과 철학은 한몸뚱이였다. 그는 자연과 수가 논리 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우주와 인간 세상도 그렇게 움직인다고 믿고, 때로는 수학자의 엄밀함으로 증명해 보이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피타고라스 사후 70여 년 뒤 태어난 후배 철학자 플라톤의 ‘이상 국가론’ 등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19세기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논증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에 사는 시민들의 원형을 피타고라스가 그렸던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피타고라스 정리’ 등은 유클리드에 의해 집대성된 후 약 2000년간 세계 수학계를 제패한 ‘유클리드 기하학’의 토대가 됐다.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살았던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정리를 증명했을 때 사모스 섬의 제자와 주민들에게 암소 100마리를 잡아 잔치를 벌였으며 주민들은 ‘암소 100마리 정리’라는 별명도 붙여주었다고 한다. 피타고라스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현재 쓰이는 음계의 기초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음악은 영혼의 정화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주는 조화롭다’ 등 피타고라스의 믿음은 종교적 신념이나 마찬가지여서 그를 따르던 ‘피타고리안’들은 신도에 가까웠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이 트로이의 한 영웅이 환생한 것이라고 여기는 등 ‘윤회’를 믿었다. 인간과 동물은 모두 영혼을 갖고 있으며 죽은 후에는 다른 사람이나 동물의 몸으로 옮겨갈 수 있다(transmigration)’고 믿어 육식을 일절 하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평생을 살았다.

그의 믿음 중에는 기이한 것도 적지 않다. ‘성행위는 여름 아닌 겨울에 해야 한다’ ‘모든 병은 소화불량에서 비롯된다’ ‘모피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있다. 특히 콩을 먹으면 방귀를 너무 뀌고, 콩의 모양이 여성의 성기와 닮았다며 먹지 않았다는 이른바 ‘콩 금기’는 그의 미스터리 같은 죽음과도 연결된다.

피타고라스는 사모스 섬에서 ‘하프 서클(반원)’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학당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사모스의 독재자 폴리크라테스와의 갈등으로 이탈리아 크로토네로 옮겨온 후 후학 양성과 정치 활동에도 관여했다. 크로토네에서 그의 교육 철학에 맞지 않아 학당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게 결국 화를 불렀다. 어느 날 학당 입학 금지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학당을 습격해 불을 지르고 살육을 자행했다. 도망가던 피타고라스가 콩밭을 만났으나 “콩밭을 건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며 피살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고 이만근 교수(동양대 수학과)는 말했다.

피타고리온은 중세 이후 이탈리아어로 ‘창고’라는 뜻의 ‘티가니’로 불렸으나 1956년 피타고라스를 기리고 섬의 관광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피타고리온으로 바뀌었다. 199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됐다. 1983년 설립된 에게대는 레스보스 섬에 있으나 수학과는 사모스 섬에 개설됐다. 그리스 본토와 에게 해의 여러 섬 출신 200여 명의 학생이 입학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 에게대 수학과 안토니스 솔로미티스 교수(45)는 “피타고라스의 고향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것에 자부심과 숙연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사모스 섬 토박이로 20여 년째 식당을 운영 중인 니코스 보지아지스 씨(58)는 “수학자라면 누구나 사모스 섬에 한 번은 왔다 가야 할 만큼 역사성이 있는 곳”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11세 때 미국에 건너갔다 지난해 고향 사모스로 돌아왔다는 주민 술라 빈 씨(54)는 “미국에서도 대부분의 사람이 피타고라스를 알고 있어 항상 고향을 자랑하고 다녔다. 비록 지금 사모스는 행정이 투명하지 못하고 경제 침체의 그림자도 짙지만, 인류 수학 문명의 위대한 발상지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사모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1>피타고라스는 왜 제자에게 사형선고를?

 



직각삼각형만 보면 생각나는 이름, 피타고라스(사진).

‘직각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은 다른 두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정의를 만들어낸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수학자는 왜 제자에게 사형을 선고했을까.

인류 문명에 획을 그은 수학과 수학자의 고향에는 알려지지 않은 무궁무진한 얘기들이 숨어 있다. 동아일보는 창간 92주년을 맞아 위대한 업적을 남긴 수학자들의 고향을 찾아가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학문의 기초’인 수학에 대한 청소년과 대중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시도다. 마침 2012년은 명실상부한 수학의 해다. 7월 서울에서는 ‘수학교육의 올림픽’인 제12차 ‘국제수학교육대회(ICME-12)’가 열린다.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수학의 대축제다.

피타고리온(그리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1>‘무리수의 비밀’ 누설한 제자 지중해에 던져

 

■ 엄격했던 피타고라스 학파

피타고라스가 운영했던 ‘하프 서클(반원)’이라는 학당의 입학 조건은 ‘입학생의 재산은 학당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재산을 바쳤다기보다는 공동체 의식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규율이 있다. 학당에서 배운 것을 출판하거나 학교 밖에서 누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런데 이탈리아 크로토네에서 피타고라스의 제자 히파수스는 한 가지를 어겨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사형 판결을 받았다. 동료들은 비밀 누설 혐의를 받아 고개를 푹 숙인 채 삶을 체념한 히파수스를 배에 태우고 지중해로 나가 바다에 빠뜨려 ‘조직의 비밀’을 지켰다(히파수스를 실제로 죽인 것은 아니고 죽인 척하기만 했다는 설도 있다).

히파수스가 누설한 비밀은 ‘정수(整數)의 비로 나타낼 수 없는 수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삼각형에 적용하면 ‘직각삼각형의 변이 유리수면 대각선은 유리수로 나타낼 수 없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현재 용어로는 루트(√)기호를 사용해 나타내는 무리수의 존재를 당시 피타고라스 학파는 알아냈지만 외부에는 비밀로 했던 것이다.


에게대 수학과 니코스 카라칼리오스 교수(41)는 “피타고리안들은 다른 사람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말해주면 안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요즘으로 비유하면 마치 핵폭탄을 아무에게나 주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위험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수학의 원리를 알려주면 어디에 어떤 목적으로 사용할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상식적으로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으나 수와 수학 원리에 대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피타고라스 학파가 종교적인 색채도 띠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피타고라스가 발견한 ‘무리수’는 후일 루트(√)를 통해 표현됐다. 이는 2차 이상의 고차 방정식을 푸는 단서를 제공한 점이 수학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이만근 교수는 풀이했다. 피타고라스는 제자를 죽이면서까지 존재를 감추려 했으나 무리수가 결국은 세상에 알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모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